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은 유난히 미적거렸다. 산에 가야 하는데. 누가 등 떠미는 것도 아닌데 왜 가야 하는 걸까? 지난주는 고관절이 아파서 운동을 쉬었고, 지지난주는 산에 갔었는데 모지리를 못 봤다. 모지리를 꼭 봐야 하나? 그래도 잘 있는 거 보면 좋잖아. 어기적대다가 어차피 쓰레기도 버려야 해서 꾸역꾸역 길을 나섰다. 다른 때보다 늦은 시각이었다.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서니 아파트 단지 후문 앞쪽 신호등이 막 빨간불로 바뀌는 게 보였다. 후문 쪽으로 가는데 왼쪽에서 승용차 하나가 나온다. 후문은 오전 출근 시간대만 차량이 통행할 수 있어서 이 시각엔 차가 다닐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차가 진행할 방향은 내가 걸어 나오던 길뿐이다. 먼저 지나가라고 길옆으로 물러섰는데 차도 멈춰서 움직이지 않는다. 차 안이 잘 보이지 않아서 잠깐 주저하다가 내가 먼저 차 앞을 가로질러 지나친다. 그 순간 경적 소리. 아주 짧게. 나한테 그런 건가 싶어 차 쪽을 뒤돌아 봤지만 별 반응이 없다. 햇빛이 창에 반사돼서 내부가 보이지도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다시 제 갈 길을 간다. 후문을 벗어나 건널목 앞에 섰는데 다시 짧게 빵. 내 시야에선 담에 가려 차가 완전히 보이지 않는다. 주변에 있는 누굴 부르는 건가 싶어 잠시 두리번거린다. 그 주변이 마침 그늘에 벤치들이 있는 자리라 어르신들과 아파트 주민들이 주르륵 앉아 쉬고 계시는 곳이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도 다들 두리번. 어르신들도 두리번. 뭔가 이유가 있겠지 싶어 관심 끄고 신호등을 바라본다. 모지리 보러 가야지.


그리고 쿵. 충돌하는 소리, 아니면 넘어지는 소리. 이어 브레이크 밟는 소리. 걸음을 옮겨 소리가 난 쪽을 봤더니 오토바이 한 대가 땅에 쓰러져 있었다. 아까 그 차는 우회전한 상태로 멈췄고, 조금 전 내가 서 있던 자리보다 조금 더 앞서 있었다. 소리가 한 번만 났던 걸로 봐서 둘이 부딪쳤다기보단 오토바이가 차를 피하다가 미끄러져 넘어진 듯하다. 다친 사람은 오토바이 운전자 한 명뿐인 거 같다. 불행 중 다행인 게 쓰러진 오토바이가 벤치 쪽을 덮치진 않았다. 많이 다치진 않았으면 좋겠구나. 몸이 재산인데.


길을 걸으며 생각한다. 내가 집에서 1분만, 아니 몇십 초만 늦게 나왔으면 저 상황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내가 똑같은 경로를 걸었다면, 차도, 오토바이도 나를 보고 멈췄거나 방향을 바꿨을 테니 아예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예 내가 그 사고에 포함되었을 수도 있다. 미끄러져 넘어진 오토바이가 후문을 나가려던 나를 덮쳤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애초에 난 왜 미적거렸지? 다른 때처럼 나왔다면 이 상황을 아예 몰랐을 거다. 2주간 모지리를 못 봤고, 지난 주엔 고관절이 불편해서 운동을 쉬었다. 고관절 쪽이 불편한지는 한 달 정도 되어 간다. 가까이 벌어진 현상으론 이런 것들 때문에 산에 갈지 말지 고민했었다. 그런데 따지고 들어가면, 오른쪽 고관절이 불편한 건 내 무게 중심이 오른쪽으로 쏠린 자세 탓이고, 십몇 년 동안 장사하면서 같은 자세로 서 있을 때가 많았던 탓이다. 모지리가 신경 쓰이는 건 작년 9월 이후에 봤던 고양이 중 유일하게 이 녀석만 자리를 지킨 탓이고, 더 멀리는 내가 고양이를 입양하면서 고양이에 대한 관점이 바뀐 탓이기도 하다. 내가 저 사고에 포함되었더라면, 이 모든 것들이 켜켜이 쌓여 기반을 다진 꼴이 되나? 세상에나, 줄줄이 낚여 올라오는 생각에 숨 막혀 죽겠다. 이래서 ‘운명’이란 단어가 신비하고 모호하고 매력적인 거구나. 이래서 ‘우연’이란 단어가 삶에 숨통을 틔워주는 거구나. 에라, 모르겠다. 걷자. 목표는 산 정상. 중간에 뭐가 있든 내 알 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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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손을 쫙 피고 들여다본다. 올해 들어서 오른쪽 손가락 관절 일부가 통증을 호소하곤 한다. 청소하거나 무언가 무거운 물건을 나를 때처럼 일정 시간 이상 힘이 가해지면 그렇다. 그럴 때마다 손가락을 쫙 펴보지만, 축 처진 어깨처럼 금방 오그라든다. 하아, 세월 진짜. 아직 다섯 살인 고양이가 높은 곳에 올라앉아 바닥에 있는 나를 내려다본다. 언젠가 고양이도 예전 같지 않을 텐데, 그때가 되면 나처럼 무심한 세월에 투덜댈까?


오른손을 쥐락펴락 해본다. 움직일 때마다 감각이 느껴진다. 내 모든 감각은 나를 정의한다. 정의한다고? 그보단 인식한다는 표현이 맞겠다. 나를 인식하고, 고양이를 인식하고, 그 너머 세상을 인식한다. 세월이 흘러서 죽음과 맞닥뜨리면, 무(無)가 된다면, 대상을 인식하던 나는 증발하듯 단절되는 걸까? 누구나 몸의 퇴행을 겪으며 육체의 소멸은 당연하게 여기지만, 정신의 소멸은 그만큼 확신하지 않는다. 물질의 영역을 넘어서 종교나 철학, 또는 미지의 영역이라 그러겠지. 지금 나를 인식하고 있는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는 완전히 지워질까?


오른손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뒤집어본다. 이 모든 걸 인식하는 나는 태어나기 전엔 무엇이었을까? 아니, 사실 그건 별로 궁금하지 않다. 죽음 이후가, 완전한 무(無)가 된다는 게 가장 궁금하다. 그러고 보니, 이 의문에도 내 이기심이 들어가 있는 모양이다. 이전에 무엇이었든, 이후에 무엇이든, 지금의 내가 완전히 지워지듯이 사라지는 게 살짝 억울한 거 보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이전의 내가 있었을까?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후의 내가 존재할까? 생각 속에서 방향을 상실하면 언제나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또 나뿐이다. 계속 나를 쳐다보는 고양이에게 묻는다. 고양이, 너는 이 막막함과 이 또렷함이 뒤섞인 이질감을 어떻게 생각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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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이를 입양하고 나서 가장 많이 집을 비웠던 시간이 53시간이었던 듯싶다. 2박3일 일정의 일본 여행이었지만 느낌상 1박2일 같았던 교토 구경. 내년 계획 중인 여행은 그보다 10시간 정도 더 길듯한데. 여러모로 고민이다. ***


아저씨가 사라진 지 삼 일째. 밤이 두 번 지나갈 동안 간식을 못 먹었다. 해가 세 번째 아침 인사를 건넸는데 아직도 변기 물이 안 내려가고 있다. 내내 켜져 있는 마루 전등불이 두 번이나 기세를 잃었는데도 사냥놀이 한 번 하지 못했다. 이, 이 형편없는 복지를 내 절대로 잊지 않으리라. 화장실을 하나 더 만들었을 때, 커다란 가방을 등에 둘러맸을 때, 두세 배나 길게 열심히 빠이빠이를 할 때, 난데없이 간식을 퍼줄 때, 알아챘어야 했다. 이 멍청한 고양이 같으니. 까까에 히죽대던 과거의 난 얼마나 바보 같았던가. 앞으론 절대 까까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고양이별에 연락해서 감시 모드를 암살 모드로 바꿀 수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돌아오기만 해 봐라. 자고 있을 때 명치를 꾹 밟고 지나갈 테다. 냥, 까까 먹고 싶다. 밥통이 무미건조하게 비명을 내지르며 밥알을 내뱉는다. 하루 세 번. 이 좁은 세상에 나를 생각하는 건 밥통뿐이구나. 미안한데, 밥통아, 밥 말고 까까를 뱉어주면 안 될까? 이런! 이런! 미안하다니! 고양이가 미안하다니!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감정을. 내가 미쳐가는 중인가? 아악, 집고양이가 어떻게 밥만 먹고 살 수가 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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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은 비교적 단조롭다. 공간은 변함없고, 가구는 굳건하다. 까만 고양이와 마른 집사가 간혹 투닥대지만, 그 역시 5년이나 지속되었던 일이라 소란스러운 고요에 가깝다. 계절의 변화도 이 안에선 다채롭지 않다. 드나드는 바람이 시원해진 이후론 더욱 그렇다. 남아 있는 여름의 흔적이라곤 내 옷차림과 여름용 홑이불과 그 이불을 덮고 잠들었다가 잠결에 저 멀리 내치는 내 행동 정도. 그걸 제외하면 가을의 영역이 폭넓게 여름의 뒤꽁무니를 뒤덮고 있다. 지루하다. 바깥보다 안을 좋아하는 나는 무덤덤함에 익숙하지만, 간혹 발작적으로 투덜댈 때가 있다. 아무 생각이 안 나!


컴퓨터 앞에 앉아 쓸데없이 머리만 굴리다가 고양이의 동태를 슬쩍 살핀다. 캣타워에서 방석에 머리를 기대고 자는 중이다. 이제 곧 내려와 까까 내놓으라고 보챌 시각이다. 점심 먹고 한 시간이 넘게 모니터와 눈싸움을 벌였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름이 몽니를 부린 것일까? 잠결에 이불을 걷어차는 내 발길질에 차이기라도 했을까? 이 집구석에서 유일하게 활기찼던 내 상상력을 함께 데리고 간 모양이다. 네가 그걸 어디에 써먹으려고! 에잉, 오늘은 뜨거운 김치찌개나 끓여서 가을이나 반겨야겠다. 어이 고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여름이 손잡고 창문 틈으로 끌고 나가는 애 있으면 좀 챙겨둬라. 걔 없으면, 나 너무 심심해서 안 되거든.


꼬리말) 정말, 정말 여름이 간 거 같다. 이 글을 쓴 뒤로 며칠 사이에 이불과 나는 새벽녘, 떨어질 수 없는 한 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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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부모님은 두 분 모두 1920년대생이다. 큰누나는 50년대, 누나는 60년대, 나는 70년대에 태어났다. 부모님과 세대 차이는 말할 것도 없고 자식끼리도 세대 차이가 있다. 큰누나는 어린 시절을 다른 곳에서 보냈지만, 누나와 나는 어머니의 극진한 보호 속에서 컸다. 과보호의 피해는 이후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돌아갔지만, 누나의 타격이 가장 컸다고 해야겠다. 나는 누나를 반면교사 삼았으나 누나는 그럴 대상조차 없어서 몸소 부딪히고 깨져야 했으니까. 큰누나는 일찍 결혼해서 출가한 탓에 그 혼돈을 직접 겪진 않았다. 그래도 웬만한 과정을 다 듣거나 지켜봤고, 일이 왜 이렇게 됐는지 충분히 판단할 수 있었다. 그러니 큰누나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큰누나는 어머니가 했던 것처럼 자식들에게 똑같이 집착했다. 특히 아들에게. 세부적인 사건·사고는 달랐지만, 어머니와 누나와 내가 휩쓸렸던 혼란에 큰누나 역시 휩쓸리고 말았다. 달랐던 점이라면, 내가 빠진 혼란은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마무리됐고, 큰누나의 혼란은 큰누나가 직접 선을 그으면서 정돈했다는 거. 큰누나가 한 성격 하거든. 다만 뒤에 남은 서운함은 부모 처지에서든, 자식 처지에서든 어쩔 수 없는 일.


우린 살면서 항상 어딘가로 향한다. 가다가 가다가 계속 갈 수도 있고, 흠칫 놀라 되돌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되돌아왔다고 해서 그 자리가 처음과 같은 자리일 리도 없다. 어떤 경험을 했다면 사람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향을 받고 변했을 테니까. 그런데 이렇게 변한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까? 희한하게도 우린 같은 방향으로 다시 전진하고 또 흠칫 놀라 돌아온다. 당사자가 이 모양인데 그걸 지켜본 타인이 다 알면서도 같은 방향으로 가는 건 사실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러니까 우린 살면서 항상 어딘가로 향한다. 삶의 굵직한 방향성을 따라 어떤 대로를 따라 걷다가 벽에 부딪혀 다른 길로 되돌아와서 멈춰 선다. 잠시 망설이다 다시 비슷한 방향으로 발길을 옮긴다. 하지만 이전에 갔던 길은 아니다. 우리 발자국은 언제나 한 방향만 향한다. 삶의 모든 길은 일방통행일지도 모르겠다.


꼬리말) 글의 제목이 AI가 내놓은 문장이다. 듣자마자 ‘함흥차사’가 떠올랐지만 바로 고개를 저었고, 다음엔 다소 추상적인 이미지의 ‘길’을 생각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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