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의지는 없다 -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자유 의지의 허구성
샘 해리스 지음, 배현 옮김 / 시공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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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54년 워싱턴, 범죄가 일어나기 전 범죄를 예측해 범죄자를 단죄하는 최첨단 치안 시스템 프리크라임. 프리크라임 시스템은 범죄가 일어날 시간과 장소, 범행을 저지를 사람까지 미리 예측해내고, 이를 바탕으로 프리크라임 특수경찰이 미래의 범죄자들을 체포한다. 영화<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시작이다.  2002년에 톰크루즈 주연으로 개봉 되었던 이 영화가 샘 해리스의 <자유 의지는 없다>를 읽으면서 참 많이도 떠올랐다.  영화외에 책 제목을 보자마자 생각났던 것은 '신은 왜 인간을 선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였다.  당연하게도 나는 '자유의지'를 '종교'를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존재로' 그리고 그러기 위해 '자유의지'가 있다고 아주 어렸을때 부터 당연시 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내가 '자유 의지는 없다'고 이야기를 하는 이 황당한 책을 읽고 있었다.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자유 의지의 허구성'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은 굉장히 얇다.  한나절이면 충분히 읽을수 있을 정도로 얇은 이책이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어쩜 이렇게 쉽게 다가올것 같은 책이 어렵게 다가올 수 있는지 모르겠다.  얇다고 느낀 이책을 다 읽었다고 생각한 순간, 내가 뭘 읽었는지를 모르겠다.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도, 어렵다.  리처드 도킨스, 크리스토퍼 히친스, 대니얼 데닛과 함께 종교적 도그마와 지적설계론을 비판하고 있는 샘 해리스는 미국의 대표적인 논객이자, 신경과학자란다.  <종교의 종말>, <기독교 국가에 보내는 편지>와 같은 그의 저서들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종교의 독단, 특히 기독교의 독단을 강도높게 비판하는 이다.  그러기에 샘 해리스는 이 책을 통해서 인간의 마음에 관한 진실을 밝히면서, 이것이 도덕을 약화시키거나 사회적. 정치적 자유의 중요성을 감소시키지는 않는다고 주장을 하고있다.

 

 책에 서두에서 밝힌것처럼 자유 의지라는 문제는 우리가 중요시하는 거의 모든 것들을 건드린다. 도덕, 법률, 정치, 종교, 공공정책, 사적인 관계, 죄책감과 개인의 성취 등에서 말이다. 그런데, 자유 의지가 없다고 해보자. 그런 가정만으로도 우리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여기 두 가지 관념이 있다.  첫째, 우리 모두는 과거에 자신이 했던 것과 달리 행동할 수도 있었다.  둘째, 지금 우리가 하는 사고와 행동의 의식적 원천은 바로 우리 자산이다.  널리 알려진 자유의지의 관념은 이 두 가지 가정에 근거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저자는 이 두 가지 가정이 모두 틀렸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제 저자는 자유의지를 부인하기 위한 방법으로 뇌의 '상위'영역과 '하위'영역을 구분하고, 피험자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한 것을 보여준다. 자신의 뜻이라고 행동했던 것은 스스로 내린 결정을 인식하기 700밀리세컨드 전에 뇌는 이미 결정해 놓고, 이 '결정'을 의식하게 되어 우리가 결정을 내린다고 말이다.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의도하는 모든 것이 뇌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의해 초래되는데, 정작 그 사건들은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것이고 전혀 인지하지 못한 것이라면, 의식적 주체로서 우리가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라고 말이다.(p.35)  그래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이다.  사람들이 자기자신이 자기의 사고와 행동의 주인이라고 '느끼는데' 이것이야말로 자유 의지라는 문제를 논쟁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유일한 이유라고 말이다.  아니, 선택을 이야기하면서 의식적 자각이라는 관점에서 볼때, 다음번 행위에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에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고도(p.45) 이야기를 하고 있다.  분명 이 책이 밝히려는 바는 명백하다.  인간을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로 규정하고, 그래서 인간을 법적으로 처벌하는 근거가 되도록 하는 일은 부조리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 뿐일까?  그가 주장하는 것 역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아닐까?  내몸의 일부를 나와 별개로 생각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물론, 나는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너무나 당연하게 믿는 사람이다. 한번도 의심을 해본적이 없다.  책을 읽으면서도 의심은 없다.  하지만, 저자가 '자유 의지'라는 미명아래 개인에게 모든 것을 책임 지우는 것에 대한 이야기들은 들어보고 생각해본다. 피식 웃고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책이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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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뺄셈 - 버리면 행복해지는 사소한 생각들
무무 지음, 오수현 옮김 / 예담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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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모든 것이 제대로 갖춰져야 환영받을 수 있는 것보다, 불완전한 부분 때문에 더욱 큰 사랑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두팔이 없는 모습으로 유명한 비너스 상이나 채 완성되지 못한 슈베르트의 2악장짜리 미완성 교향곡이 그렇지 않는가.  반신불수 작가 니콜라이 오스트로프스키가 쓴 소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도 마찬가지다. (p.74)

 

 처음엔 무무(木木)라는 작가명을 보고는 일본인이 쓴 책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요즘 화두가 '비움'이기에 비움에 관한 책을 일본작가가 냈구나하고 스쳐 지나 갔었다.  그런데, 이 작가가 한국사람이란다.  물론 필명이다.  다른이들은 섬세한 감성과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목받은 에세이스트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사실, 그의 전작을 읽어보지 못했다. 가슴을 저미는 사랑의 다양한 풍경들을 세심하게 살피고 있다고 평가받고있는 『사랑을 배우다』를 읽어본적이 없으니, 당연히 일본인이라고 생각을 했다.  전작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오늘, 뺄셈』은 에세이스트인 무무 작가의 글임에도 에세이는 아니다. 작가는 어떤글로 다가왔는지 궁금하다면 읽어봐야한다.

 

 

 정리를 못한다.  심하게 정리를 못한다.  가족들은 내게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정리를 못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책상 가득 쌓여있는 책들중에는 읽지 않은 책들도 있고, 옷장가득 옷이 있음에도 항상 입을 옷은 없다.  그럼에도 또 책을 사서 책상과 책장에 쌓아두고, 옷장속엔 뭔가를 집어 놓는다.  비워야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런데 왜 못하고 있을까?  그러기에 내가 책을 읽고 있는것이 아닐까?  지식적인 앎과 실행은 다르다.  분명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몸은 움직이질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비움'을 알고 있으면서도 하지못하고 있다.  이런이들이 한둘이겠는가?  살면서 미쳐 깨닫지 못할때도 있고, 너무나 작은 깨달음이기에 피식 웃으면서 넘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작은 실천이 얼마나 큰 변화를 줄지 알고는 있다.  은 이런 자잘한 깨달음을 '뺄셈'을 통해서 알려주고 있다.

 

 등불을 들고 다니는 장님이 한번도 다른이들과 부딪치지 않았다는 이야기, 가득찬 찻잔에 끊임없이 차를 부어주는 스님 이야기, 지우지 않고 있는 선을 짧아지게 만든는 방법, 망가지 물동이에서 흘러나온 물이 주변에 꽃을 피운 이야기, 낯선집에 있는 마중물과 펌프이야기들 처럼 어디선가 한번쯤 들어봤던 이야기인데, 새롭게 다가온다.  자기계발서들을 읽을때면 아. 이거 어떤책에서 읽었지 하면서도 읽을때마다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오늘, 뺄셈』은 굉장히 쉽게 읽히고, 편하게 다가오지만, 생각을 하게 만든다.  어쩜 작가는 그걸 노렸는지도 모르겠다. 이 편한 글을 통해서 읽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읽는 시간보다 많은 시간을 생각하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눈으로 들어오는 것보다 머리와 가슴에서 만들어 지는 것이 더 오래가는 것 처럼 말이다.    

 

 편하게 읽히지만, 고개가 끄덕여지는 글들.  평온하고 화목한 가정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힘을 합쳐 만들어낸 노력의 산물이라는 이야기,  밖에서 쌓아온 스트레스를 집안으로 들어가기전에 스트레스를 걸어두는 나무에 걸어두고 들어간후 다음날이면 대부분 사라져 버린다는 이야기, 사람들이 저마다 등에 업고 살아가고 있는 괴물들의 이야기들처럼 내가 그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모든 사람들에 포함되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책을 통해 만나게 되는 47개의 이야기들은 내게 집착만 하다가, 무력감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그러기 전에 내 삶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편하게 읽히지만, 쉽지 않은 이야기들.  그러기에 나는 읽는다.  오늘 하지 못해도 내일은 할 수 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담아내지 못하고 넘치기만 한다면, 성장은 거기서 멈춘다.  '비움'은 과거를 부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과거에 품었던 것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새로운 환경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호흡을 할 때, 먼저 날숨으로 묵은 공기를 뱉어내야 들숨으로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는 것과 같다.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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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
이창래 지음, 나중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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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은 가슴 아픈 전쟁에 대한 이야기였다.  준이라는 아이와 쌍둥이 동생.  이름 때문이었을까?  남자 아이가 그보다 어린 동생과 피난을 가고 있다고 생각을 했는데, 여자 아이다.  그것도 어린 아이다.  이 아이가 더 어린 쌍둥이 동생을 데리고 부산으로 가고 있었다.  어디서 얻었는지 알 수 없는 낡은 모포가 아이의 유일한 재산이었다.  무사히 피난을 떠나길 바랬지만, 그 또한 사치였을까?  아이에게서 동생들을 뺴앗아 가는 것은 운명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아이에 눈에 다리가 잘린 남동생과 하반신이 사라져버린 여동생이 보이고 아이는 그져 살아 남기위해 움직인다.  그럼, 이 아이의 부모는 어떻게 되었을까?  교사였던 아버지. 사랑하는 어머니와 쌍둥이 언니, 오빠.  중간에 끼여있던 특별한 이 아이는 만나지 않아도, 보지 않아도 될 것들을 봤다.  폭격에 차안에 있던 언니와 엄마가 죽는 것을 봤고, 아버지가 죽는 것을 봤고, 오빠가 끌려가는 것을 봤다.  이제 이 아이에게 남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그랬다.  준의 이야기라고만 생각을 했었다.  어떻게 준이 미국으로 건너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경제적으로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준을 만나면서 이제 편해졌을까를 생각했었다.  그런 그녀에게 8년 전 유럽으로 떠난 아들 니콜라스가 있단다.  그렇게 준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던 이야기는 니콜라스를 찾기위해 준이 찾는 헥터와 누구인지 알 수 조차 없는 실비에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이렇게 이야기는 전쟁 고아가 되어 버린 준과 미군 병사 헥터 그리고 선교사 아내 실비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내기 시작한다.  과연 그들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무엇때문에 전쟁 고아였던 준이 헥터를 찾고 있고, 헥터는 끊임없이 실비를 떠올리는 것일까?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야지만 전쟁을, 그 속에서 희생된 세 영혼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준의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준이 고아가 되었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준이 마주치 미군을 따라 들어간 고아원은 새로운 세상을 보여줬다.  그 남자는 누구였을까?  전쟁을 경멸했던 아버지.  자신의 부재시에 일어난 아버지의 죽음.  왜 그의 어머니가 그를 그렇게 봤는지 모른다.  단지 그는 전쟁이 일던 곳으로 가야만 했다.  헥터라는 이름에 이남자는 분명 타고난 군인이었다. 하지만, 죽어가는 중국 소년의 눈동자는, 동료들의 죽음은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는 전사자 처리부대로 옮겨갔고, 그곳에서도 그는 있을수가 없었다.   우연히 알게 된 목사를 통해서 고아원으로 가던 길, 다 죽어가던 그 소녀는 그냥 그를 따라왔던 어린 아이였다.   그곳에 있던 한 여인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의 삶은 그저 흘러가는 시간처럼 흘려보내기만 하면 되는 것 같았다.   선교사의 아내, 실비.  그녀의 부모님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교사였는데, 그녀가 만나는 곳은 하나님만 전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준의 이야기로 시작된 글은 헥터의 현재의 삶과 과거를 교차하면서 보여주기 시작한다.  헥터가 실비에게 연정을 느끼고, 그녀를 품는 이야기부터 준을 만나기 전까지의 그의 삶을 말이다. 헥터는 굉장히 잘생긴 남자로 나온다.  그덕에 헥터를 그냥 두는 사람이 없었다.  어린시절 부터 말이다.  그가 미국에서 준을 만나기 전까지의 삶을 보면 왜 그렇게 살고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안쓰럽게 보인다.  도라를 만나면서 이제 행복을 느끼기 시작하는 헥터앞에 준이 나타나면서 또 다시 그의 행복은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아무것도 없는 그에게 그녀가 찾기를 원하는 아이, 니콜라스.  그아이를 만나야 할것 같았다. 하지만 니콜라스의 문제가 아니었다.    헥터와 준의 기억 속 교차점은 실비였다.  헥터가 사랑했던 여인, 실비.  그리고 준이 사랑했던 여인, 실비.  육체적인 사랑만이 사랑은 아니다. 그들의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할까?

 

 부모의 죽음을 보고, 타락이라 정의한다면 타락이었을 길을 걸은 그녀는 겉으로 보기엔 완벽한 여인이었다.  그녀가 선교사의 아내가 되는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그녀가 남편과 함께 한국으로 왔다.  고아원에 있던 모든 아이들이 그녀와 함께 하기를 원했고, 나이든 여자들은 그녀를 동경했었다.  그리고 그곳에 준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들을 위해서만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의 삶은 준과 마찬가지로 보지 않아도 될 것들을 너무도 많이 만났으니 말이다.  영혼이 상처받은 세명의 이야기는 이렇게 끊임없이 씨실과 날실이 엮이는 것처럼 교차되면서 나온다.  한 사람의 현재의 모습뒤엔 다른이에 과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그 속에 또 다른 이들이 조금씩 겹쳐지면서 나오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한 산골에 세워진 고아원과 1986년 미국을 배경으로 현재와 과거를 오가면 전쟁으로 인해 뒤얽힌 세 남녀의 삶을 이야기 하고 있는 <생존자>는 출판사의 말처럼 그들의 비극적인 삶과 슬픔, 인간의 가치를 말살하는 전쟁의 참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2010년 퍼블리셔츠 위클리 올해의 책, 2011년 풀리처상 후보작이며 데이턴 평화상 수상작인 <생존자>는 전쟁의 참상 속에서 엉망이 된 청춘들의 엉켜 버린 과거의 매듭을 풀어주고는 있다.  1965년 한국에서 태어난 이창래는 세 살 때 미국으로 이민해 현재까지 미국에서 활동하고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한국계 미국 작가다.  그의 다른 작품을 읽어 볼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600페이지가 넘는 쉽지 않은 <생존자>를 읽으면서 그가 써 내려가는 한국전쟁은 눈앞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무섭다.  조금도 덮어주거나 미화함없이 전쟁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누군가는 이야기를 한다.  이 글은 전쟁과 구원, 사랑과 용서, 숭고한 희생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이다.  사실 모르겠다.  어렵기도 하지만, 두려움이 앞서서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준이 느끼는 굶주림.  그것이 전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의 단순함 때문일까?

 

굶주림. 그것이 다시 준을 찾아왔다.  하지만 피난길에서 어머니와 언니 오빠, 그리고 쌍둥이 동생들과 함께 행렬에 파묻혀 가다가 결국은 혼자가 되었을 때 느낌 굶주림과 달리 이번에 찾아온 굶주림은 숨어 있는 망각의 천사, 죽음의 천사가 아니었다. (p.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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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의 모든 것
델핀 드 비강 지음, 권지현 옮김 / 문예중앙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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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예순한 살에, 노부인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엄마는 바람대로 세상을 떠났다.  살아 있을 떄 죽었다.  이제 나는 엄마의 용기에 감탄할 수 있다. (p.413)

 

 붉은 속지 때문인지, 겉표지가 강렬하게 다가왔다.  중간 중간 뚫린 표지 탓이겠지만, 표지 속 여인이 눈길을 사로 잡는다.  이 여인이 델핀 드 비강일까?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류작가라는 그녀의 글을 처음 만났다.  <내 아내의 모든 것>이라는 영화 제목 탓인지, 책을 읽고 있는데 딸 아이가 엄마가 외로운 이야기냐고 묻는다.  어머니로서가 아닌 한 여인의 어린 시절부터 죽음을 맞이한 순간까지, 아니 그 이후까지의 이야기를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은 담고 있다.  노부인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나 버린 엄마. 살아 있을 때 죽어버린 엄마.  그 엄마의 삶은 어땠을까? 

 

 

 조르주, 리안, 리스베트, 바르텔레미, 뤼실, 밀로, 앙토냉, 장 마르크, 쥐스틴, 비올레트, 그리고 톰까지 엄마의 가족은 참 많기도 많았다.  신화적인 이 대가족은 모든지 가능할 것 같은 외할아버지와 아름답고 밝은 외할머니 리안 그리고 부모를 닮아 예쁜 아이들로 넘쳐났다. 엄마는 조르주와 리안의 아홉 아이들 가운데 셋째였다.  아이를 좋아했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엄마의 가족들은 외모 덕분에 어디서나 주목을 받았고, 그 중에서 엄마, 뤼실은 특히 아름다웠고, 어린 시절엔 광고모델로 활동을 하면서 생활에 도움을 주는 착한 아이였다.  그런 엄마의 막내 동생이었던 여섯살 난 앙토냉이 우물에 빠져 죽으면서 조금씩 금이 가는 것 같이 보인다.  앙토냉의 죽음 이후 장 마르크가 입양되어 오지만, 이 아이 역시 열 다섯 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고, 뤼실의 동생 밀로도 서른이 되기전에 자살을 한다.  가족들만의 일이라고 넘기기에는 엄마의 삶이 삐걱거리기 시작하는 것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아니, 온 가족들이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

 

난 무슨 상상을 했던 것일까?  객관적이고 전지전능한 서사를 통해 엄마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할 수 있을 거라고? 내게 맡겨진 소재를 갖다 쓰기만 하면 된다고?  선택을, 말하자면 '작은거래'를 하기만 하면 된다고? 도대체 무슨 권리로? (p.42)

 

 엄마를 알기 위해서, 가족들을 찾아 다니면서 엄마에 '관한', 혹은 엄마의 '주변', 또는 엄마를 '시작'으로 하는것이 아닌 광활하고 어둡고 절망에 찬 땅 처럼 엄마가 느껴지면서 엄마를 보기 시작한다.  작가는 총 3부로 이야기를 분리하면서, 엄마의 어린시절, 결혼 후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 생트 안느 병원과 엄마의 죽음직전까지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굉장히 따뜻한것 처럼 1부는 그려지고 있다.  조르주의 첫 광고회사 설립과 파산, 앙토냉의 출생과 같은 비극적인 '모뵈주 가' 마저도 가족의 애정이 결속되어 있고, 따뜻함이 넘쳐나는 것 처럼 그려주고 있다.  그렇게 끝없이 행복할 것 같은 곳에서 엄마는 왜 탈출을 하려고 했을까?  2부로 넘어가면서 엄마의 망상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근친상간, 자살, 정신질환과 같은 극단적인 이야기들이 나오지만, 그 속에 나오는 가족들은 침묵하고 외면해 버린다. 이것은 진실일까? 

 

 도대체 왜 뤼실은 정신을 놓은것일까?  정말 아버지에게 강간을 당한 것인지, 어렸을 때 겪은 형제들의 죽음과 사고사와 자살로 영향을 받은 것인지 알수가 없다. 아니면 리안의 가족력이 뤼실에게 전해진 것일까?  작가 델핀 드 비강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델핀 드 비강은 엄마에 대해 끊임없이 '왜'라는 물음을 던지고 있고, 그러기에 자살을 택한 엄마의 과거를 추적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옮긴이에 말 처럼 사람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선택의 여지없이 한 가족안에서 태어났고 좋든 싫든 평생 함께 살아가야 한다.(p.416) 원망하고 인연을 끊겠다 외쳐도 보지만, 결국 가족이기에 사랑하고 미워한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은 가족이기에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야만 했던 이야기를, 웃어야 했던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있다.  가장 끈끈하기에 가장 아프게 하는 사람들, 가족.  아름답지만 절대 사라지지 않는 추락의 흔적을 가지고 있던 엄마, 뤼실.

 

 죽음 이후 남은 가족은 신화를 만들고 미화시킨다.  자식들을 방관한것 처럼 보이는 뤼실에 대해 비올레트가 '누가 뭐라 해도 언니 덕분에 너희들이 빨리 인생을 알게 된거야'(p.217)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정신질환으로 딸의 눈에 침을 놓겠다고 덤비던 엄마였지만, 엄마였기에 애틋하고 엄마였기에 오열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델핀 드 비강은 이야기한다.  왜 그녀가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지.  읽으면서 이런 가족도 있구나 싶지만, 이게 가족이구나 하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지극정성이신 내 어머니가 생각이 났고, 아직도 건강하신것에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것은 나의 어머니는 뤼실같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저 엄마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작가는 엄마에 대한 모든것을 찾고 엄마를 알아가면서 슬퍼하는 것보다는 가족의 일환으로서의 엄마와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 가족의 가장 즐거운 모습을, 소란스럽고 분에 넘치는 생명력을, 비극을 이겨내는 그 강한 힘을 읽게 하고 싶었다.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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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타 - 만들어진 낙원
레이철 콘 지음, 황소연 옮김 / 까멜레옹(비룡소)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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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이런 세상이 가능한걸까?  복제를 이야기하던 십여년 전에는 '설마'라는 생각과 함께 '소설이니까'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어느새 이런 세상이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거리낌 없이 드는 것을 보니 세상이 많이 변한것만은 사실인 듯 하다.  클론을 이야기하면서 먼 훗날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젠 당연하게 이야기 되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것이 사람이 아닌 동물을 가지고 하는 실험일지라도 황우석 박사가 코요테를 복제하고 맘모스까지도 복제를 했다는 뉴스들이 나오고 있지 않는가?  '클론'을 이야기 할때마다 '인간윤리'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작년 초엔 <스타터스>가 젊어지고 싶은 인간의 욕구로 서점가를 강타 하더니, 2013년 초는 <베타-만들어진 낙원>이 파라다이스 속 영혼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이젠 이런 클론들의 인권(?)을 이야기하기 시작하고 있다. 

 

 

 인간이 로봇을 만든 이유는 생활의 편리성을 위해서 였다. 오로지 인간을 위해 만들어져야 하는데, 그런 로봇중 궁극의 로봇은 터미네이터의 T-6000으로, 액체 금속 로봇 T-1000으로 분해서 인간을 위협하고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전쟁은 참 많은 것을 바꿔놓는다.  <베타>의 배경인 '드메인' 역시 전 세계를 폐허로 만든 '물의 전쟁'이후 부유한 권력자들이 만들어 놓은 지상낙원이다.  가장 깨끗한 공기에 완변하게 아름다운 풍경으로 둘러쌓여져 있는 곳.  그런 곳에서 사람들이 일을 한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일지도 모른다.  아니, 부유하지 못한 인간은 들어와서는 안되는 곳인지도 모른다.  이곳에 필요한 것. 인간을 대신해서 요리를 하고 운전을 하고 정원을 청소해야만 하는 복제인간은 이렇게 만들어 지기 시작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인간을 복제한 다음 영혼을 제거한 클론.

 

나는 영혼이 없다. (p.7)

 

 불과 몇 주 전에 출시된 열 여섯 소녀, 엘리지아. 당연히 그녀에 모체는 죽었을 것이다. 죽은 모체를 통해 만들어진 클론. 시험적으로 출시되었기에 베타가 되어버린 10대의 클론은 클론으로 태어난 순간부터 인간들이 '행복, 만족, 기쁨, 충분'을 느낄 수 있도록, 그들이 쾌적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고안되어진 것을 알고 있다.  분명 베타인 엘리지아의 최종 목표는 인간들이 그런 표정을 짓게 노력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빼어난 외모와 귀여운 행동까지.  베타인 엘리지아에게 드메인은 자신의 칩속에 인식되어진 것 처럼 지상 낙원이다.  분명 모체와 함께 영혼이 제거되었을 텐데, 엘리지아에겐 이상한 일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마카로니 치즈와 초콜릿이 맛있고, 수영을 할 때 마다 환영처럼 나타나는 남자.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어야만 한다. 아무도 그녀가 인간처럼 맛을 느끼고, 환영처럼 나타나는 남자로 인해서 가슴이 아프다는 것을 모르게 말이다. 클론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그녀가 디펙트, 불량품임을 인정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총독의 집안으로 팔려와 아이반과 리젤을 만나면서, 엘리지아는 총독 집안에 가족이 된 착각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녀에 칩은 끊임없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아이반의 친구, 타힐. 드메인에서 가자 부유한 포테스키외 집안에 아들이 엘리지아를 보기 시작한다.  예쁘다고 해도 클론일 뿐인 엘리지아를 바라보는 타힐은 다른 인간들과 다르다. 아니, 엘리지아를 닮아 있다. 아이반이 만들어 낸 락시아라는 마약은 인간들은 흥분하게 만들고, 클론은 각성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완벽할 정도로 평화로와 보이는 드메인의 클론들은 그들이 느끼지도 못하면서 노예생활을 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메인랜드에선 드메인의 클론을 반대하고,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닐까?  클론은 자살을 할 수 없다고 칩은 이야기하는데, 사랑을 하고 언덕에서 뛰어내닌 젠스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곳은 진정 파라다이스 인가?   

 

 너무나 아름답고 사랑스럽기에, 순탄할 것만 같았던 엘리지아의 삶은 위태로워지기 시작한다.  전생을 기억하는 클론. 클론인 엘리지아와 함께 하고 싶어 하는 타힐과 그녀를 알아보는 남자, 알렉스.  작가 레이철 콘을 섬세한 심리 로맨스의 여왕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클론일지라도 10대 소녀인 엘리지아와 다른 아이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곳에 10대들은 어른들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있다. 어른들이 권력을 이용한 것 처럼 클론을 섹스돌쯤으로 여기거나 허영과 허세로 시각을 낭비하면서 락시아에 취해 현실에서 도망치려 한다.  엘리지아가 가족으로 여겼던 총독 식구들이 그녀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엘리지아는 인간들이 주입한 칩의 정보는 모두 거짓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 자신의 인생을 직접 선택해야만 한다.  폐기될 수 밖에 없는 디펙트. 그녀는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베타> 시리즈는 1편과 2편까지 출간이 확정됐고, 3편과 4편은 기획 단계에 있단다. 클론 소녀 엘리지아의 이야기를 다룬 1편에서 인간윤리와 영혼에 대한 화두를 던졌는데, 2편에서는 엘리지아의 시조인 즈하라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단다. 3편에서는 스스로 클론이 되기를 원한 총독의 딸 애스트리드를, 4편에서는 엘리지아의 딸 잰스의 이야기를 펼쳐낸다고 한다.  10대의 이야기는 싱그럽고 순수하다.  <베타>속에 나오는 아이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기는 힘이 들지만, 그들이 '드메인'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면 또 다른 모습으로 보여줬을 것이다.  완벽한 엘리지아와 외모와 지능, 힘까지 모든것이 우월한 아퀸 족으로 나오는 알렉산더.  '물의 전쟁'이후라는 전제하에 보여지는 세계에서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슈퍼인종인 아퀸족과 클론은 뭐가 다를까?  영혼의 문제를 <베타>시리즈가 어떻게 풀어낼지는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악마에게 영혼을 판 파우스트부터 영혼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임에는 틀림이 없는 듯 하다.  지금, 당신의 영혼은 안전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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