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 독서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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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독서

 박노해 | 느린걸음

마음아 천천히

천천히 걸어라

내 영혼이

길을 잃지 않도록

「걷는 독서」의 외향은 사전을 떠올리게 하는 크기와 두께(p.880)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부담보다는 앙증맞다는 말과 함께 즐거운 마음이 절로 나오게 만든다. 아마도 빼곡하게 적힌 글이 아닌 각 페이지를 채우고 있는 컬러 사진과 한 줄의 문장 그리고 여백들이 읽는 이로 하여금 여유를 느끼게 만들기 때문인듯하다.

시인이면서 사진작가이기도 하고 혁명가인 박노해 시인은 늘 걷는 사람이었고 ‘걷는 독서’를 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학교가 끝나는 길에, 가을바람에 물든 잎이 지는 길에, 동백꽃이 떨어진 흰 눈길 등을 걸으며 ‘걷는 독서’를 했고, 군사독재 정권 하에 무기수로 감옥 독방에 갇혀있을 때도 ‘걷는 독서’를 계속한다.

‘걷는 독서’를 할 때면 두 세상 사이의 유랑자로 또 다른 세계를 걸어가고 있었다는 박노해 시인, 그가 매일 아침 한 줄의 문장과 사진으로 수많은 이들의 하루를 함께 해온 7년간 연재한 2,400편 가운데 엄선해 묶은 「걷는 독서」를 통해 그의 일과이자 그의 기도이고 그의 창조의 원천을 만나볼 수 있었다.

 

 

 

 

이 소란한 세계의 한 구석에

 내 영혼이 오롯이 앉을 수 있는

 오래되고 아늑한 의자 하나.

 잠깐, 생각에 잠기는 그 순간

 하나의 세계가 탄생하는 자리.

 p.116

박노해 시인이 온몸으로 살고 사랑하고 저항해온 삶의 정수가 담긴 사상과 문장, 세계의 숨은 빛을 담은 사진이 어우러진 작품을 보며 하염없이 ‘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나’ 자신을 들여다보며 ‘나’ 자신을 찾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우린 지금 너무 많이 읽고 너무 많이 알고 너무 많이 경험하고 있다. 잠시도 내면의 느낌에 머물지 못하고 깊은 침묵과 고독을 견디지 못하고, 끊임없이 찾아다니고 찍어 올리고 나를 알리고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인정을 구하고 있다. 그리하여 책을 읽는 것조차 경쟁이 되고 과시와 장식의 독서가 되고 말았다.(p.11)

이 문장을 접하는 순간 얼굴이 절로 붉혀졌다. 최근 책이 나를 읽는 건지 내가 책을 읽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빠진 나에게 ‘정신 차리라’고 말하는 거 같았다. 내가 책 속의 지식을 약탈하는 듯하지만 그 지식이 나의 생을 약탈하고 있다는 말에 울컥해지기도 했다.

 

자신감 갖기가 아닌 자신이 되기, 많은 만남보다 속 깊은 만남을, 그저 그런 책 백 권을 읽는 것보다 단 한 권의 책을 거듭 읽는 게 낫다, 일을 위한 삶인가 삶을 위한 일인가, ‘바빠서’라는 건 없다. 나에게 우선순위가 아닐 뿐 등 한 줄의 문장과 어우러진 사진을 보며 오롯이 나에게 집중해 생각에 잠기는 그 순간들이 더없이 좋았다.

우리 모두는 별에서 온 아이들이고 내 안에는 별이 빛나고 있다고 주어진 길 밖의 모든 길이 그대의 것이고 심어진 꿈 밖의 모든 꿈이 그대의 것이라는 말에 위로와 응원을 받기도 했다.

가만히 한 장 한 장 넘기며 음미하기에도 좋고, 순서와 상관없이 손이 가는 대로 펼쳐진 문장을 읽어도 좋다. 오늘 읽었던 문장이 다른 날 다른 상황에서 다르게 마음속으로 스며들기도 한다. 거기에 우리말의 깊은 뜻과 운율까지 살린 영문이 나란히 수록되어 있어 좋은 문장을 영어로 동시에 읽는 기쁨도 누릴 수 있다.

처음 해보는 부모 노릇, 처음 해보는 아이 노릇, 모자라고 실수투성이인 우리가 만나 서로 가르치고 격려하고 채워주며 언젠가 이별이 오는 그날까지 이 지상에서 한 생을 동행하기를(p.836), 영원이란 ‘끝도 없이’가 아니라 ‘지금 완전히’ 사는 것임(p.34)을 잊지 말자.

 

 

독서의 완성은 삶이기에.

 그리하여 우리 모두는 저마다

 한 권의 책을 써나가는 사람이다.

 삶이라는 단 한 권의 책을.

 p.12

「걷는 독서」를 읽으며 이 소란한 세계에서 오롯이 나만의 세계를 들여다보며 여유로움을 즐길 수 있었고 때론 필사를, 때론 그냥 읽기도 하고 때론 누구에게 위로와 희망을 선물해 줄 수 있는 책이다. 지금 나의 리뷰를 통해 접하게 된 문장들이 당신에게도 잠깐의 쉼이, 잠깐의 여유의 시간이 되었길....^^

 

ps. 서울 통의동 ‘라 카페 갤러리’에서 박노해 시인의 「걷는 독서」展이 진행 중이다. 9월 26일까지 무료 전시 관람이 가능하다고 하니 작은 사이즈에 대한 사진의 아쉬움을 이곳에서 채워보는 것도 좋을 거 같다.

 

 

+ 출판사 느린걸음을 통해 책만 협찬받아 읽고 작성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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