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령
양국일.양국명 지음 / 네오픽션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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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렸을때부터 공포영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전설의 고향'이 하는 날에는 한 여름에도 이불 뒤집어쓰고 숨어 있기 바빴고, 결혼 후에는 남편 등뒤에서 귀막고 있기 바빴다.  여전히 나는 공포영화를 보지 않는다.  <링>이라는 영화의 '사다코'라는 귀신도 이야기를 들어서 알지 영화를 본 적은 없다.  듣기는 해도 보는건 왜 이렇게 무서운지 모른다.  두려움이 이것뿐이겠는가?  책을 통해서 만나는 공포는 몇일밤을 오싹하게 만들어 버린다.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공포와 두려움은 눈앞에서 피가 튀는 것보다 잔인하게 다가오고 귀를 통해서 들려오는 두려움의 고함소리보다 멀리 퍼진다.  책으로 만나는 스릴러 물은 좋아라하고 읽는데, 어째서 귀신이 나오는 이야기는 무서워하는줄 모르겠다.  아마, 사람이 아닌 미지의 존재로 인한 두려움이기에 대처 방법이 없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첫 장면부터 스물스물 공포가 몰려오는 이야기. 이 소년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걸까에 대한 궁금증도 풀어내지 못한채, 태인의 학교 생활로 들어가 버린다.  20여 년 전에 세워진 명문 사립 고등학교로 수도권에서 4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지방 소도시, 500미터 고지의 산꼭대기에 지어진 'KM문화예술고등학교'에 태인이 전학을 왔다.  공부잘하는 아이들만 오는 학교라는데, 이제 갈곳이 없이 마지막이라고 온 학교가 이런 학교라니 태인이 이상하게 여길만도 한데, 학교까지 오는길이 여간 스산하지 않다. 빽빽한 숲 속을 뚫고 올라온 학교에서 만난 차가운 미소의 학생주임, 나이를 알 수 없는 교장만 이상한것이 아니라 태인의 앞에 있었다는 빈자리에 대한 아이들의 반응이 오싹함을 느끼게 만든다.  어느 학교에나 귀신이야기는 존재한다.  하지만, 이곳에 흐르고 있는 음산함은 누구나 알고 있는 그런 음산함과는 다른다.

 

  이유도 없이 사라져버린 한 학생의 부재를 아무도 느끼지 못하는 듯 태인은 그 자리에 들어와 앚아 있고.  태인은 사라져버린 은호의 일기장을 발견하게 된다.  은호의 일기장은 학교의 비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은호가 본 것들을 들려준다. 그리고 룸메이트인 지원의 안내로 들어가게 된 이니그마에서 만나게 된 아이들.  겉으로는 미스터리 소설 연구회 같은 구실을 내세우고 있지만 '학교의 비밀'에 접근하고 악의 소굴을 파헤치는 조사단이라는 이니그마. 태인은 이니그마를 통해서 얻는 '학교의 비밀'보다 은호의 일기장을 통해서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이 미스테리한 학교의 비밀속에 빠져든다.  감시자, 면담과 같은 용어들을 알게 되고 똑같은 얼굴을 한 아이들과 숲에 있는 괴물.  매달 선배와의 만남을 갖는 학교. 은호가 그린 무시무시한 그림들.  믿을 수 있을까?  아니, 믿어야 하는걸까?  왜 태인은 이곳에 있는 걸까?

 

  태인의 전학과 함께 시작되는 이야기는 오랜시간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태인의 전학 첫날부터 다섯째날까지 일주일을 넘지 않는다.  하지만 그속에서 퍼져나가는 공포는 스물스물 온 몸을 감싸면서 조여온다.  태인의 이야기 전에 사라져버린 아이의 이야기와 여우 전설의 이야기부터 시작을 했기때문인지도 모른다.  조금씩 밀려오는 공포는 어느새 태인이 읽어내려가는 은호의 일기만으로도 깜짝 깜짝 놀라게 만들고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게 만들어 버린다.  태인과 함께 하려 하던 아이들과 함께 했던 아이들이 닷세사이에 다른 아이처럼 변해서 태인에게 다가온다.  은호의 일기장을 통해서 만난 은호는 은호의 단짝이었던 석규의 변화를 보면서 위험하니 발을 뺴라는 경고음을 들었다.  그럼에도 은호는 그것을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호기심은 엄청난 가속이 붙어 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을테고, 관성을 거스르지 못하고 가속도에 몸을 맡겼을 것이다.  그리고 태인 역시 엄청나게 내달리는 호기심이 가속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지금 내가 이 학교에서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너야." (p.236)

 

  이니그마에서 만난 유미.  은호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학교를 파헤쳐나가려는 유미에겐 태인만이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태인 또한 아무도 믿을 수가 없다. 같은 모습으로 변해버린 아이들.  똑같은 눈빛, 똑같은 얼굴. 반항하던 제임스 딘이 젊음의 상징이듯 아이들은 반항하고 싶을 때 반항하고 분노하고 싶을 때 분노하고, 웃고 싶을때 웃는다.  그게 아이들이다.  질서를 강요하며 억압하면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일반적인 아이들도 이럴진데, 이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곳에 떨어진 태인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숨죽이고 있다면 청소년이 아닐 것이다  분명 이야기의 처음에 힌트를 주었는데도 난 읽으면서 이 아이의 망상이 빚어낸 것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했었다.  '스키조'로 은호라는 아이를 만들어 낸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니었다.  지구상에 인간이 모든것의 주인이라는 생각은 잘못인지도 모른다. 

 

"나는 반항하고 싶을 때 반항하고, 분노하고 싶을 때 분노하며 살고 싶어." (p.272)

 

  제목이 '악령'이다.  한여름이 지나 만난 이야기가 스르릉 스르릉 뱀처럼 기어 올라온다.  대놓고 무섭지는 않는데, 어디선가 '악~'하면서 덤벼들것 같고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기게 만든다.  그럼에도 태인의 말에 정신을 차리게 된다.  격동기라고 하는 청소년기.  생각하고 반항하고 분노하고 삶의 지침을 세워나가는 그 시기. 악령이든 천년여우든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결국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기 위해 애쓰는 이들이 이 세상을 살아간다.  또 다른 악령이 뒤에 숨어있을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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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전달자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0
로이스 로리 지음, 장은수 옮김 / 비룡소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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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전에 <더기버>가 상영되었다. 영화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안보길 잘한 것 같다.  영화가 상영될때는 아직 책을 읽지 못한 상태였기도 했고, 영상물로 접하는 이야기들을 열광적으로 좋아하지 않아서 영화관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좋아하는 님들의 후기를 읽어보니 책과는 다르다는 내용들이 많이 나오고, 평이 그다지 좋지는 않은것 같다.  원작만큼 잘 만들어진 영화를 만나기는 굉장히 어렵다.  지금까지 본 영화중에서 원작을 능가하는. 아니, 원작만큼이라도 되는 영화를 만나 본 경험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많은 이야기들을 뒤로하고 『The Giver 기억전달자』를 만났다.  집에 『메신저』가 있는데, 이 책이 '더 기버'시리즈 중에 한권이라는 걸 책을 읽고 나서야 알았다.  생각보다 얇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더 기버'.

 

 

  내가 알고 있고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진짜 세상일까라는 고민은 '트루먼쇼'에서 이미 다뤄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곳에선 트루먼을 제외한 모두가 가짜 세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반대로 생각해보자.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가 가짜 세상을 진짜라고 생각한다면 그 세상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열두살 어린 소년이 진짜 세상을 접하게 된다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느 누구도 답을 이야기 해줄수가 없다.  심지어 소년이 살고 있는 세상은 가족조차도 내가 알고 있는 그런 모습이 아니다.  너무나 완벽해 보이는 모습들이 조금씩 다르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열 두 살, 성인이 되기 위한 직위를 받기위한 자리에서 부터 시작된다. 

 

  모든것이 완벽하게 표준화되어 있는 곳이 조너스가 살고 있는 마을 공동체다.  마을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는 이곳은 각종 충동을 억제하는 법을 배우고, 마을 공동체에 적합한 사람이 되도록 행동을 표준화하고있다.  조너스는 부모님과 여동생 릴리와 살고 있는데, 릴리는 1살 때 가족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진 아이다.  릴리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은 태어나서 한살까지 공동으로 보육사가 돌보다가 한살 기념일에 가족들에게 전해진다.  아이들은 열두살때까지 매년 기념행사를 하게되는데, 나이마다 자켓을 받기도 하고 자전거를 받기도 한다.  9살행사에 자전거를 받기전에 자전거를 타면 법을 어기는 행위다.  그리고 가장 하이라이트는 열두살 기념행사로 아이들을 어릴때부터 지켜 본 원로들이 아이들의 직위를 정해주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이 행사에서 조너스는 듣도 보도 못했던 '기억 보유자'로 선택되어진다.   

 

"네게 전달하려는 건 세계 전체의 기억이야.  네가 있기 전, 아니 내가 있기 전, 그리고 내 스승님이 있기 전, 그리고 그 스승님의 스승님도 있기 전 세대의 이야기야." (p.132)

 

  모두의 존경을 받고 거짓말이 허용되지 않은 공동체에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직위가 '기억 보유자'란다. 기억 보유자가 된 조너스는 기억 전달자에게서 조너스가 알지 못했던 전세계의 기억을 전달 받게 되면서 12년동안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였던 것들을 처음으로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  사과가 빨갛다라는 것을 알아버리고, 하늘이 파랗고, 풀밭이 초록색이라는 걸 알아버린 소년.  다른 이들은 이걸 모른다는 것일까?  모른다.  오래 전 '늘 같은 상태'를 공동체에서 선택한 순간부터 마을 공동체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햇볕을 포기하는 그 순간부터 색깔 역시 사라져 버렸다.  그 시간이 언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굉장히 오래전인것은 확실하다.  기억전달자와 기억보유자만 알고 있는 사실이니 말이다.   

 

  기억을 혼자 가지고 있었을때는 이야기할 수 있는 대상이 없었지만, 기억전달자로부터 조너스가 행복하고 슬프고 아프고 괴로운 기억들을 조금씩 전달받으면서 그들은 함께 공유하고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어린 조너스이 '임무해제'가 무엇인 줄 알게되고, 존경하던 아빠의 일을 '기억보유자'의 위치에서 보게되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 공동체와 기억 전달자로부터 받은 옛날 세상의 기억은 충돌을 하기 시작한다.  그 가운데에는 조너스가 '임무 해제'될 위기에 처한 가브리엘에게 따뜻한 기억을 전해주면서 진정한 가족애가 피어났는지도 모른다.  모든것이 규격화된 사회.  머리나쁘고 건강하기만 한 소녀들이 '산모'의 직위를 받고 아이를 낳아 공동체에 건네주는 사회.  정확하게 50명씩 같은 나이의 아이들이 있고, 한살 기념식에서 가족과 이름이 정해지고, 나이가 들면 노인의 집에 들어가 임무해제를 기다리는 사회.  자연스러운 성욕은 약으로 억제되고, 모든것이 규격화되어 규칙위반을 조심하는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사회.  이 사회는 꿈꾸던 사회일까?

 

  미래의 어느시간인지는 알수 없지만, 가능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로이스 로리는 들려주고 있다.  오직 한사람을 제외하고 과거를 통제하고 인간의 욕구를 통제하는 곳.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가 아닌가?  소수의 권력자가 다수의 피지배자를 억압하는 방법.  생각의 자유를 불가능하게 하면서 자신들의 의지대로 움직이게 하는 사회. 로이스 로리는 이야기한다.  생각을 하는 단 한사람으로 세상은 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기억 보유자이기를 거부한 조너스와 아기 가브리엘에게 펼쳐질 세상이 어떤 곳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따라 에굽을 나오면서 그들은 지상낙원을 꿈꾸지만 그 곳까지의 여정은 너무나 길었고, 노예였을지라도 에굽이 좋았다는 생각을 하듯, 조너스도 그럴지 모른다. 아이의 평생이 마을 공동체의 삶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세상은 움직이는 이들의 의지로 변화된다.  그자리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어떠한 변화도 있을 수 없다.  그 변화가 선한쪽으로 움직이는지 악한쪽으로 움직이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또한 개개인의 의지다.  신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선물했고, 선물받은 이들은 사용할 권리가 있으니 말이다.  조너스에게 화이팅을 외쳐본다.  '조너스, 힘내~!' 그래서 조너스가 만나고 만들어 낼 또 다른 세상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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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을까? - 비담 vs 선덕여왕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7
정명섭 지음 / 자음과모음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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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가 생긴 이래 여성들이 역사에 흔적을 남긴 경우가 얼마나 될까?  주몽을 뒷바라지해 고구려의 건국을 도운 유화부인,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는 데 협력한 후 아들인 비류와 온조와 함께 백제를 세운 소서노가 있긴 했지만, 이들은 조력자의 역할이 강했다.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것이 당연한 시대였기에 강한 왕이 통치하면서 남성이 중심이 되었던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역사속에서 여성이 나라를 통치하는 왕의 자리에 올랐다면 어떻게 받아들일까?   고구려나 백제에서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고, 중국에도 여왕은 측천무후가 유일한데, 한반도에 탄생한 여왕.  그것도 한 번에 그친것이 아닌 세 번씩이나 말이다. 그들이 궁금하고, 그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선덕 여왕, 진덕 여왕, 진성 여왕이 신라시대의 여왕들임은 학교교육을 통해서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여왕들에게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없다.  삼국유사를 통해서 만나고, 드라마를 통해서 주변인물들의 나이가 뒤죽박죽이 된 상태로 만났었고, 야사를 통해 만난 여왕들은 많은 남성편력과 음란의 대명사처럼 여겨졌었다. 신라에만 존재했던 여왕.  어째서 여왕은 신라에만 존재했던 것일까?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에서 만나게 된 '비담 vs 선덕여왕'의 이야기는 드라마를 통해서 만났던 비담이 아닌 상대등인 비담과 한반도 최초의 여왕인 덕만이 여왕이 될 수 밖에 없었던 내용을 담고 있다.  물론, 그 시대를 살지 않았고, 남겨진 사료들이 많지 않기에 우리의 역사는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가 많은 것도 현실이지만, 그런 궁금증이 역사를 알아가는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성리학을 기본 이념으로 한 조선시대와 비교를 하면 신라시대는 여성에게도 상속권을 인정하는 등 상대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높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신라만 유독 여성의 권리를 존중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왕은 아니지만, '역사공화국'에서 다룬적이 있던 고구려 우씨황후는 남편과 시동생을 왕으로 올리면서 두번이나 황후가 되었으니 말이다.  신라시대를 들여다 보면 율령이 반포되고 불교가 공인되는 등 왕권이 차츰 강해지면서, 신성함을 강조하고 정통성을 선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혈통이 강조되었고, 성골은 그런 과정의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혈통을 강조한 나머지 근친혼을 하기도 했고, 남성 후계자가 없을 때 사위나 친족 남성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하는 융통성이 사라져 버린 부작용이 생겼다. 이러한 부작용 중에서 여왕이 즉위되었다고 이야기를 하는 이들도 있다.  극도로 폐쇄적인 족벌주의가 낳은 결과라고 말이다.

 

  분명 여왕이 즉위한 것을 두고 어떤 이들은 남녀 평등을 이야기하고, 또 다른 쪽에서는 족벌주의의 폐단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어떤것이 맞는 이야기일까?  현대의 정치를 봐도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제대로된 사회상을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분명 고대사회의 특징답게 신라 역시 계층 간에는 차별이 존재했다.  하지만 같은 계층, 즉 성골 내부에서는 남녀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남녀 평등도 족벌주의의 폐단도 인정을 해야할 것 같다. 여왕의 즉위와 함께 이번 법정에서 나오는 인물은 비담이다. 드라마를 통해서 만났던 여왕을 좋아하던 비담은 잊어라.  이번 법정에서는 반란을 일으킨 비담이 역사속에선 그렇지 않았다면 왜 반란을 일으켰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해주고 있다.  화백 회의는 진골 귀족들이 회의체로 상대등이 주관하는데,  만장일치제를 채택했으며 중요한 나랏일을 처리했다.  심지어 화백 회의의 귀족들은 왕의 폐위를 결정하기도 했는데,  진지왕은 화백 회의가 내린 폐위 결정에 따라 왕위에서 물러났다.

 

 

  이런 점을 생각한다면, 비담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선덕여왕이 화백 회의의 결정을 따르지 않았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이렇게 여러 가지 의견이 존재하는 것은 남아 있는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이고, 역사는 정해진것이 아니라, 탐구하고 고민해서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비담의 난은 귀족세력과 왕권이 대립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흔히 이야기하듯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에 패자의 기록은 가차없이 사라지거나 평가절하된다.  근현대사도 왜곡되는 경우가 많은데, 천년전 이야기를 몇권 남아있지 않은 사료만 가지고 옳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올바른 우리의 역사를 찾기위해 노력해야한다.  우리가 노력하고 찾아내지 않으면 당연히 우리의 것이어야 하는 사실도 다른곳에서 강하게 주장하는 이들의 것이 되니 말이다.  선덕여왕과 비담의 이야기는 역사를 강탈해가는 이야기는 아닐지라도 너무나 많은 우리의 역사가 잊혀지고 뺴앗기고 있기에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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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사랑 - 순수함을 열망한 문학적 천재의 이면
베르벨 레츠 지음, 김이섭 옮김 / 자음과모음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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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것도 모르던 때에도 학교에서 읽으라는 숙제로 읽었던 작품들중엔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이 많았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읽었던 책들은 숙제로 읽었을때가 아닌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나는 순간부터 새로운 이야기로 다가왔지만, 헤르만 헤세의 작품만큼 '필독'이라는 이름으로 읽어야 했던 작품들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데미안>을 처음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1900년대 초반에 쓰여진 작품을 읽으면서도 갭을 느끼지 못했던 걸 보면 무슨 생각으로 읽었는지 모르겠다.  그 어려운 책을 어린아이가 왜 읽었을까?  그뿐인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책은 읽어봐야할 것 같았던 어린시절의 호기는 <수레바퀴 아래서>, <싯다르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황야의 이리>, <크눌프>,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유리알 유희>까지 겉표지만 뚫어지게 보다가 몇장 넘기고 잠들고 했던 시간들이이 참 길게도 이어졌었다.  독일 현대 문학의 거장, 진정한 삶의 길을 탐구한 영혼의 구도자라는 헤르만 헤세. 어디서 들은건 있어서 그의 모든 작품이 그러리라 생각을 했었고, 그의 삶 역시 그러리라고 생각을 했었다.

 

 

  순수함을 열망한 문학적 천재의 이면이라는 부제를 달고있는『헤르만 헤세의 사랑』은 내가 알지 못했던 헤세를 만나게 해주고 있다.  문학적인 측면에서 분명 헤세는 대단하다.  존경하는 작가이기에 현존해 있다면 옆에도 못가고 벌벌 떨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사랑은 문학으로만 일관되어졌으면 하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들었다.  헤세의 철학이 집약된 대표작들은 길이 남을진데, 남녀간의 사랑은 어쩜 이렇게 안타깝고 외바라기로 만들어 버리는지 참 나쁜 남자다.  헤세만큼 뛰어난 작가는 사랑의 역사조차 그냥 넘길 수가 없는 것 같다.  그의 사후, 이렇게 사랑을 이야기하는 편지 한장 한장, 누군가에게 이야기했던 절절한 가슴앓이까지도 모두 공개되어질지 누가 알았겠는가?  몇줄 적지 않은 끄적임 마저도 연구하고 그 속에 있는 헤세의 마음을 알아내려는 사람들 덕분에 거장으로만 남아있었을 헤세는 인간적인 모든 면들이 그를 궁금해하던 모든 이들에게 보여지고 있다. 

 

  책은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여러 편지와 문서를 찾아내 헤르만 헤세가 사랑한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사랑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참 다양한 사랑을 하는 것 같다.  과거 뿐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인물중에도 뛰어난 작가나 음악가처럼 예술을 하는 사람들 옆에는 그들의 사랑을 갈망하는 이들이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으니 말이다.  헤세 역시 하나의 사랑만 찾아오진 않았다.  우리나라의 주례사처럼 '검은 머리 파뿌리'는 턱도 없던 헤세는, 사진작가였던 마리아 베르누이, 성악가였던 루트 벵거, 미술사학자였던 니논 돌빈까지 세 여인을 사랑했고 그들과 결혼을 했다.  서로 사랑하는 유예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짧은 유예기간이후 '이젠 그만~!'을 외치지는 않는다.  우리가 거장이라 말하는 헤세의 사랑은 아름답지가 않다. 심지어 헤세와 각각 인생을 공유한 세 여인은 헤세와의 사랑을 모두 지워버리고 싶어 했단다.

  잔인하게도 책은 세 여인과의 사랑 이야기를 '기.승.전.결'처럼 사랑의 시작부터 끝까지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묻어버리고 싶고, 기억하기조차 싫은 이야기까지도 베르벨 레츠는 끄집어 내어 독자들에게 '알 권리'를 채워주고 있다.  꿈꾸며 사랑을 노래하던 아름다운 여인들은 한 남자를 만나 새로운 삶을 노래하지만, 세 여인은 헤세의 삶의 일부분이었다는 것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아이들의 아빠가 되어버린 남자가 자신들의 삶 전체를 엉망으로 만들 사람일지 누가 알았을까?  마리아 베르누이는 이야기를 한다.   “그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더 이상 없어. 다시는 그에게 기쁜 마음으로 굴종하지 못할 거야. 이제 그런 건 없어. 그 사람은 그냥 작가일 뿐이야.”  그는 작가다.  누구나 인정하는 천재 작가다.  철학을 이야기하고 고뇌하는 삶을 이야기하기에 전쟁에 참여하던 독일 젊은들의 주머니 속에 한권씩 가지고 있었다는 <데미안>의 작가.  동생의 삶을 보면서 <수레바퀴 아래서>를 집필한 천재 작가.  하지만 마리아 베르누이의 말처럼 그는 '그냥 작가'이다.  읽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을 알아버렸을 때 느낄 희열보다 답답함이 더 많이 느껴졌던 경험을 하게 된『헤르만 헤세의 사랑』은 '사랑'이라는 표현도 아깝다.  책임이 따르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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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편 섬
이경자 지음 / 자음과모음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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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전 지식 없이 그냥 책을 만났을 때의 느낌은 '이 책은 뭘까?'정도였다.  요즘에 나오는 책들과 비교해서 너무나 단조로운 표지를 가지고 있었고, 표지가 화려한 '자음과 모음'과는 어울리지 않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그랬을까?  재미 없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었다.  '기우'는 이럴 때 쓰는 표현이다.  단편인 줄 몰랐다.  그래서 몇 장을 읽어 내리면서 '우타노 쇼고'를 떠올렸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저 우타노 쇼고의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를 읽었을 때 내게 남긴 이미지가 강해서 였을 것이다.  노인을 대상으로 쓴 이야기가 한두편이 아님에도 언제나 나이드신 분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책들을 읽으면 우타노 쇼고가 먼저 떠오른다.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는 것은 그 책이 뛰어나서 일까, 『건너편 섬』이 뛰어나서 일까?  그런쪽으로 무지하기에 말 할 수는 없다.  그저 내게는 그렇게 다가왔다는 거다.

 

 

  콩쥐 마리아, 미움 뒤에 숨다, 언니를 놓치다, 박제된 슬픔, 세상의 모든 순영 아빠, 고독의 해자, 이별은 나의 것, 건너편 섬. 타이틀로 선택 되어진 단편이 가장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첫 이야기부터 편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지는 않다.  양색시라는 호칭이 있던 시대를 살아본적이 없기에 그 시절 이야기는 그저 이야기로 다가올 줄 알았는데, 그 시대를 살던 한 여자의 마음을 모를 줄 알았는데, 작가가 터놓은 길을 따라가다보면 어쩔 수 없이 나는 마리아가 되어 버린다.  스물여덟에 한국 이름대신 얻은 마리아라는 이름의 여인를 통해 그녀의 가족은 미국으로 건너왔고 다들 잘 사는데, 어느 형제도 마리아 근처에 살려 하지 않는 현실속에서 마리아는 숨을 죽이고 자신과 같은 사람들 속에서도 과거가 드러남은 치부로 다가온다.  왜?  외롭고 멸시받아 주눅들었어도 악착같이 살아았는데, 이 외로움은 어떻게 할수가 없는데, 한국이민사 100년이라는 이민사는 마리아를 '양색시, 한국 이민사의 초석'으로 바라보려 한다. 

 

  한편의 단편을 끝내면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오지만, 결코 녹녹하지가 않다.  기뻐서 깔깔 거리면서 뒤로 넘어지게 웃어 넘길 수 있는것은 단편 속 잠깐 나오는 '개그콘서트'의 배우들 뿐인지도 모르겠다.  머나먼 타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작은 땅덩어리에서 이념으로 갈라져 사는 사람들, 아내가 죽은 후에야 미안함에 죽을듯이 덤비는 남자까지 무엇하나 간단한 것이 없다.  읽어내리다 만난 '고독의 해자'와 '이별은 나의 것'은 연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딸들이 보는 유명한 작가 엄마의 이야기.  여류 작가가 느끼는 삶의 무게 이야기.  누구나 자신의 삶은 가벼운 유흥거리가 아니기에 무겁지만 애쓰고 힘써 살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기에 그녀들의 이야기뿐 아니라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무명씨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을 그린 '건너편 섬' 역시 묵직하게 다가온다.

 

  미움뒤에 숨어 버리고 슬픔 마저도 박제해 버리는 시대를 살았던 이들이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들일까?  해방둥이로 태어난 엄마는 할아버지를 모른다고 하신다.  일흔이 되신 엄마에게 아버지는 전쟁통에서 살아져 버린 사람이고, 이제는 생사를 확인하는 것이 우습게 느껴질 만큼 세월이 흘렀지만, 그런 이들이 한둘일까?  멀쩡이 잘 살다가도 사상범으로 몰릴 수 있는 나라가 지구상에 얼마나 있을까?  여전히 휴전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중인 나라.   전쟁중임에도 반으로 나뉘어진 땅덩어리 안에서 또 싸우고 있는 나라.  세월과 함께 무뎌지고 이제 전쟁의 기억마저도 '8.15'나 '6.25' 기념 행사를 통해서만 인식하게 되어버렸지만, 그러기에 그 시대를 살던 이들의 마음을 느끼게 해주는 이경자 작가의 글이 가슴에 와 닿는다.  아직은 그 시대의 이야기가 '옛날 옛날 호랑이가 담배피던 시절'이야기로 치부되어 버리기엔 남아 있는 것이 너무나 많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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