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바깥 일기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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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거리 건널목. 아침 시간이라 사람들이 많다. 옆에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으, 으 소리를 내며 불안해한다. 이유는 바로 눈앞 찻길에서 두 발로 왔다 갔다 하는 비둘기 때문. 여학생의 소리에 따라 내 얼굴도 같이 찌푸려진다. 승용차들이 아슬아슬하게 비켜 갔지만 녀석은 날개를 쓸 생각이 없다. (? 새라면 날아야 하잖아?) 빠각. 온몸이 내지른 날카롭고 건조한 절규. 버스가 지나간 뒤 차도엔 조금 전까지 비둘기였던 존재가 납작하게 짓눌려 있다. 새는 발성 기관으로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지만, 여학생이 존재를 마감하는 비명을 대신 내질렀다. (본질을 망각한 존재의 소멸. 무엇이 비둘기가 날지 않게 했을까? 난 이 거대한 사회 속에서 내 본질을 제대로 자각하고 있는 걸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날 위해, 아니 날 대신해 비명을 질러줄 사람들이 있을까?) 녹색불이 들어오자, 얼굴을 찌푸린 채 황급히 건널목을 건넌다.

 

오후 4시경. 지하철 안. 다들 손에 든 스마트폰에 시선을 둔다. 손안에 쥔 또 하나의 거대한 세상 속으로. 별안간 울려 퍼지는 외침이 있었다. ‘버르장머리 없게 어디서!’ 나이가 아주 많아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이 나이가 그냥 많아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께 내지른 소리다. 간혹 하나의 단어가 모든 이미지를 압도할 때가 있다. 이 경우는 버르장머리’. ‘꼰대란 이미지가 머리에 그득 차오르면서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사라진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일이 충분히 화를 낼 만한 것이었는지. 그런 건 이제 의미 없다. 그저 꼰대. 언어와 사회현상이 어우러져 발휘하는 엄청난 힘.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힘이 곧 발휘된다. 나와는 상관없다는 듯,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리는 사람들. 아무것도 보기 싫다는 듯 자리를 피해버리는 사람들. 고독? 무관심? 이기주의? 귀찮음? 문득 떠오르는 비둘기.

 

이 책은 이런 식의 글쓰기를 지향한다. 정확히 말하면 눈에 보이는 일상을 그대로 적되 작가 자기 생각은 직접 드러내지 않는 방식의 글쓰기다. 사진이 정지된 장면만으로 충분히 많은 사유를 하게 하는 것처럼 글 또한 그게 가능하기에 그걸 시도해 본 셈이다. 하지만 작가는 스스로 실패를 자인했다고 한다. 계속해서 끼어드는 내 생각들, 그걸 어찌해 볼 수가 없었던 거다. 나 역시 실패다. 첫 번째 단락은 괄호 안에 문장들을 뺀다면 얼추 사진과 같은 느낌을 주겠지만 두 번째 단락은 뭘 빼고 자시고 해야 할지 판단이 안 선다. 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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