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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빌라
전경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내가 알고 있는 책친구들과 만나면 어김없이 나오는 작가가 전경린 작가다. 오랜만에 나오는 신작에 다들 고무되어 있었고, 책을 읽은 후 역시 '전경린'이라며 외침을 주저하지 않았다. 솔직히 난 그냥 들을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글을 읽어본 기억이 없다. 읽고도 넘겼을지도 모르겠지만 작가의 이름만 익숙하다. 분명 책을 읽었는데, 무슨 글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수필도 아닌것이 소설도 아닌듯 하고, 소설인 듯 하기엔 내 상식에 있는 '기승전결'이 없다. 그저 누구 누구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또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들려주는 이야기가 해결이 날까하는 기대를 하고 읽지만 그런 기대는 일찌감치 사라져 버렸다. 아무것도 없다. 그저 들려줄 뿐이다.
오로지 어린시절부터 제대로 들려주는 이야기는 유지의 이야기이지만, 그녀의 이야기 역시 소설다운 무언가는 없다. 그럼에도 아름답다. 어떻게 이 소설을 읽으면서 한권의 책으로 느껴지는 느낌이 아닌 글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 들으려 하는 이야기가 아님에도 들려오는 이야기를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닌데, 유지의 생각과 유지가 바라보는 풍경을 보여주는 설명이 '美學'으로 다가온다. '문장의 미학'이라고 했던가? 아름답다는 표현이 글을 이루는 플룻과 인물 관계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한줄의 문장으로 슬쩍 슬쩍 보여지고 있는데, 그것들이 모여서 '아... 참 고운 책을 읽었구나'하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큰 고모부를 아버지로 알고 살았던 유지가 작은 고모인 '손이린'이 생모라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단숨에 그녀의 삶이 변하고, 이린과 함께 살게된다. '손약국'의 이린은 독특한 인물이다.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지만 누구나 인정하고 있는 인물. 그녀와 특별한 관계가 있을 것 같은 생물 교사 '이사경'. 어째서 유지는 이사경에게 자신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고 싶었을까? 그녀는 이야기를 하지만, 내 아둠함은 그녀의 말을 들을 수가 없다. 그로인해 유지는 이사경의 어머니인 '노부인'을 만나게 되고, 이사경의 아들인 '연조'의 피아노 교사로 이사경집을 드나들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이사경의 부인 '백주희'. 분명 사건의 추궁은 백주희가 당연한것 처럼 보이나 혼자만이 세상을 살고 있는 듯한 손이린이 가장 깊이 실망하고 진정으로 화를 내었다. "왜 그랬니?" (p.34)
삶은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들을 두고 남편을 따라 일본에 가 서른해가 넘어 돌아온 노부인은 어쩌면 그리도 고고하고 당당할까? 아무렇지도 않는듯 조용하게 읍조리면서 유지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책을 읽고 그림을 많이 보고, 그리고 생각하며 피아노를 치렴. 중요한 것은 네 목소리를 내는 것이지, 매끄럽게 치는 것이 아니야. 피아노를 오래 치려거든 내 말 흘려듣지 마."(p.38). "왜 그랬니?"에 포함된 말이었을까? 이사경외에는 다른 누군가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소리를 유지는 설명할수 없고, 그저 그렇게 시간은 흐르는 것처럼 보인다. 유지의 친구의 결혼이 있고, 해변빌라 주위의 풍경들이 쉼 없이 흐르는 파도의 썰물과 밀물처럼 밀려왔다 떠나가버린다.
노부인의 죽음 이후에도 삶은 계속 된다. 연조가 아들을 낳고 이혼을 했고, 이린이 떠나가버렸으며, 동네에 살던 연인이 죽음을 맞고, 해변에 있는 카페 '가능성'에서는 또 다른 일들이 일어난다. 편사장과 편사장이 마음을 준 해영이 있고, 알코올 중독 치료센터에서 나와 센터에서 만난 유부녀를 기다리는 진수가 있다. 그리고 손노인과 손노인의 문구점 한켠에서 도장을 파는 벙어리 여인도 있고, 결혼후에 유지를 찾아와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오휘까지. 그들을 생각한다면 아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사건이 일어나지도 않는다. 같은 공간에 살고 있으면서도 다른 곳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 '부재의 사과를 깎는 일'로 시작하는 '프롤로그'부터 '에필로그'까지 이야기를 펼쳐내고 있지만 무언가 탁 사건의 결말을 들려주고 있지 않은 이야기들. 책장을 다 덮은 후에도 고민하게 만드는 이야기들. 내가 놓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이야기에 앞으로 다시 돌아가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는 『해변빌라』는 정말 이상한 책이다. 계속해서 이렇게 기웃거리게 만드니 말이다. 문장에 기웃거리고 등장인물들의 말들에 기웃거리면서 찾아내려 애쓰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는 정말 이상한 책이다. 그런데, 난 뭘 찾고 있는걸까?
'삶이란 부재의 사과를 깎는 일이다, 할때의 그 사과이지. 삶이란 사과 껍질을 얇게, 끊어지지 않게 깍는 일이야. 그사과는 페루에만 있는거야? 라고 물으면 당연하지,라고 말했다.' (p.76)
"사랑을 한 후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 쓰나미에 휩쓸려 사라진 모터바이크가 알래스카의 해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처럼, 처음 시작한 지점으로 절대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사랑이야." (p.89)
'해변 모래사장에 유목이 하나 올라와 있었어요... 슬픔이라는 단어는 약해요. 비통 같은 현재형도 아니에요. 차라리 바다 전체의 무게로 변한 검정이었요.' (p.119)
'살아 있는 몸속에서 네가 먼저 떠나고.. 그 뒤 빈집처럼 갑자기 텅 비어버리는 몸. 그때 너는, 나를 위해 표정하나도 바꿀 수 없겠지." (p.169)
"이상한 것이, 어딘가에서는 너와 결혼해 살고 있는 것만 같아. 그곳에선 나는 여전히 밤낮 피아노를 치고 있지. 잠에서 깨기 전엔 그런 세계에서 숨 쉬다가 돌아오는 거야. 너무나 이상한 이야기지만 그런 느낌이 들어. 어딘가 다른 세계에서는 너와 함께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p.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