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보기 전엔 죽지마라 - 떠나라, 자전거 타고 지구 한바퀴 1
이시다 유스케 지음, 이성현 옮김 / 홍익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이시다 유스케의 자전거 여행 기록은 여정과 이색적인 풍물들을 순차적으로 열거하며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방식의 의례적인 여행기와는 달랐다. 그것은 남다른 감성과 인간미를 지닌 한 존재가 깨달음에 이르는 구도의 과정을 내밀하게 그리고 있는 한편의 드라마였다.

유스케는 캐나다 유콘강을 카누를 타고 유유자적 흘러가며 대자연의 고요한 섭리를 온 몸으로 체득하던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였다. 마치 월든 호숫가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처럼 말이다. 그런 그이기에 아프리카 중부 사막지대를 통과하여 기니에 도착했을 때 장엄하게 펼쳐진 녹색의 숲을 보고 아찔해지면서 정신적 환희에 들떠 그간의 시름을 까맣게 잊고 천둥 벌거숭이 아이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유스케는 안데스 산지에 홀로 살아가던 앨버트라는 남루한 목동의 무뚝뚝하면서도 사려 깊은 모습에 자신을 동일시하기도 하였으며 아프리카나 중국 등지에서 만났던 선하고 친절하며 아낌없이 호의를 베풀던 이들에 대해서는 경제적 형편이나 지위 고하를 떠나서 존경과 더불어 동류의식까지 느끼며 상호 교감을 나누기도 하였던 다정다감한 인간미의 소유자였다.

그는 이렇게 섬세한 감성과 따뜻한 인간미를 지니고 있었기에 인간과 세상의 이면을 남다른 시선으로 살필 수 있었고 거기서 소중한 지혜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운명론자였던 그가 세계와 인간을 만나서 그들과 공감하는 가운데 다시금 활력을 얻어 자신의 참모습을 또렷하게 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유스케는 배려가 깃들인 타인의 그윽한 눈을 바라보며 외톨이로 남겨진 것이 아니라는 안도감과 이런 세상에 살아 있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는 이치를 온몸으로 터득한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 행복의 빚을 갚기 위해 다른 이들에게로 눈을 돌려야겠다는 결단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 많은 이들이 축복하고 보살피며 동행하는 가운데 살아가는 행복한 존재라는 값진 경험을 한 유스케의 여정을 나도 뒤따라 밟고 싶다. 유스케의 깨달음을 나도 체득하고 싶다. 그리하여 나의 진면목을 발견하고 세상의 참다운 지혜도 얻은 자랑스런 여행기를 남길 수 있었으면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래된 정원 - 상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대의 격랑을 넘어 굽이굽이 아픔의 자리들을 거쳐 다시 본래의 일상으로 돌아온 황석영이 그간의 응축된 역량을 오롯이 쏟아 부은 듯『오래된 정원』은 여러모로 우뚝하다.  그런데 작품 속에 투영되어 있는 황석영의 정신세계가 이전의 그것과는 많이 달라 보인다.  그리하여 작중의 오현우이기도 한 황석영이 바뀐 환경에 낯설어하듯이 우리 또한 그와 그의 글에 서먹하기도 하다.

"무감동하게 바짝 마른 황야의 돌처럼 굳어 있던 마음속으로 촉촉한 물기가 번져오는 느낌이었다.  여름날 석양녘에 낮잠을 자고 깨어난 것과도 같이 사람들이든 산과 들의 풍경이든 너무도 선명하고 새롭고 뚜렷해서 낯설게 보이기까지 했다." (하권, 111쪽)

그의 작품은 이전의 그답지 않게 현실의 팍팍함에서 한 발 비껴나 있다.  일견 초월을 꿈꾸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오래된 정원』에서 그는 이상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오현우와 한윤희의 아니 작가 황석영에게 오래된 정원은 어디였을까?  아마 그것은 역사 발전의 과학적 원리에 입각하여 합법칙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단계로서의 미래는 아닐 것이다.  우리 안에 오래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는데 의미를 깨닫지 못했었거나 알게 모르게 가능성이 조금씩 배태되고 있던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그것은 이념 과잉의 시대를 힘겹게 겪어내면서 뼈아프게 체득한 깨달음일 것이다.

황석영은 이상 사회의 표상으로서의 오래된 정원을 그려 보이기에 앞서 그것의 대척점이 될 지나간 시대의 성격을 나름대로 규정하고 있다.  그 시대는 수컷들의 삭막하고 쓸쓸한 갈등과 번민의 나날이었다. (하권, 304쪽)  권력, 헤게모니에 집착하던 광기의 시절이었다.  또 자본측이나 반체제 진영까지도 물질적 진보를 맹목적으로 추구했던 일방적인 시대였다.  하부 구조의 토대를 구축해야 인간성이 실현된다고 본 것이다.  한편 운동의 동력으로 전위(前衛)가 강조되던 연대였다.  소수의 영도 세력이 조출해낸 지침이 조직 대중에게 일관되게 관철되는 권위적인 방식에 얽매어 있었다.  새로 깨어나고 있던 각계각층의 잠재적 역량들을 과소평가하고 그들에게 소홀했던 것이다.  이러한 비판적 성찰을 현우의 회상과 윤희의 일기 형식을 통해 황석영은 가하고 있는 것이다.

황석영은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지평이 열리고 있음을, 그리하여 바람직한 새로운 사회에는 전과는 다른 시대 정신이 요구됨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새 시대에는 가부장적 사회구조의 냉혹한 지배방식에서 모성적 사랑으로 지향이 바뀌어야 함을 한윤희와 마리 부인을 통해 설득력있게 나타내고 있다.  연민과 보호가 탈취와 파괴보다 더 크고 근본적인 것임을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또 그 모성을 황석영은 위대한 자연과 같은 맥락으로 보았다.  현우와 윤희가 몇 달을 함께 보냈던 갈뫼의 생태와 같은 본연의 것이 그것일 것이다.  샹그릴라나 유토피아는 관념속의 허구가 아니고 스스로 있을 따름인 자연의 원리에 순응해서 자족하며 살아가는 지경일 것이다.  새 시대의 화두가 모성과 생태임을 적시한 황석영은 이러한 시대로의 이행의 동력으로 새로 떠오른 시민 사회를 지목하고 있다.  6월 항쟁을 통해 우리는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특정 계급이나 세력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 아니고 광범위한 계층을 망라한 시민의 총체적인 역량이 사회 진보를 이루어 낼 힘의 원천임을 절감한 것이다.  그들의 연대가 결국은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나간다고 본 것이다.

그리하여 황석영은 우리의 오래된 정원, 모성과 생태의 공간이 결국은 우리가 열어 나가야 할 이상적인 미래의 모습인 것을, 그리고 이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시민의 각성과 연대가 절실히 요구됨을 간곡하게 말하고자 한 것이리라.


당신은 그 외롭고 캄캄한 벽 속에서 무엇을 찾았나요.  혹시 바위틈 사이로 뚫린 길을 걸어 들어가 갑자기 환하고 찬란한 햇빛 가운데 색색가지의 꽃이 만발한 세상을 본 건 아닌가요.   당신은 우리의 오래된 정원을 찾았나요? (하권, 30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산책의 숲, 봄 여름 가을 겨울
이순우 글 그림 / 도솔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인적 드문 금정산 뒤편 양산시 동면 쪽 등산로를 따라 걷다보면 숨이 턱 막힐 때가 종종 있다.

가령, 얼어붙고 메말라 의식마저 정지시킬 듯 혹독한 시절, 산 길 안쪽 한 모퉁이를 막 도는데 갑자기 훅 끼치는 보춘화 향기에 아득해져서 세상이 다시 촉촉하게 살아나고 무기력하게 찌든 몸 생기로 충전되는 듯 짜릿해지는 경우가 더러 있다.

화사하던 봄꽃 어느새 스러져 나뭇잎, 잡초 등속으로 온통 초록 일색인 즈음, 나뭇가지 위에 둥실 얹힌 듯 피어있는, 너무 기대 밖이어서 오히려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으아리꽃, 마삭줄들 앞에 아! 하는 영탄을 다시 내뱉기도 한다.

겨울 산사 내원 꽃 한 점 잎 하나 없는 가운데 달빛 아래 아기자기 오밀조밀 얼려있는 목백일홍 잔가지들 쳐다볼 때 이 세상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잠시 나를 잊기도 한다.

아마 나와 같은 이런 경험 몇몇, 흐뭇한 기억들이 쌓여 저자의 마음을 자연스레 움직인 것이 "산책의 숲"으로 태어난 것이리라.  출판사의 기획이나 작가의 인위적 의지만으로는 낳을 수 없는 소박하되 품격 있는 밥상이다.  이 즐거운 정찬에 참여하여 이순우님의 심사와 행로에 동행하는 동안 때론 충만해지고 더러는 서늘해지는, 그리하여 우리의 강퍅했던 정서가 눈 녹듯 풀리는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글샘 2006-05-10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 누구나 보는 것을 누구나 느끼는 것은 아니죠. 저도 잘 읽고 있는 중입니다. 리뷰 잘 읽었습니다.
 
엘리아의 제야
고종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자유주의자 고종석의 에세이 소설이다.  본래 소설이란 시사 논평이나 중수필과는 달리 형식 논리적 제약이 덜한 자유로운 장르이다.  이런 특성을 지닌 소설의 형식을 빌어 고종석은 그간 묵히고 삭여 두었던 내면의 소리를 분방하게 발언하고 있다.  그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상력에 실려있는 정신적 지향과 의식의 결을 접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자유주의자는 단연 사회적 약자인 소수자의 처지에 공감하고 그들에게 우호적인 지적, 정서적 경향을 지닌 자이다.  고종석의 글에서도 이점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주류에서 소외된 주변 계급에 대해 애정 어린 시선으로 관심을 기울이며 가진 자들의 배려를 호소하고 있는 것이 이번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경상도 출신의 강남 거주자로 명문대를 졸업한 고귀한 신분에다가 조선일보에 기고하여 문화 권력까지 누리고 있는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에 비해 전라도 출신에다가 강북에 거주하며 비명문대 출신의 학벌 때문에 천출로 취급당하고 배제와 억압의 대상으로 내몰린 이들에 대하여 고종석은 따뜻하고 축축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그들을 두둔하고 비호할 수밖에 없는 이성적 근거와 심정적 연민을 간곡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더러는 이런 사회 구조를 혁파해야겠다는 의지도 언뜻언뜻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고종석은 소수자들에게, 또 그들에게 동조하는 자유주의자들에 대해 무조건 우호적인 눈길만을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약자들과 자칭 자유주의자들의 내면에 깃들어있는 분열적 무의식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집어내고 있다.  자신이 사회적 약자로서 또는 그들에게 우호적 입장에 서 있는 자유주의자이기에 끝까지 그들의 처지에 공감하고 동참해야만 할 이들의 한 꺼풀 내면에는 이런 의식을 배반하는 천박한 속물 근성도 잠재해 있음을 과감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들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천민자본주의적 풍토에 휘둘려서인지 주류 기득권층에 합류하여 또 다른 약자들 위에 군림하고픈 욕구를 지니고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출신 지역과 가문을 숨기고 싶고 강남으로 거주지를 옮기고 싶으며, 조선일보에 기고하여 사회적 명사의 반열에까지 오르고자 하는 무의식적 갈망을 읽어내고 있는 것이다.  권력이나 금력에 초연해야 할 자유주의자 내지는 그 우호 세력들의 내면에 동물적 욕망이 강렬하게 번들거리고 있음을 짚은 것이다.

고종석은 어쩌면 그동안 발설이 금기시 되어온 자유주의적 지식인의 무의식 세계, 천박한 권력욕으로 점철된 지점을 소설의 형식으로 또렷이 드러내 보여 우리가 진정으로 배격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 어떤 것인지를 명료하게 보여주었다 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로와 함께 강을 따라서
에드워드 애비 지음, 신소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4년 4월
평점 :
절판


웰빙(well-being)이라는 말이 넘쳐나고 있다.  이 신조어에 시대가 휘둘리고 있는 듯 하다.  그런데 한동안 잘 먹고 잘 살기, 즉 물질적 풍요를 통한 유족한 삶 향유라는 뜻으로 이 용어가 쓰여지더니 요즘은 일상의 번잡한 굴레에서 벗어나 느림과 하강, 생태적 삶 실현 등 정신적 가치를 지향하는 생활 양식으로까지 의미 범주가 확장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소로의 삶과 내면세계를 벤치마킹 하고자 하는 에드워드 애비의 <소로와 함께 강을 따라서>는 트랜드에 부합하는 저작이라 할만하다.  인위가 아닌 유유자적한 삶, 강물과 더불어 혼연일체가 되어 자연에 의탁하는 모습 등에서 이러한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애비를 따라 읽으며 소로를 함께 강을 내려가다 보면 웰빙이라는 시대의 유행이, 우리의 지향이 얼마나 지적 허영인지, 정신적 사치인지 금방 깨닫게 된다.  부대끼며 살아내어야 하는 실천적 삶이 아닌 상징으로서 우리가 그것을 좇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시대가 만들어낸 몽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자연에 순응하며 사는 생태적 삶은 그렇게 편안하고 만만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계의 냉혹한 법칙이 예외 없이 지배하는 조야하고 불편한 것이다.  애비 가족이 살았던 애리조나주 투산의 집 주변처럼 멧돼지가 내려오고 전갈과 방울뱀이 집안까지 들어오며 모래 먼지가 뒤덮는 야성적인 공간에서 살아내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 보호막도 없는 상태에서 나약한 인간이 고스란히 온몸으로 버텨내어야 할 따름인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들은 애완용으로 길들여진 집개와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안락과 평온을 탐하는 통속적인 자들이다.  그런 우리가 코요테가 출몰하는 야생에서 무방비로 지내기란 너무도 두렵고 힘겨운 것이리라.  아니 사실상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통속적 의미로서의 웰빙(well-being)이라는 상징적 관념에 빠져 대책 없이 느림과 하강과 생태적 삶을 지향하는 요즘의 유행을 읽는 함의를 얻을 수 있는 대목이다.  애비의 삶에 비추어보자면 많은 부분 그것은 몽환이요 아편이자 정신적 유희인 것이다. 

진정한 생태적 삶은 안락과 평온을 얻으려고 해서는 실천되지 않는다. 그것은 애리조나 투산의 척박한 환경속에서도 절망하거나 자기 연민-천박한 슬픔-에 빠지지 않고 의연히 나무를 심으며 후일을 기약하는 야성의 삶을 살았던 애비와 1세기 전 콩코드 숲에서 지난한 불편을 오히려 축복으로 여기고 기꺼이 받아들였던 소로우에게나 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이문재 시인의 말-나는 생태주의자가 되지 못할 것이다-처럼 아마도 나는 야생의 삶을 살지 못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