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2월
평점 :
판매중지


세상을 살면서 그 사람이 겪어온 삶은 그로 하여금 자신만의 독특한 세상을 품게 만든다.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사람 역시 직접 겪어보기 전엔 그 세상을 제대로 알 수 없다. 그것이 빛이 가득한 평온하고 안정된 세상인지, 아니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 같은 세상인지. 몇 번 만나보는 것만으로 짐작할 수 있는 세상이 있는가 하면, 수십 년을 살고도 그 존재 자체만 알 뿐 그것이 어떤 형태인지 알 수 없는 세상도 있다. 후자의 경우처럼 꾹 숨어있다 나온 세상일수록 충격과 파장은 클 수밖에 없다. 관계라는 거미줄을 타고 그 영향력은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도 있겠고.

 

내게도 나만의 세상이 있다. 물론 나 스스로 이 세상을 직접 체험했기에 알게 된 세상이다. 그 파괴력이 어느 정도일 줄 말이다. 내 세상의 중심엔 어머니가 있었다.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젊은 시절 심적 고통이 크셨을 테고, 자식들을 위해 많은 걸 희생했으면서도 말년엔 자식들 걱정 때문에 안절부절못하셨던, 그런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향한 애정과 연민과 죄책감이 똘똘 뭉쳐서 내 안에 똬리를 틀었고, 그것은 어머니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으면 언제든 달려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물론 나는 몰랐지만. 30대 초반쯤. 여러 가지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달려들어 나를 괴롭히고 있을 즈음 악몽이 내게 찾아왔다. 2~3일에 한 번씩 가위에 눌리고 그럴 때마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상황에서 존재하는지, 존재하는지도 확실치 않은 무언가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잠이 드는 게 무서웠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질 않았다. 그러기를 한참. 어느 날 또 가위에 눌렸고 몸부림을 치던 중, 그 무언가가 어머니를 언급했다. 그 순간 색채가 바뀌었다. 공포와 무기력과 회피가 지배하던 세상을 오로지 딱 하나, 분노가 휩쓸었다. 그 무언가의 놀란 표정을 본 건 내 착각일 수도 있다. 난 내가 아는 욕을 모조리 내뱉었고 그 순간 가위에서 풀렸다. 현실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면서도 난 욕을 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그렇게 난 그 무언가에서 벗어났다. 오직 내 삶에만영향을 미친 하나의 예일 뿐이다.

 

<7년의 밤>은 그런 세상들이 충돌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그들 모두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세상 밖으로 뛰쳐나온 자기 안의 세상은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과 엮이면서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 아니, 물러설 수가 없다. 간혹 물려받은 것이라 착각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 세상이 곧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물러선다는 건 자신의 근본부터 갈아엎는다는 얘기니까. 그래서 결국 세령호란 호수를 배경으로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다. 그 이후 7. 세령호 사건의 핵심 인물이었던 최현수와 오영제는 각기 다른 길을 걷는다. 최현수는 자신을 돌아봤고, 오영제는 변하지 않았다. 7년은 현수와 영제 두 사람뿐만 아니라 현수의 아들인 서원과 서원의 보호자인 승환에게도 어둠이 들어찬 시공간이었겠으나 그 시공간에 새벽을 밀어 넣을 수 있었던 건 현수의 변화와 승환의 선택 때문이었을 거다. 그 덕에 작가가 인용했던 빅터 프랭클의 문장,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예스라고 대답하는 것이 조금은 수긍이 간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모든 피해자와 가족들이 결국 그 문장에 도달했으면 하는 강력한 희망을 품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지금 죽으러 갑니다
정해연 지음 / 황금가지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성악설과 성선설. 학교에서 배울 땐 그런가 보다 했지, 둘 중 어떤 것도 믿어 본 적은 없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드는 생각은, ‘대부분사람은 백지상태로 태어나 환경에 따라 기억과 망각을 거치면서 자아를 만들어간다는 거. 다만 어떤 생명이든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자신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두기에 그것을 얼마나 적절히 조절하느냐에 따라 선악의 구별과 정도가 달라지는 게 아닐까 싶다. 뜬금없이 무슨 얘기인가 싶겠지만,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니 내 경우는 저런 생각이 떠오르더라라는 얘기.

 

존속 살해에서 시작해 동반자살을 거쳐 연쇄 살인을 지나 다시 존속 살해로. 뭐랄까. 화려하게 차려진 밥상 앞에 앉아 이 반찬 저 반찬 맛있게 먹고 배가 너무 불러서 수저를 딱 내려놨는데! 아우, 맛은 있는데 이젠 다른 걸 먹어야겠구나. 신체적, 물질적 포만감과 정신적 포만감이 서로 엇나가버린 상황. 아마도 한 작가의 글을 짧은 기간 동안 너무 많이 읽은 모양이다. 재미는 있다. 뒤가 궁금해서 다음 화면을 계속 불러오는 거 보면. 하지만, 그래도 잠시 멈추고 다른 길로 가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바깥 일기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거리 건널목. 아침 시간이라 사람들이 많다. 옆에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으, 으 소리를 내며 불안해한다. 이유는 바로 눈앞 찻길에서 두 발로 왔다 갔다 하는 비둘기 때문. 여학생의 소리에 따라 내 얼굴도 같이 찌푸려진다. 승용차들이 아슬아슬하게 비켜 갔지만 녀석은 날개를 쓸 생각이 없다. (? 새라면 날아야 하잖아?) 빠각. 온몸이 내지른 날카롭고 건조한 절규. 버스가 지나간 뒤 차도엔 조금 전까지 비둘기였던 존재가 납작하게 짓눌려 있다. 새는 발성 기관으로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지만, 여학생이 존재를 마감하는 비명을 대신 내질렀다. (본질을 망각한 존재의 소멸. 무엇이 비둘기가 날지 않게 했을까? 난 이 거대한 사회 속에서 내 본질을 제대로 자각하고 있는 걸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날 위해, 아니 날 대신해 비명을 질러줄 사람들이 있을까?) 녹색불이 들어오자, 얼굴을 찌푸린 채 황급히 건널목을 건넌다.

 

오후 4시경. 지하철 안. 다들 손에 든 스마트폰에 시선을 둔다. 손안에 쥔 또 하나의 거대한 세상 속으로. 별안간 울려 퍼지는 외침이 있었다. ‘버르장머리 없게 어디서!’ 나이가 아주 많아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이 나이가 그냥 많아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께 내지른 소리다. 간혹 하나의 단어가 모든 이미지를 압도할 때가 있다. 이 경우는 버르장머리’. ‘꼰대란 이미지가 머리에 그득 차오르면서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사라진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일이 충분히 화를 낼 만한 것이었는지. 그런 건 이제 의미 없다. 그저 꼰대. 언어와 사회현상이 어우러져 발휘하는 엄청난 힘.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힘이 곧 발휘된다. 나와는 상관없다는 듯,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리는 사람들. 아무것도 보기 싫다는 듯 자리를 피해버리는 사람들. 고독? 무관심? 이기주의? 귀찮음? 문득 떠오르는 비둘기.

 

이 책은 이런 식의 글쓰기를 지향한다. 정확히 말하면 눈에 보이는 일상을 그대로 적되 작가 자기 생각은 직접 드러내지 않는 방식의 글쓰기다. 사진이 정지된 장면만으로 충분히 많은 사유를 하게 하는 것처럼 글 또한 그게 가능하기에 그걸 시도해 본 셈이다. 하지만 작가는 스스로 실패를 자인했다고 한다. 계속해서 끼어드는 내 생각들, 그걸 어찌해 볼 수가 없었던 거다. 나 역시 실패다. 첫 번째 단락은 괄호 안에 문장들을 뺀다면 얼추 사진과 같은 느낌을 주겠지만 두 번째 단락은 뭘 빼고 자시고 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선다. 뭐 그렇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못 먹는 남자
정해연 지음 / 엘릭시르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화광을 자처하던 2~30대 시절. 장르나 제작 시기를 가리지 않고 영화를 보고 다녔지만 그래도 애정을 품었던 건 스릴러 장르와 B 무비였다. 요즘은 영화와 멀어져서 일반적으로 쉽게 눈에 띄는 장르가 액션 영웅물인 듯한데 그때만 해도 스릴러 영화가 꽤 많이 극장에 걸리곤 했다. 그러다 보니 편차가 꽤 컸다. 은근한 수작이 있는가 하면, 배우 얼굴만 내세운 망작도 있고, 그냥저냥 줄거리만 뒤쫓아갈 만한 평작도 있다. 그래도 가리지 않고 즐길 수 있던 이유는 내 취향 때문. 소설이 영화랑 똑같진 않겠지만 역시 비슷한 이유로 같은 장르의 소설을 즐긴다. 그렇다면 <못 먹는 남자>는 어디쯤 자리 잡고 있을까? 딱 그냥저냥. 자꾸 기본이 당기는 거 보면 아무래도 나이가 들었단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단 말이지.

 

<못 먹는 남자>는 특수 능력을 지닌 사람들의 이야기다. 제영은 음식을 먹을 때 자기가 얼굴을 아는 사람의 죽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얼굴을 아는 사람의 범주는 광범위하다. TV나 잡지에서 봤던 연예인이나 유명인일 수도 있고, 자기 가족일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죽음을 막을 수 없다는 거. 시기와 장소를 특정해서 자신이 목격했던 그 죽음을 막아도 반드시 죽음은 그 사람을 다시 찾아간다. 이야기는 이 지점에서 분화가 된다. 죽음을 회피할 수 있는가? 회피할 수 있는데 만약 그 수단을 얻기 위해서 경제적 사회적 계급이 작용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타인의 죽음과 그 회피에 들이댄 도덕적 잣대를 나 자신을 비롯한 내 가족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가?

 

질문은 저렇게 했지만 그렇게 어렵고 심오한 소설은 아니다. 경제적 사회적 계급은 돈 문제라고 보면 되고, 들이댄 도덕적 잣대는 너 그렇게 살면 안 돼!’라고 하면서 내뻗는 손가락질이라 생각하면 된다. 누구나 한 번쯤 살면서 경험해 본 일이다. 내가 항상 피해자였다고만 생각하지 말자. 그러면 나는, 이 사회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될 거다.

 

누군가의 기진한 퇴근길, 피로한 몸을 누이는 그저 그런 집 안, 쓰레기들로 괴로움을 토해내는 한강. 지긋하게 평범한 그것들을 모아놓고 조망하는 아름다움이 새삼 불쾌하다.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조차 5성급 호텔 최상층 스위트룸을 차지한 자들이 사유한다.


(본문 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레 미제라블 4 (한글) 더클래식 세계문학 84
빅토르 위고 지음, 베스트트랜스 옮김 / 더클래식 / 201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권부터 4권까지만 세 번을 읽었다. 책만 읽은 것도 아니고 배경지식이 필요했던 프랑스 혁명들과 그 과정까지 찾아봐야만 했다. 그제야 책에 있는 글씨들이 의미 있는 문장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물론 처음 읽었을 때보다 나아졌단 거지 소설의 전부가 술술 읽히더란 얘기는 아니다. 내가 몸담지 않았던 시대, 내가 발붙인 적 없는 나라의 이야기는 언제나 어렵고 낯설다. 우리나라 역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었다면 이 정도로 난감하진 않았을 거다. 게다가 소설을 쓴 작가마저 그 시대의 인물인 터라 얘기를 풀어놓는 방식마저 저세상 타입이다. 하지만 이 모든 걸 다 고려하더라도 <레미제라블>만큼 어렵게 읽었던 소설이 있었나 싶다. 아마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면서까지 할 말은 하고야 마는 작가의 서술 방식 때문이지 싶은데 이 때문에 지금 읽고 있는 게 소설인지 설명문인지 꽤 자주 궁금해지더라. 두 번째 읽을 때쯤엔 예전 어린 시절 놀이터에서 있었던 한 장면이 겹쳐 떠오르기도 했다. 바로 개미구멍에서 쏟아져 나오는 개미들. 저 구멍(에피소드)이 중요한 걸까, 이 개미들(, 문장)이 중요한 걸까? 구멍을 막고 개미도 잡아야 하나? 개미가... 너무 많은데.

 

어려운 건 이뿐만이 아니다. 하나의 단어에 가치판단이 응축되어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게 관점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래서 배경지식이 없거나 불완전하거나, 또는 다양한 관점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의 맥락이 이상하게 받아들여질 때가 있다. 이 소설과 직접 관련은 없지만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면, ‘18세기 말 파리가 그렇다. 영국 작가가 쓴 <두 도시 이야기>에서 ‘18세기 말 파리는 혼돈과 죽음의 도시다. 하지만 프랑스 작가인 빅토르 위고가 생각하는 ‘18세기 말 파리는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모든 중세적 암흑과 단절을 시도하는 선구적이고 모험적인 도시다. 그러니 문장에 ‘1790년대 파리가 등장했다면, 문맥에 따라, 아니면 그 말을 한 캐릭터의 성향에 따라 의미를 달리 파악할 필요가 있는 셈이다.

 

끝에 거의 다다랐다. 이야기도 6월 혁명이 시작되면서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자의든 타의든 혁명의 한복판으로 뛰어들 모양이다. 5권은 빠른 전개를 보여주지 않을지 하는 기대를 품어 본다. 아는 만큼 보인다. 이 문장을 참 오랜만에 절실히 느끼게 해 준 소설이다. 소설... 맞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