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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킬레우스의 노래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이봄 / 2020년 6월
평점 :
읽음과 동시에 빠져들어 술술 읽히는 매력적인 이야기 <아킬레우스의 노래>, 그저 이 책을 다 읽고 내가 느낀 감정을 글로 다 표현을 못 한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아직까지도 이 책의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매들린 밀러 작가의 첫 작품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으며 바로 이어 읽을 예정인 작가의 또 다른 책 <키르케>에 대한 기대감에 설렐 정도였다.
파트로클로스는 왕자로 태어났으나 작고 가냘팠으며 빠르지도 않았고 튼튼하지 않아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린 아들이었다. 자신을 괴롭히던 귀족의 아들을 죽이는 실수로 인해 열 살의 어린 나이에 외국으로 쫓겨나게 되고 그가 도착한 유배지 프티아에서 펠레우스 왕의 아들이자 여신 테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를 만나게 된다. 자신의 나라에서처럼 누구의 관심도 받지 않은 채 생활해 나가던 파트로클로스가 수업을 빼먹어 벌을 받을 처지에 놓이게 되자 아킬레우스가 나서 알려주면서 둘의 우정이 시작되었고 우정이 어느덧 애정으로 변하게 된다.
인간을 혐오하고 그녀의 아들이 아버지를 능가할 거라는 예언으로 인해 인간과 결혼을 해야만 했던 여신 테티스는 자신의 아들 아킬레우스가 신이 되길 원했고 그녀의 주선으로 헤라클레스와 아이손을 가르쳤던 케이론 밑에서의 배움을 받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어디든 볼 수 있다던 어머니의 눈이 이곳에선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킬레우스는 이 사실을 파트로클로스에게 전하고 서로의 애정을 확인함과 동시에 밤 역사도 시작되었다. 어머 어머
어릴 적 파트로클로스가 아버지를 따라 헬레네에게 청혼을 하러 가는 에피소드를 볼 때만 해도 이 일이 그들의 운명을 좌우할 거라고, 전쟁의 계기가 될 거라고는 전혀 상상조차 못했다. 추후 헬레네가 스파르타의 왕궁에 납치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구혼하는 장소에서 했던 맹세 - 헬레네를 빼앗아가려는 남자가 있을 경우 그녀의 남편의 편에 서겠다는 맹세-를 한 모든 영웅이자 왕들이 참전하게 된다.
전쟁에 참여하길 원치 않았던 어머니 테티스에 의해 여장까지 하며 스키로스의 폐하의 수양딸로 지내던 아킬레우스는 전쟁에 참여 안 하면 그의 안에 신성이 쓰이지 않은 채 시들어 버려 무명인 채로 죽거나 전쟁에 참여해 명예를 얻어 영광스럽게 단명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예언을 듣게 되고, 명예를 선택한다. 이때부터 이들의 비극이 시작된 건지도 모르겠다.
내 안에서 부풀어 오른 확신에 목이 메었다. 절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을 테다. 그가 날 내치지 않는 한 영원히 이렇게 있을 테다.
"무서워?" 나는 물었다. 우리 뒤편 숲속에서 나이팅게일이 첫 울음을 울었다.
"아니." 그는 대답했다. "나는 이걸 위해서 태어났잖아."
아킬레우스를 따라 전쟁에 나섰지만 파트로클로스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고 죽이려고도 하지 않았다. 케이론에게 배운 의술로 다친 병사들을 치료했으며 포로로 끌려온 여성 포로들이 병영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볼 수가 없어 아킬레우스에게 그들을 최대한 많이 데려와 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약자의 편에서 손을 내밀고 보살폈던 파트로클로스의 모습에서 강함을 느낄 수 있었다. 어릴 적 약했던 파트로클로스가 어느덧 성인이 되고 아킬레우스와 함께하며 자신만의 가치관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더없이 멋졌으며 그가 나에겐 주인공이었다.
아킬레우스가 눈을 든다. 핏발이 서 있고 아무 감정이 없다.
"이 친구가 당신들 모두 죽거나 말거나 내버려 두었으면 좋았을 것을요."
아킬레우스가 명예를 얻어 자신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겠다고 했지만 오히려 그 예언에 묶여 예전의 정직하고 강인했던 본인의 모습을 점차 잃어만 가는 거 같아 안타까웠다. 꼭 신이 넌 꼭 그렇게 될 거라고 농간을 부리듯이...
파트로클로스를 잃고서 그 시신조차 묻지도 못한 채 자신의 곁에 두고 슬퍼하며 무너져가던 아킬레우스, 그 죽음이 네가 지키고자 했던 명예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소리쳐주고 싶었지만 자신을 죽여줄 사람을 찾아 헤매는 아킬레우스의 처절한 모습에서는 함께 울 수밖에 없었다. 죽어서도 함께 하고 팠던 그의 유언이 그의 아들로 인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는 안타까웠고 마지막까지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모든 걸 지켜보며 이야기를 하던 파트로클로스의 부분에서는 묘하게 마음을 울리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너의 짝으로는 한없이 부족한 아이라며 못마땅해하던 어머니 테티스에게 자신의 추억 속 아킬레우스의 이야기를 들려주던 파트로클로스의 모습부터, 그 어머니가 마지막 아킬레우스의 유언을 들어주던 모습 또한 강하게 기억에 남는다.
"나는 그 아이를 신으로 만들 수가 없었다." 그녀가 말한다. 상심으로 가득한 목소리가 떨린다.
하지만 그를 만드셨잖습니까.
그녀는 한참 동안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사그라져가는 마지막 햇살에 눈을 반짝이며 앉아만 있다.
"내가 써두었다." 그녀가 말한다. 처음에 나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가 비석 위에 새긴 이름이 내 눈에 들어온다. 아킬레우스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그 옆에 파트로클로스가 있다.
"가거라." 그녀가 말한다. "그 아이가 널 기다리고 있다."
수많은 리뷰에서 책을 읽는 순간 책에서 손을 넣을 수 없다는 말은 책을 읽다 보면 저절로 공감을 하게 된다. 정말 모든 책들이 이러하다면 수많은 책을 좀 더 즐기면서 읽을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매들린 밀러 작가의 또 다른 작품 키르케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렌다. 매들린 밀러라는 작가를 이제라도 알게 되어 한없이 기쁘다. 어떤 이야기로 나를 또 초대할지 기대된다.
어둠 속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가망이 없는
묵직한 어스름을 뚫고 서로에게 다가간다.
그들의 손과 손이 만나자 빛이 홍수처럼 쏟아진다.
태양 밖으로 금 항아리 백 개가 퍼붓듯 쏟아진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왜 제목이 <아킬레우스의 노래>였는지 알 거 같았다. 영웅이라고 불리던 아킬레우스도 인간이었다.
그는 나를 지켜본다. 뭔가를 기다리는 눈치다. 나는 미세하게 그의 쪽으로 몸을 움직인다. 꼭 폭포에서 뛰어내리는 듯한 기분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뭘 할 생각인지 알지 못한다. 내가 몸을 기울이자 우리의 입술이 어색하게 맞닿는다.
"더 이상 가르칠 게 없구나. 너는 헤라클레스의 모든 기술과 그 이상을 알고 있다. 너는 네 세대, 그 이전의 모든 세대를 통틀어서 가장 위대한 전사다.
내가 그를 못 알아볼 거라고 생각한 걸까? 나는 살짝 스치는 감촉만으로도, 체취만으로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눈이 멀어도 그가 숨을 쉬는 소리와 땅을 밟는 소리를 듣고 알 수 있었다. 죽더라도 땅끝에서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침을 삼켰다. 프티아에서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자음은 딱딱하게, 모음은 입을 크게 벌리고 발음했다. 처음에는 듣기 싫었는데 아킬레우스의 말소리를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얼마나 물들었는지 모르고 있었다.
"내게 명성은 목숨과도 같아." 그가 말한다. 숨소리가 거칠다. "내가 가진 건 그게 전부야. 나는 앞으로 오래 살지도 못하잖아.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것이 내가 바랄 수 있는 전부라고." 그는 침을 꿀꺽 삼킨다. "너도 알잖아. 그런데도 아가멤논이 그걸 짓밟도록 내버려 둘 거야? 나한테서 그걸 앗아가도록 도울 거야?"
내가 아는 사람들이다. 내가 연고를 발라서 낮게 해준 상처의 흉터로 가슴이 뒤덮인 사람들이다. 내 손으로 살갗에 박힌 쇠와 청동을 제거하고 피를 닦아준 사람들이다. 나에게 치료를 받는 동안 농담을 하거나 감사 인사를 건네거나 얼굴을 찡그렸던 사람들이다. 이제 그들이 흘린 피와 부러진 뼈로 다시 곤죽이 됐다. 그로 인해. 나로 인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