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비밀의 방 - 월화수목금토일 서울 카페 다이어리
이영지 지음 / 나무수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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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주일, 무미건조해만 보였다. 일년이 몇 개의 일주일로 구성됐는지 잘 모르지만, 월화수목금토일, 너무 흔해 보인다. 아니 흔하다. 지금까지 그렇게 흘렀지만 앞으로도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내 의사완 무관하게, 아니 개인의 통제로는 어쩔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이리서인지, 너무 흔하다. 그러나 하루하루를 색다른 특색으로 치장하면 할수록, 그런 무미건조함도 사라질 것만 같다. 그런 생각, 그런 마음, 그리고 그런 놀이로 구성된 책, [서울 비밀의 방, 월화수목금토일 서울 카페 다이어리]는 그렇게 구성됐다.
  서울은 건조하다. 이런 삭막한 서울 속에서의 청량제로 언제부터인가 카페가 자리매김하고 있다. 바쁘고 힘든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뭔가 색다른 것을 만끽하면서 하루의 에너지를 충전하는 곳, 말이다. 어쩌면 카페는 별 것은 아닐 것이다. 기본적으로 커피나 여타 음료수를 마시는 수준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즐거운 식사만의 장소 정도로도 여길 수 있다. 그다지 대단해 보이지 않은 곳이지만 그러나, 카페엔 개성이 있고, 그 개성과의 만남이 있다. 그런 개성과 만남이 서먹해져만 가는 도시 속의 낭만을 만들고 있다.
  브랜드를 앞세우지 않고 자신만의 개성으로 꾸민 카페엔 주인이 있다. 그들은 개성 있는 인간이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손님이라 불리는 어느 개성 있는 인간과 소통한다. 그들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인간미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에 부합하는 손님이란 인간은 그런 만남과 소통을 통해 자신의 시간을 만들며, 그곳에서 자신의 생활과 낭만, 그리고 행복을 만든다. 동시에 카페는 혼자만이 오는 것일 수도 있지만, 자신이 아는 타인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주인과의 만남과 또 다른 타인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 이제 카페라는 곳은 물리적인 한계를 넘어 인간적인 소통을 마련한다.
  이런 카페는 도시인들의 우울함을 날려 버릴 수 있는 마력을 도시인들에게 선사하고 있다. 이 책에 있는 카페들은 분명, 그렇다. 특히 각 요일의 특색으로 채색된 각 요일의 카페들은 자신들만의 매력을 선보이면서, 무미건조한 하루들이 아닌, 자신들만의 성격과 개성을 지닌 하루로 탈바꿈한다. 이런 날들을 대할 때의 마음들은 아마 평범하지 않을 것이며, 하루하루의 생활은 매우 활력이 넘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이 반갑다. 하루의 평범함을 삭제시키고, 개성으로 점철된 하루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수다의 장소가 아닌, 색다른 곳을 찾는 노력을 통해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또한 색다른 곳을 통한 기쁨을 얻을 수 그런 카페들을 독자들에게 선사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색다른 생활을 만드는 것은 색다르게 살려는 개인의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책은 이 곳에서 소개된 그곳만을 알려주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를 통해 독자 자신도 자신만의 다이어리를 만들고, 그것이 꼭 카페는 아니더라도 자신만의 공간을, 아니 시간을 만들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 시작이라는 것, 그것은 쉽지만 안 해서 문제이다. 그래서 시작하라고 이 책은 독자를 다그칠 것이다. 그러나 유쾌한 질책이다. 그래야 즐겁고 행복해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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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다리 - I Came from Busa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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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울지 않았다. 자신이 사는 세상 속에선 말이다. 오직 아기에 대한 생각 속에서만은 예외였다. 그러나 그것도 영화 속에선 많은 시간이 할애되지 않았다. 그녀가 보는 세상은 혹독할 뿐이었다.
  영화의 시선은 그녀가 보는 세상을 함께 보며 움직였다. 그 속에서의 장면들은 여과 없이 표현됐고, 거칠고 폭력적이고, 냉정했고, 무관심했고, 그리고 차라리 보고 싶지 않은 장면들로 가득했다. 폭력과 외면이 만연된 사회, 그런 곳에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영화는 냉혹하리만큼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 소외된 인간들의 군상의 어느 일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속에 인간, 연약하고 위험하기조차 하다. 그렇게 그들은 위험하게 살고 있었다.
  상처받고 자라난 어린 소녀의 산모가 된 모습은 비극이 또 다른 비극을 잉태하는 장면이었고, 그게 영화의 시작이었다. 이미 끝의 모습이 보여주는 듯한 첫 장면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자그만 빛을 받고 서서히 일어서는 어린 산모는 과거에의 고통이 결코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질 것임을 암시했다.
  영화 [귀향 (2009)]이 생각났다. 불행한 미혼모로부터 시작된 서사의 마지막이었던 비극적인 장면은 신에 대한 저항일 수도, 그리고 세상에 대한 저주일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녀와 아기의 불행이고 만 그 장면들이 이 영화를 통해 재생되었다면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외면과 소외로 빚어진 비극은 결코 개인만의 문제일 수도 없고, 결국 버림받은 자들을 배려해 줄 수 없는 사회적 구조는 비극의 확대재생산만을 촉진시킬 뿐이다. 이 영화 역시 그런 류의 비극을 보여주었고, 또한 이 영화는 [똥파리(2009)]의 또 다른 형제일 뿐이었다. 어린 시절의 폭력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해 방황한 어느 3류 깡패의 이야기는 비운의 가족으로부터 잉태됨을 사회적으로 이미 공유된 사실이 되고 말았다. 2009년도의 비극을 담은 많은 작품들은 올해도 그 형제자매들을 계속 파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영도다리란 공간의 차별성을 사실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영화를 통해 바라보게 된 영도다리란 공간의 고통과 폭력성, 그리고 사회적 소외로 점철됐고 비상구 없는 그런 공간이었고, 그 속에서의 삶이란 결국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그런 버팀목이 될 수 없는 곳이었다. 그 곳에서의 삶은 척박했고, 각박했고, 무서웠다. 그 속에서의 어린 산모는 그런 부정적 요소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만삭이 된 어느 어린 소녀의 모습은 사회로부터의 외면을 의미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입양으로 처리되고 있는 아기의 모습 속에서 형편없겠지만 함께 더불어 살면서 얻게 되는 가족의 행복조차도 미혼모에겐 사치스럽다고 인식되었나 보다. 그런 곳에서 사느니 차라리 다른 곳에 사는 것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추론이고, 그것이 생활의 지혜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결론이리라. 하지만 남겨진 아기의 엄마의 미래와 행복은 결국 사멸되는 것인지 모른다.
  결국 산모는 영도다리에 남겨진다. 산모였던 어린 소녀가 돌아간 곳은 역시 폭력과 외면이 넘쳤다. 누군가의 폭행에도, 불행에도 무관심한, 그녀가 사는 세상은 말뿐인 인간사회일 뿐이었다. 그냥 사람이 살 뿐, 그곳엔 최소한의 기본적인 인간관계도, 그리고 우정이나 관심은 결코 없었다. 그런 곳에서의 행복 찾기는 사치일 뿐이었고, 어쩌면 그런 것조차 없을 것이다. 동물과도 같은 인간관계들 속에서 어린 소녀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이었을 뿐이다. 어쩌면 대충 살면서 일본에서 새로운 일생을 살겠다는 그녀의 친구의 선택이 더 옳아 보였다.  
  어린 미혼모의 무관심은 잔인했다. 어린 소년의 파괴에 무관심했고, 타인의 무관심했고, 타인의 죽음에도 그랬다. 그녀가 보고, 듣고, 그리고 살고 있는 그곳은 잿빛이 가득하고 차가운 겨울이었을 뿐이다. 그래서였을 것만 같다. 그녀는 자신의 아기를 찾기 위한 모험을 시작한다. 자신의 육체의 변화를 통해 자신이 어머니였다는 것을 확인했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어느 가족의 한 일원이었다는 것을 생활하면서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회복하고 싶어하기 시작했다. 세상을 통해 행복하기 힘들다면 그녀에게 마지막 남은 가족이란 인연을 다시 회복하며, 새로운 인생을 살고자 한 것이다.
  영화는 아기를 찾으려는 그 순간 끝맺는다. 사실 이 마지막은 우스워 보일 수도 있지만 가슴 아픈 장면이기도 하다. 그 다음의 스토리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영화의 줄거리를 통해 볼 수 있는 세상을 고려한다면 결코 둘 다 Happy Ending이기 힘들다는 것을 그 모든 이들이 알 것이다. 아기를 다시 찾아온다고 해서, 영도다리로 상징되는 힘든 생활공간을 벗어날 수 있다고는 믿기 힘들다. 아니 불가능하다. 영화의 울림은 이 때부터 시작이다. 사회의 냉대를 바꿀 수 있는 변화를 촉구한 것이기도 하고, 어린 학생들의 성교육을 목적으로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결국 남는 것은 영도다리로 대표되는 불행을 잉태하는 특정의 공간이고, 이 공간이 점차 확대되는 한국사회에 대한 아쉬움이다. 무엇보다 이를 바꾸려는 노력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몰락하는 한국인들 상당수에 대한 불행은 결국 또 다른 비극을 잉태할 수밖에 없는 가혹한 현실에 대해 자탄만이 흐른다. 한국의 건강성은 영화 속에 드러난 그런 사회처럼 몰락하고 있는 것 같아 영화의 참혹함이 다시금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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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목적 - 당신의 발걸음에 이유를 묻다
배성아.김경민 지음 / 나무수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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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터인가 현대인들은 불행해져만 갔다. 왜 사는가 하는 문제는 사치스런 것이 됐고, 왜인지 모르지만 힘겨운 경쟁 속에서 헤매기만 했다. 인생의 목적인 행복이란 단어를 잊고 현대인, 그들에게 유일한 행복은 어쩌면 힘든 세상으로부터의 일탈일 것이다. 살고 있다는 것이 즐겁지 않은 요즘, 여유는 분명 도시와 사회생활에선 찾기 힘든 것들이다.
  여유가 대안일 것이다. 행복이 가까운 곳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매일의 생활에서 확인한 현대인들은 그래서 지금의 시공간과는 차별되는 공간으로의 여행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현대인이 꿈꾸는 여유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인간적인 훈훈한 관계 역시도 말이다. 일탈을 꿈꾼다는 것은 현실 속에서의 그 무엇들을 버리는 과정이다. 저자는 그런 대범함을 실천, 독자들에겐 어딘지 낯선 곳들로의 여행이 담긴 에세이를 우리들에게 남긴다. 
  이미지는 작지만 인상적이었고, 글은 짧지만 여운이 깊었다. 작지만 풍부한 이미지 속에 담긴 여행지의 매력은 확실히 도시와는 차별됐다. 인간이 꿈꾸는 낙원이 갖춘 소박함, 인간미, 그리고 여운은 책이 담긴 내용을 넘어서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리는 것들이었다. 특히 가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공간에 담긴 묘한 이미지들과 환상은 언제부터인가 잊고 살던 이상향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책 속에 담긴 시 같은 글들은 여백의 미 속에서 인간미를 물씬 드러냈다. 어느 순간 삶의 여백이 세속의 것들로 채워지면서 잃어버린 생활의 미는 저자를 힘들게 했다. 그래서, 현대의 것들로부터 벗어나고자 그녀는 일탈을 시도했고,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다시 되새겨 보는 시간을 갖게 됐다. 
  여행, 벗어나고픈 일탈행위다. 그러나 단순한 충동이 아닌 자신의 과거를 성찰하고, 과거의 인연을 되새김하고, 자신의 행복이 과연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하는 시간이다. 찌들고 찌들어버린 일상의 권태로부터의 해방이 아닌, 자신만의 진지한 시간을 얻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인 것이다. 저자의 에세이는 그래서인지, 기행의 멋진 아름다움과 상쾌한 공간적 매력을 이야기하기보단, 과거의 인연에 대한 추억과 아쉬움, 그리고 자신이 잊고 살았던 따뜻한 것들에 대한 미안함과 아쉬움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여행을 하기 보다, 자신의 그 무엇을 찾으려는 고행을 하고 있는 듯 했다.
  매우 색달랐다. 여행기라면 느끼는 평범한 상식을 넘어, 마치 자신의 인생을 찬찬히 살펴보는 듯한 시간을 얻었다. 이런 인식의 시간은 어쩌면 현대인 모두가 갖고 싶은 갈망이리라. 어느 순간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무덤덤해지고, 가슴 아파하면서도 잊으려 노력하는 현대인들은 생황의 여유로움도, 인생의 진미도, 그리고 자신의 행복을 거세당하고 말았다. 생활하는 이유가 단순한 생물학적 생존 정도로만 떨어진 상황이 현대인들의 자화상이다. 이런 현대인들에게 저자는 잔잔한 울림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저자의 간결하면서도 시적인 언어들 속엔, 그러나 갈등과 갈망이 숨겨져 있다. 얻고자 했지만 결코 얻을 수 없었던 고통과 번민들이 무수히 담겨 있었다. 거기에 과거의 상처는 여행하는 도중에도 결코 치유될 수 없는 것들처럼 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도망하고 싶었던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지 위태롭기만 했다. 그래서인지 여행 에세이의 어조는 무척 어둡기만 했다. 어쩌면 일탈이 아닌 도망을 위한 에세이가 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일탈이 필요한지 모르겠다. 그녀의 여행은 어쩌면 일탈이 아닌 해결해야 할 숙제들을 풀기 위한 자신만의 시공간을 얻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매우 현명한 선택인지 모른다. 아무것도 치유될 수 없는 현대의 도시와 사회라는 공간에서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어쩌면 전무한 곳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기에 벗어나야 하는 것이고, 자신의 고통과 번민에 정면으로 맞서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용기가 없어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용기를 내어 정면으로 맞서는 것인지 모른다. 이런 모습, 어쩌면 현대인들이 갖고 싶고, 또한 가져야 할 치료약일지 모른다. 정말 여행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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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술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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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보다 감독에 더욱 관심을 갖게 한 영화라는 것은 영화 자체로만 본다면 썩 유쾌한 관심은 아닐 것이다. 영화는 결국 영화 자체로서 매력을 발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여자 연기자 중 하나로 평가된 구혜선, 그녀에게 감독이란 호칭은 낯설기만 하다. 아니 부적절한 것이다. 감독이란 호칭이 붙기엔 경력은 너무 일천했고, 데뷔는커녕 연기 생활 자체도 그다지 길지 않아 보인다. 과거의 그녀가 무엇을 보여줬던, 영화를 만든 풋내기 연기자란 느낌은 어쩌면 엄청난 한계로 보인다. 차라리 그녀가 단역으로 영화에 출연했다는 것이 화제가 된다면 더 좋았을 정도다. 그런데 그녀는 과감히 감독으로 데뷔했고, 그 시작이 ‘요술’이었다.
  의외였다. 또한 시작이 결코 독립영화와 같은 신참감독의 통과의례는 아닌 것으로 보였을 때, 조금은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시작이 자칫 가혹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한국이 신인에게 주기엔 너무 어렸고, 너무 경력이 짧았고, 그리고 너무 신선했다.
  다행이란 생각이 그래도 들었다. 그녀의 음악적 능력을 뽐낸 앨범을 들었을 때도, 자신의 그림이 담긴 소설에서도 그녀는 아슬아슬한 모험을 했지만 평가는 긍정적이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새로운 모험이 자칫 위험하단 생각도 들었지만 그녀는 잘 넘겼다. 영화 역시 그런 맥락에서 볼 때, 분명 그녀의 도전은 긍정적일 것만 같다. 영화는 음악이란 요소를 통해 이어지면서 현실감과 환상, 그리고 뮤지컬같은 효과를 느끼게 하며, 대중영화로선 보이기 힘들었던 과감한 도전을 영화에서 일삼았다. 결코 대중적인 작품에선 보이지 않았던 과감한 시도였고 도전이었다.  어딘지 모를 신선한 이미지와 구성, 과거와 현재로 넘나들면서 보이는 한 남자의 아련한 추억과 고통, 그와 반대이듯 즐거운 아카펠라의 노래는 영화에 색다른 인상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런 음악적 구성에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과거와 현재의 교차 속에 보이는 다양하고 고전적인 음악들은 어린 감독으로서 보일 수 있는 새로운 매력처럼 다가왔다. 과거와 현재의 교차 속에 이루어진 다양한 상징성은 종종 이해하는데 있어 힘들게 만들기도 했지만, 아련한 추억을 만들어주었고, 인물들의 갈등의 수준을 형상화하고 또한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에 역시 큰 힘을 발휘했다. 무엇보다 신선한 이미지를 창출하는 느낌이 들도록 만들었다.
  사랑, 행복을 위한 필수조건이면서도 영원한 갈등과 번민의 원인이기도 한 이 감정을 ‘요술’에서 소재로 선택했다. 영화에서 선택한 묘한 삼각관계는 그러나 둘 사이에 낀 묘한 한 인간의 모습은 항상 갈망을 하면서도 결코 얻을 수 없는 타인의 마음 앞에 한없이 약해지고, 또한 한없이 고통스러워한다. 가까이 있을 것만 같지만 결코 가까이 갈 수 없는 고통의 심연 속에서 과거와 현재는 묘한 대치를 이룬다. 매우 컸던 기대가 점차 약해지는 과거와, 그 과거로 인해 힘들어한 중년의 모습은 과거로부터의 비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길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된 것에 대한 아련한 추억, 정신적 Trauma, 그리고 그 속에서 방황하는 한 인간의 모습은 나약하기만 하다. 그 나약함 속에 보이는 과거에 대한 아쉬움과 편린, 그리고 현재에도 잊지 못하는 갈망 등은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으로 보였고, 영화는 설득력 있는 구성을 갖고 관객들에게 선보이고 있었다.
  그렇게 인간은 허약한 것인지 모르겠다. 사랑도, 우정도, 그리고 자신의 아름다운 마음도 잃어버린 그의 모습은 과거의 투영을 통해 감상적으로 그려진다. 현재와 과거의 투영이 빚은 해변에서의 ‘문’은 과거와 현실을 환상과 상상의 세계로 만들면서 한 사람의 갈망과 현실, 그리고 고통에 대한 해소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사랑에 앞서 남녀 세 명 사이에 있었던 우정에 대한 망각을 해소하고, 그들의 인간적 우애를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장면에서 나이를 통해 얻어지는 현명함이 아닌, 직접 그 고통에 스스로 다가서면서 그것에 대한 새로운 도전만이 인간적인 문제를 해결될 수 있다는 점은 어쩌면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있었던 것 같다. 좋은 결론이었다.  
  언제나 자신을 속마음을 숨기면서 벌어지는 사랑 이야기는 즐겁기도 하면서도 비극의 원인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영원한 예술의 주제이자 소재인 사랑을 주제로 다가왔다. 어쩌면 진부한 주제에 진부한 결론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디선가 본 듯한 구성이나 내용, 그리고 화면 등이 솔직히 보였다. 그러나 모든 것에 그렇듯, 탄생의 비밀은 하늘에서 갑작스레 온 것이 아니다. 새로운 것도 그 새로움 뒤에 있던 어떤 현명함이 있음은 당연한 것이리라.  중요한 것은 그것을 빚어낸 예술가의 능력이란 느낌이 든다. 그런 예술가의 능력이 30이 넘지 않은 어린 여성 연기자에게 나왔다는 것이 무척 반갑다. 영화를 이야기하기보다 감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좋은지는 모르지만 그녀의 미래가 기대된다. ‘워핏(2009)’의 드류 배리모어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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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 후드 - Robin Hood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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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나 그렇듯 가진 자들이 문제다. 자신들이 갖고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 다른 이들의 희생에 아랑곳하지 않은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의적의 탄생 이유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가치 역시 더욱 커보인다. 의적이든 민주주의든 결국 하나다. 모두 가난하고 힘든 서민들을 위한 것들이란 점이다. 그리고 특정세력만이 아닌 모든 이들을 위한 국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 누구도 돌봐주지 않기에 역사의 희생을 거의 담당하고, 그에 대한 열매는 가장 적게 향유하는 자들, 그들을 위해 이 영화가 만들어졌다.
  [로빈 후드], 영화는 과거의 먼 시간 여행으로 관객들을 이끈다. 십자군 전쟁과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 그리고 그의 동생이자 다음 왕인 존 왕, 그리고 필립 왕 등 무수히 반가운 역사적 인물들이 나온다. 여기에 로빈 후드라는 영웅적인 의적까지 말이다. 과거의 먼 시간은 현대인들에겐 큰 낭만적인 시대다. 감독, 리틀리 스콧은 그런 낭만적인 시대 속에서 현대적 의미를 되새김질하는 신선한 작업을 한다. 과거 속에서의 현대성 찾가, 어쩌면 역사에서의 인간의 고민은 시공간을 초월하나 보다. 마치 쌍둥이처럼 같은 고민과 내용을 갖고 그 시대를 살아가나 보다. 왕의 폭력과 그에 대항하는 국민, 이런 이분법적 구도가 12세기에도 현재와 같은 모양새를 공유하면서 영화에서 진행되고 있다.
  분명하지 않은 역사의 시간과 상대한 느낌이었다. 역사적으로 귀족들과 서민들에 의해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하는 굴욕을 당한 영국의 왕인 존 왕의 시대에 로빈 후드가 활약한다는 설정은 역사의 진위를 떠나 인상적이다. 이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약자를 위해 목숨을 건 어느 의적이 영화에서 결국 큰 결과물을 선물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실정에 대한 댓가를 치루지 않고 어떻게서든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무모하고 무가치한 왕의 작태가 모든 원인의 시작이란 점이다. 인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욕심을 위해 타인의 희생을 당연하게 강요하는 그의 모습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언제나 있어왔다. 그것이 왕의 신분으로만 국한된 것은 결코 아니다. 대통령이든 총리이든, 독재자는 다양한 직함과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한 그다지 크게 볼 필요도 없이 회사든 조그만 마을이든 이런 불손한 지배자들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있어 왔다.
  그래서 의적이 영웅으로 되는 것인가 보다. 의적, 이 단어 자체는 역설적이다. 도적이라는 존재는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반사회적 집단이다. 하지만 이런 부정적 상징성을 지닌 존재라도 시대에 따라 달리 평가될 수 있고, 사회적 인식도 다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존재도 없다. 한국에서 홍길동이나 장길산, 그리고 임꺽정 등 도적이란 지배계층의 폄하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새로이 조명받고 억울하게 살아간 많은 이들에 의해 좋은 평가를 받는다. 그런 존재들이 바로 의적이다. 도적이지만 그들이 의로운 존재로 추앙받는 것은 시대적 흐름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로빈 후드도 이런 범주일 것이다. 도적이 되고 싶은 이들은 없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역사적 현실 앞에서 인간은 무력해진다. 결코 폄하할 수 없지만 과거의 모든 도적들이 그렇듯 태생부터 도적인 것은 없다. 태생부터 누군 귀족이나 왕이 아니듯 말이다. 역사적 무게 앞에서 나약해진 수많은 인간들을 보면, 인간에게 과연 선택의 여지는 남아 있는지 의심도 된다. 생존을 이어가기 위해 그들은 사회에서 가장 냉대받는 방식을 선택했을 뿐이다. 비록 도적들이 잘 했다고 할 수 없지만 무조건적인 비판은 위험한 것이다. 그렇게 그들을 몰아세운 것은 분명 당시 사회의 이익 대다수를 독점하고 그것을 이용해서 더욱 타인에게 사회적 짊을 지도록 강요한 기득권 세력임을 인식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도적이 의적이 된다는 것은 매우 큰 의미를 차지한다. 도둑질하고 공격하는 대상이 바로 사회적 권력을 독점하고 악용하는 그들이며, 그들에게서 빼앗은 이익을, 가난한 서민들을 위해 사용한단 점이다. 의적은 사회적 여론을 대변하며, 공익을 우선시하며, 민초들의 솔직한 심경을 대변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방식에선 다르지만 오늘날의 민주주의의 한 축을 담당하는 의회의 의원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그들의 의견표현에 귀담지 않은 권력자들이 바로 사회적 문젯거리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영화 [로빈 후드]의 시작에서 주인공 로빈 후드가 의적이 되고자 하는 분위기는 처음부터 없었다. 소위 이런저런 사연으로 존 왕에 대항했고, 그는 자신들의 동료와 함께 산속으로 가서 의적, 아니 현대적 표현으론 반정부 세력이 된다. 그런 상황의 반전 속에 그는 사회적 문제를 느끼게 되고,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병폐와 지도자의 탐욕과 무능에 의해 붕괴되는 사회를 목도하게 된다. 그리고 그 자신이 그것을 직접 체험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존 왕에 대항하는 존재가 되며, 또한 민중의 편에 서게 된다. 귀족도 아닌 한 사나이가 국민 전체의 의견을 몸으로 표현하는 그의 모습은 한 개인의 성장기와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부당한 권력에 맞서지 않는다면 결코 건강한 삶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에 대해 저항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는 그 자체의 구성을 통해 앞으로 2부와 3부 등의 연작 시리즈로 기획된 것임을 보여준다. 로빈 후드의 인생과 활약을 통해 오늘날을 살고 있는 민주주의 시대의 현대인들에게 부당한 권력에 대한 도전이 왜 필요한가를 분명히 보여줄 것 같아 기대가 된다. 특히 한국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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