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시대 - 춘추전국시대와 제자백가 제자백가의 귀환 1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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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나키스트, 혹은 양주와 견해를 같이 하는 철학가의 해체와 선별, 그리고 분류작업이 어떤 것인지를 기대하게 한다. 그것도 개인적으로 무척 관심이 많은 시대인 춘추전국시대의 철학자들을 다뤘다니 더욱 그렇다. 책의 저자는 춘추전국시대의 수많은 사상가들을 분류했던 역사가들 뒤에 존재하는 정치적 힘에 주목하며, 그것들을 분류한 관점을 해석하고 해체한다. 그것을 통해 뒤에 존재하는 정치적 관점이나 개인적 관점을 드러내며, 그 다음부터 작가는 자신의 관점을 기반으로 비판하고 재구성한다. 그런 과정에서 그의 비판과 재구성 기반은 바로 양주, 혹은 아나키스트다. 즉 국가의 폭력성의 단점을 부각하고 그것을 통해 국가의 불필요성과 해체에까지 이른 철학가들의 관점을 수용한 것이다.
  철학자든 역사가든 과거를 자신의 논거로 활용할 때, 언제나 선택하는 근거는 바로 자신의 관점이다. 언제나 자신의 관점을 주장하게 되면 이전, 혹은 동시대의 철학자나 역사가들을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점에서 관점은 독선으로 불릴 수도 있고, 흐를 수도 있다. 자신의 관점이 옳다라는 유혹은 언제나 존재하며, 그것을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한다. 비판이 어느 정도 타당성은 있지만 비난은 어느 각도에서도 가능할 수 있으며 비판적 관점이나 이론이 대중성은 확보할 수 있지만 얼마큼 효율적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런 점에서 아나키스트의 비판은 어느 정도 타당성과 대중성이 있어 보이지만 사실 역사적으로 어느 정도의 타당성과 가치가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정부가 없던 시대를 살지 못했기에 언제나 아름답게 윤색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고, 설사 아름다운 무정부상태가 있었다 하더라도, 과연 오늘날, 많은 이들이 정부가 없는 시대를 살 수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나누는 기준이 어떤 것인지 잘 확인은 안 된다. 다만 나와 너란 공동체 범위와 우리란 범위 정도로 구분된다는 인상은 받게 된다. 이 둘은 다루는 분야가 서로 너무 달라 비판이 금지되어 있는 분야인 것도 같다. 그래서 사회과학자들이 인문학자들을 비판하는 것은 마치 축구를 좋아하는 이가 야구 매니아에게 왜 축구를 좋아하지 않느냐고 타박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역으로 인문학자들이 사회과학자들을 비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사회과학은 그 ‘우리’란 범주로 인해 책임을 져야 하는 불운을 갖고 있다. 정치학, 경제학 등의 사회과학자에게 있어 자신의 아이디어에 대한 책임이 채택될 경우 그 책임의 범위는 공동체 크기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과학자들이 자신의 관점이나 대안을 내놓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걸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사회과학자들은 인문학자가 부러울지 모르겠고, 어쩌면 양자(양주)가 국가를 비판하는 태도가 부러울 뿐이다. 사회과학자들은 결국 정부를 다루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양자는 아마도 사회과학자들을 어리석은 자들로 평가할지 모르겠다. 괜한 고통을 사서 하는 이들이라고. 하지만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민주주의도, 복지정부도, 그리고 개인의 책임을 지켜주는 정부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양주의 견해를 더 이상 처벌하지 않은 사회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한비자는 불필요한 학자들을 삭제시키라고 했고, 진시황은 분서갱유를 일으켰다. 오늘날의 사회과학자들은 그런 독단적인 정권을 비판하며, 그에 항거했고, 그리고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 최소한 많은 철학자들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할 만큼의 사회를 이루는데 나름 공헌했다.
  양자는 물론 저자는 국가, 혹은 정부에 대한 도구론을 기반으로 정부의 절대성을 부정한다.  그리고 춘추전국시대에 아나키스트로서 정부의 역할을 축소하거나 부정하는 철학자들을 발굴한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이 의도하는 목표이기도 하다. 하지만 춘추전국시대의 철학가들은 도가라는 묶인 철학자들을 빼곤 어떤 면에선 정치학자로서의 측면이 강하고 그래서 인문학자가 다루는 분야보다 사회과학자들의 관심이 더욱 적절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되는 분야기도 하다. 그런데도 양자의 관점을 따르고 있는 저자는 춘추전국시대의 철학가들을 분류한 이들 이면의 정치적 상황과 정치적 권력관계를 파헤치면서 권력관계를 따르는 사가들을 비판하는 측에 선다. 일리는 있지만 당시의 사가들 역시 자신의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랬을 것이고, 그것은 마치 양자의 견해의 타당성을 만들기 위해 선 저자의 의도와도 다르지 않다. 다만 향하는 방향과 목적이 다를 뿐이다. 또한 양자의 비판은 국가에 관한 것이며, 이 점에서 국가의 절대성을 부정한 도가들 역시 이미 사회과학자들이다. 이 점에서 양자는 물론 도가의 모든 사상가들 역시 사회과학자들이다.
  인간은 착한데 국가와 지배자의 속성을 담은 국가기제의 타고난 문제점으로 인해 세상사람들의 불운이 강해졌다는 인식은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됐다. 특히 그 중심엔 도가라고 할 수 있는 철학자들이 존재하며, 그 중 양자의 견해가 가장 주목되는 것 같다. 매우 강력한 이기주의자로 평가되곤 한 양자의 개인주의는 유별나기는 한 것 같다. 그다지 많지 않은 자료로 그의 많은 이야기들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그는 정부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확실하다. 많은 이론가들도 국가 혹은 정부의 문제점을 언제나 인식하고 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런 정부와 국가를 어떻게 좋은 기관으로 만들 것인가 하고 고민을 했다면 양주, 노자, 장자와 같은 이들은 차라리 무시했다. 그래서 이들 도가 철학자들에게 있어 정부는 죄악이 되거나 삶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삭제해야 할 기관일 뿐이다.
  이것이 옳은지 아닌지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또한 과연 작은 규모의 공동체의 사람들이 지금의 시대에 가능한지, 잘 모르겠다. 그런 시도를 하고 있는 미국 Arizona의 Argosanti와 같은 특별한 공동체가 주목 받고 있지만 아직도 그들의 성과를 확인하는 것은 요원할 따름이다. 차라리 욕심을 촉발시키는 세상의 모든 광고나 광고판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더 빠르고 확실한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힘들긴 마찬가지이리라. 도리어 어떤 시도도 바보와 같은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세상 살아가는 것은 뭘 해도 어려운 법이니까 말이다.
  저자는 오늘의 관점에서 사마천이나 반고 등의 역사서를 비판한다. 하지만 각자의 시대에 맞게 역사서는 제작되는 법이고, 오늘날 유행하는 관점에서 역사를 다루는 법이다. 이제 사마천이나 반고 등의 역사서는 열심히 분해되고 해체되면서, 그 속의 권력적 요소들은 물론 당시 시대의 정치권력기관을 정당화했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그런 비난은 하지만 냉정할 수도, 냉정할 리도 없다. 관점은 싫든 좋든 주관적이다. 그것도 정확하게 역사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아나키스트라면, 그리고 많은 이들이 아직 동의하기에 주저하는 아나키스트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럼 무정부상태를 시험하고 보자라고 이야기하기에도 너무 위험부담이 크고, 그것은 많은 이들의 동의를 구해야 할 사안이다. 다만 색다른 시각을 전해주고 새로운 생각을 일깨운다는 점에선 매우 긍정적이다. ‘만약 A가 없다면’이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도리어 A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비판이 비난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결국 비판이 비난이 되는 현실은 피할 수 없다. 역사책의 교본이란 ‘사기’와 ‘한서’는 당시 정치권력의 의도를 보여주는 작품이란 평가를 받고서 해체되는 과정을 보면 더욱 그렇다. 다만 가혹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시대적 흐름을 외면하고 사는 철학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당시의 시대적 흐름을 기본 전제로 삼고 사는 철학자가 과연 적을까? 설사 안티테제에 선 자들 역시 어떤 전제에 따라 자기 이론을 펴기 마련이고, 그것이 옳고 그른지를 정확하게 판별하지 못한 채 자행되기 마련이다. 정부가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모르고 정부에 관해 이야기하는 철학자들은 사실 없다. 알면서도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나를 고민하는 법이고 역사가들 역시 같은 고민을 할 뿐이다. 그들도 용기는 있을 것이니까 말이다.
  사실도 불분명한 1000년 이상도 더 된 과거의 이야기를 오늘에 재구성하면서 작가는 자신이 이상으로 삼는 사회를 기준으로 재편집한다. 특히 에필로그에서 시경 속의 이야기를 갖고 당시 여성들의 적극성을 이야기하면서 오늘의 애정관과 비교해서 그 진솔성을 이야기하지만 사랑에 적극적인 것은 어쩌면 근대 이후에 들어와서 보다 적극적이었는지 모른다. 과거의 이야기가 있다 해서 그것을 사회의 일반적 풍속도로 몰아간다면 현재의 작품이나 드라마는 숫자로도 훨씬 풍부하고, 결국 과거보다 지금 더욱 진솔할 것이다. 정말 진솔함을 따진다면 현재 제작되고 있는 아이돌 그룹의 가사나 그들이 찍고 있는 영상작품들의 수위는 결코 과거에 비해 손색없이 진솔하다. 차라리 더할 것이다. 차라리 그때나 이때나 인간은 다 비슷하다라는 결론이 훨씬 현명하다. 과거의 신화적인 세상을 기준으로 현대를 비판하는 것은 매우 중국 철학가적인 사고다. 하지만 과거를 살지 못한 이들에겐 너무 가혹한 기준일지 모른다.
  유가, 묵가, 도가 법가 등의 구분은 한 제국의 정치권력을 위해 일하는 관료들이 사후적으로 만든 범주에 지나지 않는다고 저자는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저자 역시 1000년도 넘은 시간이 지난 후에 시도되는 범주일 뿐이다. 다만 방향과 목적, 그리고 그 방식이 다를 뿐이며 정치권력이 후원하지 않을 뿐이다. 정치권력이 지방분권이냐, 아니면 중앙세력이냐에 따라 책의 방향이 달라지듯 모든 이들은 자신의 입장에 따라 해석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짧든 적든 자신의 의도에 따라 역사를 해체, 편집, 그리고 재수정을 가하기는 마찬가지며, 당시 시대의 관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 철학자들이나 역사학자들을 비판하는 것은 자칫 과도한 욕구 과잉으로 나아갈 수 있다. 또한 저자의 방식이 제자백가 사상가들을 가능하면 고유명사로 처리해 일일이 다루려는 의욕은 무척 인상 깊지만 구체적인 것을 추상적인 범주로 이해하는 것이 인간의 이해를 더욱 높일 수 있는 수단이었으며, 많은 이들이 시도해 나름대로 성공을 거뒀다. 최소한 이해의 폭은 넓힐 수 있는 방법일 수 있다.
  아나키스트들의 주장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세상이 도래한 것은 사실이고 그것을 현재 누가 지켜주고 있는가도 논의의 대상이 될 것이다. 현재가 행복한 것은 아니지만 과거보다 자율성은 많이 보장된 사회다. 태어나면서 결정되는 계급은 어느 정도 사라졌고, 자립이 중요시되는 자유 역시 점차 보장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자신의 생각을 피력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보장하는 것은 공교롭게도 정부의 힘이다. 정부가 도구인 것도 수긍할 수 있고, 정부의 폭력성 역시 인정해야 할 문제다. 하지만 정부는 태어나자마자 사악하다는 것은 극단일 수 있다. 언제나 양극단의 중간에 정부는 위치하며 어느 쪽으로 끌어당기느냐가 정부가 좀 더 국민과 개인을 위해 좋은 판단의 문제가 될 것이다.
  난 무엇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보다 소통을 위해 자신이 갖고 있는 전제의 보편성을 더욱 크게 확대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특정 사상의 완고함이 사라지고 보다 타당하고 보편적인 사고와 이해가 나오는 법이다. 정부의 폭력성을 주목한 학자들은 단지 도가에만 있지 않다. 서양 근대 철학자들은 물론 고대 희랍의 철학자들도 그랬고, 지금의 사회과학자들 역시 고민하긴 마찬가지다. 과연 그들 중 국가권력의 폭력성으로 인해 국가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권력 통제를 위해 삼권분립이나 인권의 강조를 통해 권력의 폭력성을 제어하자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결국 국가만이 모든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 것은 받아들였지만 모두 해줄 수가 없다고 아예 삭제하자고 주장하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어차피 도구라면 잘 다뤄야 하는 법이다. 파워포인트로 고생하는 많은 이들이 있다고 파워포인트의 장점을 무시한 채 없애 버릴 수는 없는 법이다. 다루는 것은 결국 인간이니까 말이다. 차라리 인간 본연의 탐욕과 본능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빠를 수도 있다. 그 방법이 옳은지 그른지는 불분명하지만 유가, 묵가, 법가 등이 다들 고민한 내용들이다. 그들도 다 나름대로 고민해서 그런 결론을 얻은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춘추전국시대의 철학가들에 주목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그 때의 고민이 지금의 고민과 비슷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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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ive 드라이브 - 창조적인 사람들을 움직이는 자발적 동기부여의 힘
다니엘 핑크 지음, 김주환 옮김 / 청림출판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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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는 새로운 시대다. 다양한 분야에서 그렇겠는데 산업현장 역시 다르지 않다. 이 책이 전제하고 있는 것이 이것이기도 하다.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도 달라질 것이고, 타인과의 관계를 맺는 방법이나 회사를 운영하는 CEO의 전략도 달라야 할 것이다. 어쩌면 이런 것은 선택사항이 아닐 것이다. 신기하기만 했던 인터넷을 이젠 못쓰면 무능력한 직원이 될 것이고 파워포인트, 엑셀 등을 다루지 못한다면 회사에서 버티기 힘들 것이다. 문명의 이기가 처음 나왔을 때나 독특해 보이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보편적인 것은 물론 살아가야 할 가장 기본적인 수단이 될 뿐이다. 그래서 변화는 무서운 것이고, 그에 맞춰야 생존할 수 있다.
  책 ‘Drive’가 제안한 세상의 변화는 매우 적절한 상황이다. 아직 일반적인 모습은 아닐 수 있지만 그것은 과거에 집착하면서 내일을 살려는 고집스런 편견일 수도 있다. 책은 전반적으로 제안이나 가정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새로운 동력을 찾아야 할 기업이나 산업이 많으며, 기존의 방식으로 생산력을 끌어올리는 것이 점점 힘들어진다는 것을 다양한 지표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특히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환경이 변화하고 있고, 또한 의식도 변화하고 있다. 즉 인간이 달라지고 있다. 좀 거칠게 말하면 예전과 다른 사람들로 변화하고 있다. 진화인지 아닌지 퇴화인지 모르지만 만족시키는 방법이 과거에 머무른다면 앞으로 다가올 시기에서의 사람들의 근로의욕은 계속 정체될 것이고 비용은 과거보다 더욱 비싸질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현재 경제위기로 인해 많은 이들이 과거 방식이라 할 보상과 체벌 방식이 아직도 유효한 듯도 보인다. 특히 실업이 증가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럴지 모른다. 다만 경제위기는 새로운 경제발전에 이은 변화일 수 있고, 그것에 부응하지 못한 결과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새로운 변화의 흐름이 경제위기와 상관없이 온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파워포인트 때문에 직장을 잃었다고 파워포인트를 없앨 수 없는 것이다. 새로운 직장과 사업 분위기는 앞으로 모든 이들이 맞춰야 할 대상이다. 그러기에 현재의 경제적 상황에 맞춘다는 것은 어쩌면 위험하며 새로운 방향에 적절히 맞춰야 생존할 수 있다. 바로 그 점이 이 책의 힘이다.
  보상과 체벌이란 동기 2.0 방식으로 인류는 엄청난 산업과 경제 발전을 이뤘지만 그 방식의 한계가 점차 노정되고 있다. 표준화된 작업과 양적 생산에 우선을 뒀던 시기에 적합했지만 점차 창의성을 위주로 하는 산업으로 변화되고 이 시점에서 동기 2.0의 마력이 소진되고 있는 시점이다. 어쩌면 산업사회의 고도화가 미진한 지역에서 동기 2.0이 위력을 유지할 수도 있지만 고도화된 지역에선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기존의 생산방식과 보상체계에 의문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무엇보다 수동적인 작업만을 요구하는 현재의 생산방식은 미래의 고부가가치 산업에선 위기를 맞이할 수 있다. 한 개인의 창조력에 의존하는 산업이 점차 두각을 나타내고 선진국과 개도국의 서열을 구분 짓는 기준으로 부상되는 이 시점에서 동기 2.0과는 뭔가 다른 보상체계를 제공해야 할 시점인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서인지 인간은 뭔가 다른 것을 모색하나 보다. 여기에 인간의 창의력을 이끌어내야 할 산업들의 등장이 가세하면서 단순한 기계부품이 아닌 보다 고차원적인 그 무엇을 요구하기 시작하며, 인간의 존엄성이라고까지 할 것들을 배려하는 기업문화가 요구되고 있다. 이 책이 강조하는 부분들이고, 무척 인상 깊은 내용들이다. 그것을 이 책은 ‘목적, 의미 있는 삶’으로 표현하고 있다. 심리학을 통해 얻은 많은 지적 결과물들을 통해 인간의 본질적 문제까지 파악하며 얻어서 낸 결론을 담은 이 책에서 인간이 수익 극대화가 아닌 ‘목적 극대화’를 추구하며, 기부 등의 형태로 새로운 보상을 얻기를 원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에 대한 새로운 조명인 것이며, 기존과 다른 새로운 관점에서 인간을 보는 것이다.
  새로운 것은 위험하기도 하다. 오랜 시간의 검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새롭다는 것은 역으로 검증 받았던 시간이 적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입증되고 있으며, 보다 창의력을 요구하는 세상이 전개된다면 분명 기존의 방식은 위험할 수 있다. 또한 미래의 더욱 큰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선 새로운 방법이 요구된다. 그런 점에서 자발적 동기부여는 분명 새롭고 색다르며, 시도해 볼만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인간이 행복할 수 있다면 가장 좋은 대안일 것이다. 우린 스트레스를 받으며, 억지로 직장 다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다. 보다 인간을 위한 방식이 존재한다면 그것을 해야 하는 것이 정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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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리츠 - Blitz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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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 제이슨 스태덤이 나온다면 대충 느낄 수 있는 영화 분위기는 화끈한 액션이다. 살벌하기 그지없는 폭력이 난무하고 명확한 선과 악의 이분법 속에서 냉정한 판단이 필요없는 악의 징벌 정도가 그런 액션에 덧붙여질 뿐이다. 그런데 이 영화, 좀 다르다. 과거의 자기 영화에 대한 반성인지, 아니면 연기자로서 뭔가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고 싶었는지, 아니면 오스카 상 한 번 타려고 했던 것 같다. 아무튼 그의 이전 작품과는 달랐다. 그래서인지 미국이 아닌 영국 런던이 촬영의 배경이었던 것도 같다.
  영화 속에서 경찰들이 나온다. 하지만 정의감에 사로잡혀서 악당을 잡는데 주저하지 않은, 정의의 사도 같아 보이지 않았다. 시작부터 나오는 경찰은 술을 엄청 마셨는지 방안이 술병으로 가득 찼다. 또한 그의 사건 해결 방식도 거칠기만 했다. 우리가 아는 성숙한 경찰이 아닌, 경찰과 깡패의 차이를 별로 느끼지 못할 만큼 야만스러웠다. 즉 경찰서에 출근하는 것을 보면서 경찰인지 알았지, 처음 그가 경찰인지도 몰랐을 정도다.

 

 

 


 

  경찰이 난폭하다. 그리고 술을 마시면서 과거를 잊곤 한다. 즉 정상이 아닌 것이고 아프기도 하다. 하지만 그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동료 경찰들 중 여경사는 재활프로그램을 갔다 왔으면서도 결코 인간적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만다. 자신의 아내의 죽음으로 상처 입기도 한 경찰이 있었고, 차분한 듯 하면서도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일을 해결했던 경찰도 있었다. 우리가 염원하는 멋지고 정직하며, 제정신인 그런 경찰이 이 영화에선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현실인지 모른다. 그들도 힘든 도시생활을 하는 현대인이니까 말이다.
  이 영화에서 범인이 나온다. 그것도 아주 잔혹하면서도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고 경찰을 주요 타깃으로 삼고 있다. 소위 죄질이 매우 나쁜 범인이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그런 범인, 과연 영화의 악역답다. 문제는 합법적으로 그를 잡아들이는 게 너무 힘들다는 점이고, 그것으로 인해 경찰은 더욱 힘들다. 정말 경찰 해먹기 너무 힘든 것이다. 세상은 정의로운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줬으면 하고 경찰에게 바라지만 현실은 냉혹하기만 하다. 경찰이 피폐해져 가는 것은 어쩌면 비상식적인 방식으로만 해결해달라는 세상의 요구에 경찰이 억눌린 채 살아가야 한단 점일 것이다.
  참 힘들다. 좋은 방식은 요원하기만 하고, 비정상적인 방법이 어쩌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된 세상,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과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은 것으로 바뀔지 모르겠다. 나만 노력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사회는 결국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모두의 동참이 필요하다. 하지만 의구심은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 의심이 모든 노력을 물거품이 되도록 한다. 그래서 비참함이 감돈다. 그런 현실을 이 영화는 적실히 보여준다. 심지어 민중의 지팡이란 애칭을 갖고 있는 신문기자까지 요행수를 바라는 시점이고 보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이 영화는 어느 순간 영화 ‘도가니’와 같은 현실고발 영화가 된다. 우리는 너무 서로에게 과도한 것을 요구하다 보니 계속 탈이 나는 사회인지 모르겠다. 과연 희망은 무엇일까 하는 고민도 있지만 그래도 제대로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역시 가치는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영화가 보여주는 세상은 배트맨의 고담시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우울했고 축축했고, 영 개운하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보이는 세상은 그렇게 우울하기만 했다. 어쩌면 그래서 스태덤은 새로운 도전을 하려 했는지 모른다. 그가 보여줬던 폭력물들은 인터넷 게임과도 같은 소비성 영화였고, 자신의 가치를 보여줄 수 있는 게 화끈한 폭력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변하고 싶었고, 나름 자신의 역량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찾은 셈이다. 어떻든 그는 자신이 맡은 역할 중 가장 좋은 연기력을 보여줬다. 또한 보다 현실에 가까운 장면들을 통해 세상에 사는 모든 이들이 참 힘들게 사는 것을 보여준다. 경찰에게 강요되는 사회적 책임이 얼마나 고달픈지, 그리고 세상은 얼마나 크게 변했는지를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점 때문에 스태덤의 변신은 성공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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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jy 2011-12-09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하고 있는 영화입니다^^

novio 2011-12-09 14:10   좋아요 0 | URL
색다른 스타뎀의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11월 3주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선 무조건적인 용서를 해야 한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그렇게 들었을 것이다. 너무 획일화된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우리 주변에선 처벌보단 배려와 용서를 해주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은 것만 같다. 종교계는 말할 것도 없고 드라마에서도 용서를 통한 화해가 주제가 된 것 같다. 특히 개인의 입장에서 말이다. 하지만 이런 획일화된 용서 문화에 대해 그런 것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주는 영화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사회는 개인적 차원이 아닌 사회적 관점에서 법을 통해 비관용을 유지해오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인 관점에서의 비관용이나 복수의 대한 것은 많은 논쟁이 붙고 있다. 어쩌면 앞서의 무조건적인 용서는 개인적인 단위에서 특히 이야기되는 것이다. 이런 개인적인 용서는 사실 가해자에 대해 피해자가 당한 고통을 다소 경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게도 된다. 법정으로 가는 가해자에게 개인적으로 용서를 하는 장면 등이 대표적인데 과연 그런 것이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영화들이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갈등이 점차 일반화된 한국 사회에서 한 번 볼만한 작품들일 것이다.  


오늘     
 

 


  용서를 해부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 영화가 만들어졌다. 이 영화에서 용서는 도리어 죄악이 될 수도 있는 개인적 선택이다. 특히 이 영화에선 말이다. 용서를 했을 때, 사실 그 반대급부를 원하는 것이다. 즉 개과천선이다. 하지만 그런 개과천선을 하지 않는다면? 그 때 용서는 무슨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을까? 영화는 오늘의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단편적이고 획일화됐고, 어쩌면 강요로 변질된 용서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모험을 한다.
  이 영화에서 가슴 아픈 것은 바로 용서가 자칫 갖고 있을 수 있는 모순이다. 용서받은 자가 변하지 않고 또 다른 곳에서 가해자가 또 된다면 처음 용서한 자는 결국 다른 측면에서 가해자이지 않은가 라는 무거운 질문이 내재되어 있다. 영화는 이 어려운 퍼즐을 줄기차게 고민한다. 영화에서 그리 힘을 쓰지 못했던 송혜교가 나름대로 사회적 이슈를 짊어진 영화에 출연, 자신의 오랜 연기력을 발휘했다. ‘집으로’란 재미있는 걸작을 만들었던 이정향 감독이 좀 더 무거운 주제로 우리에게 왔다. 최근 ‘도가니’란 영화가 보여준 사회적 혼란 속에 이 영화는 많은 의미를 던져 줄 것이다. 
 


고백  



  앞서 소개한 ‘용서’와는 전혀 다른 길을 가는 영화일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전통적인 형식을 갖고 있는 용서와 관련된 영화다. 이 영화에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면서 겪는 고통을 보여주고 어쩌면 용서하는 게 그나마 좋다 식의 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엄마이자 선생님인 주인공의 수업 중의 이야기는 섬뜩한 분위기를 만들면서 가해자의 마음에 큰 상처를 입히는 사회적 용서는 결국 또 다른 피해를 양산하는 악수가 되는 것을 보여준다. 자식은 부모에겐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사랑스런 존재다. 하지만 살해됐을 때, 그리고 그에 대한 처벌이 납득할 수 없을 때의 고통은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이런 고통은 결국 보복이란 악순환을 만들게 되고,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복수를 계획한다.
  거의 공포물의 단골 소재로도 사용되겠지만 이 영화의 특이점은 진지한 고민이 서사 과정에서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단순한 공포영화를 넘는다. 아마도 이 영화는 한국에서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등과 같은 영화와 유사한 동맹을 맺는 것 같다.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성찰 등은 보는 내내 사람들을 힘들게 할 것이다. 어쩌면 특별한 내용이 아닐 수 있지만 그래도 언제나 고민해야 할 내용들이다. 일본 영화 특유의 고민과 고통, 그리고 공포가 잘 조화된 영화다.  



보이 A 



  앞서의 영화가 용서를 받아야 할지 말지에 대한 가해자에 대한 이야기라면 이 영화는 용서를 해야 할 사회의 변덕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가해자였던 한 소년의 현재를 보여주면서 한 때 실수했던 가해자가 어느 소녀를 구출한 후 영웅이 되지만 나중에 그의 과거가 알려지면서 그는 구출한 영웅에서 천벌을 받을 악인으로 떨어진다. 영화 이름 ‘보이 A’는 그를 보호하기 위한 그의 예명인데 그 뒤에 담긴 사회적 인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예명이 아니라면 정상적으로 그는 사회에서 살 수 없기에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준 이름이다. 그만큼 과거에 대해 냉혹한 사회의 한 측면을 이야기한다.
  영화는 과거의 악행에 대해 괴로워하는 ‘잭’이라는 한 인간의 슬픈 고민을 보여준다. 그의 얼굴과 다른 그의 과거는 자신의 선행도 무너뜨릴 만큼 무서운 것이며, 과연 인간을 용서받을 수 있는가 하는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된다. 그리고 쉽게 모든 것을 덮으려고만 했던 사회적 타성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보여준다. 너무 어려운 고민이 따르기에 영화를 보는 내내 너무 진지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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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볼 - Moneyball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거칠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오늘날의 현대인들을 이 영화를 통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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