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강검진과 스케일링을 받고 깨어난 월이는 아주 멀쩡해 보였다. 마취에서 깬 후 일정 시간이 지난 뒤 사료를 줘야 했는데, 그사이 먹을 걸 내놓으라고 엄청 눈치를 주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틀 후, 녀석은 먹는 걸 거부했다. 사료든 간식이든 먹을 때가 되면 쪼르르 달려왔다가 입에 넣어보고 곧장 뱉어냈다. 스케일링 후유증이었다. 가뜩이나 예민한 녀석인데 치아 감각이 이상해지니 아예 먹는 걸 참기로 한 거다. 그날부터 3일 동안 녀석은 츄르만 먹었다. 내 속은 걱정으로 썩어 들어갔고. ***


아고, 힘 없어라... 세상이 노랗구나. 내 눈은 초록색인데... 계속 츄르만 먹어서 그런가... 아, 씨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상하네. 입속이 왜 이러지? 지난번 선생님이랑 있다가 정신 차려보니 이렇단 말이지. 이거, 이거, 나를 굶겨 죽이려는 속셈인가? 내가 아저씨를 감시하려는 걸 막으려고?


(아저씨는 걱정돼서 고양이 주변을 끊임없이 얼쩡대고 있음) “왜? 왜 그렇게 계속 쳐다보는데? 배고파? 먹을 거 줄까?”


아무리 봐도 딱히 대단해 보이지 않는 아저씬데. 그건 그렇고 3일간 츄르만 먹었는데 배가 안 고프겠냐, 이 아저씨야. 이렇게 생각 없는 아저씨 감시하는 걸 막으려 할 리는 없고. 냥, 내가 뭘 놓친 게 있나?


(아저씨, 계속 고양이 주시 중) “왜? 왜 그렇게 게슴츠레 축 처져 있는데? 힘없어?”


3일간 츄르만 먹었는데 힘이 남아돌겠냐, 이 아저씨야. 에잇, 모르겠다. 화장실이나 갈란다.


(터덜터덜. 쉬와 응가. 응가는 설사로 작렬) 앗, 아저씨, 응가가 노란색이다! 나 이러다가 죽는 거 아니냐? 아까는 하늘도 노란색이었다!


(요란한 모래질에 뒤따라 들어온 아저씨, 오묘한 표정으로 화장실을 살핌) “츄르가...”


그러고 보니, 아까 옛날 장면들이 머릿속으로 쭈욱 흘러갔다. 이런 걸 주마등이라고 하지 않냐?!


“더 이상 안 되겠네. 바꿀 때가...”


헉, 나 고양이별로 돌아가야 하냐?! 너무... 짧은데... 


“이리 와 봐.”


(터덜터덜) 아저씨, 내가 고양이별에 돌아가거든 아저씨는 좋은 사람이라고 얘기해줄 거다. 청소도 열심히 하고, 화장실도 잘 치우고, 밥도 시간 맞춰 잘 주고, 어엉엉.


(부스럭) “그만 웅얼대고 이거 한 번 먹어보자. 아저씨가 잘게 부쉈으니까 먹기 편할 거야.”


(날름) 엉엉. 쩝쩝. 어라, 입안 아픈 게 좀 낫네?


“이제 좀 괜찮아? 먹을만해?”


(날름) 쩝쩝. (날름) 쩝쩝. (입에 들어갔다가 덩어리째 바닥에 흘림) 


“... 이거 먹어라. 새 거다.”


내 침 묻었다. 입에 들어갔다 나온 건 안 먹는다.


“이 자슥이...”


그냥 간다? 확 안 먹어버린다?


“오구, 오구, 잘 먹는다. 그래, 그렇게라도 먹어라. 그게 어디냐.”

 

기분 나빠지려고 하는데... 고양이별 얘기는 취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볕이 마루에 경계를 만든다. 그 경계 너머, 그러니까 햇볕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내가 있고, 경계 안쪽에 고양이가 있다. 나는 도끼눈을 뜨고서 째려보는 중이고, 고양이는 고양이 눈을 뜨고서 노려보는 중이다. 서로를 마주 보는 자세지만 둘은 서로를 보고 있진 않다. 나는 조금 전 발을 내디뎠다가 여전히 뜨거운 햇볕에 놀라 심통이 났고, 고양이는 내가 옆에 팽개친 장난감이 못내 아쉽다. 뭔가 묘한 대치 상태를 깬 건 고양이. 목이 간지러웠는지 뒷발로 아래에서 위로 긁어대기 시작했는데 햇볕을 배경으로 털이 분수처럼 솟구쳐 오른다. 내 도끼눈이 햇볕을 놔주고 고양이를 포착한다. 저 자슥이. 이제 털 가지고 분수 쇼를 하냐? 가지가지 한다, 진짜. 고양이는 네가 뭔 상관이냐는 듯, 잠시 멈췄던 행위를 재개한다. 긁긁.


어제 오후 늦게 산에 오르면서 여름이 떠날 채비를 하고 있음을 알았다. 수풀은 더욱 무성해지고 뜨거움은 여전했지만, 사소한 변화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물을 꽁꽁 얼려서 가곤 하는데 지난주만 해도 이 물을 남김없이 다 마셨다. 그런데 집에 돌아올 때까지 얼음도 다 녹지 않았다. 또 하나. 산 정상에 있는 모지리 활동 반경이 넓어졌다. 귀신같이 시원한 곳이나 따뜻한 곳을 찾는 게 고양이인데, 고양이가 어떤 자리를 고집하지 않고 돌아다닌다는 건 더위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다는 얘기. 여름이 가는구나. 집에선 잘 때 선풍기조차 틀지 않았고, 새벽에 깨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가기까지 했다. 드디어.


햇볕은 뜨거웠지만 적어도 집안에선 그 바깥에 있거나, 그 영역 밖에서 움직여도 땀이 나지 않는다. 여름이 다른 곳에 정신 팔린 게 분명하다. 근질근질한 입을 꾹 다물고 고양이를 보는데, 녀석이 터덜터덜 햇볕이 없는 쪽으로 가더니 철퍼덕 소리가 나게 바닥에 눕는다. 그리곤 냅다 뒹굴 쇼 투척. 뒹굴뒹굴. 연이은 고양이 쇼에 나도 모르게 입이 헤 벌어지고 그 사이로 참았던 말이 삐져나온다.


고양이, 여름이 이제 가나보다.


화들짝. 아, 말하면 안 되는데. 짐을 싸던 여름이 이 말을 듣고 ‘어림없지’ 하며 다시 돌아올 것만 같다. 이번 여름,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요놈의 입이 방정이다. 너 이 자슥, 여름이 보낸 스파이였냐? 고양이를 째려보지만, 알 바 아니라는 듯 배를 까고 누워서 뒹굴뒹굴한다. 고양이, 여름이 다시 고삐를 조이면 다 너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 "인간은 갈대다.“


생명에 경중이 있을까? 질문을 던졌지만 사실 우린 선택에 따라 차등을 둔다. 그리고 선택과도 상관없이 차등을 두기도 한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죽인 곤충의 수는 얼마나 될까? 젊은 시절, 공원 근처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다가 유제가 진열된 냉장칸에서 몸이 굳은 나방과 마주친 적이 있다. 덩치가 정말 커서 고양이 발만 했고, 처음 발견하고 놀랐던 사람은 눈이 마주친 기분이 들었을 정도였다. 그곳에서 일하면서 나방을 숱하게 빗자루로 때려잡았지만, 그 나방은 그럴 수가 없었다. 조심스레 꺼내 바깥에 놓아주면서 이런 생각을 했었다. 생명력과 부피가 비례 관계였던가? 생명은 그저 내 손안의 감각에 따라 그 묵직함이 결정되는 것일까?


- "하지만 생각하는 갈대다.“


인간이 이기적이라 그럴 것이다. 내 삶의 반경에 들어와 있다면, 그 안에서도 나와 가까울수록 소중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나방의 경우는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로 감각과 감정에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죽였을 때 자신이 느끼게 될 실질적인 감각과 받아야 할 감정적 충격을 고려해서 대상을 판단하는 셈이다. 그러니까 생명의 경중을 따지는 게 아니라 나의 안위를 걱정하는 거다. 차바퀴에 깔리는 비둘기 몸뚱이의 빠각 소리는 내 삶의 영역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저 멀리 해외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나 굶주림은 영역 밖의 일이다. 이때 비둘기의 생명은 무겁지만, 사람의 생명은 가볍다. 잔인할 정도로 우린 이기적이다.


- AI가 던진 문장


다짜고짜 클로드에게 내가 그동안 썼던 거 말고 아무 문장이나 하나 던져보라고 했다. 그러자 내놓은 문장이 바로 파스칼의 문장이었다. "인간은 갈대다. 하지만 생각하는 갈대다." 무슨 글을 쓸까 고민하다가 조금 쉬운 길을 가보자고 글감을 요구했던 거였다.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다. 파스칼이라니. 갈대밭을 본 적이 있다. 갈대 자체가 대단한 건 아니었지만 바람이 불 때 그들 전체가 일구어내는 울림은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바람에 따른 그 일사불란함을 어떻게 봐야 할까? 저들이 이기적인 인간이라면?


젊었을 때, 인간의 이기심을 맞닥뜨리고 부정하고 인정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저 문 너머엔 희망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인간으로 인해 절망했지만, 열쇠 구멍으로 엿본 그곳엔 분명 희망이 있을 거라고. 그 희망 역시 인간일 거라고. 결국 문을 열었고, 그 과정에서 나는 더 단단해졌고 동시에 더 유연해졌다. 그리고 절망과 희망은 여전히 똑같이 존재해서 나를 당혹스럽게 한다. 이기적이며 뻔뻔하기까지 한 인간들은, 생명마저 나를 중심으로 놓고 보는 우리들은 도대체 무엇에 이끌려 어디로 우르르 몰려가는 걸까?


"이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 파스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산에 처음 오를 때가 생각난다. 둘레길만 산책하듯이 돌다가 문득 올려다본 정상이 궁금했다. 올라가 보자. 그런데 웬걸. 눈만 살짝 옆으로 돌려도 저 아래쪽에 보이는 바위 암벽과, 발바닥에서 미끄러지는 자잘한 모래 알갱이들 덕에 기가 눌리고 말았다. 그 상태로 도착한 곳이 하필이면 해골바위. 이름도 으스스한데 이곳은 까마귀들이 터를 잡은 곳이다. 주요 등산로가 아니라 사람은 나 하나뿐. 아주 가까이 날아다니는 까마귀들과 그들의 울음소리는 꽤나 위협적이었다. ‘꺼져라, 인간.’ 내겐 그렇게 들렸다.


“그래, 간다, 가! 아우, 치사해서….”


너희들이 무서워서 가는 게 아니라 산에 기가 눌린 거야. 호기롭게 외치고 속으로 웅얼댔지만, 진실은 까마귀가 무서웠다. 처음 오른 산에 기가 눌린 것도 사실이고.


그 줄행랑이 2년 전 9월쯤의 일이다. 지금은 아찔한 시야에 익숙해져서 무덤덤하게 다닌다. 아마 익숙함의 범위를 벗어나면 또 다르겠지만. 발밑만 보고 다니던 그때는 하늘을 볼 수 없었다. 지금은 자주 하늘을 보곤 하는데, 시야에 새들이 잡혔다. 바람이 아주 많이 부는 날이었고, 여름인데도 땀이 빠르게 식을 만큼 바람이 강했다. 그 바람 속에서 새들이 큰 반경으로 하늘을 휘젓는 중이었다. 한 부류는 까마귀, 다른 한 부류는 아마도 황조롱이. 아마도. 덩치가 더 큰 까마귀들은 비행이 힘차고 그만큼 거칠다. 서너 마리씩 한꺼번에 움직였고, 착륙 지점에선 날개를 편 상태로 바람을 타며 좌우로 크게 흔들리면서 내려앉았다. 이 바람 속에서 그 좁은 나무 꼭대기에. 반면 황조롱이(아마도)는 부드럽고 날렵하다. 더하고 뺄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게 저런 느낌일 거다. 게다가 저 높은 하늘에서 바람을 탈 땐 핀으로 고정해 놓은 듯 미동조차 없었다. 한참을 넋 놓고 보고 있자니, 까마귀가 영역에 들어온 황조롱이를 내몰려 하는 분위기였다. 서로 엉켰다가 멀어지고, 다시 휘몰아쳤다 점이 된다. 푸른 화폭에 하얀 구름을 배경으로 힘이 넘치는 검은 붓질과 부드럽고 발랄한 펜의 놀림을 보는 듯해 멍하니 구경만 했다.


나를 다시 현실로 끌어낸 건 한쪽 시야 구석에 잡힌 하얀 뭔가의 움직임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까치가 보였다. 산등성이를 따라 정상 쪽으로 삐뚤빼뚤 힘겹게 날아가고 있었다. 순간 낮술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흔한 아저씨의 뒷모습이 떠올라 헛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우리나라에서 비둘기와 함께 도시를 양분한 새는 까치다. 도시에선 너희들이 극성이지만 산에선 까마귀 발밑에도 못 미치겠구나. 산 정상 쪽으로 발걸음을 잡는다. 훌륭한 공연을 봤고, 코믹한 막간극을 봤다. 정상에 가면 모지리가 피날레를 장식해 줄 것이다. 기대를 해 본다. 뭐, 코미디일 가능성이 크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무언가 읽거나 시청할 때, 일할 때, 지쳐서 멍때릴 때, 하나의 문제에 골몰할 때를 제외하면 생각이 아무렇게나 흐르게 둔다. 심각하기도 하고, 아이 같기도 하고, 어떤 의미가 있을 수도, 그냥 말 같지도 않은 공상일 수도 있다. 방향성도 없이 자유롭게 이리저리 뛰놀게 둔다.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뭐. 상호작용 할 게 많은 산에선 특히 더 그런 편이다. 누군가는 새로운 경험으로 가득한 여행에서 많은 걸 얻어낼 수 있다고 한다. 부인하진 않겠다. 하지만 워낙 새로운 탓에 감각과 생각은 그 지점에만 집중된다. 나를 벗어난 특별한 경험과 특별한 시각에. 그래도 특별한 것만이 꼭 특별한 것은 아니다. 그 옛날 그 어떤 시절, 일상이 일상처럼 이어지길 바라던 내가 있었기에 지금의 일상이 얼마나 특별한지 잘 알고 있다.


고양이와 산으로 너무 많은 글을 우려먹는 것에 대한 변명이자 핑계를 적어봤다. 내일부터 삽을 들고 나가서 아파트 앞 화단을 파볼까? 생물의 다양성은 지상보다 지하가 더 풍부하다고 하던데. 현미경도 사야 하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