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크로스로드
조너선 프랜즌 지음,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11월
평점 :
크로스로드
조너선 프랜즌 | 강동혁 옮김 | 은행나무
영미소설 / p.872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택에 여지없이 한 부모의 아이로 태어나 부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해 나간다. 그리고 부모의 양육 스타일에 따라 성장해 나가며 정체성을 가지게 되고, 더 나아가 친구, 학교, 직장, 종교 등으로 확장해 나가면서 다양한 정체성을 더해 나간다. 그만큼 그 사람의 인생에 있어 모든 것의 시작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회의 기본단위인 가족은 중요하다.
그런 가족이 흔들리게 되면 어떻게 될까? 나의 뿌리이기도 하고 혼란과 불확실한 세상에서 온전히 내 편이 되어줄 거 같은 든든함이자 휴식처였던 ‘가족’이 흔들리면 어른들도 힘들겠지만 제일 큰 영향을 받게 되는 건 아이들이지 않을까?
붕괴 직전의 현대 가족 이야기를 각자의 시선에서 들려주던 「크로스로드」를 통해 그 모습을 자세히 엿볼 수 있었다.
미국 중서부 시카고 교외의 한마을에서 부목사로 일하는 러스 힐데브란트를 아버지로 둔 클렘은 형이상학적인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아버지의 인정이 받고 싶어 교회 행사에도 참여할 정도로 16년 이상 아버지를 존경해왔다. 하지만 이제 러스는 클렘에게 역겨운 존재이면서 도덕적 사기꾼이었으며 클렘이 학생 징병 유예 혜택까지 포기하며 베트남 전쟁에 나가게 하는 존재가 된다.
아내를 두고 있으면서도 최근 남편을 잃고 고향으로 돌아온 프랜시스 코트렐 부인을 탐내던 러스. 가난한 자를 돌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토록 떠벌리면서도 정작 자신의 아들 페리에게선 오직 결점만을 보았고, 딸 베키의 공손함을 이용해 산책에 끌고 갔으며, 청년부의 아이들이 릭 앰브로즈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의 이름에 먹칠까지 한다.
그리고 네 명의 아이들의 어머니이자 러스의 아내 매리언은 자신의 과거 사건으로 인해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받으면서도 가족들에게 숨겼고, 재능이 뛰어났지만 마음이 가난했던 페리는 누나에 대한 열등감과 질투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약물에 점점 중독되어 간다. 이러한 페리를 자신과 동일하게 보며 애지중지한다던 매리언이었지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지는 않는다.
이모에게 유산을 물려받아 사립 대학으로 진학하는 것을 꿈꾸던 인기인 베키는 오래 사귄 여자 친구가 있는 밴드 리더 태너 에번스와 사랑에 빠진다.
유일하게 이 가족 중에서 순진무구하게 보였던 존재는 아홉 살 어린 막내 저드슨뿐. 이 가족 괜찮은 걸까?
한 국가의 경제란 어찌나 정신질환과 비슷한지!
시장의 붕괴와 아버지의 붕괴가 우연히 동시에 일어난 건
너무도 불가피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후반부쯤 생각지 못한 러스의 과거의 등장은 앞서 읽은 이야기를 새롭게 보이게 할 만큼 색다르게 다가왔다. ‘그렇지. 이 사람도 한때는 그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개인이었구나.’를 깨달으며 그 순간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며 이 가족이 이렇게 되기까지의 그 과정들이 더 안타깝게 다가왔다.
베키의 길을 안내해 주는 별이었던 클렘과 한때 할리우드 배우를 꿈꿔왔던 매리언이 가족 모두에게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현재에서 변화해가던 모습들이, 성스러운 땅에 발전소가 세워지는 걸 지켜봐야 했던 나바호 인디언들의 아픔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자신의 길을 강단 있게 가던 베키에게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인종차별, 베트남 전쟁, 마약, 빈곤과 결핍 등 가족 안에서의 문제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문제까지 긴밀하게 연결되어 보여주던 이야기를 각자의 시선으로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던 감정들로 엿볼 수 있어 좋았던 「크로스로드」였다. 나의 가족의 모습은 어떠한지 그리고 크로스로드에서 말하던 '진심을 다해 귀 기울여 듣는 것'을 나는 하고 있는지도 생각해 본다.
ps. 재미있었던 건 러스가 프랜시스 코트렐 부인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보는 사람마다 다 알아챈다는 것이다. 자신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아내 그리고 자신이 적대시하던 릭 앰브로즈에게까지. 아니 어떻게 이렇게 다 걸리지?! 이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정말.
▶ 너무 가난해서 가진 것이라고는 그 애들밖에 없다고 상상해 보세요. (중략) 오늘 당신이 경험한 일은 그 동네 사람들이 매일 경험하는 일이에요. 못된 말과 인종적 편견 같은 것들이요. p.26~27
▶ 나는 평생 너랑 함께 살았으니까.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너를 잘 알아볼 수 있어. 나는...... 나는 정말로 너를 더 잘 알고 싶어. 너는 내 동생이니까. 하지만 그전에, 네 안에 알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있는지 알아야겠어. p.64
▶ 여기에서 중요한 건 듣는 거야. 알았지? 정말로 귀 기울이는 것 말이다. p.110
▶ 그저 정직하게 말하고 감정에 항복하고 다른 사람들의 정직함과 감정을 응원하는 것만으로 베키는 자신의 영성이 처음으로 반짝이는 것을 경험했다. p.114
▶ 진심 없는 사랑은 공허하고 파괴적이라고 말했다. p.172
▶ 그녀는 스무 살짜리의 마음을 가진, 네 아이의 엄마였다. p.409
▶ 아버지는 나를 대학에 보내고, 웬 흑인 아이를 나 대신 베트남으로 보내서 싸우게 했으면서 아무 문제도 못 느꼈어요. 애팔래치아 출신의 가난한 백인 아이일 수도 있겠죠. 아니면 키스 두로치의 아들 같은 가난한 나바호 인디언일 수도 있겠네요. 아빠는 아빠가 키스보다 나은 사람인 것 같아요? 내 목숨이 토미 두로치의 목숨보다 소중한 것 같으냐고요? 나바호 소년들이 죽어가는데 나는 대학에 다니는 게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해요? p.460
▶ 너무 늦은 건 없어. 네가 그 애를 사랑하고, 그 애도 너를 사랑한다면 그 애를 떠나지 마. 그렇게 간단한 일이야. 사랑하는 사람한테서 도망치지 마. p.519
▶ 나는 기도하고 또 기도했어요. 그랬더니 당신이 나타났죠. 내 보상이. 그렇게 말해도 되나요? 당신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선물 같아요. 당신은 나한테 그만큼 기적이에요. p.666
▶ 노천 광산에서는 계속해서 먼지가 풍겨 나왔다. 그 사이사이의 비탈에는 나무도, 생명도 없었다. 땅은 물에 굶주렸고 죽음에 이를 때까지 풀이 뜯겨나갔다. p.705
▶ 어떤 사람들은 부모님을 좋아할 수 있는 행운을 타고났지만, 난 아니야. p.851
▶ 나쁜 소식이라도 있어? 누가 아프데?
응. 뭐…… 맞아.
그럼 당장 가. 가족보다 중요한 건 없어. p.854~8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