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 - A Blind Rive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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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담스런 시작이었다. 중고생 정도의 배부른 학생의 모습에서 엿볼 수 있는 미혼모와 어느 형편 없는 수술실에서의 모습은 확실히 충격적이다. 관객은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쉽게 안다. 그래서 마음이 편하지 않다. 그러나 사실적이다. 영화는 버림받은 자와 버린 자와의 불행한 인생, 버림받았고, 그리고 버렸다는 내면적 trauma, 그리고 어떤 식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그들 마음의 방황과 그에 따른 막다른 종착점을 어두운 어조로 보여주는 비극적 가족관계의 마이너러티 인생을 담은 영화다.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 힘든 미혼모의 인생은 불행의 시작이다. 그녀 자신이든 그녀가 잉태한 아기에게든. 그 둘의 인생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해주기 위해 선택하는 것이 보통 입양이란 형식이지만 그것은 사실 치유를 위한 것이 아닌 ‘봉합’일 뿐이다. 미혼모의 의사도 묻지 않고, 편의적 발상으로, 그들을 보호해주지 않고 그들을 떼어 놓음으로써, 모두가 만족할 것이란 착각이 그 속에 숨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회의 폭력성도. 영화는 그런 것들을 보여주려는 듯 기묘한 두 개의 서사를 중심으로 영화를 풀어나간다. 
  하나의 서사는 버림 받은 자가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찾기 위해 먼 곳으로부터 한국을 찾아온다. 영화는 역순행적 구성을 바탕으로 어머니를 찾으려는, 한국말에 서툰, 아들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있는 어느 여인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녀 역시 어느 비극의 시작임을 은연중에 알 것만 같다. 자신을 위해 그 어떤 정보나 흔적도 없다는 사실에 힘들어 하는 입양된, 다 큰 어른은 그런 자신의 처지에 분노하고 비관한다. 자신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힌 한 인간으로서 그는 근원적 존재감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 혼자만이 찾아간 어느 모텔은 그의 자궁이자 시작이자 후일 끝이 된다. 그 속엔 자신을 버린 자가 있으니까. 그 모텔에서 만난 어느 여인에 대한 연민과 이상한 친근감, 그리고 시작을 알 수 없는 분노는 영화의 비극을 암시하듯 거칠게 표현된다. 무엇보다 자신을 알지 못하고 있는 두 모녀는 자신의 근원이지만 자신을 외면하는 존재들일 뿐이다. 그러기에 그는 두 번이나 버림받는다.
  버린 여인은 버렸다는 사실 때문에 버린 사건 이후 편안한 삶을 포기한 채, 인적 드문 모텔에서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비밀스런 작업으로 살아간다. 그것은 버렸다는 죄책감을 속죄하지 못한 체, 어정쩡하게 살아가고 있으면서, 타인의 목숨을 앗아가는 가엾은 여인이다. 그녀는 자신의 구원을 신에게도 바랄 수 없었고, 그런 구원조차 포기했다. 그녀는 버림 받은 아이를 찾을 수 없는 자신의 당당하지 못한 처지를 용서하지 못한 듯, 혹은 세상에 대한 화풀이를 하듯 무서운 일들을 모텔에서 꾸미고 있었다.
  그녀에게 아기는 비현실적인 상상과 망상의 공간 위에 존재했다. 그렇지만 현실의 아들은 거부하는 이중적인 비극을 갖게 된다. 그래서 가혹한 잔인함을 마침내 자신을 찾아온 아들에게도 가한다. 하지만 진정한 비극은 그런 짓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다는 설정이다. ‘신’에 기대어 해결하려고 하면서도 해결할 수 없었던 그녀는 자신의 폐허가 된 마음 속에 언제나 사로잡혀 아이에 대한 갈망을 하면서도 또 한편 언제나 외면하는 역설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분노의 표현으로 ‘당신 자식이니 당신이 알아서 하십시오.’라고 그녀는 무서운 말을 하늘에게 이야기하며 비극을 더욱 키우듯 아들을 물가에 내던진다. 
  그러나 그녀가 버린 것은 아들 목숨 하나만이 아니다. 영화의 역순행적 구조를 통해 마지막 장면에서 새로운 생명의 잉태는 그가 왜 자신을 버린 엄마를 찾아야 하는 이유를 엿보게 한다. 어쩌면 그 잉태된 생명만큼은 축복받기를 원했던, 버림받은 자의 간절한 소망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소망은 원래부터 무시받을 운명이었나 보다. 그와 함께 어머니를 찾았던 여인과 그 여인의 뱃속에 자라나는 또 다른 하나의 생명까지 버림받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스스로 모든 것을 끝내버리는 마지막 불타는 장면은 내면적 Trauma의 해결 없이 모든 것의 극단적 결말만을 보여준다. 용서 받을 수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그들에겐 버린 그 순간부터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한 번의 관계 단절로 그들은 영원한 관계 단절과 연속되는 외면만 낳고 만 것이다. 
  ‘가족’은 영화에선 언제나 낭만적인 장소로 표현됐다. 그리고 언제나 관객은 그런 것을 원한다. ‘과속스캔들’에서 혼자 사는 남자의 집 한복판으로 들어온 미혼모의 딸과 어린 손자를 자신의 품 속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나, 프랑스 영화인 ‘Papillon (2002)’에서의 새로운 가족 찾기에서 보듯 가족은 언제나 모든 것의 해결점이자 새로운 해결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것이 Happy Ending을 위한 전제였다. 그러나 [귀향]에선 가족이 비극의 시작이자 폭력의 또 다른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똥파리(2009)’에서의 가족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점에서 낯선 모습을 보여주는 [귀향]은 그러나 무척 현실적이다. 어쩌면 한국에서 행복한 가족은 영화에나 있을 법한 이상향이 되어 가고 있는 것만 같다. 왜냐 하면 현실의 냉혹성은 그렇게 우리 마음대로 편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영화의 두 번째 서사가 중요하다. 어느 중고생 여학생의 배부른 모습과 그 아이를 죽이려는 시도, 그러면서도 결국 포기할 수 없었지만, 그러나 아기를 세상에 내놓았을 때, 그녀가 원하지 않았지만 결국 자기의 아기를 사회가 억지로 갈라 놓을 때의 무력감과 그녀의 슬픈 독백은 버린 자와 버림받은 자의 불행한 관계의 무한반복을 강렬하게 보여준다. 어쩌면 이 영화는 그런 사회의 폭력성을 제시하는지 모른다. 보호와 재생산을 위해 노력해야 할 사회와 정부가 사실은 우리가 원하고 사랑하는 가족관계를 파멸시키는 원인이자, 원하지 않은 결과물을 어떻게든 은폐하려는 시도를 하려는 ‘괴물’이라는 것을. 그리고 사회는 결국 또 다른 불행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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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머 - Game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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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F 영화도 진화하나 보다. 새로운 관객을 찾기 위해서, 그리고 평단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뭔가 진지한 고민을 던져주려고 노력한다. [Gamer]는 그런 영화에 속한다. 그리고 선택한 방식이 Minority들에 관한 영화다. 영화 속의 모습은 통제 받고 그것에 익숙하게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이다. [매트릭스]란 영화가 그런 통제사회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인간들의 모험에 관한 것이라면 이 영화 속에 존재하는 인간들은 통제를 즐기는 그런 인간들이다. 그 이유는 통제에 대한 대가로 얻은 즐거운 게임이다.
  영화 스토리는 단순하다. 위험에 빠진 자가 위기를 극복하고 가족을 구하는 영화다. 뻔한 내용이어서 시작부터 대충 보면 스토리에 대한 궁금증은 사라진다. 그러나 이 영화의 중점은 스토리도 액션도 아니다. 영화를 구성하는 무대 장치와 구도의 상징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B급 액션물일 뿐이다. 영화는 과정 속에서 그 미학과 심각함을 느끼도록 만든다. 이 영화의 미학은 캐릭터의 성격을 뛰어넘는 그들의 위계적이고 불평등한 관계다.  




  [Slayer]란 온라인게임을 사이에 두고 두 명의 gamer가 존재한다. 조종하는 쪽과 조종당하는 쪽. 이들은 성격이 전혀 다른 공간에서 존재한다. 한쪽에선 안락한 장소에서 즐거움을 위해 조종하는 쪽이라면 다른 한 쪽은 사형당하기 싫어서 게임에 참가, 만약 일정 경기에서 죽음을 모면하면 생존을 보장받는다는 각서를 쓰고 출전한, 목숨을 건 전사들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바로 후자의 한 명이다. 그리고 이런 게임의 구도를 만든 창조자는 저편에서 이들의 불평등한 관계를 만들고, 그런 안락함 속에서 둘 다를 지배하는, Slayer game을 구상한 게임제작자가 있다. 엄청난 수입원을 올리는 게임 제작자는 양자간의 불평등한 구조를 통해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내고 더 나아가 사람들의 뇌와 재미를 통제, 세상의 지배까지 꿈꾸게 된다.
  이 구도엔 영화 ‘매트릭스’에서 봤던 세계가 보인다. 그러나 매트릭스와 다른 점은 참가자들이 자발적이란 점이다. 도시생활에서 비롯된 비인간화의 심화는 미래를 투영하는 거울인가 보다. 그래서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는 방식이 제거되거나 협소화된 도시생활 때문에, 그들은 가식적이고 거짓된 사회에 참여, 자신들의 욕망을 거리낌없이 표현한다.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도시인 비겁하거나 소심한 모습들은 온라인 게임이란 가상의 세계에서 자신과 전혀 반대되는 욕망을 지닌 자들로 탈바꿈한다. 그들의 진정한 육체는 어느 골방에 있어도 자신들의 이상을 상징하는 캐릭터들을 통해 세상과 교류하는 것이다. 그 캐릭터들은 아름답고 멋지며 무척 대범하다. 그들의 본 모습이 추하더라도 그들은 가상의 세계에서 우아하거나 거칠 정도로 대범하다. 어쩌면 그러고 싶은 인간의 본능을 만족시키는, 대리만족의 세계인 것이다. 그 속에서 행복을 느껴야만 하는 인간의 비극을 담고 있다. 그들도 결국 Minority인 셈이다. 

  영화의 또 다른 측면은 ‘1984’에서 볼 수 있는 ‘Big Brother’의 또 다른 모습이 존재하고 있다. 가상의 세계이지만 gamer의 뇌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그것을 통해 그들의 마음은 물론 신체적 활동까지 통제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세상 사람들을 통제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려는 독재자는 확실히 우리 사회의 적이다. 특정한 개인의 의도로 많은 이들의 의사가 조정되고 통제되는 것은 결코 우아한 모습은 아니다. 그는 영화 속에선 부정적 악이다. 그러나 영화 속의 특정인의 모습은 우리 사회에 점차 확대되고 있다. CCTV란 기계는 개인의 이익을 보장해주는 장치이지만 점차 우리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기계로 진화하고 있다. 우리들의 행동을 본다면 점차 통제하려는 의지를 가질 경우, 영화에 있는 게임 창조자들의 욕구를 실현할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영화는 신나는 격투신이나 전투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 모두가 우울하거나 불행해 보이는 것들일 뿐이다. 그런 경기에서 실제로 참여해서 목숨을 걸어야 하는 minorities의 모습은 절망으로 밀려가고 있는 현대인이 은연 중 투영된다. 보호를 받기 위해 통제를 요구하는 역설 속에서 인간들의 관계는 파괴되고 불평등하게 변모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영화는 우리들의 미래를 보여주는 것만 같다. 그런 속에서 우리들의 따뜻한 관계를 기대하기 힘들 것이고 행복 역시 암울하긴 마찬가지다. 우리가 왜 이리 살아야 하는지를 되돌아보게 해준 슬픈 영화다. 그래서 꼭 봐야 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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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와 리저드 - Mayb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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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나 버림 받은 자의 고백은 슬픈 것이기보다 힘들면서도 분노에 차있다. 아마도 자신을 버린 자에 대한 분노와 그런 것에 묶인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 아마도 인간으로서 행복하기 위해선 자신의 문제점을 남겨 둬선 안되기에 이런 것들과 힘겹게 싸워야 한다. 아마도 그런 투쟁의 결과가 좋은 결과가 나올 수만은 없겠지만 그래도 뭔가 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그 무엇인 노력 아닐까?
  인천공항은 만남과 이별의 장소다. 그러나 동시에 귀향의 장소이기도 하다. 뉴욕에서 인천공항까지 비행기 시간으로 하루 안으로 돌아올 수 있는 16시간이지만 23년 이상 걸린 것을 밝힘으로써 영화는 단순하지만 복잡한 내면의 문제를 갖고 온 어느 여자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녀에게 한국은 자신을 버린 그들이 있을 것이며, 어느 이해 못할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해 온 것이다. 왜 버렸는지, 아님 누가 버렸는지.
 그것을 안다고 과연 내면의 문제가 해결될 지는 모른다. 그러나 알고 싶다. 이 점에서 그녀는 평범한 인간이다. 안다고 어떤 것도 해결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알고 싶은 근원에 대한 질문을 갖고 있다는 것. 일반인들은 뻔한 것이고 다 알고 있지만 그녀에겐 무척 심각한 고민이고 해외입양이란 새로운 현실을 묵묵히 20년 이상 살아왔으면서도 자신의 딱 3년 간의 한국에서의 인연을 알기 위해 귀향한 것이다. 
 

  그녀를 맞이한 것은 어느 순간 죽을지 모를 답답한 가슴을 갖고 있는 택시 운전사다. 그는 남자고 아프다. 어느 순간 죽을 지도 모르는 위험을 안고서 평범한 일상을 산다. 다만 그도 좀 유별나다. 죽음을 목전에 뒀으면서도 특별하게 병원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닌, 평범하게 직장을 다니고 있다. 그에게 미래가 어느 정도 허락되어 있을까? 의사 말로는 얼마 없단다. 그런데도, 그냥 그는 빨간 토끼를 찾고 있었다. 이런 상징적이면서도, 엉뚱한 꿈을 갖고 있는 그는 평범하게 살고 있는 시한부 인생이다. 그런 그에게 과거로의 여행을 이끈 것은 해외 입양됐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May라는, '오월'이란 별명의 여자다.
  기묘와 우연이란 줄거리를 통해 그들은 억지로 연결된다. 어차피 문학이나 영화와 같은 서사를 갖고 있는 예술엔 ‘우연’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다 알고 우린 그 세계로 진입한다. ‘종로 3가’에서 우연하게 만나고 헤어지는 그런 남녀를 이야기를 담는 것이 아닌, 억지스럽지만 신기하지만 질긴 인연을 갖고 이야기를 만들고 감동시키는 것이다. 이 영화는 그런 범주에 드는 영화다. 그리고 그런 뻔하지만 둘의 낯선 관계는 과거로의 기이한 여행을 하게 된다. 그들의 과거처럼 이미 폐쇄된 ‘예서역’은 이미 기능을 상실한 철도역이지만 그들 둘에겐 과거로의 여행과 과거의 그들간의 관계의 확인, 그리고 서로 간의 상처를 보듬을 수 있는 장소로 탈바꿈한다. 과거의 상처는 과거에 치유될 수 없는 것이다. 치유는 언제나 현재시점이다.  



  과거의 자각 속에서, 혹은 과거에 있던 어느 존재를 찾기 위해 그들이 만난 것은 서로였다. 사건의 일부든, 혹은 전부든 그들은 아주 신기하고 우연한 사건을 공유하고 있고, 그것이 어느 순간 그들의 내부 고통의 원인이었다. 현대의학이 고치기 힘든 내면의 상처와 비극적 사건의 공유는 그들끼리 서로 끌리고, 의존하게 되도록 이끌었으며, 그들의 치유는 다른 사람 아닌 그들에 의한 것임을 영화는 은연 중에 밝힌다. 그리고 그런 치유는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닌 솔직과 같이 있음을 통해 해결된다.
  인간은 고독하지만 그 고독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내면적인 경우, 결국 타인에 의한 것이다. 상대를 타자화하면서 자신의 내부로부터 밀어내는 것이 일상화된 현실에서 타인의 가치는 점점 망각의 세계로 가고 있다. 그러나 그 필요성이 적어진 것이 아니다. 그냥 외면할 뿐. 또 그런 것이 편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망각이 우리들에게 과연 무엇인지 자문해야 할 것 같다. 편한 것이 치유는 될 수 없듯 타인의 관계의 망각은 내면을 더욱 힘들게 할 뿐이다. 과거에 대한 과감한 직시와 그에 대한 적극적인 타개, 그리고 그것을 위해 타인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것이야말로 해결의 실마리일 것이다. 아마 [토끼와 리저드]는 결국 고통 속에서 내면을 위한 타인의 필요성을 절감하도록 이끈 것이란 생각이 든다. 영화는 좀 지루한 관계 맺기와 우연한 만남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그 치유의 방법 제시는 무척 인상 깊다. 나도 ‘예서역’에 한 번 가고 싶다. 그런 곳이 있을지 모르겠고, 그 곳을 어떻게 가는 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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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10월5주

[하늘과 바다], [여행자], 그리고 [귀향]

  [하늘과 바다], [여행자], 그리고 [귀향]이란 영화는 모두 고아들에 관한 영화이며, 기이하게도 서로 연관이 있는 영화들입니다. 마치 시간의 장난을 느끼듯. 그리고 고아가 된 이들의 도발적인 관계맺기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관계 속에서 고통과 희망, 두 가지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감동이 있습니다.
  부모와의 이별만큼 이 세상에서 슬픈 것이 있을까요? 가장 의지를 하는 부모와의 관계가 순식간에 파괴된 이후의 고통은 일반인들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얻는 정신적 고통은 갑작스런 성숙을 방해하던가, 혹은 어린 소녀의 마음에 어두운 인간적 심성을 심고 맙니다. 그래서일까요? 그들의 어두운 과거를 치유하기 위해 새로운 친구, 혹은 가족을 만드는데 있어 주저하지 않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듭니다. 해외 입양됐던 어느 남자의 한국으로의 귀향은 어린 시절의 해외입양과 그 이후라는 시간적 연속성을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는 과정 속에서의 인간적 비극의 결말과 그것이 무한반복되는 우리들의 슬픈 여정을 보여줍니다.

하늘과 바다 

  24살임에도 정신적으론 6살에 머물게 된 ‘하늘’은 꿈 많고 별이 가득한 아름다운 세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웃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하늘’의 마음 속에 내재하는 외로움이란 고통은 타인과의 관계 만들기에 조심스러우면서도 열심입니다. 반면, ‘새엄마’와의 갈등으로 인해 갑작스레 고아가 된 ‘바다’는 불신이 불신을 낳듯, 세상에 대한 분노와 짜증만을 보이지요. 물리적으로 만날 수 없는 하늘과 바다란 거리감이 영화에선 두명의 캐릭터로 사라지며 도리어 역설적인 둘은 만남을 즐깁니다. 이 둘의 기이한 동거는 가슴 아픈 고아들의 극적인 화해와 치유를 보여줍니다. 무엇보다 왜 장나라의 대종상 여우주연상 후보가 당연한 결과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행자 

 

  사랑을 받아도 아쉬운 7살이란 어린 나이에 버림받은 고아가 되어버린 어느 가엾은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해외입양을 원하는 아빠의 버림 속에서 고아원에 들어간 영화 속 주인공인 ‘진희’는 그곳에서 새로운 만남과 필연적인 이별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곳에서 느끼는 좌절과 분노로 인해 언젠가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인생으로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가게 됩니다. 어쩌면 버림받아 해외 입양된 감독인 ‘우니 르콩트’의 분신일 것 같네요. 버림받은 어린 소녀의 연기를 완벽하게 보여준 ‘김새론’의 연기는 정말 믿을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버림받은 어느 소녀의 자책과 괴로움, 외로움과 그로 인한 세상과의 단절은 어느 비극도 표현하기 힘든 장면입니다. 이후 새로운 세계로의 관계를 만들기 위해 떠나는 모습에서 왠지 모를 우울과 기대감을 동시에 느끼게 합니다. 그녀의 미래엔 행복만이 있길 빕니다.   

귀향  


  해외입양이란 형태로 가족으로부터 그리고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두 가지 이름을 지닌, 어느 소년이, 성장한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찾는 것이 기본 줄거리입니다. 어느 모녀를 찾게 되면서 이야기는 버린 자와 버림 받은 자 간의 소통단절과 그 가혹한 고통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들의 기묘한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여정은 버림받은 자들의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를 보여줍니다. 무엇보다 치유하기 힘든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지지 못한 우리 모두의 비극을 형상화합니다. 그러면서 또 하나의 어느 여고생이 겪는 미혼모의 모습에서 어쩔 수 없었던 버린 자와 버림 받는 자와의 운명이 무한반복됨을 확인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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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위크 - One week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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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한 생활을 하고 평범한 인생의 행로를 따라 갈 그런 운명이 갑작스레 바뀌고 만다. 인생의 전환점은 언제나 예상 외의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만 같다. 영화에서 자주 사용한 충격소재이지만 극적인 것을 가져오기엔 최고인 질병인 암. 하지만 너무 사용해서인지 좀 진부하긴 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암환자의 투병일기는 아니다. 암으로 인생 전체를 다시 생각하게 된 어느 초등학교 교사에 대한 마지막 소원을 이루는 영화다.
  평범한 진로에서 벗어난 길을 암환자는 시작한다. 지금까지 일을 하는데 있어 기준이었던 평범한 삶의 방식은 악성단계인 암 4기의 진단 이후 모두 바뀌기 시작한다. 결혼을 앞둔 그였지만, 가족이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새로운 것을 찾는 원인은 그냥 자신이 원했던 오토바이크였다. 그리고 서부로의 여행을 선택한 기준은 합리적이고 복잡한 계산이 아닌 단순하고 우연을 상징하는 ‘오늘의 운세’였다. 

  언제나 마음 속 어디엔가 있었던 ‘하고 싶던 것’을 현실화시킨 것은 얼마 남지 않다는 생명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후 선택의 기준은 자신의 마음 속에 감춰져 있었던 ‘자유,’와 꽉 짜여지지 않은 ‘운명’이었다. 병 말기이기에 병원 치료를 받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었겠지만 그는 그런 삶을 포기했다. 병원 침대에서 치료를 하면서 잃게 될 자신의 생활을 거부하고 그는 자유로운 마지막을 선택한 것이다. 이후 영화는 Road Movie의 전형을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과 그들과의 관계를 통해 영화는 성찰의 과정을 밝힌다.
  영화는 ‘의식의 흐름’처럼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시간의 순서가 아닌, 주인공의 생각의 흐름을 따라 시공간의 순서와 상관 없이 자신의 시간과 의미를 되새기면서 인간 한 명의 운명을 전체적으로 조감하는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이 만났던 공간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자신을 찾기 시작했고, 아무것에도 묶이지 않은 자유를 만끽하기 시작한다. 그의 서부로의 여행은 모든 것에서 벗어난 자유의 색다른 즐거움을 의미한다. 그 속에서 확인하는 캐나다의 아름다움과 자신이 어릴 적 들었던 그 어떤 것을 찾기 위해, 만약 자신의 죽음이 평범했다면 하지 않았을, 위험한 모험도 서슴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바다로 간다.  



  항상 과정의 흐름 속에서 영화는 ‘그러나’가 존재한다. 접속사인 ‘그러나’가 나오는 부분은 영화 마지막 쪽이다. 무너진 오토바이크 앞에서 영화는 끝으로 가고 있었다. 비록 무척 어려운 서사의 나열이 있긴 하지만, 그의 마지막 여행을 통해 자신의 희망, 새로운 자아, 그리고 과거의 중요성을 확인하게 된다. 벗어나고자 한 즐거움이 있겠지만 자신이 소중하게 가꿔왔던 주변의 가치를 다시금 확인하는 순간이었고, 그는 마지막 일상으로 돌아온다. 자신의 과거의 꿈이었던 소설가로서의 마지막 작품을 남기게 되는 아주 짧은 특별한 날들을 지낸 후 그의 이야기는 어느 타인에 의해 구술된다.
  인생의 얼마만을 살게 된다면 누구나 비슷한 결정을 내릴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인생을 살고 싶은 충동을 채우려는 그런 결정을. 어쩌면 우린 현재의 생활을 감옥으로 여기는지 모르겠다. 그러기에 일탈은 매력적으로 다가오며, 그런 일탈을 경험하는 것이 마치 마약처럼 행복이 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일상의 가치를 잊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삶의 모든 형태는 중요한 것이다. 살아있는 가치는 가슴의 박동이 아니라 살면서 얻게 되는 관계, 믿음, 그리고 사랑 등으로서 혼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들이며, 인간 사이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짧은 시간이 주는 매력을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되돌아보게 하는 시간을 얻는 것, 바로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즐거움이 아닐까 생각한다. 삶을 너무 편파적으로만 봐선 안 될 것 같다. 삶은 이중적이기에 그 속에 긍정적인 것을 찾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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