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고화질] 봇치 더 록! 외전 히로이 키쿠리의 과음일기 03 봇치 더 록! 외전 히로이 키쿠리의 과음일기 3
하마지 아키, 쿠미쵸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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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편과는 다른 모습이 재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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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로알토, 자본주의 그림자 - 미국경제 욕망의 역사
말콤 해리스 지음, 이정민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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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로 알토, 스페인어로 '큰 나무'라는 뜻의 이 도시는 샌프란시스코와 산 호세 사이에 위치한 작은 도시다. 이 도시에는 미국의 아이비리그 만큼이나 유명한 대학, 스탠포드 대학이 위치하며 미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부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말콤 해리스는 팔로 알토 출신이면서도 2011년 월가 점령 캠페인을 주도한 인물이다. 나아가 그는 이 두꺼운 책을 지극히 개인적인 동기에서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이 살기 좋은 동네에서 어린 학생들이 연달아 자살하는 사태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무엇이 이 '살기 좋은 동네'에서 그러한 사태를 초래한 것일까?


이어서 이 책은 팔로 알토라는 도시, 나아가 이 도시를 포함하는 캘리포니아라는 지역이 1850년대 미국의 소유가 되는 과정에서 시작해, 골드 러시로 이어지는 캘리포니아의 급성장, 스탠포드 대학의 설립, 팔로 알토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스탠포드 대학을 거쳐간 여러 학생, 학자, 사업가들과 미연방 정부 산하의 다양한 기관들이 뒤얽히며 형성된 촘촘한 '미국적인 정경유착' 혹은 비즈니스 네트워크의 고착, 그리고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의 사반세기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아는 21세기 현대 사회(비평가들은 이를 두고 '탈산업사회,' '제4차 산업혁명,' '제3의 물결'과 같은 여러 명칭을 사용한다)의 등장 과정을 추적한다. 


이렇게 요약하면 이 책의 저자의 의도를 왜곡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저자 말콤 해리스는 '2011년 월가 점령 시위를 주도한 인물'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이러한 미국의 한 지역으로서 팔로 알토라는 지역의 경제적, 지적 위상의 발전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그의 서술에서 언급되는 대다수의 스탠포드 학자와 학생들, 그리고 그와 연계된 창업자나 기업가들은 대체로 부정적인 측면이 부각된다. 포티나이너스에서부터 릴런드 스탠포드까지, 루이스, 프레데릭 터먼에서부터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저커버그까지. 


이 점에서 저자 해리스는 이미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다. 우리가 실리콘 밸리의 유명 창업가들, 흔히 '차고 속에서 미국에서 제일 가는 대기업을 일군 거인들'이라 이상화하는 인물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생각하면 바로 드러나는 지점이다. 예컨대 우리 사회의 정치인들은 항상 '미래 먹거리'를 강조하면서 미국 거인들의 정신을 본받아야 하며, 한국에서도 이런 거대 기업들을 탄생시킬 필요성을 강조하고는 한다. 


이러한 '거인'들이 세운 회사로는 미국의 시가총액 최상위권을 차지하는 매그니피센트 7이 대표적이다.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구글, 페이스북, 테슬라, 엔비디아의 창업자들은 거의 다 미국 서부, 태평양 연안 지역(캘리포니아의 실리콘 밸리와 시애틀)과 관련이 있으며, 많은 경제지나 경제/경영서적에서 아주 긍정적인 인간상으로 표현되곤 한다.


어떤 점에서, 이런 '거인'들의 신화는 이미 21세기 현재 전 세계의 '경제영웅'의 신화를 차지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이든, 유럽이든, 중국이든, 한국이든 간에 출신지와 상관없이, 이들 거인 혹은 경제영웅들은 미래를 향한 비전을 보여주고 제시하는 인물로서 그들의 발언 하나하나가 전 세계 주식, 코인, 환율 가격을 변동시키며, 때때로 이들의 비판적 발언은 경제라는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대표적인 사례로 빌 게이츠와 일론 머스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빌 게이츠는 마이크소프트 경영에서 물러난 뒤 각종 자선 재단을 설립하여 기부 및 자선사업을 이어가면서 흔히 '선한 영향력'을 대표하는 은퇴 기업가로 자리잡았다. 반대로 일론 머스크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행보와 각종 물의를 일으키는 발언, 나아가 최근 들어 정치에 발을 담그며 각종 논란의 중심이 되면서 부정적인 면모를 이전보다 더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저자 해리스의 관점에서 보면 빌 게이츠와 일론 머스크는 사실 동전의 양면에 불과하다. 이들은 미국 내에서도 미국적이며 자본주의의 첨병이라할 팔로 알토, 스탠포드, 실리콘 밸리가 주도하는 현대를 상징하는 인물들일뿐이다. 즉, 이들의 창업과 성공은 기본적으로 실리콘 밸리 지역이 보여주는 자본주의 구조 내에서의 경제적 성공이라는 공식의 일부이다.


여기서 해리스는 이런 '경제영웅'들이 어떻게 영웅으로서 시련을 극복했는가 그 과정을 드러낸다. 이 점에서 해리스의 이 책, 『팔로 알토』는 팔로 알토로 상징되는 실리콘 밸리, 캘리포니아, 미국의 빛과 그림자, 혹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보여주게 된다. 


이 책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면 캘리포니아가 경제적 중요성을 띠게 된 19세기 중반, 골드러시 무렵부터 이런 '경제영웅'들은 누군가들을 희생시켜 영웅이 되는 과정이다. 단지 우리가 20세기 후반-21세기 초의 주요 경제영웅들만 기억하기에 그 이전의 경제영웅들은 부각되지 않을 뿐, 팔로 알토에서는 경제영웅들이 늘상 그래왔다는 것이다. 그 희생자들은 19세기 초중기에는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 19세기 중후반부터 20세기 초기까지는 미국 내에서 이주한 흑인을 비롯해 멕시코, 중국, 일본, 한국, 인도 등지에서 이주해온 노동자들, 20세기 중반부터는 동남아, 인도 등지에서 온 이민자들이었다. 이들 이주자들은 경제영웅들을 위한 노동력을 과잉공급하면서 그 대가는 턱없이 적게 받아가며 경제영웅들을 위해 희생되고 종국에는 그 존재까지 잊혔다. 물론 여기서 '잊힌'이라는 의미는 대중적 의미에서 그렇다는 의미이다. 적어도 20세기 중후반부터 역사학, 특히 미국 역사학은 이런 잊힌 존재들의 목소리를 발굴하려 해왔기 때문에.


이러한 백인 경제 영웅의 영웅적 행보를 정당화한 요소 중 하나가 백인 우월주의다. 저자는 스탠포드 대학이 설립되기 이전 과정을 추적하면서 스탠포드가 부를 축적하는 과정, 그리고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경마에 사용할 훌륭한 경주마를 육성하는 과정, 나아가 이러한 '우생학'이 백인의 우수성을 정당화하는 인지적 도구로서 활용된 과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우생학'은 스탠포드 대학을, 나아가 미국을 우수한 백인 남성을 육성하는 장소로서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의 일부분으로서 20세기 내내 작용했다. 덧붙여 이러한 백인 우월주의 이데올로기는 팔로 알토의 경제영웅들이 시련을 헤쳐나가는 경제 영웅의 여정을 '영웅의 여정'답게 포장하는 역할도 겸했다. 경제적 착취나 사회적 차별에 불과한 행위조차도 관점에 따라서는 기업, 나아가 국가를 살리기 위한 영웅적인 결단이 될 수 있는 법이다.(물론 그 반대도 성립한다)


물론 20세기 중후반 들어서 이러한 경향은 바뀐다. 20세기 후반부터 이러한 백인 우월주의도, 그 아래 가려진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도 가려져버린다. 첫째는 경제영웅들이 착취하는 대상이 미국 내에서 미국 외부로 옮겨갔다는 점이다. 흔히 우리가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이루어진 세계화 경향이라 일컫는 바로 그것이다. 이제 실리콘 밸리의 기업들은 태평양 연안의 여러 국가들의 저렴한 생산력을 이용해 비용을 절감하고 최대한의 이윤을 창출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제 이주노동자가 아니라 타국의 현지 노동자가 착취당하며, 그들의 문제는 그들이 속한 나라의 문제이지, 미국 내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두 번째는 새로운 개념이 이주 노동자들을 가렸다는 것이다. 이주 노동자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경제영웅들은 여전히 건재하다. 그럼 무엇이 이를 가리고 있을까? 바로 소비자다. 미국의 주요 대기업들은 소비자의 데이터를 수집하느라 혈안이 되어 있으며, 21세기의 시작을 알린 911테러 이후 미국 정부는 기업들의 소비자 데이터 수집을 묵인했다. 애초부터 이런 경제영웅들과 그들의 기업들은 노조에 적대적이었고 각종 이주 노동자를 쥐어짜는데 능했다. 거기에 이제는 소비자 문제까지 끼여들면서 노동이라는 문제는 소비라는 주제에 잡아먹힌 꼴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저자가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는 인물 중 하나가 바로 허버트 후버다. 세계 곳곳의 광산을 개발한 엔지니어이자 대통령 자리에 까지 오른 후버는 결국 대공황으로 인해 불명예스럽게 정치 생활을 마감했다. 그러나 후버라는 인물은 20세기 중반까지 현재 미국 및 전세계 자본주의 구조를 정당화할 사상적 씨앗을 뿌리는데 성공했다. 물론 그 씨앗을 뿌린 장소는 당연히 스탠포드 대학이다. 후버의 계승자들은 후버의 사상을 변주해가며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에 반격할 기회를 엿보았다. 후버의 씨앗은 마침내 로널드 레이건의 당선으로 결실을 맺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런 '경제영웅'들이 그림자만 보여준 것은 아니다. 이들, 특히 20세기 초중반 스탠포드 대학 및 팔로 알토에 자리잡고 활약한 학자와 학생들 중에는 21세기 현재 상용화된 여러 기술들의 태동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한 인물들이기도 하다. 각종 무선통신기술과 컴퓨터 관련 기술은 스탠포드를 졸업하거나 스탠포드 대학 및 팔로 알토를 거쳐간 인물들의 손에서 유명한 미국의 기업들로 변모하고 상품으로서 상용화되었다. 이 같은 상품들, 대표적으로 컴퓨터, 스마트폰, 인터넷은 우리 삶에 너무 깊이 자리 잡아 이런 제품 없는 시대는 상상하기도 힘들게 되었다.


예컨대 이 책에서 20세기 초에 몇몇 주요 인물들이 직간접적으로 제시한 '인간 증강 기술'이라는 구상은 20세기 중후반 개인용 PC, 나아가 현대의 LLM으로 이어지는 기술 발전의 방향성과 계보를 보여주는 지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 증강' 개념은 컴퓨터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착취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특히 저자는 그 대표 사례로 실리콘 밸리의 엔지니어나 개발자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증강시킬 때 20세기 중반에는 LSD같은 마약, 20세기 후반에는 커피에 의존하는 모습을 꼽는다. 즉, 실리콘 밸리에서 카페는 그 이전 근대 유럽에서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떠는 장소가 아니라, 일종의 근무지로서 엔지니어들이 연장 근무를 하는 장소이고 커피는 근무자들이 밤샘 근무 할 때 복용하는 합법적 마약과도 다름없다는 논조를 담고 있다. 


이 같은 저자의 관점에 입각한 서술은 우리가 으레 당연하게 여기는 사상과 이데올로기들, 예컨대 능력주의나 승자독식주의 같은 편견들, 그리고 여태 자본주의가 정당화해온 경제적 구조와 사회 시스템이 우리의 시선에서 무엇을 지워버렸는가를 알려준다. 요컨대, 저자가 그려내는, 팔로 알토로 대표되는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타인을 착취한 끝에 종국에는 그 착취의 여파로 인해 스스로가 붕괴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런 미국 자본주의 사회의 모습은 마치 그리스 신화에서 걸신들려 자기 딸까지 팔아치운 후 결국에는 자기자신까지 집어삼킨 에리식톤을 연상시킨다.



그럼에도, 저자는 이 같은 자본주의를 대체할 대안, 다른 미래는 제시하지 못한다. 물론 저자는 스탠포드 내부에서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내달리는 과정에서 예상외의 급진적인 흐름들을 제시하긴 한다. 예컨대 20세기 초 스탠포드 대학 내에서는 급진적인 불순분자들이 이미 활동하고 있었다. 나아가 실리콘 밸리의 기술적 산물들은 오히려 그러한 산물을 낳은 기성 체제를 비판하고 부식시키는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현재를 대체할 미래를 제시할 때 명확한 비전과 어젠다가 따라오지 않으면 설득력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나아가 그러한 비전과 어젠다가 단순 수사에만 그치고 실제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면 환멸로 이어져 일말의 가능성조차 상실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물론 이 같은 비판과 지적은 대부분의 사회변혁 시도를 냉소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부작용이 있는, 공허하면서도 어디에나 무차별적으로 적용가능한 전가의 보도에 그치는 비판일 수도 있다. 


그렇긴 하나, 이 책은 21세기 미국을 충실히 따라가고자 하는 우리 사회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570페이지에 달하는 두께는 독자를 압도하지만, 그러한 압박을 견뎌내면 우리 사회에서 변화를 초래하는 국내외의 여러 기업들이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우리 일상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우리가 무엇을 잃고 얻었는지를 돌이켜볼 수 있다. 이는 비단 경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러한 경제와 연계된 정치, 사회, 문화 영역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예를 들어 이 책은 팔로 알토로 대표되는 현대 미국 창업 및 '경제영웅' 성공 스토리가 한국의 정부와 기업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한국에 이식되는 과정을 밝히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 이 책은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할 때 우리가 얼마나 빈곤한 대안을 내세우는지, 자본주의에서 벗어나야한다는 슬로건을 내걸면서도 정작 자본주의라는 도식 바깥은 상상조차도 못하고 있다는 점을 일깨워주는 책이라고 평할 수 있다.


한편, 개인적으로 이 책과 덧붙여 같이 읽기 좋은 책을 추천하면서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첫째는 이미 한국에서도 유명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이다. 저자 룰루 밀러의 자전적 에세이인 동시에 스탠포드 대학의 초대 총장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전기이기도 한 이 책은 조던의 우생학적 사상을 드러낸다. 이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스탠포드 대학의 물질적, 정신적 기틀을 다진 인물로서『팔로 알토』에 꾸준히 언급된다는 점에서 스탠포드 대학을 지배하는 기풍과 정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두 번째는 미국의 한국사학자로 널리 알려진 브루스 커밍스의 『미국 패권의 역사』다. 이 책은 아쉽게도 절판되었지만, 미국이라는 나라가 끊임없이 서진하여 태평양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21세기 초기까지 서부 연안 및 텍사스 지역이 어떻게 미국 동북부 및 중서부에 버금가는 미국의 한 축으로 자리잡았는지 보다 넓은 과정에서 그려낸다는 점에서 이 책과 같이 읽으면 팔로 알토라는 지역을 미국 서부 지역라는 보다 넓은 공간 속에서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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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성 나르시시스트와 그 희생자들 - 악성 나르시시스트의 정체와 그 희생의 메커니즘을 찾아서
장 샤를르 부슈 지음, 권효정 옮김 / 바다출판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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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이자 정신과 의사 장 샤를르 부슈(Jean-Charles Bouchoux)의 『악성 나르시시스트와 그 희생자들』은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악성 나르시시스트들(제목에서는 악성 나르시시스트라고 나오지만 본문에서는 주로 악성 자기애자로 번역된다) 그 피해자들의 모순된 관계를 드러내는 책이다.


책은 인트로, 본문 11장, 부록 2장, 그리고 역자후기로 구성되어 있다. 연구서처럼 어떤 논지를 펼치는 책이라기 보다는 악성 자기애자와 그에 당하는 희생자의 관계 구조를 드러내고 그러한 관계 구조가 어디서 생겨나는지를 드러내는 데 집중하고 있다. 대체로 책의 본문 전반부는 악성 자기애자의 뒤틀린 인격 구조, 후반부는 악성 자기애자의 희생자들이 악성 자기애자들과의 착취적 관계에 말려들 수밖에 없는 이유와 그로부터 벗어나는 법이 제시된다.


이 책의 본문에서 저자가 주로 집중하는 지점은 악성 자기애자들과 그들에게 당하는 피해자들이 현실에서 보여주는 실제 관계 양상이다. 예를 들어 저자는 책의 전반에 걸쳐 자크와 피에레트 커플, 프랑크와 마갈리 부부의 관계를 사례로 제시한다. 저자는 이들의 사례를 통해 독자에게 악성 자기애자와 희생자의 관계에서 수평적인 인간관계가 아니라 수직적인 지배와 착취 관계가 현실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아울러 저자는 몇몇 챕터의 끝에 바네사라는 악성 자기애자의 행적과 그에 대한 질문, 그리고 마지막 부록1에서 그에 대한 저자의 답변을 삽입하여, 독자가 바네사라는 악성 자기애자가 형성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프로이트, 도널드 위니컷과 같은 정신분석학자들, 그들이 제기한 정신분석학적 개념, 예컨대 오이티푸스 콤플렉스, 남근 같은 개념을 인용한다. 이 부분은 어쩌면 일부 독자들에게는 단점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이 지점은 몰라도 상관이 없다. 저자는 이런 인용이나 개념들을 어렵게 설명하지 않는다. 이러한 인용은 책의 깊이를 더하는 일종의 MSG에 가깝다. 즉, 독자가 정신분석학적 개념이나 해당 인물들에 대한 배경 지식이 있다면 그 이해도가 높아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개념이나 인물을 모른다고 딱히 이 책을 읽으면서 불이익은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일부러 어렵게 쓰인 철학서가 아니다. 적어도 이 책의 목적은 인간들이 서로 맺는 관계 중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일방적으로 착취하는 비틀린 인간관계를 제시하고 그러한 인간관계가 어디서 기인하며, 피해자는 그러한 관계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를 제시하는 데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제시되는 악성 자기애자들은 기본적으로 불우한 아동기를 거친 끝에 사고방식도, 감정다루는 방식도, 타인과 관계 맺는 법도 성숙해지지 못한, 말 그대로 덩치만 자란 아이들에 가깝다. 저자가 보여주는 바에 따르면 악성 자기애자들의 부모는 아동기 때 악성 자기애자들에게 부모로서 보여야할 태도를 보이지 못했거나, 의도적으로 보여주지 않았고, 덕분에 악성 자기애자들의 인격구조는 비틀리고 말았다. 그들의 인격 구조가 변화될 수 있는지, 그러니까 구원받을 수 있는지 여부는 사실 이 책에서 제시되지 않는다. 어차피 그것은 이 책의 목적도 아니다.


오히려 이 책에서 구원하고자 하는 대상은 이 악성 자기애자들에게 희생당하는 피해자들이다. 피해자들은 악성 자기애자들 만큼 불우한 시절을 겪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책에서 전자는 주로 '신경증' 환자로 설명된다. 


여기서 잠깐 관계를 정리하자면, 악성 자기애자는 충동을 외부로 발산하여 욕망을 밖에서 채운다. 반면 저자가 '신경증' 환자라 표현하는 집단은 악성 자기애자와는 반대로 충동이나 욕망을 외부로 발산하지 못하며, 이를 억압한다. 


물론 악성 자기애자에게 당하는 모든 피해자가 신경증 환자인 것은 아니다. 악성 자기애자는 내면이 비어있거나, 오히려 취약한 내면을 지니고 있다. 멘탈이 강한게 아니라 손대면 바스라지는 쿠크다스 멘탈이다. 저자가 설명하는 바에 따르자면, 이들은 자신의 인격적 결함을 타인에게 전이시켜 그에 따른 불안을 해소한다. 희생자는 졸지에 악성 자기애자들의 안좋은 점을 비추는 거울 역할을 떠맡는다. 바꿔말해, 악성 자기애자는 희생자에게 자신의 병리적 측면을 떠넘기고 희생자의 존재 자체를 병리적으로 만들어 자신의 존재를 위한 에너지 공급처로 전락시키지 않는 한 생존할 수 없다. 


그러니까 제3자의 관점에서 악성 자기애자와 그 피해자의 관계를 보면 악성 자기애자들은 자신의 부정적인 면모는 피해자에게 떠넘기고, 자신에게 결핍된 면모는 피해자로부터 가져와 자신의 취약함을 감추는 셈이다. 예를 들어, 악성 자기애자는 본인이 바람을 피우면서 자신의 연인이나 배우자에게는 자신에게 충실하지 않으며 부정한 관계를 맺는다고 비난을 가한다. 이를 통해 악성 자기애자는 자신과 제3자들에게 도덕적인 자신과 부도덕한 피해자라는 프레임을 만들고 그 속에서 자신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스탠스를 차지한다.


그럼 여기서 자연히 의문이 들 것이다. 이 악성 자기애자들의 근본적인 욕구나 사고의 근원이 유치찬란한 아동의 그것인데, 왜 피해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는가? 이들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다양한 무기들을 아주 능수능란하게 사용한다. 말하자면 착취적 관계의 전문가들이다. 이들의 주 무기는 바로 '말'이다. 


악성 자기애자들의 말은 가만히 듣다보면 정말 '말'도 안되는 궤변이다. 그럼에도 왜 희생자는 악성 자기애자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가? 


첫 번째 문제는 악성 자기애자들의 궤변이 사태를 정확히 파악한 중립적인 입장 제3자의 기준에서 볼때 선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악성 자기애자와 희생자의 관계를 피상적으로 파악할 뿐인 제3자, 그리고 악성 자기애자와의 관계 속에서 시야가 좁아진 희생자 입장에서는 이런 궤변을 구분할 수 없다.


예를 들자면, 악성 자기애자는 먼저 자신의 파트너, 즉 희생자를 도덕적으로 부정을 저질렀다고 비난한 후, 희생자와 관계를 맺은 주변인들에게도 자신은 '희생자'에게 착취당한 희생자라는 식으로 먼저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희생자를 오히려 가해자로 만들어버리는데 대단히 적극적이다.


두 번째 문제는 악성 자기애자들이 내뱉는 궤변을 희생자들이 궤변으로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악성 자기애자들은 자신의 결함을 피해자에게 덮어 씌우는데, 피해자는 악성 자기애자들의 말도 안되는 궤변을 궤변이라 인지하지 못한다. 피해자 역시 악성 자기애자들처럼 불우한 아동기를 보내 악성 자기애자와 비슷한 상처를 안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악성 자기애자에게 당하는 피해자는 논리로 반박하기에 앞서 감정이 먼저 피해자를 지배해버린다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이러한 피해자의 상태를 운전 중 위기에 처한 운전자에 비유한다. 즉 악성 자기애자에게 걸려든 피해자는 교통사고가 날 수 있는 상황에서 사태를 이성적으로 파악할 수 없으며 오로지 생존을 최우선을 주변 상황을 최대한 경계하는 운전자에 가깝다는 것이다. 부모나 믿었던 사람에게 상처입어 타인과의 관계 맺기가 어려운 피해자의 경우, 악성 자기애자와의 관계가 그에게는 오히려 유일한 생명줄이기 때문에 함부로 관계를 끊기 어려운 처지인 경우일 수도 있다. 


세 번째 문제는 이런 비대칭적인, 수직적인, 혹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높은 쪽에 선 악성 자기애자들은 피해자들이 발악하기를 오히려 기대한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악성 자기애자는 피해자와의 관계를 이미 역전시킨 상태다. 실질적으로 악성 자기애자와 희생자의 관계에서 악성 자기애자가 가해자이고 희생자는 피해자이다. 하지만 표면상으로는 그 위치가 역전되어 있다. 외견상으로는 악성 자기애자가 선량한 피해자이고 악성 자기애자의 희생자는 오히려 가해자로 비춰진다. 


피해자가 악성 자기애자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한, 악성 자기애자는 무조건 이기는 싸움이다. 피해자가 악성 자기애자와의 관계를 유지하려 한다는 조건 하에서 피해자의 모든 행위는 잠재적으로 악성 자기애자를 만족시키는 행위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피해자가 말로 악성 자기애자의 말을 반박한다면 악성 자기애자는 피해자의 처절한 항변을 '언어폭력'으로 위조할 것이고, 피해자가 폭력을 행한다면 악성 자기애자는 그 순간 폭력의 피해자로서 우위를 점할 것이다. 


예를 들어, 피해자가 악성 자기애자에게 '지금까지 네가 날 가스라이팅했다!'라고 반박하면, 악성 자기애자는 '네가 그런식으로 생각하다니, 너는 처음부터 날 사랑하지 않은거야!'라는 식으로 반박할 것이다. 이를 통해 악성 자기애자는 오히려 희생자가 신롸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다는 식으로 자신이 우위에 선다.


혹은 피해자가 '우리 관계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어. 여기서 끝내자'라고 하는 순간 악성 자기애자는 '내가 너에게 해준게 얼만데,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지?'라는 식으로 상대의 죄책감을 유발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악성 자기애자는 피해자에게 자신의 치부를 덮어씌운다. 악성 자기애자의 인격적 결함은 피해자의 것으로 위조된다. 그래서 피해자가 악성 자기애자와의 관계를 단절하지 않을 경우, 피해자의 모든 자력 구제 행위는 그저 증명의 한 과정이다. 요컨대, 피해자가 악성 자기애자에게 감정적으로 대하거나, 이성적으로 대하거나, 어느 경우든 악성 자기애자 입장에서는 그 자신이 지닌 결함이 성공적으로 상대에게 덮어씌워졌음을 확인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제3자의 개입 없는 악성 자기애자와 피해자의 관계는, 피해자가 일방적으로 악성 자기애자에게 착취당하는 관계다. 그러니까, 흔히 하는 말로 피해자의 발악은 악성 자기애자 입장에서는 '울고 싶은데 뺨때린' 데 불과하다.


그렇기에, 저자는 피해자가 악성 자기애자로부터 벗어나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정확한 방법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제3자의 개입이라 강조한다. 물론 일반적인 친구, 친척, 직장 동료는 부적합하다. 누차 말했듯이, 악성 자기애자들은 스스로를 희생자에게 당한 '희생자'로 위장하여 희생자의 주변 관계를 조작하여 고립시키는데 능하므로. 여기서 우리는 정신의학/심리상담을 떠올릴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희생자가 악성 자기애자와의 관계에 묶여 있는 한, 악성 자기애자의 착취적 관계는 계속 유지될 것이라는 점이다. 요컨대, 악성 자기애자가 깔아놓은 판에 말려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악성 자기애자들의 피해자들에게 악성 자기애자와의 관계를 재고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앞에서 말했듯, 악성 자기애자는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점에서 몸만 자란 어린아이에 가깝다. 반면 그 피해자들은 그렇지 않다. 대가없이 타인을 사랑할 줄 아는, 정서적으로 성숙한 어른들이 역설적이게도 아이에 가까운 악성 자기애자들에게 이용당하기 쉽다. 여기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악성 자기애자와 희생자의 관계 뿐만 아니라 이들을 에워싼 여러 사회적 요소들, 즉 제3자들, 그리고 이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작동하는 사회 규범과 윤리 등. 


비유하자면 이 책에서 희생자는 언제든 사슬을 끊고 일어설 수 있는 거인이지만, 악성 자기애자는 바로 그런 어른을 어떻게든 세뇌시켜 무릎 꿇린 채 자기가 키가 더 크다고 으스대는 미숙한 자라고 할 수 있다. 결국 희생자에게 중요한 것은 악성 자기애자와의 관계를 좀더 넓은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독자에게 단순히 악성 자기애자와 희생자의 관계에만 머무르는 책은 아니다. 앞 서 말했듯 이 책은 악성 자기애자의 행동 양상, 비틀린 인격 구조와 심리를 드러낸다. 시공간을 떠나 지구상에 존재했거나, 존재한 모든 사회에는, 정의를 외치지만 정작 실제 행동은 자신들의 정의와 동떨어진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 그런 자들은 흔히 '내가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조롱을 받는다.


그러나 그런 조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들의 심리와 행동을 보다 깊게 이해해야 한다. 이 책에서는 각종 차별을 일삼는 자들을 그런 악성 자기애자라는 메커니즘으로 설명하는 지점들이 있다. 즉, 차별하는 자들이 차별받는 자들에게 자신들의 인격적 결함을 떠넘김으로써 자신들은 정의로우며 도덕적인 존재로, 차별받는 자들은 그렇지 못한 존재로 전락시키는 지점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지점들은 이 책에서 지나가듯 언급되는 지점들이며, 정신분석학/정신의학이라는 영역 밖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개인 대 개인의 관계에 치중하는 심리학이, 개인 대 집단, 집단 대 집단이라는 사회를 다루는 심리학, 혹은 사회를 다루는 여러 학문들과 연결되는 지점을 드러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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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 때 향이 좋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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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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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대학의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이 지은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Tyranny of the Minority)는 정치학적 측면에서 현대 미국의 민주주의 체제가 지니는 한계를 해부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는 책이다.

 

책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우선 저자들은 현재 미국 및 전세계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민주주의가 퇴보한 사례를 소개한다. 이어서 저자들은 과거 민주주의가 후퇴한 역사적 사례들을 제시함으로써 우리 시대에 닥친 민주주의의 위기가 현대에 나타난 새로운 위기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 후 저자들은 현재 미국 정치제도의 다수결주의에 맞서 미국의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반다수결주의적 요소들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들은 이 같은 미국의 뒤처진 정치제도를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 그 방향을 제시하며 책은 마무리된다.

 

이 책에서 저자들의 주요 논지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주된 주장은 민주주의 시스템 내부의 한계가 정치적 소수에 의한 다수의 지배를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첫 번째 논거는 민주주의의 원칙에 충실한 충직한 민주주의자와 구분되는, 표면상의 민주주의자들의 존재다. 민주주의자로 위장한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극단적인 소수를 묵인하거나 동조한다. 이를 통해 극단적인 소수가 권력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들이 그 근거로 내세우는 지점은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과 2010년대 말에서 2020년대 초 미국의 공화당이다. 물론 반례도 제시된다. 예를 들어 1981223일 스페인에서 일어난 군부 쿠데타에서 당시 스페인 정계의 거물들이 쿠데타에 맞선 사례가 그것이다.

 

두 번째 논거는 미국의 정치 제도들이 다수를 대표하는 정당과 소수를 대표하는 정당 간의 격차를 왜곡시킨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저자들은 미국 정치 제도(상하원, 주의회, 게리맨더링, 종신직인 대법원 판사, 선거인단 제도)가 지니는 여러 맹점들을 제시한다. 저자들은 이러한 정치 제도상의 허점 덕분에 다수의 지지를 받는 민주당에게는 불이익을 준 반면, 소수의 지지를 받는 공화당이 민주당과 맞서 이익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익을 가져다주었다고 말한다.

 

결론에서 저자들은 미국의 민주주의 시스템은 소수의 지배를 용인하는 현재의 방식에서 보다 '다인종 민주주의'에 걸맞는 방식으로 개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저자들이 인정하듯이 이러한 아이디어들은 금방 이루어질 수 있는 개혁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저자들은 과거 미국의 노예제 폐지 과정이나, 참정권 확대 과정에서 보이는 역사적 사례들을 예시로 들며 그러한 변화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함을 강조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다음의 장점들을 지닌다.


첫째는 어려운 용어들은 배제하고 쉬운 용어들을 중심으로 미국의 정치제도를 해부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저자들은 미국 정치제도의 민주주의적 성격에 가려진 비민주적 성격들을 포착하고 이를 정치 제도에 해박하지 못한 일반인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풀어낸다.


두 번째는 미국의 정치제도라는 특정한 주제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저자들은 독자들에게 경제, 사회, 문화를 비롯한 미국 사회의 다층적 측면과 얽힌 대단히 복잡한 미국 정치제도를 명쾌하게 설명하면서 저자들이 특별히 강조하는 지점, 바로 미국 민주주의에 내재된 반다수결주의적 요소들이 내포한 한계와 그에 대한 저자들의 비판을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미국 정치제도를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산물로 간주하는 관점이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비록 한국의 독자일지라도) 현재의 법률과 제도와 (독자들이 마주하는) 현실 간의 간극을 따져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 못지않게 이 책은 치명적인 단점들도 몇 가지 안고 있다. 이는 현재 민주주의 국가들이 마주한 초국가적인 민주주의 제도의 위기를 오해하게 만들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지적되어야 만 한다.

 

우선 이 책의 저자들은 미국의 정치제도에만 집중한다. 앞서 말했듯이, 이러한 선택과 집중은 현재의 미국 정치제도가 지닌 제도적 한계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다층적인 미국 사회와 긴밀히 얽혀 작동하는 미국 정치제도의 여러 측면들을 단편적으로 다루는데 그치고 만다는 한계도 노출한다.

 

그 사례가 이 책이 출간된 후 치러진 2024년 미국 대통령 선거다. 그 결과는 저자들의 논지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지점들을 내포하고 있다. 2024년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는 2016년과는 달리 총득표수에서도 민주당의 카멀라 해리스 후보를 제쳐버렸다(물론 그 차이는 1%내외이긴하지만). 저자들의 논지에 따르면 202116일 의회 폭동 이후 미국의 다수는 의회 폭동에 반감을 보였다. 그런데 왜 다수는 트럼프를 선택했단 말인가?


여기서 이 책의 치명적인 결함들이 노출되기 시작한다. 첫째는 다수소수의 구분이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다수소수에 관해 유의미한 정의를 내리지 않는다. ‘다수는 특정 인종집단인가? 특정 지역 집단인가? 특정 계급인가? 이 책에서 다수는 그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여론조사와 보통선거라는 과정에서 정치인을 선택하는 수동적인 주체일 뿐이다.

 

반면 이 책에서 소수다수에 비해 비교적 선명하다. 저자들은 21세기 현재의 미국이 다인종 민주주의라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반면, ‘소수는 이러한 흐름에 저항하는 기득권 세력으로 묘사된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소수역시 다수에 비해 좀더 윤곽이 보인다는 것이지, 선명하지는 않다. 소수는 누구인가


이 책의 설명에 따르면, 적어도 미국에서 소수20세기까지 유지된 수직적 인종 위계에서 최상위에 위치한 백인, 혹은 인구가 많은 주와 똑같은 수의 상원을 할당받아 정치적으로 대등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구가 적은 주로 추정할 수는 있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이로부터 독자는 다수소수를 어떻게 구분해야하는가라는 문제와 직면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가상의 대통령 선거에서 A후보가 55퍼센트의 지지를 얻고 B후보가 45퍼센터의 지지를 얻었음에도 선거인단 같은 제도를 통해 B후보가 승리했다면 이는 저자들이 말하는 소수의 폭정을 잘 드러내는 사례일 것이다


그런데 선거 결과가 0.5% 내외의 초박빙 상황이라면 누가 다수이고 누가 소수인가? 예를 들어, 지난 2022년 한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승자는 48.56%의 득표율과 16,394,815표를 획득했지만 패자는 47.83%의 득표율과 16,147,738표를 획득했다. 득표율은 0.73% 차이이며 표차는 불과 247,077표에 불과하다. 그럼 이 선거의 승자는 다수이고, 패자는 소수인가?


이 같이 저자들이 애매모호하게 얼버무린 다수개념은 상황에 따라 유동적인 다수소수의 복잡한 역학관계를 간과한다는 또다른 문제로 이어진다. 사회 전체에서는 다수인 집단이 특정한 상황에서는 언제든 소수가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소수라는 개념의 불분명함 역시 비슷한 문제를 초래한다. 이 책에서 소수는 저자들의 기술을 참고해볼 때, 강력한 영향력과 기득권을 지닌 소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독자가 흔히 사회적 약자로 상정하는 소수와 거리가 있다. 문제는 독자의 편견 속 소수와 저자들이 상정한 소수간의 교집합이 현실에서 예상외로 흔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래퍼 카니예 웨스트는 인종적으로는 흑인 남성이다. 이 점에서 그는 조지 플로이드와 같은 범주로 묶일 수 있다. 그런데 계급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는 사회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인플루언서이이다. 비슷한 사례는 많다. 예를 들어 많은 미국 구글, MS 같은 빅테크 기업들에서 CEO 자리를 꿰찬 인도인들은 어떤 소수인가? 애플의 팀 쿡은 백인 남성 동성애자다. 그럼 그는 어떤 소수인가? 그리고 그러한 소수들이 경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 빅테크 기업들의 행태는 어떻게 규정되어야 하는가?

 

이러한 저자들의 불분명한 다수소수구분짓기는 현실에서 독자가 마주하는 복잡한 다수소수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이는 곧 저자들의 논지를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만다.

 

이 책의 두 번째 결함은 정치제도와 정당에만 집중함으로써, 특정 정당이 다수를 외면하고 이 책에서 규정한 소수만을 위한 정당으로 전락하는 과정을 불완전하게 설명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보자. 2025년 한국에서 탄핵과 관련된 일련의 흐름을 따라가보자. 2024123일 계엄령 이후의 정국에서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반대하는 집단은 특정 정당에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의 전체 유권자에서 이들 집단의 비중은 소수일 것이다. 그러나 특정 집단이나 정당 안에서는 이들이 다수. 저자들이 이 책에서 제시하는 공화당의 선거 전략 및 지지층 공략 방식은 2025년 한국에서 탄핵 반대 세력이 영향력을 유지하는 이유를 부분적으로나마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저자들이 이 책에서 제시한 프레임에 비추어볼 때, 이 같은 소수집단이 제도 속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즉 눈에 보이는 현실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소수’의 존재는 잘 보여주지만, 그 이전 소수가 정치제도에 침투하여 존재감을 드러내기까지의 과정, 요컨대 눈에 보이지 않는 과정은 설명해주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독자는 특정 극단주의에 경도되거나, 혹은 이를 주도한 소수가 정치제도 속에 갑자기 등장한 것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극단적인 발언을 하는 정치인이 오히려 영향력을 획득하는 현상은 정치인의 극단적 발언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그에 동조하는 일정한 숫자 이상의 지지자들이 특정 정치인을 지지함으로써, 혹은 자신들의 정치적 대리자로 인정함으로써 그 정치인은 비로소 영향력을 지닐 수 있게 된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하지 않던가?

 

그리고 이 같은 소수를 지지하는 지지자들은 앞서 지적했듯이 특정 인종/계급/젠더/종교 같은 범주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영역이다. 한 인간을 특정 범주 속에 집어넣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진 다양한 측면을 무시하겠다는 선언이다. 그리고 이 같은 범주화는 오히려 현상을 파악하는 데 방해만 된다. 영향력과 기득권을 지니며 극단적인 발언을 일삼는 소수를 지지하는 지지자들을 단순히 못 배워서’ ‘몰라서’, 막말로 국평오여서 같은 식으로 범주화하고 매도하는 것은 해당 지지자들을 오히려 극단주의의 영역으로 몰아내 극단주의가 자라날 토양을 마련하게 해주는 것에 불과하다.

 

도널드 트럼프 및 그 지지자들의 행태와 별개로, 트럼프의 지지 세력이 공화당을 장악하였고 선거에서 승리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이 책에서 저자들이 제시하는 미국 정치제도의 거시적 구조 분석이 미국 양대 정당이 저지른 실수들을 희석시킨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기성 미국 공화당 정치인들이, 이어서는 미국 민주당이 선거에서 트럼프에게 패배했다. 그 원인에는 한편에서는 기존의 정치인과는 궤를 달리하는 상식밖의 행보를 보인 트럼프와 그 지지자들이 있겠지만, 다른 한편에는 이 같은 변화를 제대로 파악하고 대응하지 못한 채 무력화된 기성 정치인들도 있다는 것이다. 전자와 달리 후자는 정치 제도 바깥의 다양한 유권자들을 결집시키지도 못했고 그 결과 전자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물론 저자들은 표면상의 민주주의자라는 개념을 내세우고 공화당 내부에서 트럼프를 저지하려한 공화당의 기성 정치인들의 노력도 그려내긴 한다. 그러나 저자들의 분석은 피상적이고 단편적인 수준이며, 이에 따라 독자의 시선을 미국 정치제도라는 게임의 룰이 내포한 허점만 바라보게 만든다. 명심하자. 게임은 게임의 룰도 중요하지만 게임에 참가하는 참가자, 그리고 게임을 관전하는 관전자 역시도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저자들은 다인종 민주주의라는 이상을 정해놓고 그러한 방향에서 일탈하게 만드는 미국 정치제도의 한계를 경계하는 모습을 보인다. 문제는 그러한 이상이 아무리 구체적이고 현실을 반영한다 하더라도 현실과 괴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다인종 민주주의라는 방향에서 저자들이 소수로 상정한 이들의 반동적 행태는 역사의 진보에 대한 반동으로만 해석되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그러한 해석이 설명하지 못하는 지점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같은 저자들의 관점 아래에는 특정 방향으로의 역사적 과정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역사는 진보한다는 역사관의 변형, 혹은 진보와 퇴행을 구분짓고 진보를 지향해야한다는 이분법적 프레임이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프레임은 곧 과거와 현재, 나아가 미래의 방향을 재단하게 만든다.

 

물론 저자들이 지적하는 미국 정치제도의 한계는 유효하며 설득력이 있다. 그 점이 이 책이 지니는 시의적절함이며 이 책의 주된 가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래를 그려나갈 때 하나의 방향을 선점해놓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한다는 프레임은 미래로의 다양한 가능성을 지워버린다. 그러한 프레임은 우리가 현실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을 인지하지 못하게 가리는 필터이기도 하다. 나중 가서야 우리는 그러한 필터 밖의 기괴한 현실을 깨닫고 몸서리친다. 이미 2016년에 경험하였고, 2024년에 또다시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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