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이야기 3 - 완결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3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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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3권을 읽었다. 고마운 이웃님이 선물해 주셔서, 일주일을 손에서 놓지 않고 읽은 것 같다.  3권을 읽다보니, 이 엄청난 사람들 이름 덕분에, 1.2권을 또 다시 뒤적거리게 되고, 마지막 장까지 갈수 있을까 싶었는데, 결국엔 책장을 덮었다.  아득함...  이 허함을 무엇으로 표현해야 할까?  1차에서 시작해서 8차까지의 이 기나긴 전쟁에서 남은것이 무엇이 있을까하는 생각에 가슴이 텅비어 버린 느낌이다.  또 다시 내 머릿속 지우개로 모든 것이 사라지기 전에 <십자군 이야기 3>로 들어가야 겠다.

 

 

 

 십자군의 남자들과 이슬람의 남자들을 지나서 이름만으로 헉 소리 나오는 인물들이 즐비하게 나오기 시작하는 제 3차 십자군의 문이 열렸다.  제 3차 십자군에는 '교황대리'가 동행하지 않았다.  독일 황제도, 프랑스 왕도, 영국왕도 성도 예루살렘이 이제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경악시키고 남았기 때문에, 교황이라는 제창자도, 그 제창을 받들어 유럽 전역을 설득하러 다니는 설교사도 필요하지 않은 '세속인들의 십자군'이었다.  표면적으로는 말이다.  믿음이 있는 사람도 움직이고, 싸움만 좋아하는 사람도 십자군이라는 이름하에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제 3차 십자군은 프랑스 왕과 영국 왕이 이끄는 군대가 중근동에 도착한 1191년에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하틴'에서 대패하고 예루살렘마저 탈환당한 1187년의 나머지 반년이 채 지나기 전에 티루스를 놓고 벌어진 공방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 티루스 공방전이 제3차 십자군의 첫번째 전투인 셈이다.   상대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성립하는 일신교끼리 격돌한 싸움. 양쪽 다 이교도를 죽이는 것을 신을 기쁘게 하는 행위이고, 설령 죽임을 당한다 해도 순교자가 되어 승천할 따름이라고 믿었던 사람들, 특히 예루살렘을 잃은 그리스도교측에는 한층 그런 마음이 강했으니 이 싸움의 끝은 알수가 없었다.  

 

 '붉은 수염'이라는 독일황제는 싸움터까지 가지도 못한 상태에서 익사를(작가는 늙은이의 냉수라는 표현을 한다. p.67) 하고, 프랑스의 젊은 왕 필리프는 잔머리를 굴리느냐고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유럽에서 온 그리스도교도', 이슬람교도가 '프랑크인'이라고 불리던 사람들 중 영국왕 리처드는 달랐다.  퍼포먼스로 사람들을 모을 줄 알았고, 지략과 전략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의 도착과 함께 그리스도교측은 지휘계통의 일원화가 실현되면서 수뇌들은 리처드의 명을 따르기 시작한다.  예루살렘 왕, 기드 뤼지냥이 있었지만, 누가 그의 말을 들었겠는가?  야코의 들어서기 전부터 그리스도측에 도움이 되는 안티오키아, 트르토사, 트리플리, 티루스와 키프로스를 제압한 후 리처드는 아르수프, 야파, 아스칼론을 차례대로 제압하기 시작한다.  이 상태로 나가면 성지수복은 코앞에 있을 것 같은 그때에 먼저 귀국해버린 프랑스왕 필리프가 리처드의 동생인 존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다는 소식이 전해져 온다.

 

<그림으로 보는 십자군 전쟁(시오노 나나미)>중 '살라딘과 리처드 1세' by 구스타브 도레

 

 로빈후드 속 존왕과 사자왕 리처드가 이렇게 연결이 되는지 <십자군 이야기>를 통해서 알았다.  '사자의 심장을 가진 자'처럼 전장을 누비는 갑옷을 두른 장수를 보면서 가슴이 철렁했었을 이슬람교도들이 붙힌 별명. '사자심 왕 리처드'가 로빈후드의 위기 때 짠하고 나타나던 그 사람이라니. 역사는 알면 알수록 재미있다.  어쨌든, 이제야 무적의 살라딘에게 적수가 생겼는데, 너무 많은 사상자를 내다보니 양쪽이 다 쉬고 싶었던 것 같다. 하루라도 빨리 영국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리처드. 점점 십자군측에 유리한 상황에서 살라딘과 강화를 맺을 생각을 한다.  교섭은 고급 아랍어를 구사할 뿐 아니라 협상에 달인이라는 발리앙 이벨린과 살라딘의 동생 알 아딜이 맡는다.   리처드는 전쟁을 좋아했던 인물이었지, 신앙심이 좋은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빨리 영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누이 동생 조안나를 알 아딜에게 주어서 예루살렘 왕으로 추대를 하겠다는 말까지 하니 말이다. 물론,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알 아딘이 받아들였을리도 만무하지만, 조안나 역시 가만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기나긴 밀당끝에 리처드는 예루살렘을 포기하겠다, 아스칼론도 포기하겠다면서 빨리 강화를 체결하자는 서신을 살라딘에게 보내고, 살라딘은 종교적인 관용과 경제적인 고려를 포함한 강화를 한다.  이렇게 제3차 십자군은 끝이 난다.  분명 십자군측은 예루살렘을 수복하지 못했다.  이를 목표로 세우고 원정을 시작했으니 군사적으로는 실패한 셈이다.  하지만 리처드와 살라딘이 성립한 이 평화는 강화조문에 명기된 3년 개월이라는 기한을 훌쩍 넘어, 1218년까지 26년 동안 이어진다. 물론 중간에 사고가 있긴했지만 말이다.

 

 이제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와 베네치아 공화국 도제 단돌로, 살라딘의 뒤를 잇게 된 알 아딜이 주역으로 나오는 4차 십자군 전쟁의 막이 오른다.  시종 표면에 나섰던 이가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였으니 이 싸움은 이교도와의 싸움이라고 보기 보다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실리를 위한 싸움이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리스도교도이기에 앞서 베네치아인'이라는 이들은 철저하게 실리를 앞세우면서 자신들에게 빚을 진 십자군들을 몰아붙이기 시작하면서 같은 그리스도교도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도 한다. 어쨌든, 원리주의와 무관한 일반 사람들에게 제 4차 십자군으로 얻어진 베네치아가 기지로 삼은 섬과 영리사업 덕분에 순례행은 더욱 안전하고 쾌적해졌다.   교황대리 '펠라조'가 움직인 제5차 십자군은 뭐라 할말이 없다.  무엇을 했는지도 모를정도로 헛수고였음에는 지명한 사실임에도 펠라조에게 책임을 묻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니 말이다.

 

 

 1228년부터 1229년까지의 황제 프리드리히가 이끄는 제 6차 십자군의 이야로 들어가보자.  제 3차 십자군이야기 만큼 재미있는 제6차 십자군. 교황은 십자군 참전을 끊임없이 하라고 하고, 죽어라 뻰질거리면서 가지않는 프리드리히에게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파문'을 공표하는데, 별 소용이 없었다.  이 남자는 가고 싶으면 가고 맘에 내키지 않으면 가지 않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카노사의 굴욕'을 생각했을 교황청에게 '로마 교황청이 어린 나를 도와주었다고 하는데, 내가 유년기였을 무렵 로마 교황청은 시칠리아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아 내 지위를 노리는 자들이 마음대로 활개를 치고 다녔다'(p.365)라는 서신을 보내니, 열받을 만큼 받은 교황은 두번째 파문을 내린다.  '애랑 노는 사람은 다 적이다'를 공표한 셈이니, 교황이나 황제나 유치하기가 짝이 없다. 어쨌든 이 지조 강한 남자는 싸움보다는 교섭을 좋아했고, 알 카밀과의 교섭은 10년간의 평화를 가져오는것 처럼 보였다.  문제는 불신앙의 무리와 교섭을 한 황제를 교황이 너무 미워했다는 것이다.  공공연하게 황제 프리드리히를 '그리스도의 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교황.  1230년 9월 1일에 '평화의 키스'로 화해를 하긴 하지만, 이 웃긴 남자들 덕분에 <십자군 이야기 3>편에서 어이없는 웃음을 지게 만든다.

 

 제7차와 제8차 십자군 전쟁을 끝으로 십자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성인이라는 칭송을 받는 프랑스왕 루이9세가 제1차 십자군을 시작으로 얻어냈던 모든 것을 하나씩 빼앗기기 시작하더니,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성지만 남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성지 탈환'을 위해서 평생을 살았던 사람들의 모든것도 사라지기 시작한다. 교황이 콕콕 찔러서 십자군을 일으켜야하는데, 프랑스의 미남왕 필리프 4세는 십자군도 성지도 되찾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찾은 방법이 프랑스에 있는 템플 기사단을 이단으로 몰아 붙이는 것이었다.  프랑스로 돌아가기 위해 적극적이던 템플 기사단은 눈엣가시같은 존재였으니 말이다.  이단재판소를 통해서 벌어지는 템플 기사단의 고문은 상상을 초월한다.  성지에 세운 십자군 국가를 2백 년 동안 지탱해온 기둥 중 하나로 2만 명이 넘는 단원을 희생해온 템플 기사단은, 그릇된 신앙방식을 고발하는 '이단재판'의 심판을 받게 된 것만으로도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을 것이다. 거기에 이단의 증거가 127가지나 된다고 고발을 했으니 왕이라는 자들의 상상력이 좋았던 것인지, 비열하기가 극을 달했던것인지 알수가 없다.

 

 '성묘의 수호자' 고드프루아와 젊음의 상징이었던 탄크레디를 시작으로한 제 1차 십자군부터 문둥이 왕, 보두앵 4세와 이슬람의 장기를 거친 누네딘, 살라딘, 알 아딘,  사자심왕 리처드와 존엉왕 필리프등의 이야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던 <십자군 이야기>는 끝이 났다.  유일신을 믿는 두 종교 집단의 이야기였지만, 진정 이 싸움이 신을 위한 싸움이었을까?   200년에 걸친 8차에 걸친 싸움은 수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냈고, 십자군을 모티브로한 이야기 또한 수없이 만들어지고 있다.  유럽에 싸우는 영주들에 눈을 다른곳으로 돌리기 위해서, 자신의 권위를 위해서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는 말로 젊은이들을 싸움터로 보내버린 200년의 싸움.  왜 유럽에서 이 먼곳까지 와서 싸움을 걸까하고 아무 생각없이 싸우다, "알라는 위대하다!"라는 말로 유일신들의 싸움이 되어버린 곳.  그들의 싸움은 분명 끝이 났는데, 여전히 나는 전쟁의 한가운데에 서있다.  나는 어느곳을 향해야 할까?  바라보는 눈이 진정 신의 눈이 되어 신이 바라시는것을 바라볼 수 있을까?  십자군 전쟁은 끝났지만, 아직도 십자군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아마, 이 싸움은 인류가 살아있는 한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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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렸을까? - 최영 vs 이성계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21
김갑동 지음, 조진옥 그림 / 자음과모음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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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공화국 시리즈를 좋아한다.  승자의 기록만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더 좋아한다. 이 책을 어디서 부터 읽었는지 생각나지 않지만, 드문드문 읽어내려서, 역사의 맥이 끊긴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읽고싶었는데, 위만조선부터 들어가기엔 시간이 걸릴 것 같고, 고려의 마지막과 조선을 이어주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부터 읽어내려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중간중간 읽은 책들도 있지만, 그 부분은 그때가서 다시 읽기로 하고, 고려 말 북벌정책을 폈던 우왕과 최영. 요동 정벌을 포기하고 회군해버린 이성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한다.  만약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지 않고 요동 정벌에 성공했다면 고려는 고구려의 옛영토를 회복 할 수 있었을까?

 

 

 고려 말의 명장, 최영이 김딴지 변호사를 찾아왔다.  그가 소송을 건 사람은 태조 이성계.  최영장군은 이성계가 요동을 정벌하라는 왕의 명령을 어기고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린 반역자에 불과한데, 후손들이 그를 영웅처럼 높이 평가한다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 아닌가?  거기에 사람을 죽이기를 즐겨하는 장수라는 오명까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만약 요동 정벌을 성공시켰더라면 한반도가 이렇게 작아지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국력도 지금보다 훨씬 커졌을 테니 말이다.

 

 신기에 가까운 활솜씨를 가졌던 이성계는 백 보 이상의 거리에 있는 투구나 날아가는 새 따위의 표적을 정해놓고 '저것을 맞추면 이번 전투는 우리가 승리한다'라는 식으로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던 인물이었다. 물론 그 화살이 1388년에는 아군을 겨냥했다고 김딴지 변호사는 이야기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성계는 전쟁을 끝내고 백성들을 토탄에서 구하려면 개혁이 필요했다고 이야기를 한다.  개혁이 필요했다?  그당시 고려가 어떻길래 개혁을 운운하는 것일까?   1374년 불과 열살에 왕이 된 우왕은 힘이 없었다.  사람들은 더 높은 자리로 나가기 위해 권문세족에게 뇌물을 바쳤고, 백성은 안중에도 없었다.  고려는

왕과 조정 대신만 있는 나라였다.

 

 

 요동정벌은 우왕입장에서는 왕권강화를 위한 꼭 필요한 결정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끊임없이 조정 대신들은 반대를 했고, 이성계 역시 사불가론을 이야기한다.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옳지 않다.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좋지 않다. 셋째, 거국적인 원정으로 왜가 그 허점을 틈탈 것이다. 넷째, 지금은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이므로 활의 붙임이 풀려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군대가 질병에 걸릴 것이다.  사불가론과 함께 이성계는 회군을 하고 가장 먼저 최영을 제거한다.  그리고 '페가입진(廢假立眞)'이라 하여 창왕을 폐위할때 명분으로 내세운것이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니라 신씨라고 주장한 것이다.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라는 것에 진의는 여전히 알수 없지만, 이성계는 역성혁명을 내세우면서 <고려사>에 '페가입진(廢假立眞)'을 열전에 넣고, 끊임없이 왕씨의 존재를 없앤다. 고려 400년 역사속 모든 왕이 왕씨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 500년이 지나면서 왕씨를 찾아 볼수 없다는 것은 이성계가 왕씨의 자립을 얼마나 두려워했나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달은 차면 기우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받아들이는 것이 쉬운것은 아니다.  고려 왕실을 수호하려는 보수 성향의 권문세족을 대표하는 최영과 현실 개혁 성향이 강한 신진 사류를 대표하는 이성계.  군대의 시각에서 본다는 충실한 무장이었던 최영에게 이성계는 반역자지만, 당시의 모순된 현실을 개혁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던 측면에서 보면 이성계는 그 시대의 요구를 잘 읽어낸 사람이다.  지나간 역사는 만약에라는 말로 되돌릴수는 없다. 하지만 끊임없이 숙고해야만 한다. 역사는 돌고 돈다.  시대도 상황도 다르지만 이 돌고 도는 역사를 제대로 끌어나가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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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세계 아이들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14
프랑수아즈 제 지음, 최정수 옮김 / 자음과모음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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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내 22개 문학상 노미네이트, 6개 문학상 수상작. 코냐크 추리소설상, 메종 파밀리알 루랄 상, 블랑크포르 시 고등학생상, 사블레 쉬르 사르트 독자상, 벨기에 파르니앙트상, 반 시 중학생상. 책 한권의 이력이 대단하다. 책을 수식하고 있는 상들이 어찌나 많은지 어른들은 혹할것이고, 아이들은 어떨까 싶은데, 이 상 이들이 고등학생, 중학생 하니 프랑스내에서는 필독서 정도 되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나라도 뭔가 상을 받으면 필독으로 한권씩 들어가니 말이다.  겉표지만 보고 드는 생각은?  빨간머리의 여자아이가 갓난아이를 안고 있고, 그 옆에 조금 더 큰 사내아이가 어린 아이 손을 잡고 있다.  아이들이 서있는 곳이 심상치 않다. 맨홀뚜껑. 그 밑은 지하를 나타내는 것 같다.  그곳에 알수 없는 괴물체들. 사람일까? 알수없다.  그리고 커다랗고 무서운 손.  처음 보았을때는 악마의 손인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아이들앞에 펼쳐진 길. 뜬금없이 그 길 끝에 노란 문이 '트루먼 쇼'의 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25년.  가까운 미래가 눈앞에 펼쳐진다.  대기를 오염시키고 석유에너지를 대량으로 소모하는 자동차가 사라진 미래. 2010년대 초에 화석 에너지가 고갈되고 탄산가스가 대기를 오염시키자 비행기를 운송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는 시대라니, 과거로의 회기일까? 아니면 유토피아의 도래일까?  평온함을 기대하고 있었다면 꿈을 버려야 한다. 지상 세계는 경찰력으로 유지되고 하수도에는 고아들이 살아간다. 강한자만이 살아남는 그 곳에 열일곱 소녀 이리엘이 다섯살 난 조드와 함께 지내고 있다.  그리고 모세처럼 물속에서 건져낸 아이, 모이자가 그녀의 가족이다.   부모없이 지하세계에서 살고 있는 아이가 되지않기위해서 이리엘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지하세계 아이가 되지 않기 위해, 삶의 무게를 견디기 위해, 다른 삶에 대해 말해주는 책들이 필요했다.  신문과 잡지를 통해 자신이 살다가 쫓겨난 곳, 자신이 씁씁하게 '부자구역'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기도 했다. p.25

 

 이 아이들 앞에 나타난 지하세계의 아이, 놀란. 하수도 아이들의 공격속에서 놀란은 이리엘을 구해내면서, 돌아 갈곳이 없어진다.  그리고 이 아이들은 버려진 비행기 A380안에서 자신들만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이리엘과 조드에게서 글을 배우면서 놀란은 새로움을 경험한다.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평온함이 놀란을 감싸면서 놀란은 산다는 것에 경이로움을 배워나가기 시작한다.  이리엘이 주운 아이들, 조드(쓰레기통에서 주운 아이)와 모이자(하수도에서 주운 아이)도 그렇지만, 이 아이들은 트라우마를 안고 살고 있다.  부모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도망칠 수 밖에 없었던 이리엘과 큰형이 잡혀가는 것을 보면서도 숨을 죽여야 했던 놀란.

 

 빈곤과 폭력이 지배하는 세상.  A380안에서는 모든것이 해결될 것 같았지만, 아이들의 은신처에 경찰들이 습격해 오면서 잠깐의 행복은 깨어져버린다. 다시 만날 수 있는 길이 있을까?  열 일곱, 다섯, 한 살도 안 된 아이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면, 청소년 소설을 읽을 준비가 덜 된 것이다.  '15소년 표류기'를 넘어서고, '로빈슨 크로소'에서 로빈슨이 프라이데이에게 글을 알려주는것처럼 아이들은 스스로 깨우치면서 적응을 하고, 살아나간다.  아이들이 갇히게 된 기숙학교.  갇혔다는 표현이 옳은지는 알수 없지만, 이 곳에서 나가면 모두가 꺼리는 일을 해야만 한단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나간단다.   근간에 나오고 있는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들은 무섭다. 두려움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무섭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미래의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꿈꾸는 것이 당연함에도 그러지 못하는 것은 현실이 너무나 어둡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끝에는 언제나 희망이 있다.  이 책은 청소년 소설이다. 그래서 희망이 있다.  어두운 세상.  혁명의 기운이 감돌고 울분을 토하는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스모그. 그가 아이들을 찾기 시작한다. 스모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어찌어찌 될꺼라는 이야기를 하고는 있지만, 그것으로 결론이 난것인지 모르겠다.  하루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이 아이들에게서 미래를 이야기하기는 힘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희망을 품어본다.  300페이지 가량되는 얇은 책. 어른의 시각으로 읽으면 결말이 뭐 이러지라고 이야기 할 수도 있지만, 아이들 입장에서는 이게 딱일 듯 하다. 그리고 스모그와 오팔리아의 말이 현실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겁이 난다니 다행이네요!  그 두려움과 무서움이 당신에게서 떠나지 않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거만함, 지나친 확신, 당신의 자리에서 이익을 끌어내려는 욕망에 굴복하지 못하도록 말이에요. 궐녁은 끔찍한 유혹을 함께 몰고 오니까요.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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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슨이 들려주는 생물 다양성 이야기 과학자가 들려주는 과학 이야기 130
한영식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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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에는 얼마나 많은 생물들이 살고 있을까?  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지구촌 생물의 숫자는 전 세계 70억명 인구의 머리카락을 모두 합한 것보다도 많을 거란다.  많기도 많다.  다양하게 많다.  다양하다는 것은 모양, 빛깔, 형태, 양식 등의 특성이 매우 많은 걸 이야기 한다.  이 지구상에는 다양한것도 많다.  그중 지구촌에 살고 있는 생물은 정말 다양하다.  다양성이 풍부한 곤충만 생각해봐도 장수풍뎅이, 사슴벌레, 하늘소, 바구미, 무당벌레, 나비, 나방, 벌, 파리, 노린재, 매미, 잠자리, 메뚜기.... 아휴.. 이름을 다 델수도 없을 많큼 많다.  이렇게 다양하게 많은 생물을 처음엔 '자연의 다양성'이나 '생물학적 다양성'이라고 부르다가, 윌슨이 '생물학적 다양성'을 축약해서 '생물 다양성'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쓰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단다.

 

 

 큰 아이가 6학년이다.  6학년 과학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 중에 '생태계'에 관한 내용이 있다.  그 내용들이 <윌슨이 들려주는 생물 다양성 이야기>속에 들어있다.  생물 다양성을 왜 이야기 하는지는 이 다양성으로 생물종이 풍성해지고, 생물 유전가 풍성해지고, 생태계 또한 풍성해지기 때문이란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거 아닌가 하고 생각을 했는데, 이 단순하고 쉬운 문제를 인간들이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생태계는 생물과 비생물로 이루어지고, 생물은 원핵생물계, 원생생물계, 균계, 식물계, 동물계로 나뉘어 진다.  이렇게 나뉘어진 생물 다양성은 종 다양성, 유전자 다양성, 생태계 다양성을 포함하고 있다.  이 중에서 종이란 모습이 닮은 같은 종류의 생물을 말하는 것으로 짝짓기가 가능한 무리를 말한다.  종이 다양할수록 생물들이 풍요로워 진다고 할수 있는데, 라이거나 노새처럼 다음세대를 이을수 없는 것은 종이 아니다.

 

 생태계를 배우다 보면 먹이사슬과 먹이 그물이 나온다.  어떤것이 더 풍족할까는 두말없이 먹이 그물이다.  한 생물 종의 멸종으로 시작된 생물 다양성 감소가 연쇄적으로 생물 종을 멸종시키는 생물 다양성의 감소로 이어진다.  직육면체 나뭇조각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후 하나씩 빼다가 전체 구조물이 무너지면 끝이 나는 젠가라는 게임처럼 종의 멸종은 생태계를 위협한다.  물론 과거에도 멸종하는 동물은 있었다. 하지만 생물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 절멸이 과거에도 자연에 의해 일어났지만, 지금은 인간에 의해 훨씬 많은 생물들이 절멸위기에 놓이게 된것이 문제다.  환겨오염, 사막화, 지구온난화등의 인간들이 만들어낸 문제로 인한 멸종을 오스트리아의 생물철학자인 프란츠 부케티츠는 <멸종, 사라진 것들>을 통해서 지구 역사상 6번째 대 멸종이라고 말하고도 있다.  이때문에 위급, 위기, 취약으로 등급을 나눈 '적색목록'을 통해서 생물다양성 감소를 알리기위해 노력하고 있다.

 

 

 생태계는 인간에는 많은 것을 제공하고 있다.  생물 다양성과 생태계 서비스의 경제적 가치는 수치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높은데, 생태계가 인간에게 제공하는 서비스는 물자 서비스, 문화 서비스, 부양 서비스, 조절 서비스등이 있다.  생태계로부터 얻고 있는 것은 비단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풍요와 여가활동과 아이디어등이 있고, 모든 생물에게 서식지를 제공하며 종자를 퍼트리고, 양분 순환등의 조절서비스까지 하고 있다.  하지만 생태계의 높은 가치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경제 발전을 위해 생태계를 많이 훼손해 왔다. 현대 사회는 생태계 보존과 보전을 위해서 노력을 하는 나라가 부강한 나라다. 우리나라의 보호지역은 전 국토의 11.2%나 돼는데, 과거엔 개발과 보전에 많은 혼란이 있었지만, 현재는 생물다양성 보호를 위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

 

 여전히 우리들은 생물 자원을 함부로 다루고 있다.  그로인해 생물 다양성이 급격히 감소하면서 인류의 생존에도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다.  생물자원은 잠재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고, 생물 다양성은 인류의 생활 환겨을 보전해 준다.  그뿐 아니라 생물 다양성은 고유하며 복제가 불가능하다. 그러기에 생물 자원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멸종된 종을 복원하려고 노력하는것이 생물 다양성을 보존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모든것은 국가나 범세계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공책 끝까지 쓰기, 물 아껴쓰기, 전기 절약하기 같은 우리 손으로 할수 있는 것들을 하면서 환경보호를 하는것이 생물 다양성을 보전하는 길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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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 2
고우영 글 그림 / 자음과모음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정통 무예와 비술을 배운 길동.  길동은 무예와 글을 가르쳐준 무학과 백학이 길동 아버지의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바위처럼 무거운 힘을 기르고, 독사보다 빠른 검술을 배운 길동은 산속에서 산적 두목 노릇을 하고 있는 흑표를 찾아가 대결을 펼친다.  흑표가 대결에 패함으로 흑표가 거느리던 산적들은 도적질에서 손을 떼고, 열심히 땅을 일구고, 남은 고식은 가난한 자들에게 베푸는 성실한 삶을 살기 시작한다.  그런데, 흑표는 순순히 두목자리를 길동에게 내줄까?  자신의 제자였던 아이가 어느순간 커서 두목자리를 내어달라고 하는데, 누가 마음이 편하겠는가?  하지만, 흑표가 죽을 위기에 처했을때, 길동이 살려줌으로 그런 앙금은 사라진다.  

 

 

 이곳에서 길동은 고전 <홍길동>의 '활빈당'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부모형제를 잃은 고아들을 거두어 함께 살수 있는 마을을 꿈꾸면서 길동은 마을로 내려간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비슷한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삼형제를 만나게 된 길동.  부모없는 삼형제가 학대받는 것을 본후 길동은 아이들과 함께 하려 하는데, 유괴범들의 농간으로 현감 홍삼표는 길동을 잡아들이게 된다.  그당시의 유괴범이라니, 말도 안되지 싶지만, 고우영작가는 인간의 욕심을 이야기 하고 있다. 북방 오랑캐들 마을에 전염병이 들었는데, 오랑캐 무당이 푸닥거리를 하면서 남쪽지방에 사는 어린아이가 약이라는 얼토당토않는 말을 늘어놓았단다.  그러니 아이를 유괴하는 자들이 늘어났고, 부모없는 아이야 오죽 쉬운 표적이었겠는가? 

 

 유괴범들과의 한판 승부뒤에 길동이 유괴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고, 아이들은 맛있는걸 준다는 말에 현혹되어 유괴범들을 따른다.  요즘이나 예전이나 '빨간모자'의 진실은 그대로 사용되는 모양이다.  맛있는거 준다는 모른는 사람은 따라가지 말라는 말들을 어쩜 이렇게 듣지 않는지 모른다.  길동은?  신약의 바울의 전도내역을 들은것처럼 볏집으로 분신을 만들어 옥에 두고는 아이들을 찾아나선다.  아이를 어떻하면 찾을 수 있을까?  조직망으로 짜여진 인신매매범들.  길동의 아킬레스가 북소리라는 것을 알아내고는 계속 움직이는 북을 만들어 내는데, 고우영 작가의 위트를 발견하는 순간이다.  트라우마인 북소리를 어떻게 극복해 낼까 걱정하는 순간, 짠하고 나타나는 스님.

 

 고우영 선생의 <홍길동>은 이게 끝이다.  스님의 도움으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아이들과 함께 자신이 사는 곳으로 가는 것으로 말이다.  길동의 아버지는 홍익재는? 살아있다.  무학과 배학이 말을 안했을 뿐이지 역모에서도 풀렸다.  그런데, 길동에게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다.  활빈당도 율국도도 없다.  어찌보면 길동이 부모때문에 원수를 갚을 일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고우영 작가는 우리가 꿈꾸던 길동을 통해서 약자가 살사는 세상을 꿈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약자를 돌볼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말이다.  2권의 책을 통해서 많은 에피소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고전 <홍길동전>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고우영 선생의 특유의 익살과 유머는 또 다른 <홍길동>을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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