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보 집사 시절, 모든 게 서툴다 보니 아는 것을 실전에 적용하지 못했다. 사람마다 맞지 않는 음식이 있듯이 고양이도 개체마다 맞지 않는 사료가 있다. 내가 녀석에게 준 사료가 그랬다. 머리론 알고 있었는데 막상 현실에선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래서 몇 주간 고양이는 설사를 동반한 응가를 하루에 네댓 번씩 쌌다. 하지만 천하무적 아깽이 시절이다. 싼 만큼 먹고 기운차게 뛰어다녔다. 이 시기 내 머릿속은 온통 똥으로 가득 차 있었다. ***


아이 씨, 아 씨. 안 잡힐 거다. 오늘은 절대 안 잡힌다. 하지만. 역시 잡혔다. 뛰는 게 나보다 빠르진 않은데 몸이 커서 그런가? 어딜 가도 잡히는 결말. 냥! 내 똥꼬! 지구별 사람들은 왜 내 똥꼬에 다 집착하는 건데! 이런 건 고양이별에서 안 가르쳐줬잖아! 하늘색 옷 입은 사람들은 똥꼬에 뭘 자꾸 찔렀다 빼더만, 이 아저씨는 응가만 하고 나오면 축축한 걸로 자꾸 문질러대! 이봐, 아저씨, 그렇게 안 해도 내가 마루에 문지르면 된다고! 찝찝할 때 문지르면 얼마나 개운한데... 아우, 그만 닦으래두! 내가 싹 다 기억해 놓을 거야! 나중에 후회하지 마.


아니 근데, 응가는 왜 이렇게 자주 마려운 거야? 이거 정상인가? 오늘만 벌써 네 번째 싸는 건데. 내가 너무 많이 먹나? 배고픈데 먹는 건 당연하잖아. 가만, 이거 먹는 게 잘못된 건가? 냥, 거기 아저씨, 제대로 된 음식 주는 거 맞아? 나 또 응가 마렵거든! 생각 좀 해봐! 생각을 좀 깊게 해 보라구! 그래도 맛은 있더라. 생각을 다른 방향으로 깊게 해 보는 거 어때? 나 화장실 갔다 올 테니까 좀 생각해 봐. 응? 하루에 다섯 번 응가하면 반칙이라구? 뭐래? 아, 그럼 아저씨가 나 대신 싸던가! 아 씨, 기다려봐, 일단 급한 불부터 끄고.


냥, 박진감 넘치는 하루였다. 여섯 번 뛰었는데 여섯 번 다 잡혔어. 독한 아저씨 같으니. 내 똥꼬를 그렇게 문질러대고 잠이 오냐? 내가 아직 좀만해서 그렇지, 조금만 더 커봐! 이 주먹 이따만하게 키워서 한 대 쥐어박을 거야. 딱 기다리고 있어! 저, 저, 퍼질러 자는 거 봐라! 에잇, 그렇게 좋으면 내 똥꼬 냄새나 맡아라! 어라, 얼굴을 돌리네? 냄새가 이상한가? 어디? 킁킁. 카, 취한다, 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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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06-08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양이 첫 설사 보고 당황했던 일이 떠오르네요. ㅎㅎ

대굴대굴 2026-06-08 22:19   좋아요 0 | URL
처음 1년은 정말이지 온갖 감정이 날뛰었어요^^;
 
도시의 승리 - 도시는 어떻게 인간을 더 풍요롭고 더 행복하게 만들었나?, 개정판
에드워드 글레이저 지음, 이진원 옮김 / 해냄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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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때도 서울은 서울이었다. 물론 강남은 지금과 달랐지만. 십 대 초반쯤 되었으려나? 고속버스를 타고 5시간쯤 걸려서 온 가족이 큰아버지 댁에 간 적이 있었다. 재래식 화장실에 질린 누나는 그날로 서울로 복귀했고, 난 어떻게든 버텼다. 가로등 하나도 없던 동네. 자려고 불을 끄면 도시의 어둠과 차원이 다른 어둠이 주변을 감쌌다. 손을 들어 눈앞에서 흔들어봤지만 그게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 그때 기억 때문일까? 난 도시를, 서울을 떠나 살아볼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다.


문명과 편리함으로 대변되던 도시는 지금도 여전히 사람을 끌어모은다. 이 책에 따르면, 그 같은 인접성은 도시의 대표적 특성 중 하나다.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그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지식의 전파를 쉽게 한다. 동시에 여러 아이디어가 생겨나고 퍼지면서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며 또 다른 새로운 무언가를 창출해 내기도 한다. 도시의 특성 중 하나인 혁신성이다. 이 둘은 도시를 양적, 질적으로 키우는 원동력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도시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갈 수는 없다. 인접성은 질병과 범죄의 전파 역시 쉽게 하며, 혁신성은 때론 스스로 굴레가 되어 도시를 억압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절히 개입하는 공공 부문이 필요하다. 깨끗한 물 공급과 안전한 치안, 접근성을 높이는 도로 등을 공급하는 것은 개인이 아닌 공공이 맡아야 할 역할이다. 또한 경쟁을 유도하고 교육에 투자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수긍할 만한 내용이다. 그런데 이 책은 여기에 한 가지를 추가한다. 바로 고밀도 개발, 즉 도심에 고층 건물을 지어 사람과 건물의 밀도를 높여야 한단다. 다시 말해서, 이 얘기는 도심 내 개발에 제한을 두어선 안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이렇다. 건축에 제한을 두면 민간 회사는 수지가 맞지 않아 사업을 벌이지 않을 테고, 자연스레 주거 공급이 줄어들면 집값 상승이 유발된다. 그럼으로써 경제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의 도심 접근을 막게 된다. 또한 요즘처럼 자동차가 대중화된 시대에선 도시 주변부가 확장되는 스프롤 현상이 일어나게 마련인데, 이럴수록 교외의 녹지를 침범하고 자가운전을 많이 하게 되어 더 탄소 집약적인 생활양식을 갖게 된다. 이런 양상을 줄이려면 이미 개발된 도심 내에서 제한 없이 개발해야 한다는 말이다. 전문가가 하는 말이다 보니 일리가 있다. 게다가 실제 통계까지 제시하니 신빙성도 있다.


설명만 하면 딱딱하니 책에 있는 몇 가지 도시 사례를 살펴보겠다. 가장 먼저 디트로이트. 한때 자동차 제국을 상징하던 도시. 포드의 제조 혁신으로 자동차를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됐고, 도시는 초대형 자동차 제국이 되었다. 하지만 동일 업종의 대형 회사 서너 군데가 도시를 독점함으로써 업종 간 아이디어 교류가 단절됐고, 포드의 혁신은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높은 교육을 요구하지 않음으로써 도시의 교육 수준을 떨어뜨렸다. 결국 일본에 밀려 자동차 제국은 무너졌고, 도시도 주저앉았다. 물론 이후 회복을 위한 꾸준한 시도가 이어졌다. 하지만 사람이 아닌 장소를 중심에 둔 방향성 탓에 디트로이트는 실패한 도시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다. 다음으론 텍사스에 있는 휴스턴. 이 도시는 개발 지향적이며 기업 친화적이다.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 같았으면 건물이 들어설 수 없는 장소였겠지만 휴스턴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주거 공급이 충분히 이루어졌고, 그것은 적정한 주거비와 물가로 보상받았다. 그 덕에 중산층과 교육을 많이 받은 우수 인력들을 꾸준히 끌어들이면서 도시의 성장을 일구어내는 중이다. 다만 이곳은 대중교통보단 자가운전 중심의 도시라 냉방이나 자동차 연료에서 배출되는 탄소의 양이 많다는 단점은 있다.


지금까지 써놓은 글에서 살짝 드러나기도 했지만, 저자 에드워드 글레이저는 시장 경제와 자유 경쟁을 옹호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개발 제한을 두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그렇지만 주거 공급 측면에서 공공의 역할을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는 공공이 주도하는 주택 공급은 시장 가격을 왜곡함으로써 민간 기업이 사업에 뛰어드는 걸 회피하게 하고, 장기적으로 공급 부족을 초래한다고 본다. 또한 도시의 핵심 지역에 공급되는 공공 주택은 그곳에 들어와 더 많은 일자리와 혁신을 일으킬 수 있었던 기업이나 상업 시설이 들어설 기회를 영원히 박탈하게 된다. 기회비용의 문제다. 이건 오세훈 서울 시장이 서울에 적용하는 주거, 건설 정책과 맞닿아 보인다.


이왕 말 나온 김에 서울을 한 번 들여다보자. 고밀도 개발, 대중교통, 교육 수준. 도시를 살릴 수 있는, 저자가 제시한 세 가지 조건을 들여다보면, 서울은 완벽한 도시다. 높은 아파트와 사무용 빌딩들, 카드 하나만 들고서 어디든 갈 수 있는 교통 체계,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교육을 향한 열정. 게다가 완벽한 소비 도시이며,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사람들이 주거를 선택하는 중요한 요소를 모두 갖춘 도시이기도 하다. 하지만 밀도가 높아도 너무 높은 걸까? 취향이 너무 확고한 걸까? 밀려드는 사람에, 아파트를 향한 애정 공세에 주거 비용은 떨어질 줄을 모른다. 지나친 교육열은 지식과 배움을 뛰어넘어 무한경쟁과 차별을 고착시키는 중이다. 완벽한 하드웨어에 과열되는 소프트웨어인가? 이게 말이 되나? 서울은 말도 못 하게 놀라운 도시구나.


<도시의 승리>는 2011년에 발행된 책이다. 무려 15년 전이다. 책을 읽으면서 ‘지금은 어떻게 됐을까?’란 의문에 이것저것 검색해 보느라 읽는 시간이 배로 걸렸다. 또 하나, 읽는 내내 찜찜한 기분 때문에 자꾸 다른 생각을 하느라 시간이 더 걸리기도 했다. 저자도 인정했지만, 도시가 발전한다고 해서 세상을, 심지어 도시 내부조차 평준화시키지 못한다. 도시는 사람을 불러 모을 때 빈부를 가리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상호작용을 하며 기회를 제공하고 제공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래서 역설적으로 도시의 빈곤은 계속해서 커진다. 저자는 성공한 사례를 들며, 도시가 아닌 시골 지역의 가난과 비교하며 더 나은 방향을 바라보지만, 더 밑으로 굴러떨어지는 더욱 많은 암담한 사례를 우리는 애써 외면해야 하는 걸까? 공공 부문은 시장 경제와 자유 경쟁에 어느 정도까지 개입해도 되는 걸까? 책을 다 읽고서도 이 찜찜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음 책은 리처드 플로리다가 지은 <도시는 왜 불평등한가>이다. 에드워드 글레이저처럼 도시 찬양가였다 태도를 바꾼 사람이라고 한다. 찜찜함을 좀 걷어낼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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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이었다. 다행히 챙겨주는 사람이 많아서 전날부터 바빴다. 일단 점심 약속부터 시작. 지하철이 없는 곳이라 버스를 한 번 갈아타고 가야만 했다. 거리는 멀지 않아서 크게 걱정하진 않았는데, 두 번째 버스에 올라탄 순간 훅 밀고 들어오는 냄새. 대개 오래된 시외버스에서 많이 나는 냄새다. 기름 냄새 같기도 하고. 문제는 이 냄새를 맡으면 100% 멀미한다는 점. 금방 내릴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 첫 약속을 수행한 후, 큰누나 집으로 출동. 미역국을 끓여놨으니 가져가야 한다. 역시 짧게 버스 탑승. 가벼운 잽 두 방쯤은 버틸 수 있다. 과일 먹고 잠깐 수다 떨다 택시 타고 집으로. 승용차라고 다를 거 없다. 내 멀미는 앞을 보고 타는 모든 탈 것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묵직한 스트레이트 한 방. 어질. 세 번째 약속은 늦은 저녁이라 한참 쉬었다 지하철 탑승. 지하철은 아무렇지 않다. 옆으로 가니까. 나, 전생에 게였을까? 그 후로 친구 차를 타고 두 번 이동. 원투. 스트레이트 펀치가 이어지지 않아서 KO는 면했다.


다음 날. 또 점심 약속. 지하철로 이동이라 괜찮다. 밥 먹고 커피 마시면서 느긋하게 얘기를 나눈다. 이런저런 대화 중에 누군가에 대한 불평이 튀어나온다. 왜 자기가 어질러 놓은 걸 치우질 않냐고요! 누구보고 치우라고?! 얘길 했더니 자기는 가르치러 왔지, 치우러 온 게 아니라나? 자유엔 책임이 뒤따르고 권리엔 의무가 함께 하지만, 어느샌가 그건 교과서에나 나올 얘기에 불과해졌다. 현실은, 돈을 많이 준다면, 책임을 생각해 보고 의무도 고려해 보겠다 정도. 장사할 때가 생각났다. 최저임금과 주휴수당, 4대 보험. 간신히 지킬 것만 지켜서 월급을 지급했었다. ‘저 내일부터 못 나와요.’ 이런 얘기를 몇 번이나 들었더라. 받아 간 그 월급이 내 월수입보다 더 많았었는데. 펀치가 날아오진 않았지만, 무언가의 현란한 움직임에 내 스텝이 꼬였다. 비틀.


선거가 어떻게 되어가나 궁금해서 뉴스를 보다가 선관위가 큰 사고를 친 걸 알았다. 일 참 빌어먹게도 잘하는구나. TV 화면에서 소리 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져간다. 소동들. 세상을 휩쓰는 각종 분노와 혐오들. 폭주 기관차가 되지 않으려면, 누워서 침 뱉지 않으려면 자제와 성찰이 필요하겠지만 우린 그렇게 하고 있을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생각도 멈췄다. 그런데 뜬금없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나이트>가 떠올랐다. 배트맨과 조커. 배트맨은, 사람은 조그만 희망을 품을 여지만 있다면, 앞길을 비춰줄 한 줄기 빛만 있다면 세상을 옳은 방향으로 끌어갈 수 있는 존재라 믿는다. 반면, 조커는, 사람은 기회만 되면 상대를 배신하고 죽이기도 하는 둥 얼마든지 타락할 수 있는 존재라 믿는다. 하나는 질서고, 다른 하나는 혼돈이다. 둘은 끝까지 싸울 거고, 같이 있음으로 해서 완벽해진다.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은…. 고개를 숙인 채 방심하다가 날아 들어오는 어퍼컷에 걸렸다. 휘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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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에 눈을 뜬다. 출근하는 날이다. 눈을 뜨고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고양이 빗질. 빗을 들면 고양이 녀석은 저만치 있다가도 쪼르르 달려온다. 아직도 알 수 없는 게, 이 녀석이 빗질을 좋아하는 건지, 빗질 후 주어질 간식을 좋아하는 건지 모호하다. 빗질 후 간식을 주고 상황에 따라 궁디팡팡을 한 후 본격적인 출근 준비다. 세수하고 아침 먹고 커피 마시면서 간단한 청소 하고. 드디어 출근. 녀석은 내가 나간다는 걸 알기에 캣타워에 콕 박혀있다. 졸린 건지, 싫은 건지. 코앞까지 가서 열심히 손을 흔든다. 안녕, 아저씨 갔다 올게. 어렸을 땐 가지 말라고 문 앞까지 쫓아 나와서 배를 까뒤집고 난리였는데. 지금은... 주접 그만 떨고 빨리 가라... 딱 그 느낌. 다 컸구나. 나가서 돈이나 좀 벌어와라.


이 녀석이 없는 세상, 이제 상상이 안 간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언제나 내 곁에 계실 거란 생각에 그 소중함의 크기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었다. 떠남을 예상했지만 애써 외면했다고 봐야겠지. 그러다 누군가의 입을 통해 선언처럼 맞닥뜨렸을 때. 버스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더라? 생각을, 했던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세상을 꽉 채우는 내 존재와 텅 비어버린 부재뿐.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온다. 중문 너머에서 나를 보고 우는 녀석. 우와, 캔따개다. 까까.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번역을 애써 무시하며 반갑게 인사한다. 잘 놀고 있었어? 이제 5살. 아무리 시간이 빠른들 서로가 없는 세상을 생각하는 건 너무 이른 감이 있다. 내가 걱정을 사서 하는 편이긴 해. 그릇을 빙빙 돌려주며 간식을 맛나게 먹는 녀석을 보면서 누군가를 떠올린다.


‘내가 상상이나 했겠니? 너를 보면서 누군가의 즐거움과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공감하게 될 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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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여름으로 돌진 중이라 아침 햇살이 예사롭지 않다. 그런데도 고양이 녀석은 아침마다 햇볕에 몸을 내맡긴다. 간식 내놓으라고 졸졸 따라다니던 녀석은 사라지고 내가 뭘 하든 열심히 몸단장 중이다. 등도 핥고, 배도 핥고, 꼬리도 핥고. 발 사탕 먹으면서 얄미움도 한 사발 투척하고. 아우, 저거, 저거. 한참을 그러더니 햇볕이 뜨거웠는지 슬금슬금 자리를 옮긴다. 상체는 햇볕에, 하체는 그늘에. (얘네들 상·하체 구분은 어떻게 되지?) 덥기는 한데 볕을 포기하긴 싫어서 내린 애매한 결단.


고양이만 그럴까? 사람도 마찬가지다. 원해서든, 원치 않든 어떤 상황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위치를 잡을 때가 있다. 당장은 괜찮으니, 위로가 될 수도 있겠지만 외줄을 타고 삶을 가로지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뭐, 그런 게 인생이긴 하지. 열정과 냉정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는 없는 것. 우린 외면하거나 안도하지만, 한 발이라도 담그고 있다면 삶은 그 발을 절대 무시하지 않는다. 너무 거대해서 인식조차 못 하지만 삶은 잔인할 정도로 치밀하고 세심한 것일지도 모른다.


고양이는 결국 해가 들지 않는 반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앞발 하나에 턱을 괴고 온몸을 바닥에 붙인 채 누워있다. 햇볕에 완전히 녹아내려서 흐물흐물해지기 직전에 빠져나온 모양이다. 다시 여름이 오고 있다. 여전히 삶의 한가운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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