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뒷모습 - 개정판 정채봉 전집 1
정채봉 지음 / 샘터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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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송이 같은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정채봉은 그토록 그리던 어머니 품으로 떠났다.

열일곱에 시집와서 열여덟에 그를 낳고 꽃다운 스무 살에 세상과 작별한 어머니 곁으로 갔다.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며 평생 외롭게 살아온 정채봉은

바닷바람에 묻어 오는 해송 타는 내음에서 어머니 내음을 떠올리고

작은 바닷가 마을의 고향 내음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아련히 보이게 한 날을 기억하곤 했다.

그러던 그가 사진틀 속에서 당신보다 더 늙어 가는 아들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계시던 어머니와 해후하러

8년 전 우리와 긴 이별을 했다.


 

작가 정채봉은 생전에 '어른을 위한 동화' 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면서

깊은 울림이 있는 문체로 어른들의 심금을 울리는 '성인 동화'라는 새로운 문학 용어를 만들어 냈다.

정채봉과의 인연은 월간 <샘터>를 정기구독하던 2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샘터>를 통해 만난 그의 글에 대한 첫인상은 때묻지 않은 순수함과 잔잔한 감동이었다.

붓끝에 실린 섬세하고 결 고운 문체와 고향의 산천초목과 어머니를 그리는 애틋한 문장은

남성 작가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청아하고 부드럽다.

그의 글은 수필을 가장 수필답게 만드는 진솔함이 있고 나무와 새, 바람과 흙에 시선을 머물게 만드는 소박함이 있다. 

 

 

[그대 뒷모습]은 샘물 같이 맑고 투명한 영혼을 그대로 보여주는 에세이집이다.

이 작품은 목가적 시풍을 지닌 정채봉 특유의 필체가 책 전체에 고루 배어있어 독자로 하여금

목가적인 전원생활을 동경하게 만든다.

8년 전 이맘때쯤 이 책의 출간을 기다려 맨 먼저 구입한 나에게

아스팔트와 아파트 숲을 등지고 작은 바닷가 마을로 옮겨앉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갖게했다.

승주 바닷가를 찾아가 아침이면 섬들을 헤집고 말갛게 떠오르는 해를 보고,

달이 뜨는 밤이면 달빛이 파도 소리와 함께 문지방을 적셔 드는 것을 보고,

캄캄한 밤에 솔밭길을 걸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옮겨앉은 곳은 바닷가 마을이 아니라 산골 마을이다.

내가 사는 고림마을은 그가 살았던 수원의 꽃뫼마을보다 골이 깊다.

아침이면 물안개 피어오르는 산허리를 헤집고 말갛게 떠오르는 해가 이슬을 영롱하게 비추고,

달이 뜨는 밤이면 달빛이 나무 이는 소리와 함께 방안까지 길게 드리우고,

캄캄한 밤에 오솔길을 걸어 늦게 오는 아이를 기다린다.

아침마다 수묵화를 감상하고 밤마다 구슬픈 새소리를 들으며 자리에 눕고 보름날마다 달빛을 이불로 두른다.

 

 

정채봉의 저서에는 가족과 고향의 바다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작가의 이른 죽음은 얼굴을 익히기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평생 가슴 절절히 그리워하다 마음에 병이 된 것은 아닐까 싶다.

죽도록 사랑하다 헤어진 연인을 그리듯 뼈에 사무치고 가슴에 한이 되도록 어머니를 그린 중년의 아들은 독자를 매번 울린다.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주지 않고 어린 오누이를 남겨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새살림을 차린 아버지를 향해

철저한 '버림'이라고 힘주어 표현하며 '어디 당신 두고보자'고 벼르지만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그는 오열한다.

남매 앞에서 무쪽 하나도 입에 넣고 우물거리지 못하고 고생하며 남매를 키우신 할머니는

작가가 군에서 제대해 돌아오자마자 삐비꽃 피고 들국화가 새하얗게 핀 언덕밭에 누우셨다.

이제,

어머니와 해후하고,  아버지와 화해하고, 할머니와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정채봉을 우리가 그리워할 차례다. 

그가 그리운 날이면 습관처럼 이 책을 펼쳐들고 책속에 배인 그의 내음을 맡으며 꽃그늘진 그의 미소를 아련히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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