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오른다. 지난주 낮 기온 39도를 찍은 날 산을 오를 땐 자괴감이 들었다. 혹서기 극기 훈련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흘러나오는 땀에 모든 생각이 휩쓸려서 2시간 내내 저 생각만 했다. 어쩌면 저 자괴감이 그 순간 내 생명줄이었는지도 모른다. 안 그랬으면 좀비처럼 멍하니 올라갔다가 내려왔을 테니까. 그런데 이번 주는 다르다. 34도 정도의 온도. 사실 수치만 놓고 보면 더운 날씨지만 지난주 발작에 가까운 더위가 34도쯤은 아무것도 아닌 걸로 만들어 버렸다. 그렇게 한결 시원해진(?) 날씨에 감사하며 산에 오른다.


우리나라 산엔 소나무 같은 침엽수가 많다. 잎이 좁아서 가뭄에 강하고 사시사철 푸르다. 그래서 별생각 없었는데, 군데군데 보이는 큰 나무들의, 침엽수가 아닌 나무들의 잎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게 보였다. 가뭄인가? 폭우처럼 쏟아지던 장마철이 3주 전이었나? 그거밖에 안 지났다고? 여름이 시작되던 6월은 밤엔 시원해서 창을 열어놓고 잘 수 있었다. 7월 들어 급격히 더워졌고, 곧이어 장마가 스치듯 할퀴고 지나갔으며, 그 상처를 끔찍한 무더위가 파고들었다. 변화의 진폭은 컸지만, 변화의 주기는 짧았다. 하늘을 보며 슬쩍 투덜대본다. 아니, 무슨 변덕이 우리 집 고양이 수준이래.


꼭대기에 도착해서 주변을 둘러본다. 모지리가 성벽 저쪽 구멍에서 고개만 쏙 내밀고 이쪽을 살피고 있다. 닭가슴살을 주자 허겁지겁 먹는다.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날이 너무 더우면 산을 찾는 사람이 준다. 야, 너 명색이 들고양인데 여기서 사냥도 하는 거 맞지? 예전에 나비 잡던 거 보면 영 미덥지 않아서. 골격이 작은 녀석이지만 더 마른 듯한 느낌이다. 올라오면서 봤던, 낙엽과 나뭇가지와 돌들이 앙증맞게 쌓여있던, 어떻게 보면 자연스럽지만 위치상으로 보면 전혀 그럴 이유가 없는, 볼록한 무더기가 신경 쓰인다. 마치 조그마한 봉분 같아서. 사람들은 종종 자연환경을 모성에 빗댄다. 생명을 품는다는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인간의 관점일 것이다. 자연은 공감 능력이 없다. 식물이 마르든, 동물이 죽든 알 바 아니다. 그저 철저하게 공평할 뿐이다. 다시 한번 불평하려다가 입만 한번 삐죽거리다 만다. 공평하지도 못할뿐더러 공감 능력까지 잃어가는 인간이 감히 어디에 대고 투덜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헉헉거리며 산을 오른다. 땀을 많이 흘린 탓인지 확실히 다른 때보다 힘들다. 작년 여름엔 쉬었었는데 올해도 쉴까? 게으름을 피울 생각을 해보지만, 비만 내리지 않으면 일주일에 서너 번은 오를 것이다. 왜?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고양이를 보러 가는 것도 하나의 동기 부여가 되고, 이마저도 안 하면 내 세상의 폭이 너무 좁다. 그거 조금 좁다고 뭐가 잘못되나? 잘못될 건 없지. 그래도 건강은 챙겨야지. 게으르고 싶은 욕망과 부지런해야 한다는 의지가 맞붙지만 딱히 치열하진 않다. 습도에 짓눌려 그냥 바둥대는 느낌이랄까. 바람이 부는 곳까지 가려면 아직 멀었는데. 아니, 저기 그래도 바람 좀.


바람이라도 찾으려고 했던 걸까? 우뚝 멈춰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나무에 붙어있는 허물이 눈에 들어온다. 영화에 나오는 무슨 괴생명체 같기도 하고.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니 갑자기 매미 소리가 귓전을 파고든다. 아, 매미 유충이 성충이 되려고 벗어놓은 외피구나. 몇 년 전, 베란다 방충망에 들러붙어 다짜고짜 소리를 지르던 매미가 떠올랐다. 그 쩌렁쩌렁함에 어찌나 놀랐던지. 고양이는 쟤 누구냐며, 자기가 꼭 한 대 쥐어박아야겠다고 또 어찌나 난리를 치던지. 울음소리를 쫓아 나무를 살피지만 자취를 찾을 수가 없다. 3년이 훌쩍 넘는 땅속 유충 시기를 지나 고작 한 달 정도의 성충 시기를 보내려고 땅 위로 나온 매미다. ‘나 여기 있어요. 나 여기 있다구요.’ 이 여름에 악다구니로 존재를 증명하는 중이다.


몇 걸음 옮기다 말고 다시 우뚝 선다. 이번엔 왼쪽 성벽 위에 세 마리의 곤충이 있다. 벌인가? 끈으로 꽉 묶어놓은 것처럼 허리가 너무 잘록하다. 몸통이 서로 붙어있기는 한 거야? 또 하나는 메뚜기, 여치? 메뚜기라고 하자. 벌이 메뚜기 몸통을 파먹고 있다. 메뚜기 덩치가 훨씬 큰데. 이미 죽은 녀석이었거나, 아니면 벌침으로 마비를 시켰거나. 벌이 머리통을 들이밀 때마다 메뚜기 한쪽 다리가 들썩거린다. 그리고 개미 한 마리. 덩치가 벌과 비슷하다. 콩고물을 기다리는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동료들을 호출해서 메뚜기를 강탈할 작정일 수도 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다 고개를 돌려 산 정상 쪽을 쳐다본다. 우뚝 솟은 바위와 촘촘하게 자리한 푸르름. 아이구야, 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새벽 1시 40분.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확인한 시각이었다. 다른 때 같으면 새벽 3시쯤에 깼는데 이번 주는 너무 더운 탓에 산에 가질 않았더니 조금 빠른 시각에 눈을 뜬 모양이다. 삼층장 꼭대기에서 자던 고양이가 인기척에 고개를 쳐든다. 녀석이 쓰는 화장실을 치우고 있으면 따라 나와 간식을 달라고 조를 것이다. 어차피 이 시간에 일어나는 건 고양이 간식 때문이니까. 할 일을 다 하고 에어컨을 끈다. 종일 혹사 중인 에어컨에 아침까지 쉴 틈을 준다. 안 그랬다간 터질지도 모른다. 다시 잠을 청한다. 이번엔 소파에서 잔다. 고양이는 베란다 턱에 걸터앉아 바깥 구경 중이다. 아침에 출근하려면 잠이 빨리 들어야 하는데.


다시 눈을 떴다. 새벽 3시 20분. 너무 더워서 깼다. 낮 기온 39도를 사흘 정도 기록하더니 새벽에도 에어컨의 효력이 오래 가질 못한다. 마룻바닥에 내려와 큰대자로 눕는다. 바닥의 시원한 기운에 그나마 좀 낫다. 바닥에 들러붙는 선택은 나보다 고양이가 먼저였다. 에어컨 근처 바닥에 옆으로 길게 누운 검은 자태가 눈에 들어온다. 에어컨이 작동하는 동안 얼음장처럼 가장 시원해지는 장소다. 눈을 감고 있는데 녀석이 쪼르르 달려오더니 내 머리 옆 어딘가에 자리 잡는다. 자라, 아저씨 더 자야 한다.


자는 둥 마는 둥 하는데 고양이가 방석 밑에 들어간 빵끈을 잡겠다고 요란이다. 가지고 노는 장난감 중 하나다. 뒹굴며 오두방정을 떠는 녀석을 보며 미안한 생각이 얼핏 스친다. 나 이외엔 아무도 없는 세상을 만들어줘서. 사람에 대한 사회성은 전무하고 고양이에 대한 사회성도 신통치 않아 보인다. 다른 아이를 입양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덥다. 도저히 안 될 거 같아서 에어컨을 다시 켠다. 소파에 누워서 찬바람을 만끽하는데 녀석이 캣타워 꼭대기 아크릴 해먹에 들어간다. 한 다리만 해먹 밖으로 뻗고 잠을 잘 태세다. 에어컨이 켜지면 캣타워 주변이 시원해진다는 걸 이제는 안다. 녀석은 집고양이다.


잠을 잔 건지 모르겠다. 집을 나서면서 인사를 해보지만, 녀석은 뚱하다. 인사도 안 해주고. 흥이닷. 하나도 안 미안하다. 아저씨는 이제 나이가 들어가는 중이라 꽤나 변덕스럽다.


꼬리말) 놀랍게도 지난 주 토요일에 쓴 글이다. 이 날 밤을 시작으로 새벽 날씨는 시원한 바람이 부는 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자책] 1984 (한글판) ㅣ 더클래식 세계문학 55
조지 오웰 지음, 정영수 옮김 / 더클래식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다룬 소설 중 대표 격인 작품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알려진 이야기다. 1948년에 집필하기 시작해서 49년에 출간됐고, 가까운 미래인 1984년을 배경으로 내용을 서술한다. 영국인인 작가는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에서 경찰이란 직업을 가졌었고, 그 후론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정치 체제나 이념이 얼마나 겉과 속이 다른지 체험했고, 그 경험과 거기에서 비롯된 생각들을 소설에 그대로 녹여냈다고 보면 될 듯하다.


사람마다 보는 시각이 다르니, 분명 누군가는 철저한 감시와 통제를 이 소설의 핵심으로 파악할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 더 유명한 건 ‘1984’란 소설 제목보다 ‘빅 브라더’란 단어일 거고, 그 단어는 대부분 감시와 통제를 상징하는 용도로 많이 쓰인다. 게다가 요즘의 정보통신 기술은 이 소설에 나오는 감시 기술들을 애들 장난 수준으로 보이게 할 만큼 충분히 발달했다. 한 예로 AI와 결합한 거리의 CCTV는 이상 행동(담을 넘는다든지, 일정 장소를 오랜 시간 동안 배회한다든지)을 감지하면 관제 센터의 사람에게 통보하고, 지역 지구대에까지 연계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개인정보와 사생활에 민감하다면, 이 소설에 내세운 감시와 통제는 끔찍할 수밖에 없다.


나도 예전엔 그랬던 거 같다. 그런데 이번엔 정치 체제가 구성원 개인의 정신을 파괴하고 말살하는 모습이 아프게 다가왔다. 자신들은 순교자나 아이콘을 만들지 않는다는 말, 개인 내부의 마지막 피신처까지 싹싹 드러내서 텅 비어버리게 만드는 과정. 감시와 통제는 효율적이고 비인간적이지만, 말살은 역설적으로 인간적이며 건조하고 치밀하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구속, 무지는 힘.’ 소설에 나오는 당의 표어가 갖는 모순이 말살 과정에서조차 그대로 드러난다. 그래서 더욱 아팠던 거 같다. 기술적 접근이 아닌 본질적 접근이라서. 그것이 사회 제도의 개혁이 아닌 개인 세계관의 파괴를 위한 수단이라서.


‘개인이 갖는 세계관의 파괴’라고 하니 요즘 우리나라에도 이와 관련된 주제가 하나 있는 거 같다. 세제 개편과 함께 시끌시끌한 부동산. 유일한 투자 수단이자 삶의 목표였던 1970, 80년대부터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부동산은 세대에 따라, 아니, 세대와도 상관없이 개인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띠며 존재해 왔다. 안타깝게도 현재 2, 30대도 돈을 끌어모을 능력이 있는 개인에 한해서는 부동산에 대한 태도가 과거 세대와 다를 바 없지 싶다. 이쯤 되면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관의 문제 아닌가? 그럼, 개혁이나 개편이 아니라 세계관을 파괴해야 한다는 얘긴데. 뭐, <1984>랑 직접 상관은 없는 문제다. 그래도 궁금은 하네. 윈스턴이 고가 아파트 소유주였다면 끝까지 버텨냈을 것도 같은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 젊었을 땐 글을 통해서 끊임없이 투덜거렸다. 나이 들어서도 그렇긴 하지만 예전만큼은 아니다. 고양이를 상대로 대놓고 투덜거리는데, 아마 그게 어느 정도 이유가 될 듯싶다. 분산 효과일까? ***


"야, 꼬맹이! 주먹만 한 게 어디 반백 년이나 산 아저씨 물건을. 비켜라, 그거 아저씨 의자다."

난 3개월밖에 안 살았다! 그러니 이 의자는 내꺼다!


"이 자슥이, 니가 개냐? 땅바닥에 떨어진 건 다 주워 먹고? 그거 뱉어라!"

냥, 아저씨가 잘 치웠어야지! 내가 잡히나 봐라!


"월이, 아저씨 일하러 가면 혼자 집에 있을 때 청소를 하든가, 니 밥그릇이라도 좀 닦아라."

내가 아저씨 대신 잠을 자줄 순 있다. 그러니 아저씨가 해라, 청소.


"야, 너 똥 밟았냐! 고양이는 깔끔한 동물이라며? 넌 뭔데?! 이리 안 와! 그 발로 어딜 뛰어가!"

아저씨한테 인사하러 나오다 그런 거잖아! 그러게 왜 갑자기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우악! 야 이... 자고 있는데 배로 뛰어내리면 어떡하냐!"

컴컴한데 잠만 처자냐?! 나랑 놀자, 심심하다!


"월아, 아저씨 대신 네가 좀 씻으면 안 될까? 너무 힘들어서 움직이기도 싫다."

아저씨, 전생에 개였냐? 어떻게 숨 쉬듯이 개소리를 할 수가 있냐?


"월아, 아저씨 밥 좀 차려주라. 너무 귀찮다."

... 앞으로 내가 이 아저씨를 키워야 하나? 고양이별에서 그런 교육은 받은 적 없는데, 냥.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