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내 부모님 얘기해도 될까요? - 60년 된 시골 구멍가게 둘째 딸의 효사랑 일기
이혜성 지음 / 미다스북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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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모님 대신 고모가 키워주셨다.

부모님은 바쁘셨고, 사람들에게 그 말을 꺼낼 때마다

가끔은 약간의 설명이 필요했다.

“그럼 부모님은?”

“그냥, 여러 사정이 있었어요.”

하지만 내게 그건 불행의 서사가 아니라,

가장 순정한 형태의 사랑 이야기였다.


고모는 늘 조용한 사람이었다.

큰소리로 웃거나, 남의 일에 간섭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말없이 끓여주던 된장국 한 그릇,

밤늦게 이불 끝을 덮어주던 그 손길은

세상의 어떤 언어보다 명확한 애정의 표현이었다.

나는 그 손길 속에서 자랐고, 그 손의 온도로 사람을 믿는 법을 배웠다.


2018년, 고모가 세상을 떠나셨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길고, 공기가 희미했다.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집엔

익숙한 냄새도, 소리도, 그림자도 남지 않았다.

가끔은 문틈에서 들려오던 숨소리까지 그리웠다.

누군가의 부재는,

그 사람이 있던 자리보다 더 크게 들리기 마련이다.


그때부터 나는

누군가의 자식으로서의 시간을 마감하고

어른으로서의 조용한 생을 배우는 중이다.

누군가에게 돌봄을 받는 일보다

이제는 나 자신이 돌봄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왠지 모르게 무겁게 느껴지는 나이,

그 무게를 덜어주는 책을 우연히 만났다.


이혜정 작가의 '혹시, 내 부모님 얘기해도 될까요?'.

표지의 하늘빛처럼 조용하고, 바람결처럼 부드러운 책이었다.

60년 된 시골 구멍가게 둘째 딸의 효사랑 일기.

이 문구 하나만으로도

이 책이 얼마나 깊은 세월과 감정의 결을 품고 있는지 느껴졌다.


책은 효를 설교하지 않는다.

오히려 효와 불효의 경계에 선 자녀의 마음을,

끝없이 흔들리는 중년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돌봄의 과정 속에서 우리가 겪는 모순된 감정들.

사랑과 짜증, 책임과 피로,

그리고 뒤늦게 찾아오는 미안함의 진심까지.

작가는 그 복합적인 감정의 결을

거짓 없이, 그러나 따뜻하게 써 내려간다.


내리사랑과 치사랑 사이에서 뒤늦게 마주한 진심.

이 한 문장이 마음을 멈춰 세웠다.

돌이켜보면, 나에게도 그런 진심이 있었다.

고모가 내 곁에 있을 땐 몰랐다.

그저 늘 내 일상을 지탱해주는 배경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야 안다.

그 조용한 사랑이야말로

내가 세상을 견디게 한 유일한 힘이었다는 것을.


책을 덮고 오랜만에 고모의 사진을 꺼냈다.

작게 웃고 계신 얼굴을 보며,

이제라도 당신 이야기를 해도 될까요?

그렇게 마음속으로 물었다.

그 질문은 곧, 이 책의 제목이기도 했다.


'혹시, 내 부모님 얘기해도 될까요?'는

결국 돌봄의 윤리에 관한 책이다.

부모를 돌보는 일은 단순한 봉양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유년과 마주하고, 사랑의 부채를 계산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돌봄은 타인의 삶을 관리하는 일이 아니라,

함께 늙어가는 시간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건 효보다도 깊은,

존재의 연습이다.


이 책을 덮고 나니, 마음 한켠이 따뜻하게 아팠다.

누군가에게 사랑받은 기억이

결국 나를 다시 사랑하게 만든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은,

조용히 고모에게 말을 건다.

“고모, 나 잘 지내요.

당신이 가르쳐준 방식대로,

사람을 잃고도 여전히 사람을 믿으며 살고 있어요.”


#혹시내부모님얘기해도될까요 #가족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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