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2시의 박물관
성혜영 지음, 한영희 사진 / 샘터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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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설고 낯설은 곳으로 이사오던 해에는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집 근처에 있는 아리랑박물관을 가끔 찾았다. 아리랑박물관은 아리랑 관련 자료를 비롯해, 1970년때까지 추억의 일상용품 들이 전시된 박물관이다. 어릴 적 메고 다니던 책가방과 70년대까지의 교과서와 전과, 수련장과 통지표, 친구들과 둘러앉아 가지고 놀았던 종이인형과 딱지와 구슬, 그리고 변또라고 불렀던 사각 도시락과 주판, 간첩신고 표어와 삐라 등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 추억의 박물관이다. 아리랑박물관은 산골 마을의  폐교를 박물관사(博物館舍)로 사용하고 있어 추억을 불러오기에 안성맞춤이다. 그곳에 가서 전시된 유물을 보고 있노라면 해질녁까지 동네 골목에서 놀았던 친구들의 얼굴이 흐릿하게 떠오른다. 솜틀집, 문방구, 삼립빵 대리점, 점집, 구멍가게가  있던 동네 풍경을 불러와 정겨운 동심의 세계로 이끈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곳에 머무는 시간은 소꿉친구들에 대한 그리움과 짙은 향수를 느낄 수 있어 좋다. 박물관 특유의 묵직함 대신 어린 날의 추억속으로 데려다주는 주는 박물관이 있다는 것은 새로운 발견이었다.

 

[오후 2시의 박물관]의 저자 성혜영이 소개하는 34곳의 박물관은 고향처럼 정겹고 오래된 벗처럼 친근하다. 이렇게 다양한 박물관이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박물관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과 박물관에서 느끼는 감정은 더욱 놀랍다, 박물관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방학숙제이고 다음으로 떠오르는 건 견학이나 소풍 같은 현장학습이다. 무겁고 엄숙하고 지루하고 뭔가를 반드시 배워가지고 나와야 하는 부담스런 곳으로 인식된 곳이 박물관이다. 이렇듯 교육 차원에서 관람되는 박물관을 저자는 쉼터처럼 편안하고 고향처럼 정겹게 그려내고 있다.

 

저자 성혜영에게 박물관은 유물을 매개로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세상과 더 넓게 소통하는 '창'이다. 박물관에서 마음을 다독인다는 그녀는 박물관 나들이는 나로부터 시작하는 여행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에게 박물관 여행은 유물들이 들려주는 삶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과 일상을 돌아보는 '마음 여행'인 것이다. "아이가 속을 썩일 때, 남편이 남의 편 같을 때, 어디론가 숨고 싶을 때, 뭔지 모르게 지난 시간이 억울할 때, 세월의 강심(江心) 아래로 가라앉은 추억이라는 보석을 꺼내들고 나는 박물관으로 간다."는 그녀는 유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위로와 쉼을 얻는다고 고백한다. 

그녀가 권하는 박물관 관람 원칙은 이렇다. 1. 작품이나 유물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읽지 않는다. 2. 팸플릿이나 도록은 미리 사지 않는다. 3. 박물관이 정해 놓은 동선을 따르지 않는다. 4. 남의 의견을 참조하지 않는다. 5. 관람 시간과 방문 횟수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나는 이 원칙에 따라 그녀와 함께 34곳의 박물관을 여행했다. 그 중 내가 갔던 태백석탄박물관과 영월의 조선민화박물관, 자주 찾았던 정선의 아리랑박물관이 있어 반가웠다. 이제 박물관에 가게 되면 저자를 흉내낼 것 같다. 아니 그러고 싶다. 그래서 나도 그녀처럼 삶의 흔적들에 마음 한 자락 기대어 쉬어 가고 싶고, 위로를 얻고 싶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고 싶다. "텅 빈 폐허 속에서 가득 찬 생명을 상상할 수 있는 곳, 비루한 역사의 한 귀퉁이에서 빛나는 생의 조각을 불현듯 발견하는 곳, 그래서 버려야 할 삶이란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곳, 일상의 한 순간 한 순간이 생의 전부임을 깨닫게 되는 곳", 그곳이 바로 박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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