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논문 바로쓰기 A Manual for Writers - 케이트 트레이비언의 ‘시카고 양식’ 제8판!
웨인 부스.그레고리 콜럼.조셉 윌리엄스 지음, 강경이 옮김 / 시대의창 / 201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연구를 한다, 혹은 논문을 쓴다라고 하면 뭔가 거창해보이지만 사실 의외로 간단한 반복 작업이다. 적어도 이 책에 따르면 말이다. 논문은 사실 어떤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글로 쓴 것이다. 문제는 논문을 쓰는 연구자는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부터 답을 찾기까지, 다양한 자료를 읽고 다시 질문과 답변이 될 가설을 생각하는 과정을 거치고, 다시 자료를 찾는 과정을 부단히 반복해야한다는 점이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야만 독자를 설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독자를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논증 구조를 짜야하고, 자신이 속한 분야에서 통용되는 논문의 형식을 지켜야 하며, 표절 같은 연구부정행위를 절대 저지르면 안 된다. 


웨인 부스, 그레고리 콜럼, 조셉 윌리엄스가 지은 『영어논문 바로쓰기』는 지금까지 수차례 개정을 거친 논문지침서이다. 이 책은 논문을 써야하는 연구자들에게 필요한 다양한 실용적인 지식을 제공하는 도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크게 3파트로 나뉘어진다. 첫번째 파트 '연구와 글쓰기: 계획에서 완성까지" 라는 소제목이 보여주듯이 논문을 어떻게 작성할 것인가 그 시작부터 끝까지를 알려주는 파트다. 두번째 파트는 "인용출처 표기"로 연구자가 논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자료들을 어떻게 인용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지점이다. 마지막으로 세번째 "표현양식"은 논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문체, 문법, 구두점을 비롯해 글쓰기에 지켜야하는 스타일을 알려주는 지점이다.


이렇게 파트만 놓고보면 이 책은 실용적인 지침서(1부)와 실제 연구 및 논문 작성과정에서 어떻게 출처를 표기하고 인용할지, 구두법 및 철자법을 비롯한 글쓰기 스타일은 어떻게 해야할지 의문에 부딪칠 때마다 참고할 수 있는 일종의 참고사전(2, 3부)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1, 2, 3부 저마다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겠다. 1부는 논문을 써야하는 연구자들에게, 2, 3부는 실제로 논문을 작성하는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다만 2부의 경우 다양한 인용출처 표기법이 나오기는 하나 국내 논문에서 제시하는 인용출처 표기법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경우가 있어서 그 의미가 퇴색되는 지점이 조금 있다. 3부는 하이픈(--)이나 세미콜론(;), 콜론(:) 같이 한국어에서 사용하지 않는 구두법도 다루고 있다보니 역시 한국 연구자들에게 유용한 지침으로 다가오기 힘든 점이 있다.


그렇긴 하나 이 책의 1부는 논문을 작성해야하는 연구자들에게 연구 과정의 시작부터 끝까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점에서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1부는 연구를 위해 어떤 질문을 던질 것인지, 연구자가 던진 질문이 과연 가치가 있는지 따지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어서 질문에 대한 답을 설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연구자는 연구 과정 동안 내내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작성하면서 해당 답변이 논리적인가를 따지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연구자는 논문이 될 수 있는 지점, 즉 질문과 그에 답하는 답변으로서의 연구 가설을 다듬어나가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수립한 연구 가설에 따라 자료를 수집하고, 읽고, 검토한 후 다시 질문과 연구 가설을 재검토한다. 이 과정을 어느 시점까지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이 책의 저자들이 제시하는 또 하나의 핵심 과정이 논증짜기다. 논증은 주장(claim),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reason), 다시 논거를 받쳐주는 근거(evidence)로 구성된다. 앞서 질문을 던지고 연구가설을 세웠다면, 그리고 자료를 수집하면서 연구가설이 질문의 답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이제 연구가설을 주장으로 삼고, 이를 뒷받침하는 논거들을 구상하고, 해당 논거들을 받쳐줄 수 있는 증거들을 수집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렇게 자료를 수집하고 다시 주장과 논거에 배치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연구자의 논문은 점차 형태를 갖춰가게 된다. 중요한 것은 독자를 설득할 수 있는 논증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확실한 논거와 근거가 필요하다.


논증 구상이 어느 정도 진전되었다면 이제 초고를 작성하고, 수정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때 상황에 따라 다시 뒤로 후퇴할 수도 있다. 논문 쓰기 작업은 계속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과정이기 때문에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과정도, 지그재그로 나아가는 과정도 아니다. 패턴이라고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 혼돈의 길을 걷는 과정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1부는 논문쓰기의 모든 과정을 다루고 있다고볼 수 있다. 그래서 분야를 막론하고 연구자로서 첫 걸음을 내딛은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무작정 재밌어보인다고 아무 주제나 붙들고 연구를 시작하면 시간은 시간대로 버리고, 노력은 노력대로 허비할 수 있다. 이 책의 1부는 연구의 시작점으로서 질문을 던지고, 해당 질문을 어떻게 검토할지에서 시작하여 실제 논문쓰기까지의 과정을 제시하면서, 연구자가 겪을 수있는 시행착오의 가능성을 줄여준다. 


물론 이 책에서 제시하는 논문 쓰기 지침이 완벽하다고 보긴 힘들다. 사실 논문쓰기에서 완벽한 지침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논문쓰기라는 것은 실제로 논문을 쓰면서 시행착오에 부딪쳐야 하는 영역이다. 세상에 똑같은 사람이 없듯이, 연구를 할 때 똑같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그에 답하는 연구가설이 똑같은 경우도 없을 것이므로, 이 책을 읽으면서 제시된 사례들이나 지침들을 자신의 경우에 알맞게 응용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논문을 직접 쓰면서 시행착오를 겪어야 한다. 


논문을 쓰지 않는 사람에게도 이 책은 유용할 수 있다. 특히 1부 5장 논증 짜기는 이 책의 저자들이 집필한 또 다른 서적인 『논증의 탄생』의 내용을 압축하여 담고 있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이 책과 『논증의 탄생』에서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사실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늘 논증을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항상 어떤 주장을 하고, 그에 대한 논거를 대고, 그에 대한 근거를 댄다. 이는 일상생활에서 오가는 대화에서도 발견된다. 이 책 또는 『논증의 탄생』을 통해 논문과 인연이 없는 독자들 역시 논문 쓰기와는 별개로 논리적인 논증을 구사하는 방법을 얻어갈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럴 경우 『논증의 탄생』이 이 책 보다 더 유용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단점은 개정판이라는 점이다. 그리고,앞으로도 개정판이 계속 나올 것이라는 점이다. 이전 판본에 비해 현재 개정판에 추가된 점은 각종 인터넷 자료의 인용방식이 추가되었다. 향후 어떤 미디어 매체가 나오느냐에 따라 해당 매체를 인용하는 형식도 새롭게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의 개정판이 계속 나오리라는 점은 손쉽게 예측 가능하다. 예를 들어 ChatGPT로 자료를 생성하여 논문에 인용할 경우, 어떻게 인용해야할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고화질] 강철의 연금술사 20th ANNIVERSARY BOOK
아라카와 히로무 지음 / 학산문화사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러 단편들을 한데 모아 볼 수 있어서 좋네요. 덧붙여 20년이라는 세월의 흐름도 담겨 있고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제로 편 - 지혜를 찾아 138억 년을 달리는 시간 여행서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개정판)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목차를 보면 책의 줄기를 알 수 있다. 이 책은 우주론에서 출발하여, 지구의 탄생, 생명의 출현, 인간과 문명의 등장으로 굉장히 거시적인 주제들을 다룬 후, 인도 철학, 도교와 유교, 불교, 서양철학, 기독교 순으로 종교와 사상을 다룬다. 이처럼 거창한 주제들을 다룬 끝에 저자는 우리 각자는 각자의 세계관에 매몰되어 살지만 그럼에도 세계와 자아는 하나라는 일원론을 명심하라고 말한다. 마지막에 스스로를 돌이켜보라고 조언도 건넨다.


이 점에서 이와 비슷한 주제와 양상을 띠는 책을 하나 제시하자면 『내면소통』을 들 수 있겠다. 차이점이 있다면 『내면소통』은 최신 뇌과학과 우주론을 바탕으로 자아와 우주의 관계를 달리 생각하게 만든다. 정확히는 자아 역시 우주의 일부라는 것. 나아가 자아와 우주 사이의 소통(정확히는 '나'의 여러 자아들 간의 소통) 수단으로서 명상의 중요성 및 어떻게 명상을 할지 그 방법을 제시한다. 『내면소통』의 지적 수준은 아주 깊다고 감히 평할 수 있겠다.


다시 이 책으로 돌아와서, 참으로 제목에 충실한 책이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이 제목이 책의 전부를 함축하고 있다. 말그대로 넓고 얕다. 이 책이 제시하는 지식은 태평양처럼 넓지만 수위는 발목에 차오르는 수준인 바다에 비유할 수 있겠다. 그만큼 방대한 지식을 다루기 때문에 독자로서는 처음 보는 지식을 접하고 압도당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만큼 얕다. 이 책의 방대한 지식이 파고를 일으키지만 막상 그 파고의 높이는 발목 복사뼈 근처에 불과하다. 이 책의 지식만 믿고 전문가 앞에서 지적 대화를 하겠다고 설치다간 바로 얼치기 취급을 당할 것이다. 물론 천문학자 앞에서 종교와 철학 이야기를 꺼낸다거나, 스님이나 목사 앞에서 과학 얘기를 꺼내면 그들을 압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게 의미가 있을까? 과학자나 성직자는 따지자면 셜록 홈즈 같은 사람들이다. 홈즈는 왓슨에게 태양계에 대한 지식을 전해듣더니, 추리할 때 필요한 지식이 아니라며 바로 잊어버린다. 


반대로, 이 책의 평가에서 중요한 지점은, 귀한 시간을 들여 이 두꺼운 책을 읽은 후 타인과 교양인 대 교양인으로서 지적이며 교양이 넘치는 대화가 가능할 것인가? 일 것이다. 일원론을 중심으로 종교, 과학, 철학의 여러 주제들을 엮으면서 세계와 자아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는 점은 높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종교와 과학에 대해 다소 편향된 관점을 가졌던 독자들에게 이 책은 색다른 관점을 제시하여 독자가 매몰되거나 편향된 세계관에서 빠져나올 여지를 마련해준다는 점도 이 책의 가치를 높이는 지점이다.


다만 저자가 의도하는 대로 타인과의 대화에서 교양있는, 지적 대화가 가능할까는 회의적이다. 처음에는 거창한 우주론으로 시작하다가도 나중에는 시덥잖은 이야기로 흘러가는게 대화다. 그런데 저자는 서로 다른 사람들 간의 원활한 대화를 위한 공통분모로서 교양을 강조한다. 하지만 개개인마다 교양과 지적 수준이 다르지 않는가? '나'보다 더 많이, 잘 아는 박학한 사람은 세상에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렇긴 하나 사실 이 문제는 개개인에게 달린 문제라 함부로 재단할 수 없다. 한 개인이 어떤 집단에 속하느냐에 따라 상황이 너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책의 진짜 문제점들은 사실 다른 곳에 있다. 지적 대화를 위해서는 계속 부단하게 지식과 교양을 쌓는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 책 하나에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담기란 불가능하고, 그런 책이 있더라도 인간이 정신적으로 소화시킨다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먼 미래에 두뇌와 컴퓨터를 연결한다던가 하는 상황이 펼쳐지면 또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든, 다른 책이든 간에 독자가 어떤 지식에 흥미를 품게 만들었다면 그 다음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알려주는, 독자를 위한 배려를 해주는 게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그 점에서 이 책의 약점이 드러난다. 간단히 말해 책을 읽고 난 후 갈피를 잡게 해줄 지침이 이 책에 부족하다는 것이다. 물론 능동적인 독자, 지식에 목마른 독자라면 알아서 잘 할 것이다. 그런데 모든 독자가 그런 것은 아니지 않은가? 


참고문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책에서 다루는 내용은 참으로 방대하다. 그에 비해 참고문헌은 단촐하다. 아울러 더 읽을만한 책 목록을 제시할 법 한데 저자는 그러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푸념처럼 들릴 수 있겠다. 그렇긴 한데  장마다 중간 정리, 최종 정리 장을 따로 할애해서 복습하는 장은 꼼꼼하게 넣어놨으면서, 이 책을 보고 지식을 갈구하려는 독자들이 다른 책으로 넘어가고 싶을 때 쉽게 넘어갈 수 있도록 '더 읽을 도서 목록' 같은 것은 제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다소 의아하게 다가온다. 


다른 문제점을 꼽자면 얕은 지식의 문제를 들 수 있겠다. 우주론이든, 철학이든, 종교든 간에 그 방대한 영역을 불과 수십페이지로 압축했기 때문에 그 깊이가 얕아지는 것은 필연적이다. 위에서 참고문헌이나 더 읽을 목록을 운운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저자가 워낙 많은 정보를 책 하나로 압축하는 과정에서 많은 내용을 처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축약은 반드시 오해를 초래한다. 특히나 같은 사실을 두고도 논쟁이 첨예하게 벌어지거나 해석이 갈리는 지점이라면 더더욱.


그런 오해를 미연에 방지하려면, 최소한 오해가 일어날 가능성을 낮추려면, 독자에게 교양과 지식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독자가 오해하지 않도록 본문에서 주의를 주거나, 다른 책 목록을 첨부해서 독자가 관심을 계속 이어나갈 여지를 제공해야 한다고 본다. 이 책이 아무리 좋은 책이라하더라도 독자가 이 책 하나만 읽고 거기에 머무르면서 아무런 지적 여정에 나설 생각을 품게 만들지 못한다면, 결국 저자의 의도도 퇴색되지 않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드립백 코스타리카 소노라 센트로아메리카노 - 12g, 5개입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향이 마음에 듭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성사란 무엇인가? - 역사가가 텍스트를 읽는 방법
리처드 왓모어 지음, 이우창 옮김 / 오월의봄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는 여러 하위 분과로 나뉜다. 그 중 하나가 지성사(Intellectual history), 혹은 사상사(History of ideas)다. 그외의 영역들에 대해서는 『OO(역)사란 무엇인가?』 같은 키워드로 검색해볼 것을 권장한다. 너무나 분야가 다양해서 여기에 나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중에는 정치사 같은 전통적으로 강세를 부이는 하위 분과도 있고, 여성사처럼 20세기 후반에 부상한 분과가 있는가 하면, 공공 역사, 환경사, 디지털 역사처럼 21세기 들어 주목받는 분과들도 있다.


이 책은 이처럼 다양한 역사학 분야들 중 하나로서 지성사가 거쳐온 궤적과 그 실천성, 존재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지성사 입문서다. 


지성사, 혹은 지성사의 또 다른 명칭이라 할 사상사에 가해진 전통적인 공격이자 선입견을 들자면, 일부 남성 엘리트들이 남긴 텍스트에만 매달린다는 것이다. 한국으로 치면 일부 남성 사대부들이 남긴 저명한 텍스트만 연구대상으로 삼는 경우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이미지를 서양사에 반전시켜 본다면, 이미 죽은 일부 엘리트 백인 남성들의 텍스트에만 매달리는 것으로 다분히 비춰보이기 쉽다. 당연하지만 지성사는 하나의 연구방법론이기 때문에 어떤 텍스트든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오류다(문제는 현재와 거리가 멀수록 연구를 위한 역사적 자료 자체가 빈약해진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그러한 오해를 바로 잡고, 나아가 하나의 역사적 실천으로서 지성사란 무엇인가를 조망한다. 이 책의 본문 첫부분인 서론에서 제일 먼저 제시되는 것은 19세기 초 잉글랜드의 한 채석장에서 발견된 석공의 메시지다. 저자는 해당 석공의 메시지를 두고 사회사가일 경우 채석장 노동자들의 삶과 사회적 위치, 노동자가 속한 사회를 재구성하고자 할 것이며, 경제사가는 노동자들의 임금 및 경제적 조건을, 문화사가는 개인과 사회집단의 독특한 담론이나, 역사적 인물과 보다 큰 사회 집단 간의 권력관계를 분석할 것이나, 지성사가라면 석공이 남긴 언어, 즉 말에서 출발할 것이라 가정한다. 이어서 저자의 시선은 석공의 짧은 메시지로부터 19세기 초 영국의 상황과 그에 대한 데이비드 흄의 당대 인식으로까지 이어진다.


이 책은 서론, 본문 6장, 결론, 옮긴이 해제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의 저자 리처드 왓모어는 먼저 지성사에 대해 개관한 후, 현재의 지성사(정확히는 저자가 속한 캠브리지 학파)에 이르기까지의 지성사의 역사를 소개한다. 이 과정에서 아서 러브조이처럼 낯선 이도 있는 반면, 콜링우드, 쿤, 푸코처럼 반가운 이들도 등장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의 주인공은 결국 저자가 속한 캠브리지 학파다. 이 책에서 저자가 제시하는 지성사의 방법론, 실천적 의의 모두 캠브리지 학파의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해당 학파의 창시자라 할 퀜틴 스키너와 J. G. A. 포칵은 1960년대 기존의 사상사의 방법론에 반기를 들고 기존 사상사의 오류를 지적하며 그 대안으로 언어맥락주의를 내세웠다. 


스키너의 언어맥락주의에서 철학적 기반은 영국의 철학자 오스틴의 화용론에 바탕을 둔다(오스틴의 저작 『말과 행위』는 현재에도 번역서가 절찬 판매 중이다). 예를 들어보자. 경찰이 얼어붙은 호수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을 보고 "거기 얼음이 얕으니 주의하세요"라고 말한다면 무슨 의도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일까? 단순히 얼음이 얕다는 사실을 전달하기 위함일까? 여기서 텍스트의 이중적 면모를 끌어낼 수 있다. 어떤 텍스트가 말해질 때나 쓰여질 때, 즉 발화될 때와 해당 발화가 지니는 발화수반적 힘(illocutionary force)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다. 스키너는 저자가 텍스트를 쓰는 행위와 저자가 쓴 텍스트를 별개로 구분하고, 텍스트를 저술하는 시점, 즉 특정한 역사적 맥락에서 텍스트의 저자가 의도한 바, 그리고 행위로서 텍스트의 효과를 따져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예컨대 우리가 플라톤의 텍스트를 읽을 때, 플라톤이 역사적 맥락에서 어느 시점에 위치하는지, 그리고 플라톤이 텍스트를 작성한 의도가 무엇인지, 해당 텍스트가 지니는 발화수반적 힘이 무엇인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플라톤이 당대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논하는 텍스트를 현대 민주주의 정치 체제에 대한 텍스트라고 착각해버리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언어맥락주의는 지성사가들의 도구이기도 하지만, 현실에서도 유익한 실천의 도구라고 할 수 있다. 『논증의 탄생』이라는 책을 보면 우리는 언제나 주장을 하고, 그에 대한 논거를 대고, 논거의 근거를 댄다. 한 마디로 '논증'을 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수행하는 커뮤니케이션은 주장, 논거, 근거를 늘 수반한다. 지성사의 방법론으로서 언어맥락주의는 누군가가 어떠한 주장을 할 때, 그의 주장을 탐색하게 해주는 도구라고 할 수 있다. 주장을 내세우는 사람이 어떤 맥락에서 그런 주장을 펼치는가, 주장을 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주장이 담고 있는 발화수반적 힘은 무엇인가. 이 같은 지점들을 곰곰이 따져 우리는 세상에 범람하는 황당무계한 주장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거나 반대로 오해하는 경우를 최소화할 수 있다. 


이쯤에서 이 책의 한계점도 지적해두는 것이 온당하겠다. 사실 언어맥락주의는 1960년대 퀜틴 스키너의 글에서 등장한 연구방법론인 만큼 국내 학계에서도 여러 차례 소개되었다. 옮긴이 해제에서 이러한 부분을 딱히 설명하지 않고 있다는 점은 짚고 가야 할 점이다. 이 책 본문의 한계를 꼽자면 이 책의 서술에서 주인공이 캠브리지 학파라는 점이다. 사상사 혹은 지성사는 각 국가마다 그 관심 분야가 달라지고 연구방법론도 조금씩 달라진다. 이 책에서 소개되듯이 독일에서는 개념사가 강세를 보인다면, 이 책에서는 일언 반구의 언급도 없지만 미국에서는 오래전부터 고유한 사상사 혹은 지성사가 전개되었다. 『지성사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이 책만으로는 지역별로 다른 지성사/사상사의 흐름을 포착할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유럽, 그 중에서도 영국, 영국에서도 캠브리지 학파의 일원들만의 사상사를 개론서로 소개하고 있는 셈이다. 


이 책을 읽고난 후, 우연히 한 유튜버의 영상을 보게 되었다. 해당 유튜버의 비판점을 요약하자면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의 텍스트를 바탕으로 쓰인 한 베스트셀러 서적이 사실은 저자가 아들러의 텍스트들을 원래의 맥락과 다르게 왜곡한 책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 베스트셀러의 저자는 아들러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발언을 교묘하게 비틀어 마치 성인까지 포괄하는 발언으로 고쳐쓰는 식으로 아들러의 원래 의도를 곡해한 지점이 많다는 것이다.


나는 아들러의 심리학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이 사안에 대해 판단할 의도는 전혀 없다. 문제는, 우리가 현실에서 마주하는 여러 텍스트들이 오류가 없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저자가 의도했거나, 의도하지 않았거나 간에 말이다. 그래서 이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가 더 중요해진다. 이 같은 상황에서 지성사, 특히 언어맥락주의의 방법론은 저자와 저자의 발화로서 텍스트 간의 관계를 포착하여 텍스트를 면밀히 읽도록 도와줄 수 있다. 역사적 텍스트를 넘어, 현실에서 누군가의 주장을 마주할 때 이 책의 독자는 상대의 주장을 해부할 수 있는 메스를 쥐고 마주선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점에서 이 책은 단순히 지성사를 소개하는 개론서를 넘어서는 실천적 의미를 지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