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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식기
아사이 료 지음, 민경욱 옮김 / 리드비 / 2025년 9월
평점 :
처음엔 제목이 너무 자극적이었다.
‘생식기’라니. 솔직히 조금 웃겼다.
하지만 막상 읽기 시작하니 웃음은 금세 사라졌다.
이건 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 있다는 것 자체의 무게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사이 료는 생식이라는 단어가 지닌 가장 본질적인 의미(존재의 연속성, 그 무심한 생명의 힘)을 통해, 오히려 생의 피로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주인공 쇼세이는 평범하다.
출근하고, 일하고, 밥 먹고, 퇴근한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 없지만 속은 이미 텅 비어 있다.
그는 점점 세상에서 멀어지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 말의 건조함이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요즘 나도 그랬으니까.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나면서도 이유를 모르겠는 피로가 쌓인다.
잘 살아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오히려 무너져 가는 느낌.
매일 해야 하는 일로 하루가 빽빽하게 채워지지만 정작 살아 있는 나는 그 틈새 어디쯤에서 희미해진다.
아사이 료는 그런 감정을 아주 담담하게 그러나 냉정하게 그린다.
감정 과잉도 없고, 위로나 희망도 없다.
그냥 인간이란 존재를 그대로 바라본다.
살아 있음이란 게 이렇게까지 힘든 일인가.
책장을 넘길수록 그 문장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문장은 무표정하지만 그 무표정 속에서 오히려 인간의 깊은 절망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읽으면서 나는 여러 번 내 일상을 떠올렸다.
늘 해야 할 일로 하루를 채우면서도 정작 살아 있는 나를 느낄 틈이 없었다.
이 책은 그런 나에게 잠시 멈춰서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존재하는 것도 삶이야.
그 한 줄이 마음을 오래 흔들었다.
어쩌면 이 책은 살아야 한다가 아니라 살아 있음 자체를 바라보게 하는 책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숨 쉬는 순간에도 우리는 이미 충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좋았던 점은 솔직함이다.
이 책은 꾸미지 않는다.
무기력, 공허, 무의미 같은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요즘처럼 모두가 성장을 말하는 시대에,
그냥 버티는 것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책은 흔치 않다.
그 담백한 시선이 오히려 위로가 됐다.
자극적인 스토리나 극적인 전환 없이 그저 인간의 피로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그 태도 자체가 정직했다.
다만 아쉬운 점도 있다.
작가의 시선이 너무 냉정하다.
인물에게 따뜻한 손을 건네지 않는다.
그래서 읽는 동안 거리를 두게 된다.
조금만 더 인간적인 균열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차가움이야말로 현실에 가깝다는 생각도 든다.
요즘의 우리는 다들 그렇게 냉정하게 살아남고 있으니까.
감정이 마모된 시대에 아사이 료의 인물들은 감정이 없는 척함으로써 오히려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책을 읽고 나서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다.
햇빛이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걸 멍하니 봤다.
그 순간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살아 있구나.
그 단순한 사실 하나가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책이 끝나고 난 뒤에도, 문장들이 내 안에서 천천히 울렸다.
마치 잔잔한 물결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 평범한 시간 속에서 삶의 온도를 다시 느꼈다.
‘생식기’는 화려하지 않다.
대신 정직하고 조용히 파고든다.
무언가를 이루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살아 있는 인간의 이야기다.
요즘처럼 지쳐 있는 시대에 이런 책이 있다는 게 고맙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 말 하나면 충분하니까.
그리고 그 단순한 문장이, 어느새 삶을 다시 붙잡게 만든다.
🌿
삶은 해내는 게 아니라, 견디는 것이다.
그 문장을 떠올리며 오늘도 버틴다.
조금은 느리게, 하지만 분명히 살아 있는 채로.
그리고 언젠가, 이 느린 견딤이 또 다른 생을 낳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