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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을까? - 비담 vs 선덕여왕 ㅣ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7
정명섭 지음 / 자음과모음 / 2010년 9월
평점 :
한반도가 생긴 이래 여성들이 역사에 흔적을 남긴 경우가 얼마나 될까? 주몽을 뒷바라지해 고구려의 건국을 도운 유화부인,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는 데 협력한 후 아들인 비류와 온조와 함께 백제를 세운 소서노가 있긴 했지만, 이들은 조력자의 역할이 강했다.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것이 당연한 시대였기에 강한 왕이 통치하면서 남성이 중심이 되었던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역사속에서 여성이 나라를 통치하는 왕의 자리에 올랐다면 어떻게 받아들일까? 고구려나 백제에서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고, 중국에도 여왕은 측천무후가 유일한데, 한반도에 탄생한 여왕. 그것도 한 번에 그친것이 아닌 세 번씩이나 말이다. 그들이 궁금하고, 그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선덕 여왕, 진덕 여왕, 진성 여왕이 신라시대의 여왕들임은 학교교육을 통해서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여왕들에게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없다. 삼국유사를 통해서 만나고, 드라마를 통해서 주변인물들의 나이가 뒤죽박죽이 된 상태로 만났었고, 야사를 통해 만난 여왕들은 많은 남성편력과 음란의 대명사처럼 여겨졌었다. 신라에만 존재했던 여왕. 어째서 여왕은 신라에만 존재했던 것일까?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에서 만나게 된 '비담 vs 선덕여왕'의 이야기는 드라마를 통해서 만났던 비담이 아닌 상대등인 비담과 한반도 최초의 여왕인 덕만이 여왕이 될 수 밖에 없었던 내용을 담고 있다. 물론, 그 시대를 살지 않았고, 남겨진 사료들이 많지 않기에 우리의 역사는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가 많은 것도 현실이지만, 그런 궁금증이 역사를 알아가는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성리학을 기본 이념으로 한 조선시대와 비교를 하면 신라시대는 여성에게도 상속권을 인정하는 등 상대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높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신라만 유독 여성의 권리를 존중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왕은 아니지만, '역사공화국'에서 다룬적이 있던 고구려 우씨황후는 남편과 시동생을 왕으로 올리면서 두번이나 황후가 되었으니 말이다. 신라시대를 들여다 보면 율령이 반포되고 불교가 공인되는 등 왕권이 차츰 강해지면서, 신성함을 강조하고 정통성을 선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혈통이 강조되었고, 성골은 그런 과정의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혈통을 강조한 나머지 근친혼을 하기도 했고, 남성 후계자가 없을 때 사위나 친족 남성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하는 융통성이 사라져 버린 부작용이 생겼다. 이러한 부작용 중에서 여왕이 즉위되었다고 이야기를 하는 이들도 있다. 극도로 폐쇄적인 족벌주의가 낳은 결과라고 말이다.
분명 여왕이 즉위한 것을 두고 어떤 이들은 남녀 평등을 이야기하고, 또 다른 쪽에서는 족벌주의의 폐단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어떤것이 맞는 이야기일까? 현대의 정치를 봐도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제대로된 사회상을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분명 고대사회의 특징답게 신라 역시 계층 간에는 차별이 존재했다. 하지만 같은 계층, 즉 성골 내부에서는 남녀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남녀 평등도 족벌주의의 폐단도 인정을 해야할 것 같다. 여왕의 즉위와 함께 이번 법정에서 나오는 인물은 비담이다. 드라마를 통해서 만났던 여왕을 좋아하던 비담은 잊어라. 이번 법정에서는 반란을 일으킨 비담이 역사속에선 그렇지 않았다면 왜 반란을 일으켰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해주고 있다. 화백 회의는 진골 귀족들이 회의체로 상대등이 주관하는데, 만장일치제를 채택했으며 중요한 나랏일을 처리했다. 심지어 화백 회의의 귀족들은 왕의 폐위를 결정하기도 했는데, 진지왕은 화백 회의가 내린 폐위 결정에 따라 왕위에서 물러났다.

이런 점을 생각한다면, 비담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선덕여왕이 화백 회의의 결정을 따르지 않았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이렇게 여러 가지 의견이 존재하는 것은 남아 있는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이고, 역사는 정해진것이 아니라, 탐구하고 고민해서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비담의 난은 귀족세력과 왕권이 대립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흔히 이야기하듯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에 패자의 기록은 가차없이 사라지거나 평가절하된다. 근현대사도 왜곡되는 경우가 많은데, 천년전 이야기를 몇권 남아있지 않은 사료만 가지고 옳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올바른 우리의 역사를 찾기위해 노력해야한다. 우리가 노력하고 찾아내지 않으면 당연히 우리의 것이어야 하는 사실도 다른곳에서 강하게 주장하는 이들의 것이 되니 말이다. 선덕여왕과 비담의 이야기는 역사를 강탈해가는 이야기는 아닐지라도 너무나 많은 우리의 역사가 잊혀지고 뺴앗기고 있기에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