무함마드와 예수 그리고 이슬람 -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그 공존의 역사를 다시 쓴다, 비움과 나눔의 철학 3
이명권 지음 / 코나투스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이슬람'이란 단어에는 무언가 낯선 이질감이 풍겨나온다. 가끔 영화나 책에 등장하는 터번 쓰고 수염 덥수룩한 남자나 부르카를 뒤집어 쓴 여자들을 보면 정말 나와 딴 세상 사람 같기도 하고. 중-고등학교에서 배우는 '세계사'는 언제나 '유럽'중심이고 서아시아쪽은 굵직굵직한 나라 몇개로 요약해서 배우는것이 전부인데다 암기 위주인 시험인지나 지나고나면 그마저도 가물가물. 한국은 조만간 하나님께 봉헌될지도 모르는 나라이다보니 이쪽 관련 소식은 대개 한쪽으로 편향되어있다. '탈레반'의 잔학성이나 여성학대 등. 얼마전 개봉 한 '연을 쫓는 아이'에선 탈레반도 나오고 소련도 나오는데 정작 미국은 빠져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이 책은 (객관적이기보단, 우호적 입장에서)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와 그리스도교의 예언자 예수를 비교하고 (차이점보단 공통점을 보려고 노력한다) 이슬람 탄생 배경과 경전 꾸란, 다섯가지 기본 요소, 수피즘, 간략한 역사등을 설명한다. 거의 '이슬람 입문서'라고 붙여도 무방할 듯.

<구약성서>를 기반으로하는, 아브라함 종교에서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가 갈라져 나왔고, 지구의 아주 작은 부분에서 시작된 이들 종교는 서로 관용했던 초심을 잃어버리고 거의 전 대륙에 걸쳐 '종교'의 이름으로 싸워왔다. (사실 '종교'는 표면적인 눈가리개고 사실은 권력쟁취나 돈 등 '실용적'인 목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현대로 올수록.) 자신들이 진정한 후계자라는 신앙적 기준을 세우기 위해 타 종교에 적대적으로 변해가는 사회/정치적 배경들이 흥미롭다. 나같은 무신론자에게 각 종교간의 정통성 싸움은, 배다른 자식 여럿이서 왕위를 놓고 다투는 것처럼 느껴진다. 성서나 꾸란에는 서로 사랑하라는 좋은말도 많은데 하필이면 '다른 신을 섬기면 알라/주께서 결코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문구에 집착하는 걸까. 정치적 목적으로 악용가능한 구절들의 존재 자체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 낸 것임을 반증하는 것은 아닐지.

이 책은 '이슬람과 그리스도교의 창조적 만남을 위하여'라는 취지에 걸맞게, 서로 대립되는듯한 요소들에서 공통점을 찾아내곤 한다. '알라'가 '유일한 신'이란 의미에서 '하느님'과 상응하는 말이고, 이슬람은 알라 외의 전능함은 부정하기 때문에 무함마드와 예수는 '한계를 지닌 인간'으로 본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와 다르지만 '절대존재 - 진리'를 추구하는 점에선 다르지 않다고 본다. 차이를 보는 사람에겐 건널수 없는 강이, 공통점을 보려는 사람에겐 '조그만 차이'일 뿐이다. 이슬람적 요소가 가미된 무슬림 복음서와, 이슬람화된 예수를 예로 들어 "무슬림이 자신의 종교 안에 경건성을 강조하기 위해 다른 종교인 그리스도교의 영적 스승을 초대해 왔던 이런 독특한 방식은 과거의 역사가 어떠했든지 종교간의 공존을 도모할 수 있는 모범적 사례(p.119)"가 된다고 이끌어내기 까지 한다. 저자의 말을 좀 더 길게 인용해보면

   
  우리는 신앙을 이해하는 세 가지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한 가지는 교리적 정통성을 주장하는 보수적 입장과, 교리보다는 '상징성'을 강조하는 진보적 해석의 입장, 그리고 이들 모두를 하나의 보편적, 종교적 현상으로 이해하는 종교학적 관점이 있을 수 있다. 보수적인 교리적 입장만을 서로 강조하다 보면 공존과 상생의 길보다는 분쟁과 파국의 길만을 걸어 갈 뿐이다. 삼위일체나 그리스도론의 교리만을 내세우기보다는 신 중심적 사고로 대화의 폭을 넓혀 갈 수 있는 것도 상존의 윤리를 도모하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서로 상이한 문화권에서 자라난 종교인만큼, 그들 고유의 입장을 이해하고 열린 자세로 겸허하게 상대의 주장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을 가진다면, 다툼보다는 생태학적 문제와 같은 더 큰 주제를 가지고 지구 공존의 윤리를 더욱 발전적으로 함께 모색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앙은 실존의 자리다. 실존이 투여된 신앙의 자리에 교리적 싸움으로 치닫기보다는 오히려 더 중요할지도 모르는 공존하는 지구의 평화를 위해 함께 사랑의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p.160~161)  
   

 비종교인도 수긍할 법한 말이다. 좋은말이 늘 그렇듯 실현은 요원해 보이지만. 현대의 종교가 과연 "종교적 정통성/신성함"을 위해 서로 칼을 들이대는지는 생각해봐야 할 문제지만 어쨌든 '이해'와 '공존'이라는 취지 자체는 좋다.

저자의 이런 "柔"한 자세는 이슬람 소개에도 드러난다. 히친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슬람이 정말로 독자적인 종교인지에 관해서도 의문이있다. 이슬람교는 처음에 다른 종교와 뚜렷이 구분되는 특별한 신앙을 원하던 아랍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었으며, 아랍인들이 나중에 벌인 정복전쟁 및 아랍어와 항상 동일시된다......이슬람은 필요할 때마다 예전의 경전과 전통을 제멋대로 베낀 표절 집합일 뿐이다. 이런 표절 사실이 눈에 뻔히 보일뿐만 아니라, 그나마 표절해온 것을 제대로 배치하지도 못했(신은 위대하지 않다. p.194)"다며 악평을 쏟아내지만 이 책은 당시 시대적 상황 - 메디나에서 유대인들이 무함마드를 조롱하고 무관심으로 일관했기에 무함마드에게는 유대인들이 적이었다. - 을 들어 유대교인을 배척하면서도, 이슬람교의 효과적인 전파를 위해 널리 알려진 유대교 경전이나 그리스도교 성서 내용을 소개했다고 설명한다. 꾸란은 원칙적으로 번역될 수 없고 오직 아랍어로만 쓰여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아랍어의 특징 - 셈족이 사용한 원시적 형태 언어인 아랍어는 본래 형성문자로서 다른 언어적 현상에서 볼 수 없는 수학적 원리에 따라 만들어진 언어로, 이를테면 논리적이고 심리적이며 종교적인 색채의 언어다(p.243) - 을 덧붙인다. '지하드'나 '여성차별'문제를 두고도 당위적 비판보다는 관습이 형성될 당시의 상황 - 예컨데, 전쟁으로 과부/고아가 많아 그들을 거두는 사회적 책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등 - 을 설명한다. 루미의 시를 중심으로 수피즘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다.

책 끝머리에 붙은 '현대 이슬람의 과제와 전망'에는 더이상 원시적 유목생활을 고집할 수 없는 현대에 꾸란이나 무함마드의 가르침을 탄력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꾸란에 대한 문헌 비평적 작업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서구의 편향된 시각-특히 그리스도교적 관점-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등을 언급하며 서구의 편향된 시각에 관한 비평서로 "무함마드를 따라서(칼 언스트. 심산. 2003)"를 추천한다. 이슬람을 더욱 고립시키는 것은 정치적 목적으로 종교를 악용하는 사람들이고, 우리의 무관심도 그에 일조하고 있다. 다분히 종교적 색채를 띤 서술이지만 차이보다는 인류 전체의 평화와 공존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크게 불편하지 않은 책이다.  

 

** 예전에는 '코란' '마호메트' '옴미아드 왕조' 등으로 쓰였던 말들이 이 책에는 '꾸란' '무함마드' '우마이야 왕조' 등으로 쓰여있는것도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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