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역사인가 - 린 헌트, 역사 읽기의 기술
린 헌트 지음, 박홍경 옮김 / 프롬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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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판 제목을 보면 한 눈에 E. H. 카의 저작,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따온 제목이라고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의 원제는 "History: Why It Matters"이다. 대충 "역사: 왜 중요한가" 정도?


먼저 책의 저자부터 소개해보자. 저자 린 헌트는 다양한 저작을 쓴 역사가이며 책 앞날개가 소개하는 바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 문화사, 젠더사, 역사 기록학에 정통한 역사학자이다.. 국내에 소개된 린 헌트의 저작으로는 『인권의 발명』, 『역사가 사라져 갈 때』와 같은 저작들이 있다. 특히 『인권의 발명』은 최근에 교유서가에서 재출간되었다. 그외에도 저작은 많으나 대개 품절이나 절판이다. 도서관의 힘을 빌려야 할 듯 하다.


이 책에서는 여러 질문거리를 던지고 그 질문에 답변할 방법을 살펴볼 것이다. 역사란 정의상 발견해나가는 과정이지 확립된 도그마가 아니기에 이 책이 모든 골칫거리를 말끔히 해결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 어느 때보다 오늘날 역사가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를 제시할 수는 있을 것이다. - P10

 

이 책은 현재 (미국) 역사학계의 현 실태와 주요 이슈들을 짚어내는 책이다. 책의 구성은 크게 '1장 역사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해진 이유', '2장 역사적 진실을 찾아서', '3장 역사의 정치', '4장 역사의 미래'로 구성되어 있다. 1장에서는 지금 시대가 거짓말이 쉽게 신빙성을 얻는 시대라 언급한다. 역사적 논란의 대상 중에는 대개 기념물이 있다. 무엇을 기념할 것인가?는 대단히 정치적인 문제가 된다. 역사 교과서를 놓고서도 어느 지점을 수록하고 강조할지를 두고 전쟁이 벌어진다.


2장 역사적 진실을 찾아서에서는 역사적 진실이 사실과 해석의 맞물려 이루어지는데, 이 두 축이 항상 변화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역사적 진실은 잠정적이라는 사실이 강조된다. 저자는 역사를 '진실한 이야기'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문학예술로 본다. '이야기'에는 사실에 관련된 일련의 해석에 의지하는 문학적 재구성을 요구한다. 그런데 해석을 둘러싸고 의견차가 있다면, 과거의 진실성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해석의 변동성은 역사적 진실에 의구심을 초래한다. 역사가는 자신의 관점에서 기술하므로 객관적 서술은 불가능하다. 일관성있는 서술을 통해 논리적이며 밀접한 관련 증거를 인용하고, 증거에서 비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하지 않을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볼 때, 서양의 근대 역사학은 민족주의, 유럽우월주의에서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유럽중심주의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역사의 진실을 추구하는 정신은 유럽만의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중국과 아랍의 역사 서술 전통에서도 확인되는 점이다.


3장 역사의 정치에서는 역사학이 엘리트의 역사학에서 점차 변화한 과정을 다루고 있다. 1870년대 역사는 정치사 위주에 과거 엘리트의 역사 였으나 여성, 소수인종, 원주민, 서민 계층 백인이 역사학계에 진출하게 됨에 따라 역사 과목의 민주화가 일어나고 역사에 접근하는 방식도 달라져 정치사 위주에서 사회사, 경제사, 1980-90년대에는 문화사, 2000년대에는 다양한 접근법이 모색되게 되었다. 저자는 미국의 역사학계는  라틴아메리카, 아시아계 인구가 급증한 덕분에 세계사와 국사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본다. 다만 국사의 대체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역사는 여전히 국민 단결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역사는 독재 정부가 역사를 왜곡하고 기억을 통제하려 할 때 역사학 교육을 받은 학자들이 돌파구를 마련해준다는 점을 지적한다.


마지막으로 4장 역사의 미래에서 저자는 역사의 역할이 변화했다고 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역사와 관련해 정체성을 지니며, 동시에 세계의 일원이 된다는 의미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역사에는 미래를 향한 의제가 있고, 오늘날의 문제를 바라볼 관점을 제공한다. 그 점에서 저자는 역사에 자체적으로 윤리가 있다고 본다. 이어서 저자는 세계사의 시간에 접근하는 관점을 두고 앞선 전형의 사례를 찾는 접근 방식, 이어서 시간의 흐름에 진보를 투영하는 방식, 지구의 역사를 모든 차원에서 살피는 전지구적 시간이 있다고 말한다.(마지막은 저자가 창안한 용어이다) 저자는 지구의 역사에 관심을 두면 시야를 넓힐 수 있다고 말한다. 과거 서사에서 배제된 집단에 관심을 기울이면 익숙한 이야기가 해체되고 새로운 서사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저자는 최근 역사학계의 세태에 관해 경고하는 점이 있다. 이처럼 넓은 시간을 바라보아야 함에도, 많은 역사학도들이 현재와 가까운 비교적 짧은 시간만에 관심을 기울이는 "현재주의"가 득세하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주의는 필요하긴 하나, 과거를 현재 입장에서 바라보면 이는 우리 기준을 과거에 적용한 것에 불과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새로운 전망이 끊임없이 제기되며, 역사학자들의 관심도 변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시각과 디지털 역사 등 새로운 분야가 출현하면서 역사는 미래를 예견하지 못하고 그 미래가 불러일으키는 변화의 혜택을 입는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되며, 미래가 현실화되기 전까지는 어떤 예측이 옳은지 알 수 없다. 반면 과거는 불완전하게라도 파악할 수 있다. 


그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호기심과 앞서 세상을 살아간 사람들이 세계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배우려는 의지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에 대해서 2,000년 전 활동한 로마의 정치인 키케로Cicero는 이렇게 설명했다. "태어나기 전에 일어난 일에 무지하다면 어린아이로 남아있는 것과 다름없다. 인간의 삶이 역사의 기록을 통해 선조들의 삶과 엮이지 않는다면 무슨 가치가 있을까?" - P166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추구하는 바는 명백하다. 현재 역사학계는 갈등과 논란 속에 갇혀있고 저자는 이 점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역사를 두고 전쟁에 가까운 진영간의 갈등이 벌어진다. 다른 한편에서는 역사 그 자체의 특성, 역사적 진실은 정해진 도그마가 아니라 늘 잠정적이며 언제든 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있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미국의) 역사학계에서 일어난 변화가 가져온 접근 방식과 기존 역사 서사의 해체, 그리고 앞으로 역사가 나아갈 미래를 그려낸다. 이 책은 2010년대 후반 역사학이 어떤 상황에 직면했는지, 201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간략하게 알려주는 '역사학의 역사'책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저자인 린 헌트가 미국의 역사가인 만큼 미국 역사학이라 지칭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지도 모르겠다. 상당히 어려운 주제를 다룸에도 간략히 설명하는 점에서 대가로서 저자의 내공이 느껴지는 점도 있다.


지금 시대를 보고 있으면 저자의 말대로 역사는 언제나 중요한 문제임을 알 게 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런 역사학의 최전선에 서야할 전문 역사학계는 미국에서 조차 갈수록 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다. 한국은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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