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여행이란 익숙하지 않은 것을 전제로 한다. 매일의 일상에서 벗어나 전혀 새로운 시공간으로 뛰어드는것-사실 시간은 매일매일이 새롭지만 익숙한 공간에 묻혀 같이 익숙하게 지나가버리곤 하므로- 무언가 새로운 자극을 얻고싶을때나 일상이 지겨워질때면 한번쯤은 가방을 메고 어디론가 떠나는 상상을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공간이 달라진다고 해서, 잠시 눈이 바빠지는 것 외에는 본질적으로 달라지는 것이 없는 경우가 더 많다. 파헤쳐진 마음을 가다듬고자 무작정 떠났던 여행들. 하지만 새로운 공간속에서도 늘 평소와 같은 패턴을 찾아내곤 하고 기대하지 않았던 '그곳'의 지지부진함조차 '그곳'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서글퍼지곤 했다. 알랭 드 보통의 설명에 따르자면 이런 서글픔은 나 자신을 여행에 데려갔기 때문에 발생하는, 어쩔 수 없는 숙명 같은 것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와 "우리는 사랑일까". 첫 권의 주인공은 남자. 두번째는 여자. 성격도 행동도 다르지만 그 둘을 묘하게 연결짓는 고리 - 생각의 흐름에서 문득문득 튀어나오는 통찰력! - 는 알랭 드 보통이라는 사람이 주는 묘한 분위기였다. 여러 예술가들의 이야기와 섞여서 들려주는 그의 여행 에세이 곳곳에서 소설 속 인물들의 고뇌가 사실은 드 보통의 고뇌, 그리고 마음속에 품고는 있었지만 차마 이름지우지 못했던 나의 고뇌였음을 발견했다. 이름지우기. 평범한 일상도 의미를 부여받음에 따라 전혀 새로운것이 될 수 있다는 진부한 사실마저 그의 책 속에서는 전혀 새로운 경구처럼 다가왔다.

"여행"이라는 것이 실체가 되면 여느 여행에세이에 적힌 꿈과 낭만으로만 가득찬 것이 아니라는 것- 현실과 기대는 다르다는, 기대하지 않은 것 마저도 현실을 이루고 있다는 적나라함. 여행에 대한 기대가 갖는 비현실성에서 책은 시작한다. 그리고 예술작품이 갖는 필연적 단순화와 선택. 결국 여행이라는 과정은 여행자 스스로 얻을것을 선택하는 과정이라는 것. 시공간의 이질성보다 중요한 것은 심리적 수용성이라는 것. 소소한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에 좌우된다는 것을 풀어놓으며 마지막 챕터는 자신의 침실에서 여행했던 드 메스트르의 유쾌한 통찰로 마무리된다. 책을 읽은 후에 세계 여러 명소들이 주는 고유한 인상들 - 거대한 계곡의 웅장함이나 열대의 강렬한 원색 생명력 - 에 감명받기보다, 내 방에게서 무언가 발견하고 싶다는 - 다른사람은 못느끼는, 오직 나만 느낄 수 있는 것이라면 더욱 더! - 충동이 드는 건 저자의 의도에 부합하는 걸까.아닐까.

그의 책을 아직 많이 읽진 못했지만 - 앞서말한 소설 두 권과 이 책이 전부 - 왠지 이번 여름은 그의 책들에 빠져 보통 특유의 섬세함과 예리함 사이에서 즐겁게 흐느적 거리리라는 예감이 든다. 비오는 밤이면 홀로 침실여행을 떠나든가. 혹은 홀홀단신으로 어디든 떠나 무언갈 느껴야 겠다는 암박감 없이 멍청히 풍경을 바라보리라는 즐거운 상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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