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 - 김영하 산문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행. 익숙한 생활반경을 벗어나 낯선 공간에서 일정한 시간을 보내는 것. 비교적 쉽게 얻을수 있는 일탈ㅡ일상에서의 탈출. 언제부턴가 여행은 여가를 보내는 꽤 흔한 방법이 되었고, 인터넷을 조금만 뒤지면 매일 수많은 여행경험담과 이런저런 꿀팁들이 쏟아져나온다.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여행지의 흔적을 남기는것이 너무도 쉬워졌기에, 인터넷 클릭, 스마트폰 터치 몇번으로 마치 직접 다녀온것마냥 현지의 풍경이나 날씨, 에피소드들을 넘쳐나게 찾아볼수도 있다. 어지간한 관광지는 구글맵으로 골목골목까지 확인할 수 있는 시대지만. 아무래도 간접경험만으로는 뭔가 성이 안차서 기어이 비행기표를 끊고 짐을 싸들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그곳에 발 딛고 숨을 들이켜야만 아, 여행을 왔구나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이다. 낯선 시공간이 주는 묘한 긴장감.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둘러싸인 고립감. 위화감. 신선함. 설렘. 그 모든것들. 


김영하 작가를 처음 알게된 것은, "알쓸신잡"이라는 TV 프로그램이었다. 지금은 방송에 잘 나오지 않는 황교익 선생과, 작가라는 말이 영 어색하던 유시민. 정재승 박사, 유희열 가수까지 뭔가 참 다른 사람들이 만나서 장황하면서도 밀도있게 이런저런 주제들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가는것이 나름 재밌고 신선했었지. 당시 영화로도 제작된 "살인자의 기억법"을 읽어보고 아, 이 작가 꽤 재밌는 사람이네 싶었지만 추가로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었다. 순전히 나의 게으름덕에, 의무가 아닌 유희로서의 독서와 멀어진지 꽤 되었기 때문인데. 어쩌다 이 책을 구매하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예약구매 한정판이었던 "첫문장 노트"에 대한 물욕이 범인이었던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그 노트는 역시나 한줄도 채워지지 못한채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사실, 차고 넘치는 것이 여행기고. 한때는 여행기를 읽는것으로 여행가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기도 했었으나. 어딘가 뻔한 여행기들에 지쳐서 그마저도 읽지 않은지 좀 되었다. 마음의 말랑말랑함이 굳어져가고 있다 해야하나. 이 책은 엄밀히 말하면 여행기는 아니고 여행에 관한 작가의 에세이인데. 김영하 작가라면 그 흔한 감성뚝뚝 핑크빛 보랏빛 여행담이 아니라 뭔가 좀 재밌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내심 기대가 되었다. 내 기억속의 김영하 작가는, 알쓸신잡에서 봤던ㅡ어딘가 시니컬하면서도 찌그러진다 해야하나? 비대칭적인 웃음이 매력적인 사람이었으니까. 다행스럽게도(?) 이 에세이의 첫 장은. 한달 계획으로 소설 집필차 떠난 중국 상하이에 도착하자마자, 비자를 미쳐 준비 못해서 (아니, 중국도 비자가 필요해요? / 한국 국민인데요. 비자 필요한가요? 대목에서 작가 목소리 자동재생..)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추방당하는 경험담. 여느 뻔한 여행기라면 마음씨좋은 공안요원을 만나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거쳐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푸동 공항을 무사히 빠져나와야 수순이겠지만, 사람좋은 미소만큼 좋은(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던 그 공안요원은. 곰 아저씨 같은 푸근한 미소를 연신 지으며 이런저런 서류들에 싸인을 시키고. 자연스럽게 한국행 출국 비행기표를 결제시키는 것이다. 그 와중에 현금으로 결제할지 카드로 할지 물어보는 직원과, 잠깐의 고민끝에 그나마의 심적 고통을 줄이기 위해(!) 카드를 선택하는 장면. 아 시작부터 이런 블랙코미디스러운 장면이라니. 


첫 장거리 비행. 해외여행에 서툴렀던 나는, 며칠간 stop-over하는 한 도시에서 입국심사관의 당황스런 질문에 어리버리 답하다가. 앞의 여행객들처럼 무사히 통과하지 못하고 어쩐지 무시무시했던 옆 골방같은 사무실로 불려가 이런저런 서류들(호텔, 비행 예약 서류들 등)을 내밀고 나 여기 불법체류자로 일하러 온거 아니니까 어서 보내달라는 간절한 눈빛을 보내고 나서야 겨우 공항밖으로 나올수 있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이라면 마음의 여유도 삶의 여유도 생겨서 그런 별거아닌 에피소드에 마음 졸이지 않겠지만 당시는 행여 뭐가 잘못될까 안절부절 못했던 기억이 떠올라서 피식피식 웃었더랬다. 2005년 푸동 공항의 김영하 작가도 뭐 결국 추방당하긴 했지만 의외로 최악의 기분은 아니었다며 무겁지 않게 이후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늦은 저녁 서울에 도착했고. 중국이야 비자를 받아서 다시 가면 되는 거였지만 그냥 집에 틀어박혀서 소설을 쓰기로 했고. 결과적으로는 "소설이 완성되는 배경"으로서 한달 중국생활이 "내방 여행"으로 바뀐 것일 뿐 크게 달라진것이 없다는 대승적 합리화로 귀결되는데. 그 와중에 첫 해외여행이었던 대학생때의 일명 "사회주의 제대로 알기 패키지 여행"이었던 단체 중국 여행 에피소드들과. 우연히 함께했던 서대문경찰서 안형사님과의 소설같은 인연 등등으로 이야기를 확장시킨다. 어쩌면 스스로 마음 깊은곳에서 중국에 다시 가는것을 거부했을수도 있다. 때문에 중국 입국에 비자가 필요한지 알아보는 최소한의 노력도 일부러 하지 않았던 것이고, 추방당해 어쩔수 없이 돌아간 집에서 오히려 안온함을 느끼고, 비자따위 요구하지 않는 나 자신만의 세계로 마음껏 침잠하였다는, 소설가스러운 서술로 에피소드를 마친다. 여기서 여행에 대한 작가의 태도가 정리된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여행의 이유, p.51)    

사람들은 왜 여행을 하는가? 구체적인 여행의 이유야 저마다 다르겠지만. 일상에서의 벗어남. 일상의 부재, 가 아마 큰 포션을 차지할 것이다. 낯선환경이 주는 긴장감은ㅡ 그 낯섬을 즐기지 않는 사람에게도 아드레날린을 뿜어내는 적당한 자극이 될테니까. 여행을 업으로 하지 않는 일반인들에게 여행은ㅡ 정해진 기간이 지나면 돌아갈 곳이 있는 안전한 일탈. 내 귀한 돈과 시간을 기꺼이 쏟아부으면서 사서 고생을 하는 일종의 사치. 지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새로운 사람들과 자극에 (비교적 안전하게) 노출될수 있는 시간들이다. 그런데 여행 자체가 현재의 생생한 삶이 되는 사람들도 있겠다. 한 해에도 여러차례 여행을 떠나온지 벌써 이십년이 넘었다는 이 작가는, 잦은 이주로 점철되었던 유년을 상기하며. 본인이 소설의 주인공이라면 읊었음직한 대사를 늘어놓는다. 

삶의 안정감이란 낯선 곳에서 거부당하지 않고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찾아온다고 믿는 것. 보통은 한곳에 정착하며 아는 사람들과 오래 살아가야만 안정감이 생긴다고 믿지만 이 인물은 그렇지가 않아요.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이런 프로그램을 갖고 있다는 걸 모르죠. 그냥 여행을 좋아한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가 여행에서 정말로 얻고자 하는 것은 바로 삶의 생생한 안정감입니다. (p.60) ... '나는 다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제 한동안은 안전하다' 평생토록 나는 이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 1) 낯선 곳에 도착한다. 두렵다. 2) 그런데 받아들여진다. 3) 다행이다. 크게 안도한다. 4) 그러나 곧 또다른 어딘가로 떠난다. (p.61) 


아마도 작가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어준 '알쓸신잡'의 여행들에 대해서도, 따로 한 장을 할애해 정성스럽게 이야기한다. '알쓸신잡'은 아마도 새로운 예능의 한 장을 만들어 냈다고도 볼 수 있을텐데. 한명 한명이 박학다식하고 어쩐지 재미없는 얘기들을 늘어놓을것 같은 잡학박사들을 함께, 또 따로 여행을 시키면서 그들이 갖고있는 다방면의 지식들을 풀어놓으면서도 적절한 편집의 묘미로 시청자에게 재미+교양의 두 측면을 적절히 충족시켜 준 꽤 괜찮은 프로그램이었다. 정해진 대본대로 읊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과물이 어떻게 될지는 잡학박사 본인들도, 촬영자들도, 편집자들도 알수없다. 각자의 한나절, 혹은 하루 분의 여행기록을 적절히 편집하고, 사실확인도 하고, 방송을 위한 시청각 자료들도 넣고 그렇게 완성된 형태로 방송으로 나가지만. 김영하 작가 본인도 방송을 보기전까지는 스스로의 여행만 알 뿐이고, 같은 여행지에서 다른 구성원들이 겪었던 같은 하루는 완성본을 봐야 비로소 알게되는 것이다. 서로의 하루를 모르는 상태에서 저녁에 모여 각자의 하루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함께 여행을 갔지만 각자의 여행이야기를 듣는것이 또다른 여행의 한 면을 완성한다. 어쩌면 이 여행에 대해 가장 포괄적으로 잘 알게 되는 사람은 시청자일 것이라는 아이러니. 각자의 여행경험이 타자의 시각과 언어를 통해 오히려 명확해지는 역설. 바로 여행기나 여행 프로그램들이 주는 "간접 여행"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타인의 시선으로 미리 본 여행지와, 내가 직접 경험한 여행. 그리고 여행 이후 다시 마주하는 간접경험들이 켜켜이 쌓여서 비로소 특정 장소에 대한 여행 경험이 완성된다는 말. 이것은 책을 읽을때도 비슷하게 적용될 수 있겠다. 한권의 책을 온전히 읽어내는 것은. 작가가 경험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세계에, 나의 경험치와. 또 다른 독자들의 경험치가 얹어져서 적절히 혼재되고 숙성되어야 완성될 수 있다. 잘 만든 영화를 온전히 감상하기 위해 여러 비평들과 이차 창작물들을 찾아보게 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지 않을까. 


책의 막바지에 이르러.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섞어 여행자가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신뢰와 환대"에 이야기 한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여행하는 동안 적지않은 호의를 받았다. 물론, 뜨내기 여행자를 어떻게든 잘 벗겨먹으려는 현지인들의 바가지나 농단에 휘말린적도 적지 않다. 하지만 낯선곳에서 나를 모르는 이가 그저 호의로 베푸는 작은 행위들은, 익숙한 공간에서 마주하는 호의들보다 훨씬 더 크게 다가오고, 마음에 오래 남기 마련이다. 실수로 두고온 머플러를 찾아주기 위해 저 멀리서 나를 향해 뛰어오던 식당 종업원. 길을 읽고 어쩔줄 몰라 하는 나를 굳이 시간을 내어 목적지에 데려다주던 사람들. 말도 통하지 않는 식당에서 그저 자기 나라를 찾아온 관광객이라고 자기돈으로 메뉴를 주문해주던 어느 손님들...물론 내가 운이 좋았다고도 할 수도 있다. 쨌든 여행지에서 마주한 소소한 호의들은. 삶에 찌들어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일 뿐이라고, 성선설따위 세상 물정 모르는 여유로운 사람이나 하는 말이라고 한껏 시니컬해지던 나에게 힘든 여행의 피로를 잊게 해주었고. 어쩌면 그것들이 다시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두렵지 않게 만드는 자신감의 원천일수도 있겟다. 



책을 읽고 무언가 기록물을 남기는 것이, 대체 몇년만인지 가물가물하다. 공간 등의 문제로 가뭄에 콩나듯 사들이던 책들을 처분해야하는 상황에서. 중고책으로 내놓기는 어쩐지 아쉬워서. 직장 공용책장에 두기로 했다. 내 손을 떠나는 것이 아쉬워서. 조금 더 오롯이 이 책을 마음에 남겨두고자 이렇게 끄적이고 있다. 이 책을 읽을/읽은 누군가가 이 글을 읽는다면. 나의 기록물 역시 그의 독서에 한겹 쌓이는 흔적이 될테니. 이렇게 나의 독서도 완성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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