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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광해군은 억울해했을까? - 광해군 vs 이귀 ㅣ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34
김태희 지음, 박상철 그림 / 자음과모음 / 2011년 6월
평점 :
조선 왕조 500년 역사 속에 '묘호'를 얻지 못한 왕은 단 두명에 불과했다. '묘호'란 왕이 죽은 뒤 종묘에 모실 때 붙이는 이름으로, 높이는 뜻이 담겨 있는데, 태조, 태종, 세종처럼 '~조'나 '~종'으로 끝나는 임금 이름을 말한다. 조선 왕조에서 '~군'으로 끝난 임은근 노산군, 연산군, 광해군 이렇게 세 명이었지만, 노산군은 후에 단종이라는 묘호를 얻어, 조선 시대의 왕 가운데 오직 연산군과 광해군만이 세자 때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쫓겨난 왕이었다. 그래서 역사는 그들의 '공'보다는 '과'를 더 많이 알려주고 있다. 내고 알고 있는 머릿속 지식들도 광해군은 천하의 나쁜놈 이었다. 그런 광해군을 새롭게 보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광해군 그는 정말 쫓겨날 만큼 나쁜 임금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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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법정에서는 광해군이 원고로 인조반정을 일으킨 이귀가 피고로 나온다. 나쁜 임금이라는 이미지가 워낙에 굳어져 있어서 광해군이 어떤일은 했었는가에 관한 것들은 그리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은것이 사실이다. 근래에 들어 광해군에 대한 새로운 시각들이 꽤 많이 보여지고 있다. 선조 때 일어났던 '정여림 모반사건'을 통해서도 임해군과 광해군에 대한 모습들이 새로운 시각으로 그려지고있고,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서 보여지고 있는 광해군은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광해군의 모습이 아니다. 소설과 드라마 속 임금은 극과 극을 달릴 정도로 좋고 나쁨이 나뉘어지기 때문에 그런 모습만 보고 좋다 나쁘다를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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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어떻게 세자가 되고 왕이 된 후 쫓겨나게 되었을까? 조선의 15대 임금인 광해군의 이름은 혼이다. 1575년에 선조와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공빈 김씨는 정실 왕비가 아닌 후궁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한양이 함락될 위기에 있었던 4월 29일 선조는 분조를 위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고, 1608년 선조가 죽은후 왕위에 올랐다. 세자시절 전란이 있었고, 전란을 수습하는 기간중에 왕위에 올랐으며 1623년 3월 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나 강화도와 제주도 등지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다 유배지에서 죽게 된다. 광해군 대신 선조 임금의 손자인 능양군이 왕으로 추대되어지는데, 능양군이 바로 인조 임금으로 이 반란을 후세에서는 '인조반정'이라 부른다. 임진왜란은 일본의 100년동안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군사력을 관리하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해결책으로 해외로 눈을 돌리게 하기위해 전쟁을 일으킨 것이었다.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일본군이 1592년 5월에 한양을 점령하면서 조정은 혼비백산을 하고, 선조는 분조를 하여 조정을 둘로 나눌방책을 세운다. 광해군보다 형인 임해군이 있었으나, 임해군의 행적은 광해군에 비해 총명함이 뒤떨어졌고, 정실왕비인 인목 왕후가 영창 대군을 낳았으나 그일은 후에 일이었기에 광해군은 갑작스럽게 '세자'책봉을 받게 된다. 이렇게 특수한 상황에서 세자가 되었고, 이때 활약한 것이 바탕이 되어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고 왕위에 오른 광해군의 치적은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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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 광해가 남긴 업적을 한두가지만 이야기 할 수 없지만, 크게 세 가지로 간추려 중요한 것만 이야기 하자면, 첫째, 대동법 실시였다. 방납에 대한 폐혜를 막기위한 방법이 대동법으로 공물을 현물로 걷는 대신 쌀로 내도록 간소화 시킨 것이다. 둘째, 허준의 『동의보감』편찬을 들 수 있다. 선조의 죽음으로 당시 어의였던 허준은 책임을 질 수 밖에 없는것이 관행이었던 것을 광해군에 의해서 허준이 죽음을 면하면서 총 25권 25책의 귀중한 문화유산이 탄생하게 된것이다. 세번째로 광해군의 치적은 중립 외교라고 할 수 있다. 근래에 들어서는 중립외교의 달인이라는 말이 나올정도로 임금 광해군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는데, 명나라와 청나라, 그리고 일본에 사이에 있으면서 적절한 외교를 했다는 점이다. 인조반정은 왜 일어났을까? 이귀가 반정을 일으킨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는데, 첫째, 광해군이 인륜을 저버렸다는 것이다. 어머니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고, 형과 아우를 죽이고 주변 사람까지 죽이는 패륜적 인 행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두번째 정치적으로 어려운 나라 상황에서 여러 차폐 큰 옥사를 일으켜 죄 없는 사람들을 가혹하게 죽였다는 점이고, 마지막으로는 나라 사이에 은혜를 저버렸다고 이야기를 한다. 물론, 그 당시 상황으로 미루어 보면 중국과 조선을 군주와 신하의 사이로 보고 있는 관행으로 인해서 그렇게 생각할수도 있었을 것이다. 역대 임금 가운데 권력을 잡거나 유지하려고 형제를 죽인 경우가 어디 한둘인가? 유독 광해군에게 그런 평가를 하는건 '인조반정'이 승리를 거두었고, 역사를 기록한 이들이 이들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광해군의 비극은 정치력이 부족하여 스스로 초래한 명이 있다. 반대 의견을 무시하고 소수 권세가를 중심으로 무리하게 정국을 이끌어 갔기 때문에 반란이 일어났고, 사태를 막아 줄 사람이 없었다. 정치인은 도덕가처럼 옳다는 신념만으로 행동할 수 없다. 아무리 옳은 정책이라도 많은 사람의 동의를 얻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대동법 시행과 『동의보감』편찬등으로 공적이 인정되지만, 궁궐 건축 사업은 지나쳐서 백성을 고통스럽게 했고, 중립 외교는 매우 신중하고 적절한 정책이었다고 평가됨에도 불구하고 대외 정책이 신하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것은 지도력의 부족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한 '폐모살제'등으로 가족 간의 윤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유교 국가에서 반정의 명분을 만든 것 또한 사실이다. 지나간 역사의 옳고 그름을 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를 돌아봐야만 한다. 그래서 왜 정치가 잘 되었고, 왜 정치가 잘못되었는가를 끊임없이 살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