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나먼 바닷가 어스시 전집 3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지연, 최준영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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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시여, 하지 마십시오. 그 일이 정의롭거나 찬양받을 만하거나 고귀한 일이기 때문이라면, 하지 마십시오.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라면, 하지 마십시오. 오직 당신이 해야 하는 일만을 하고, 다른 방법으로는 할 수 없는 일만을 하십시오.

 

(책 본문 중에서)

 

참 어려운 문제다. '조화와 균형'을 대전제로 놓았을 때 그것을 지키기 위해선 '오직 해야 할 일만을 하고 다른 방법으론 할 수 없는 일만을 하라'라니.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오직 해야 할 일만을 하는 존재는 바로 자연이다. 초원의 사자가 치타의 새끼를 물어 죽이고, 맹수들이 힘없고 약한 대상을 사냥감으로 정해서 덤벼드는 행위를 사람들은 약육강식이라 표현한다. 사막의 뜨거운 햇빛은 그 열기 아래서 생명체가 목말라 죽어가든 말든 상관없이 내리 쬐고, 겨울의 냉기는 동물들이 먹을 것이 없어 눈 속을 파 뒤집는다 해도 끄덕 없이 그 서늘함을 과시한다. 비정하고 모질다 손가락질해도 소용없다. 그것은 자연이 해야 할 일이며 조화와 균형을 맞추는 일이다. 옳고 그름은 우리 사람들의 관점이지 자연의 관점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와서 사람들이 자연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아니, 돌아갈 수 있을까? 아마 돌아갈 수 없겠지. 우리들에겐 지식이 있고, 문명이 있으니까. 그럼 지식과 문명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건 무얼까? 존중? 나와 상대방의 선택을 존중하고, 현재를 누리는 삶뿐만 아니라 지나갔거나 다가올 삶을 존중하고, 심지어 죽음까지 존중할 수 있다면? 그 때 사람들은 자연이 행하는 조화와 균형을 조금이라도 흉내 낼 수 있을까?

소설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야기에 이어 여전히 성장 소설의 형태를 갖추었으며, 그 안에서 삶과 죽음을 다룬다. 죽음이 간직한 두려움에 압도된 삶. 마법이 사라지고, 기술을 잊어버리고, 용마저도 창조의 언어를 읊지 못한다. 죽음이 부정됨으로써 삶이 위협받고 모든 존재가 흔들리게 된 것이다. 대현자 게드는 죽음이 부정된 시작점을 찾아 죽음을 향한 긴 여정을 떠난다. 그 과정에서 게드가 함께 길을 떠난 아렌에게 한 말, '오직 해야 할 일만을 하고 다른 방법으로 할 수 없는 일만을 하라'. 나는 현자도, 왕도 아니라서 그 말의 깊은 속뜻을 모르겠구나. 더구나 숱한 제약을 드리웠음에도 도전과 행함에 가치를 두는 문명의 아이이기까지 하니 내가 무슨 수로 '행하지 않음'의 진정한 의미를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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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시의 마법사 어스시 전집 1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지연, 최준영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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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침묵 속에만
빛은 어둠 속에만
삶은 죽어감 속에만 있네.
텅 빈 하늘을 나는 매의 찬란함이여.

(본문 중에서)

 

가끔 막 돼먹은 어떤 사람에 의해 한쪽 면이 말끔하게 갈려나간 동전을 보곤 한다. 10이란 수자는 멀쩡히 있는데 반대편에 있어야 할 다보탑과 '십 원'이란 글자는 사라지고 없다. 무슨 생각으로 동전의 존재 가치를 깡그리 무시해버릴 이런 수고를 한 것일까? 무슨 의도였든 덕택에 한쪽 면이 말끔해진 동전은 동전으로서 온전한 존재 가치를 부여받긴 틀려버렸다.

삶과 죽음. 그 둘도 동전의 양면처럼 둘 모두 존재해야만 온전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것들이다. 살아있는 자들은 무엇인지도 모를 죽음을 두려워하고, 그 너머를 알 수 없는 죽음을 회피하려 든다. 죽음은 삶을 단절시키고 삶을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워지지 않는 영원한 삶이란 걸 지독히 변덕스런 사람들이 감당이나 할 수 있을까? 지금 이 질문에 '감당 못하지'라고 확답을 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그 답을 모른다. 죽음이 무언지도 모르고, 죽게 되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며, 혹시나 죽음이 사라진 삶이 있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그 삶을 일구어 나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음이 사라진 삶, 끝이 없는 시작이란 정말 끔찍할 거라는 데 주저 없이 두 손 두 발 다 들 수는 있다. 다시 말해 '끝'이란 단어가 '시작'이란 단어에 의미를 부여하듯이 삶의 앞길 그 어딘가에서 기다릴 죽음이 비로소 삶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삶의 품 안에서 죽음을 갈구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자연스러움을 넘어서는 행위다. 죽어가는 나무에서 남모르게 새싹이 돋아나는 것처럼 모든 생명은 살아가기 위해 애를 쓰는 게 자연스럽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망각할지언정 일부러 죽음을 향해 발을 내딛어선 안 된다. 죽음이 내포한 두려움, 무한한 어둠.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되 구속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만 삶은 그 화려함과 진실함을 이어갈 것이고 자연스레 죽음을 향해 조심스런 발걸음을 떼어 놓을 것이다.

<어스시의 마법사>는 언뜻 보면 상반된 두 개이지만 자세히 살피면 뗄 수 없는 두 개를 놓고 이야기를 꾸려 나간다. 삶과 죽음, 빛과 어둠, 땅과 바다, 드러남과 숨겨짐, 포용과 회피. 어느 한 쪽을 무시한다면 한 쪽 면이 말끔히 갈려나간 동전처럼 되어 버리는 것들. 신기한 마법 대결도 없고 박진감 넘치는 육탄전도 없지만 소설은 그 어떤 판타지 이상 가는 재미와 생각을 선사한다. 화려한 액션과 거대한 스케일을 원한다면 이 소설은 그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죽음은 제쳐 두고라도 삶을 얘기할 때 화려함과 거대함 속에서만 그 가치를 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손바닥 위에 올려진 동전 한 닢만으로도 얼마든지 사람들의 진실하고 소중한 얘기를 해 낼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치를 이해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세상은 바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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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 그림으로 읽기 아트가이드 (Art Guide) 6
권오숙 지음 / 예경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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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셰익스피어 입문서'로서의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한다. 이 책은 크게 셰익스피어 극의 소개와, 그 극들을 소재로 그려진 그림들에 대한 소개로 이루어져 있다. 총 37편의 희곡 내용을 책 한 권 안에 충실히 요약 및 정리했으며, 극의 이해를 돕는 감상 포인트를 함께 실었다. 또한 극중 대사 속에서 유독 아름답거나 인생에 대한 진리를 담은 명언들도 선별하였다...

 

책에 대한 소개는 지은이가 직접 써놓은 저 글만으로도 충분하다.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을 한 권 한 권 구해서 읽기가 까마득하다면 이 책 한 권으로 그 까마득한 심정을 달래는 게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이 책에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소재로 해서 다양한 화가들이 그려놓은 그림들이 함께 수록되었기 때문에 색다른 경험까지 할 수도 있다. 셰익스피어의 상상력 뿐 아니라 그림을 그린 화가들의 상상력까지 함께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친절하게도 지은이는 그림에 대한 간략한 설명까지 곁들여 놓았으니 벙어리 그림과 장님 독자의 갑갑한 만남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지은이와 다른 의견을 한 가지 제시한다면 이 책은 입문서로 접할 때보다 일반 독자로서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접하는 쪽이 더 유용해 보인다.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을 읽고 이 책을 본다면 그림 속 인물들의 표정, 자세, 행동이 훨씬 더 가깝게 다가올 테니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단기 속성이 불러오는 필연적 단점은 깊이가 얕고 생각의 고리가 끊어진다는 점이다. 그러니 셰익스피어란 인물에 대해, 셰익스피어가 엮어낸 작품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고 싶다면 먼저 그의 희곡들을 읽는 게 제대로 된 순서이지 싶다.

그러나 '읽을 것도 많고 볼 것도 넘쳐나고 들을 것도 세고 센 이 세상, 어찌 한 곳에 머리 박고 집중할쏘냐!'라고 생각한다면 지은이의 말대로 이 책을 입문서로 활용해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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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에서 돈 키호테까지 - 서양고중세사 깊이읽기
윌리엄 레너드 랭어 엮음, 박상익 옮김 / 푸른역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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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누구도 세르반테스를 능가하는 작가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시대를 단 한 발자국도 앞서 가지 않았다... (책 본문 중에서)

 

역사서다. 역사 관련 서적이 지닌 단점은 다 지니고 있다. 모르는 인물이나 사건이 나오면 주를 읽기 위해 앞뒤를 오가야 하고, 심지어 한 문장을 읽기 위해 반 페이지 분량의 주를 읽어야만 할 때도 있다. 아주 가끔은 번호를 잘못 찾아가 엉뚱한 주를 읽고 헤매기도 한다(엉뚱한 주를 읽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만도 다행이지 싶다). 게다가 이 책은 한 시대에 관한 것이 아니라 대략 기원전 천 수백 년부터 기원후 1600년경까지, 그러니까 거의 삼천년에 걸친 역사를 다룬다. 아무리 서양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정도 범위의 역사서를 읽으려면 역자가 달아놓은 주를 소홀히 할 수는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책이 여러 저자의 글들을 시대별로 모아놓은 터라 부분부분 끊어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한 사건 또는 한 인물에 초점을 맞춘 채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그 시대를 규정짓기 때문에 글을 읽다가 '이 내용이 도대체 어쩌다가 튀어나온 거야?'라는 식의 방황에 빠져들 가능성이 조금은 줄어든다는 장점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분명 역사서는 역사서다. 다른 거 다 제쳐두고 표지에 빨갛게 써 있는 글자를 보자. '서양 고중세사 깊.이. 읽기'... '쉽게' 읽기가 아닌 '깊이' 읽기다. 내 평생 소설을 제외하고 만만한 역사서는 본 적이 없다.

써놓고 보니 굉장히 고리타분한 책이라고 강조한 듯한 느낌이다... 뭐, 역사서니까. 그래도 세계사 교과서보단 훨씬 낫다. 외울 필요도 없고 앞뒤 분명하고 진도에 쫓길 필요도 없으니까. 책장에 꽂아놨다가 생각날 때마다 한 편씩 읽어보는 것도 괜찮지 싶다. 누가 알겠는가? 그러다가 남의 일기장을 숨죽여 들여다보듯 시대가 낳은 자식들의 이야기를 훔쳐보는 재미에 빠져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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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도시의 쓰레기 탐색자
제프 페럴 지음, 김영배 옮김 / 시대의창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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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만으로 무언가 변하진 않는다. 그랬다면 세상은 온통 연예인과 부자들로 득시글거릴지도 모른다. 깨닫고 행동이 뒤따르고 그래야만 비로소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는 법이다. 하지만 행동하는 건 정말 어렵다. 그 행동으로 인해 놓치고 버려야 할 것들은 확실한 반면 얻게 될 것들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책의 주제와 관련 없는 얘긴 그만 주절대고 책과 관련된 얘기를 하자면, 이 책은 쓰레기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며 그와 관련된 삶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등을 밝힌다. 욕망에 휩쓸리지 않고 필요한 것만 취하며, 재활용과 분배를 통해 극단적 소비문화의 대안으로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얘기.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삶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꿀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최신 스마트폰을 손에 쥐어야 만족하고,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은 것을 알고 더 많은 일을 해서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 최선의 삶이라면 이 책의 이야기는 저 밑바닥 삶이나 다름없으니까.

결국 행동, 즉 실천이 문제다. 삶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꿀 수 있는가? 사회가 강요하다시피 하는 표준이란 굴레에서 한 발 물러날 수 있는가? 글로 써 놓으면 간단한데 이게 실제 행하기엔 참 어렵다. 그렇다면 행동에 앞서 관심이라도 가져보면 어떨까? 생각만으론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게 이 글의 첫 일갈이었지만 그래도 아예 모르는 것보단 낫지 않겠나 싶은데.

꼬리말)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5년 가까이 하루 평균 4~50분씩 쓰레기통을 뒤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쓰레기'란 단어에 눈길이 갔고 책을 읽으면서도 많은 부분 공감을 했다. 하지만 나처럼 매장 쓰레기통을 뒤져본 경험도, 멀쩡한 음료수들이 버려지는 양에 놀라서 돈의 가치가 사람마다 얼마나 다른지 생각해본 적도 없다면 이 책은 와 닿지 않을 거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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