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 흐르는 곳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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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흐르는 곳에

스티븐 킹 | 황금가지

인간의 뇌는 한계가 있지만

그 안에 담긴 정신은 무한하단다.

저장 능력이 어마어마하고

상상력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지.

p.166

스티븐 킹의 최신 중편 소설집 「피가 흐르는 곳에」는 2020년 미국에서 첫 출간되었을 때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 등극한 작품으로 넷플릭스, 벤 스틸러 등에게 수록작 4편 모두 바로 영상화 판권이 팔려 화제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호러 킹'이라 불리는 그의 작품이라는 듯 피가 낭자한 듯한 책 표지와 더해진 제목이 으스스함을 자아낸다. 공포와는 거리가 먼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온전히 띠지에 적힌 '그가 왜 이야기의 제왕인지 확인시켜주는 4편의 매우 매력적인 이야기'라는 글귀 때문이었다.

그리고 책을 다 읽은 후 그 띠지의 글귀보다 더 이 책을 잘 표현할 문장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정말 스티븐 킹의 매력적인 4편의 중편소설을 만나볼 수 있었다.

평범한 일상 속의 이야기인 듯 '이 이야기 한번 들어보지 않을래?'라며 편하게 다가오던 그 이야기들이 교묘하게 불안을 자극하며 읽는 나로 하여금 그 이면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상상이 주는 오싹함과 짜릿함이 책 읽는 즐거움을 더해주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생각했던 결말로 끝난 이야기가 하나도 없단 말이냐?!ㅋㅋㅋ




헨리 소로는 말했지,

우리가 물건을 소유하는 게 아니라 물건이 우리를 소유하는 거라고.

집이 됐건 차가 됐건 텔레비전이 됐건 그런 근사한 전화기가 됐건,

뭔가 새로운 게 추가되면 우리가 짊어져야 하는 게 늘어나는 거야.

그러고 보니 제이콥 말리가 스쿠루지에게 한 말이 생각나는구나.

이것들이 내가 살아가면서 만든 족쇄였어.'

p.36

4편의 매력적인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 「피가 흐르는 곳에」 그 첫 번째 이야기는 은퇴 후 작은 마을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는 해리건씨에게 크레이그가 책을 읽어주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일어나는 '해리건 씨의 이야기'이다.

해리건씨에게 매번 받던 복권에 당첨이 된 크레이그가 해리건 씨에게 제1세대 아이폰을 선물해 주게 되고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뉴스와 주식 등의 다양한 기능에 신문물을 거부하던 해리건씨도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노환으로 돌아가신 해리건 씨, 그에게 크레이그는 감사했다는 메시지와 함께 그가 아끼던 아이폰을 해리건 씨 시신에 몰래 넣는다.

장례식을 치른 날 천둥 치는 소리에 잠이 깬 크레이그는 해리건 씨가 죽었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은 마음에 전화를 건다. 쇳소리와 함께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라는 그의 음성이 들려오고(무섭) 크레이그는 그가 살아난다면 자신에게 남긴 돈도 포기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남긴다. 그런데 다음 날 해리건 씨에게 문자 메시지가 도착해 있다?!(소오름!)

오늘은 화분에 물을 주지 않아도 된다, G부인이 했어. CCC aa 수신된 시각은 새벽 2시 40분이었다.

p.75

와~! 이때의 오싹함이란! '뭐야, 뭐야'라는 말이 절로 나왔던 문자 메시지는 이날 이후에도 계속된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해리건 씨에게 전화를 걸게 된 크레이그와 그의 바람을 해리건 씨가 들어주듯 사건이 해결되는 기묘한 이야기였다. 오싹함뿐만 아니라 해리건 씨와 크레이그의 기묘한 우정 이야기가 임팩트 있게 다가왔다.

응답을 바랄 때만 부르짖으라. 그날 나는 응답을 바랐다.

p.125

21세기에 우리는 전화기를 통해 세상과 혼사를 맺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 결혼 생활은 불행할지도 모른다.

p.133




한 사람이 죽으면 온 세상이 무너진다고 본다.

그 사람이 알았고 믿어온 세상이.

생각해 봐라.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구가 수십억 명인데,

그 수십억 명 각자의 안에 하나씩의 세상이 있어.

그들의 정신으로 탄생시킨 지구가.

p.166

4편의 이야기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두 번째 이야기 '척의 일생'총 3막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역순(3-2-1)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3막에서 대규모 지진, 싱크홀, 화산 등 지구의 종말을 보는 듯한 재앙 속에서 알 수 없는 광고가 계속 뜬다. '찰스 크란츠 39년 동안의 근사했던 시간! 고마웠어요, 척!(p.139)' 그가 누구인지 서로에게 물어보지만 아는 사람이 없다.

3막에서 궁금증을 일으켰던 척이 2막에 본격적으로 등장해 그에 대해 살짝 들여다볼 수 있었고, 1막에선 다락방에 얽힌 미신과 함께 혼수상태에 빠져 죽음을 앞둔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누구나 자신만의 세상을 품고 있다며 한 사람의 죽음을 하늘에서 별빛이 하나둘씩 사라져가다 나중에는 수백 개씩 그리고 결국 은하수가 어둠 속으로 말려 들어가 암흑이 되는, 세상이 종말 하는 것으로 표현한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힘든 건 문가 하면 말이다, 처키. 기다리는 거야.

이제는 그의 기다림이 시작될 것이었다.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할까?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저 남자는 몇 살일까?

p.219

'과연 나였어도 그처럼 그 기다림을 없었던 것처럼 마주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과 함께 우주로 표현된 나만의 세상을 생각해 보게 했던 이 이야기는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내 마음을 두드려 온다.

얼굴마다 헤어라인이 다르고, 눈과 입이 다르고,

선이 다르고, 연령대가 다르다.

모두 기본 틀은 같은데 다른 모델이다.

모두 온도스키다.

p.338

틀은 같은데 매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던 '이방인'을 쫓던 세 번째 이야기 '피가 흐르는 곳에', 내부의 악과 외부의 악을 하나의 새로 표현하며 여기저기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총기를 난사하는 사람 머릿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히틀러, 폴 포트 등 그들의 머릿속으로 날아 들어가 살인이 자행되는 그 새를 잡고 싶다던 홀리가 기억에 남는다.

사건이 잘 마무리된 가운데 계속 진행되던 보고식 이야기에 설마... 하는 긴장감이 더해지면서 마지막 헨리 삼촌이 홀리에게 미소 지으며 남기던 마지막 말 "안녕, 홀리."에선 오싹함이 느껴졌다. 왜지?? 사건이 잘 마무리되었는데?? 왜??

"나는 끝까지 한번 가봐야겠어.

그거면 돼. 그게 전부야."

p.491

마지막 네 번째 이야기 '쥐'는 장편 소설을 쓸 때마다 사건이 생겨 포기하길 여러 번이었던 드류가 자신의 도움으로 살아난 쥐로부터 장편소설을 완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대신 드류가 아끼는 사람이 죽어야 한다는 조건이 걸린 제안을 받게 되는 이야기이다. 쥐가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는 생각으로 꿈으로 치부해버린 그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데... 만약 나였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각 4편의 이야기를 통해 스티븐 킹만이 보여주는 매력적인 세계에 푹 빠져 '어쩜 이런 생각을?'이란 말이 절로 나왔던 그만이 보여주던 상상력에 감탄하며 읽었던 「피가 흐르는 곳에」였다. 모든 이야기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니 읽는 독자마다 떠올리는 그림이 다를 거라는 생각에 왜 내가 다 즐거운지 모를 일이다.

정말 오랜만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책이었다. 공포물이 아님에도 왜 오싹함이 느껴지는지 모를 이야기들, 정말 상상력이 주는 힘이란 놀랍고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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