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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5월
평점 :
하버드 대학의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이 지은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Tyranny of the Minority)는 정치학적 측면에서 현대 미국의 민주주의 체제가 지니는 한계를 해부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는 책이다.
책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우선 저자들은 현재 미국 및 전세계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민주주의가 퇴보한 사례를 소개한다. 이어서 저자들은 과거 민주주의가 후퇴한 역사적 사례들을 제시함으로써 우리 시대에 닥친 민주주의의 위기가 현대에 나타난 새로운 위기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 후 저자들은 현재 미국 정치제도의 다수결주의에 맞서 미국의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반다수결주의적 요소들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들은 이 같은 미국의 뒤처진 정치제도를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 그 방향을 제시하며 책은 마무리된다.
이 책에서 저자들의 주요 논지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주된 주장은 민주주의 시스템 내부의 한계가 정치적 소수에 의한 다수의 지배를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첫 번째 논거는 민주주의의 원칙에 충실한 충직한 민주주의자와 구분되는, 표면상의 민주주의자들의 존재다. 민주주의자로 위장한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극단적인 소수를 묵인하거나 동조한다. 이를 통해 극단적인 소수가 권력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들이 그 근거로 내세우는 지점은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과 2010년대 말에서 2020년대 초 미국의 공화당이다. 물론 반례도 제시된다. 예를 들어 1981년 2월 23일 스페인에서 일어난 군부 쿠데타에서 당시 스페인 정계의 거물들이 쿠데타에 맞선 사례가 그것이다.
두 번째 논거는 미국의 정치 제도들이 다수를 대표하는 정당과 소수를 대표하는 정당 간의 격차를 왜곡시킨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저자들은 미국 정치 제도(상하원, 주의회, 게리맨더링, 종신직인 대법원 판사, 선거인단 제도)가 지니는 여러 맹점들을 제시한다. 저자들은 이러한 정치 제도상의 허점 덕분에 다수의 지지를 받는 민주당에게는 불이익을 준 반면, 소수의 지지를 받는 공화당이 민주당과 맞서 이익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익을 가져다주었다고 말한다.
결론에서 저자들은 미국의 민주주의 시스템은 소수의 지배를 용인하는 현재의 방식에서 보다 '다인종 민주주의'에 걸맞는 방식으로 개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저자들이 인정하듯이 이러한 아이디어들은 금방 이루어질 수 있는 개혁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저자들은 과거 미국의 노예제 폐지 과정이나, 참정권 확대 과정에서 보이는 역사적 사례들을 예시로 들며 그러한 변화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함을 강조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다음의 장점들을 지닌다.
첫째는 어려운 용어들은 배제하고 쉬운 용어들을 중심으로 미국의 정치제도를 해부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저자들은 미국 정치제도의 ‘민주주의’적 성격에 가려진 비민주적 성격들을 포착하고 이를 정치 제도에 해박하지 못한 일반인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풀어낸다.
두 번째는 미국의 정치제도라는 특정한 주제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저자들은 독자들에게 경제, 사회, 문화를 비롯한 미국 사회의 다층적 측면과 얽힌 대단히 복잡한 미국 정치제도를 명쾌하게 설명하면서 저자들이 특별히 강조하는 지점, 바로 미국 민주주의에 내재된 반다수결주의적 요소들이 내포한 한계와 그에 대한 저자들의 비판을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미국 정치제도를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산물로 간주하는 관점이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비록 한국의 독자일지라도) 현재의 법률과 제도와 (독자들이 마주하는) 현실 간의 간극을 따져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 못지않게 이 책은 치명적인 단점들도 몇 가지 안고 있다. 이는 현재 민주주의 국가들이 마주한 초국가적인 민주주의 제도의 위기를 오해하게 만들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지적되어야 만 한다.
우선 이 책의 저자들은 미국의 정치제도에만 집중한다. 앞서 말했듯이, 이러한 선택과 집중은 현재의 미국 정치제도가 지닌 제도적 한계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다층적인 미국 사회와 긴밀히 얽혀 작동하는 미국 정치제도의 여러 측면들을 단편적으로 다루는데 그치고 만다는 한계도 노출한다.
그 사례가 이 책이 출간된 후 치러진 2024년 미국 대통령 선거다. 그 결과는 저자들의 논지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지점들을 내포하고 있다. 2024년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는 2016년과는 달리 총득표수에서도 민주당의 카멀라 해리스 후보를 제쳐버렸다(물론 그 차이는 1%내외이긴하지만). 저자들의 논지에 따르면 2021년 1월 6일 의회 폭동 이후 미국의 ‘다수’는 의회 폭동에 반감을 보였다. 그런데 왜 ‘다수’는 트럼프를 선택했단 말인가?
여기서 이 책의 치명적인 결함들이 노출되기 시작한다. 첫째는 ‘다수’와 ‘소수’의 구분이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다수’와 ‘소수’에 관해 유의미한 정의를 내리지 않는다. ‘다수’는 특정 인종집단인가? 특정 지역 집단인가? 특정 계급인가? 이 책에서 ‘다수’는 그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여론조사와 보통선거라는 과정에서 정치인을 선택하는 수동적인 주체일 뿐이다.
반면 이 책에서 ‘소수’는 ‘다수’에 비해 비교적 선명하다. 저자들은 21세기 현재의 미국이 ‘다인종 민주주의’라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반면, ‘소수’는 이러한 흐름에 저항하는 기득권 세력으로 묘사된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소수’ 역시 ‘다수’에 비해 좀더 윤곽이 보인다는 것이지, 선명하지는 않다. 이 ‘소수’는 누구인가?
이 책의 설명에 따르면, 적어도 미국에서 ‘소수’는 20세기까지 유지된 수직적 인종 위계에서 최상위에 위치한 백인, 혹은 인구가 많은 주와 똑같은 수의 상원을 할당받아 정치적으로 대등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구가 적은 주로 추정할 수는 있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이로부터 독자는 ‘다수’와 ‘소수’를 어떻게 구분해야하는가라는 문제와 직면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가상의 대통령 선거에서 A후보가 55퍼센트의 지지를 얻고 B후보가 45퍼센터의 지지를 얻었음에도 선거인단 같은 제도를 통해 B후보가 승리했다면 이는 저자들이 말하는 소수의 폭정을 잘 드러내는 사례일 것이다.
그런데 선거 결과가 0.5% 내외의 초박빙 상황이라면 누가 ‘다수’이고 누가 ‘소수’인가? 예를 들어, 지난 2022년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승자는 48.56%의 득표율과 16,394,815표를 획득했지만 패자는 47.83%의 득표율과 16,147,738표를 획득했다. 득표율은 0.73% 차이이며 표차는 불과 247,077표에 불과하다. 그럼 이 선거의 승자는 다수이고, 패자는 소수인가?
이 같이 저자들이 애매모호하게 얼버무린 ‘다수’ 개념은 상황에 따라 유동적인 ‘다수’와 ‘소수’의 복잡한 역학관계를 간과한다는 또다른 문제로 이어진다. 사회 전체에서는 ‘다수’인 집단이 특정한 상황에서는 언제든 ‘소수’가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소수’라는 개념의 불분명함 역시 비슷한 문제를 초래한다. 이 책에서 ‘소수’는 저자들의 기술을 참고해볼 때, 강력한 영향력과 기득권을 지닌 ‘소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독자가 흔히 사회적 약자로 상정하는 ‘소수’와 거리가 있다. 문제는 독자의 편견 속 ‘소수’와 저자들이 상정한 ‘소수’ 간의 교집합이 현실에서 예상외로 흔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래퍼 카니예 웨스트는 인종적으로는 흑인 남성이다. 이 점에서 그는 조지 플로이드와 같은 범주로 묶일 수 있다. 그런데 계급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는 사회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인플루언서이이다. 비슷한 사례는 많다. 예를 들어 많은 미국 구글, MS 같은 빅테크 기업들에서 CEO 자리를 꿰찬 인도인들은 어떤 ‘소수’인가? 애플의 팀 쿡은 백인 남성 동성애자다. 그럼 그는 어떤 ‘소수’인가? 그리고 그러한 ‘소수’들이 경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 빅테크 기업들의 행태는 어떻게 규정되어야 하는가?
이러한 저자들의 불분명한 ‘다수’와 ‘소수’ 구분짓기는 현실에서 독자가 마주하는 복잡한 ‘다수’와 ‘소수’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이는 곧 저자들의 논지를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만다.
이 책의 두 번째 결함은 정치제도와 정당에만 집중함으로써, 특정 정당이 ‘다수’를 외면하고 이 책에서 규정한 ‘소수’만을 위한 정당으로 전락하는 과정을 불완전하게 설명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보자. 2025년 한국에서 탄핵과 관련된 일련의 흐름을 따라가보자. 2024년 12월 3일 계엄령 이후의 정국에서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반대하는 집단은 특정 정당에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의 전체 유권자에서 이들 집단의 비중은 ‘소수’일 것이다. 그러나 특정 집단이나 정당 안에서는 이들이 ‘다수’다. 저자들이 이 책에서 제시하는 공화당의 선거 전략 및 지지층 공략 방식은 2025년 한국에서 탄핵 반대 세력이 영향력을 유지하는 이유를 부분적으로나마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저자들이 이 책에서 제시한 프레임에 비추어볼 때, 이 같은 ‘소수’ 집단이 제도 속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즉 눈에 보이는 현실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소수’의 존재는 잘 보여주지만, 그 이전 ‘소수’가 정치제도에 침투하여 존재감을 드러내기까지의 과정, 요컨대 눈에 보이지 않는 과정은 설명해주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독자는 특정 극단주의에 경도되거나, 혹은 이를 주도한 ‘소수’가 정치제도 속에 갑자기 등장한 것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극단적인 발언을 하는 정치인이 오히려 영향력을 획득하는 현상은 정치인의 극단적 발언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그에 동조하는 일정한 숫자 이상의 지지자들이 특정 정치인을 지지함으로써, 혹은 자신들의 정치적 대리자로 인정함으로써 그 정치인은 비로소 영향력을 지닐 수 있게 된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하지 않던가?
그리고 이 같은 ‘소수’를 지지하는 지지자들은 앞서 지적했듯이 특정 인종/계급/젠더/종교 같은 범주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영역이다. 한 인간을 특정 범주 속에 집어넣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진 다양한 측면을 무시하겠다는 선언이다. 그리고 이 같은 범주화는 오히려 현상을 파악하는 데 방해만 된다. 영향력과 기득권을 지니며 극단적인 발언을 일삼는 ‘소수’를 지지하는 지지자들을 단순히 ‘못 배워서’ ‘몰라서’, 막말로 ‘국평오’여서 같은 식으로 범주화하고 매도하는 것은 해당 지지자들을 오히려 극단주의의 영역으로 몰아내 극단주의가 자라날 토양을 마련하게 해주는 것에 불과하다.
도널드 트럼프 및 그 지지자들의 행태와 별개로, 트럼프의 지지 세력이 공화당을 장악하였고 선거에서 승리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이 책에서 저자들이 제시하는 미국 정치제도의 거시적 구조 분석이 미국 양대 정당이 저지른 실수들을 희석시킨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기성 미국 공화당 정치인들이, 이어서는 미국 민주당이 선거에서 트럼프에게 패배했다. 그 원인에는 한편에서는 기존의 정치인과는 궤를 달리하는 상식밖의 행보를 보인 트럼프와 그 지지자들이 있겠지만, 다른 한편에는 이 같은 변화를 제대로 파악하고 대응하지 못한 채 무력화된 기성 정치인들도 있다는 것이다. 전자와 달리 후자는 정치 제도 바깥의 다양한 유권자들을 결집시키지도 못했고 그 결과 전자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물론 저자들은 표면상의 민주주의자라는 개념을 내세우고 공화당 내부에서 트럼프를 저지하려한 공화당의 기성 정치인들의 노력도 그려내긴 한다. 그러나 저자들의 분석은 피상적이고 단편적인 수준이며, 이에 따라 독자의 시선을 미국 정치제도라는 게임의 룰이 내포한 허점만 바라보게 만든다. 명심하자. 게임은 게임의 룰도 중요하지만 게임에 참가하는 참가자, 그리고 게임을 관전하는 관전자 역시도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저자들은 ‘다인종 민주주의’라는 이상을 정해놓고 그러한 방향에서 일탈하게 만드는 미국 정치제도의 한계를 경계하는 모습을 보인다. 문제는 그러한 이상이 아무리 구체적이고 현실을 반영한다 하더라도 현실과 괴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다인종 민주주의’라는 방향에서 저자들이 ‘소수’로 상정한 이들의 반동적 행태는 역사의 진보에 대한 ‘반동’으로만 해석되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그러한 해석이 설명하지 못하는 지점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같은 저자들의 관점 아래에는 특정 방향으로의 역사적 과정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역사는 진보한다’는 역사관의 변형, 혹은 진보와 퇴행을 구분짓고 진보를 지향해야한다는 이분법적 프레임이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프레임은 곧 과거와 현재, 나아가 미래의 방향을 재단하게 만든다.
물론 저자들이 지적하는 미국 정치제도의 한계는 유효하며 설득력이 있다. 그 점이 이 책이 지니는 시의적절함이며 이 책의 주된 가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래를 그려나갈 때 하나의 방향을 선점해놓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한다는 프레임은 미래로의 다양한 가능성을 지워버린다. 그러한 프레임은 우리가 현실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을 인지하지 못하게 가리는 필터이기도 하다. 나중 가서야 우리는 그러한 필터 밖의 기괴한 현실을 깨닫고 몸서리친다. 이미 2016년에 경험하였고, 2024년에 또다시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