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까무룩 가라앉는다. 조금 전 축구 경기를 볼 때만 해도 이러지 않았는데. 축구는 우리나라가 이겼다. 그것도 역전승. 응원을 너무 열심히 했나? 아닌데. 중간에 세탁이 다 돼서 빨래도 널었고, 배고파서 떡도 데워 먹었는데. 떡을 너무 많이 먹었나? 음, 그럴 수도. 그래도 이렇게 의욕이 사라져서 껍데기만 남은 거 같은 느낌은 좀 지나치잖아! 경기 보기 전에 청소를 너무 열심히 했나? 항상 하는 건데. 어제 잠을 푹 못 잤나? 항상 그렇듯이 고양이가 두어 번 깨운 거 말곤 똑같았는데. 어제 산꼭대기에 갔다가 전운이 감도는 고양이 마을을 봐서 그런가? 그래, 그럴 수도. 리듬이 깨져서 그런가? 다른 날 같으면 고양이랑 놀다가 점심 먹고 글을 썼을 텐데. 그 모든 걸 축구 경기 보는 걸로 퉁 쳤으니. 내 성격이라면 당연히 그럴 수도. 요즘 종종 이러는데 본격적인 갱년기인가? 이런, 그럴 수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그래도 머릿속으로 온갖 잡생각이 지나가는 걸 보니 뇌는 멀쩡한가 본데.


바닥을 내려다보며 멍하니 서 있는데 고양이가 터덜터덜 내 앞을 지나쳐 안방으로 들어간다. 무심코 따라 들어갔는데, 방석에 턱 하니 자리 잡더니 나를 쳐다본다. 이것은? 이럴 땐 잠이나 자자는 고양이식 처방. 에라, 모르겠다. 방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눈을 감는다. 처음 눈을 떴을 땐 고양이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두 번째 눈을 떴을 땐 배를 까고 자고 있었다. 아, 배 만져 보고 싶은데. 그럼 물겠지? 다시 까무룩.


정신을 차려보니 한 시간이 조금 넘게 지났다. 내 기척에 고양이도 일어나 하품하며 기지개를 켠다. 나도 뻣뻣한 목을 돌리며 하품. 사람 하나와 고양이 하나가 아니라 마치 고양이 둘인 찰나의 시간대가 지나갔다. 글을 쓴다. 글을 써 보지만 아직 고양이의 흔적이 남아 있다. 아웅, 귀찮아라.


(꼬리말) 월드컵 체코전이 있을 때 썼던 글이다. 글에 묻은 귀찮음이 그대로 글의 성격이 되었는지 한 달이 넘어서야 세상에 등장하고 말았다. 이름은 신중하게 잘 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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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 엄청난 무더위로 산에 오르는 걸 포기했었다. 그러다 9월 말, 아니면 10월 초쯤. 거의 4개월 만에 인왕산에 다시 갔다. 정상에 도착해 초코바 하나를 뜯어 먹는데 느닷없이 무언가 수풀 속에서 툭 튀어나와서 깜짝 놀랐다. 고양이 한 마리, 삼색이었다. 눈을 나름 동그랗게 뜨고 놀란 척을 하다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어렸을 때 골목에서 가끔 마주칠 법한 꼬맹이의 억울한 표정이 떠올라서다. ‘아 씨, 내가 안 그랬는데! 엄마는 맨날 나만 혼내!’ 그렇게 소리 지르면서 대문 밖으로 뛰어나온 개구쟁이 아이의 표정. 나도 한때는 저런 표정을 한 적이 있었을 텐데. 그렇게 삼색이는 내 마음을 뺏었다.


이 아이 이전엔 난 어떤 길고양이에게도 먹을 걸 주어본 적이 없다. 내가 책임질 수 없는 아이니까. 눈길을 주고 사진을 찍고 때론 웃고 때론 안타까워했지만 그뿐. 하지만 어느새 먹을 걸 한두 개씩 챙겨서 산으로 향했다. 전엔 근처 다른 산에 가기도 하고, 서울 둘레길을 찾아 걷기도 했다. 삼색이를 본 후론 인왕산에만 갔다. 많아야 일주일에 세 번, 그것도 갈 때마다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먹을 걸 챙겨서 갔다. 세상에 태어난 지 길어야 6~7개월밖에 안 됐을 거 같고, 곧 추운 겨울이 오면 산 정상에 오는 사람은 많이 줄어들 터였다. 그래서 딱 1년만, 세상에 태어났으니, 사계절은 온전히, 건강하게 경험해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그러다 젖소냥이에게도 정이 들었다. 당차고 똘망똘망한 삼색이와 달리 젖소냥이는 어수룩한 면이 있었다. 처음엔 그저 삼색이에 딸려오는 캐릭터 느낌이었는데, <모지리>란 글에서 썼던 상황을 거치면서 녀석에게도 정이 가기 시작했다. 삥 뜯어먹고 살아야 할 녀석이 눈에 잘 안 띄는 재주를 가졌으니 이렇게 모자랄 수가 있나 싶어서. 아우, 모지리, 진짜.


지금 정상엔 고양이들이 늘었다. 최근에 새로 등장한 녀석들은 삼색이와 모지리, 아니, 젖소냥이의 동생뻘 되는 아이들이 아닌가 싶다. 서로 적대하지 않는다. 다만 서열은 삼색이가 가장 높고, 그다음 모지리, 그리고 나머지들로 보인다. 최근 3주간 삼색이와 젖소냥이를 보지 못하다가 어제 모처럼 젖소냥이와 마주쳤다.


“야, 네 누나 어디 갔냐?”


대답할 리 없다. 대답하면 모지리가 아니지. 가져간 거 다 털어서 주고 내려오면서 생각한다. 딱 1년만, 온전히 4계절만 경험하라고 바라는 게 아니었어. 왜 더 길게 바라지 않았을까? 10년이라고 할 수도 있었고, 산신이 되라고 할 수도 있었는데.


집에 돌아와서 창밖을 구경 중인 고양이에게 슬며시 얘기한다. 이봐 고양이, 궁금해서 그러는데, 고양이별에 연락해서 삼색이 잘 있는지 알아볼 수 있을까? 내가 바람피우는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잘 있나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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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이가 저지른 각종 사고의 책임은 99% 이상의 확률로 집사 책임이다. 어디든 갈 수 있는 고양이 특성을 생각한다면, 치울 건 치우고 막을 건 막아야 한다. ***


냥. 오늘은 집구석 탐사 대망의 마지막 날. 아까 봤는데 신발장 위 틈새에서 어둠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음. 그러니까 요 상자를 밟고 점프하면. 조금 높기는 한데…. 도전은 아깽이가, 뒷일은 아저씨가! 가만, 아저씨는... 컴퓨터를 하고 있음. 우선 상자 위로. 하나 둘 점프! 팍팍(뒷발로 벽 긁는 소리). 오, 아슬아슬. 아저씨는 눈치 못 챘겠지? 예! 나는야 어둠의 암살냥 검은 고양이! 먼지! 먼지! 얍 받아랏, 내 앞발을! 먼지! 먼지! 냥. 먼지뿐이네. 시시해라. 이제 나가야겠당.


흠. 턱이 있네. 이러면 밖으로 뛰어내리기 힘든데 어쩌지? 어, 안 되겠는데. 무서운데. 이러다 걸리면 아저씨한테 혼나는데! 앗, 아저씨다, 쉿!


어디 간 거야?


큰일 날 뻔…. 벌써 큰일 난 건가? 저기 아저씨야... 으응~


뭐야, 여기서 소리가 났는데? 신발장에 들어갔어?


내가 거기 들어갔겠냐? 문도 못 여는데. 생각을 좀 깊이 하자, 이 아저씨야. 응냥~


없는데? 붙박이장에? 그건 말도 안 되는데?


아우, 답답스러워라! 여기다, 여기! 냐아웅! 어우, 깜짝이야! 그렇게 빛을 비추면 내 소중한 눈이 놀란다구. 아니, 아니, 그 우악스런 손으로 날 잡으려고? 아니야, 안돼! 혼내지 않겠다고 약속하기 전엔 절대 못 나간다!


이눔의 자슥이! 너 가만있어봐!


냥? 뭐 하게? 앗, 이 아저씨가? 막대기로 뒤에서 밀면 어떡해! 나보고 낑겨 죽으라는 거냐! 우와앗! 어, 나왔다, 나왔어! 아, 아, 아, 목덜미를 그렇게 잡으면 좀 그런데...


야. 너 거긴 왜 들어간 거야, 응?


왜긴? 틈이 있으니까 아깽이는 들어간 거고... 아, 아, 아, 이거 놓고 얘기합시다. 그니까 틈을 잘 막았어야지. 아저씨가 잘못해 놓고 왜 나한테 그러는데? 아, 아, 목덜미, 목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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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쳐다보는 중이다. 마루에 접한 베란다 창 아래쪽에 턱이 있는데 녀석은 그곳에 상체를 걸치고 밖을 내다본다. 날이 더워지면서 간혹 저런 자세를 취하는데, 마음에 든 모양이다. 솔직히 저 눈높이로 밖을 내다봤자 건너편 아파트 끄트머리만 보일 뿐이다. 부동산에 관심 있는 건 아닐 테고. 무얼 보는 걸까? 시선을 돌려 화장실 문을 잠깐 응시하다 다시 고양이에게 관심을 돌린다. 제법 진지하게 밖을 보고 있다. 뭐가 보이니? 그냥 귀찮아서 그러고 있는 거야? 그러다 다시 화장실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이상하네...


한 시간 전쯤. 건강 검진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이것저것 하다가 화장실에 가야겠단 생각을 했다. 그리고 쭉 시간이 흘렀다. 고양이를 뒤쫓아 베란다로 가다가 갑자기 떠오른 의문 하나. 내가 아까 화장실에 갔던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갔던 거 같기도, 안 갔던 거 같기도. 그러면 지금 오줌이 마렵나? 그런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화장실 문을 열고 안을 살폈다. 다를 바 없는 모습. 무언가 변한 게 있다면 아까 들어와서 만졌단 얘기니까 확인이 가능하겠지만, 난 습관적으로 물건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사람이다. 티가 나는 게 없다. 수면 마취의 영향인가?


잠시 회상에 빠졌다 고양이를 보니, 한쪽 앞다리만 창턱에 걸친 자세로 나를 보고 있다. 이야, 너, 제대로 건방지구나. 근데 그러고 있음, 너 팔 저리지 않니? 고양이는 저리거나 하지 않나? 실없는 의문이라 생각하며 웃다가, 그렇다면 조금 전까지 품었던 의문은 진지한 것인가 싶어 얼굴을 살짝 찌푸린다. 화장실에 갔던가? 이런 사소한 일에서조차 생각과 행동을 일치시키지 못하면, 난 무엇을 확신하며 살아야 하는 거지? 화장실 문을 힐끔거리는데 무언가 핥는 소리에 고양이를 본다. 창턱에 걸치고 있던 앞발을 열심히 그루밍 중이다. 어렸을 때 팔에 전기가 오르면 침 발라서 코에 묻히던 기억이 뜬금없이 떠올랐다. 저 녀석, 고양이가 아니라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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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검진을 받았다. 수면으로 내시경을 받을 때마다 신기하다. 옆으로 누워서 '눈 뜨고 계세요. 약 들어갔습니다.'란 얘기를 듣자마자 뭔가 묵직하면서도 살짝 흔들리는 느낌을 받고 의식이 사라진다. 그리고 눈을 뜨면 회복실. 대개는 입가에 침을 흘리고 있어서 목에 놓인 휴지로 침을 닦는다. 확연히 변한 건 사라진 시간과 흐르는 침뿐. 시간을 침으로 보상받은 느낌이라 굉장히 손해 본 느낌이랄까.


3년 전, 위와 대장 내시경을 동시에 한 적이 있었다. 대장 내시경 준비 때문에 밤에 잠을 설쳤다는 게 다른 때와 달랐고, 확실하진 않지만, 두 군데 내시경을 진행하느라 약의 투입량이 좀 더 많았을 거로 추측해 본다. 정신을 차렸다. 아니, 그때는 차렸다고 생각했다. 침대에서 일어나서 의자로 가다가 중간에 기억이 끊겼다. 항상 검사받던 곳이라 무의식중에도 이동한 모양이다.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의자에 앉아 있었다. 두리번. 응? 옆을 보니 약간 떨어져 남자분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제가 어떻게 여기 앉아 있는 건가요?’라는 질문을 하려고 손을 뻗다가 움찔했다. 보통 때 나라면 아무리 궁금한 게 있어도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그래서 깨달았다. 아, 지금 내가 수면마취가 제대로 깬 상태가 아니구나. 손을 거둬들이고 무의식적으로 입 주변을 닦고(왜?) 한참을 조용히 앉아 있었다.


검사는 무사히 마쳤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와서 문득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침대에서 일어나 의자로 가던 그 사이, 선생님이 나를 불러 세웠었다. 내시경 결과 설명을 듣고 가라고. 겉보기엔 내가 아주 멀쩡했던 듯하다. 의자에 앉아서 설명을 들었는데, 마치 흐릿한 망원경을 통해 1:1 배율로 외부를 보는 느낌이었다. “대장엔 문제없고, 예전 검사 결과를 보면 위에 작은 혹이 하나 있었네요?” 그 질문엔 제대로 대답했다. 그다음 어떤 생각이 이어졌다. ‘그건 다 아는 사실이고 그래서 그 혹이 어떻게 됐는데?’ 그런데... 이게 단순히 생각이었는지, 실제 말로 내뱉었는지 분간이 안 되는 거였다. 아무래도 말을 한 거 같은데…. 한참을 나무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만화였다면 하얗게 재로 변해 파사삭 부서져 내렸을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별문제 없다는 얘긴 알아들었다. 세상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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