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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 이야기
베르나르 키리니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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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놀라운 일들이 현실이라면 나는 미쳐버릴 것이다. 그것들이 상상의 것이라면 난 이미 미쳐 있는 것이다. -앰브로스 비어스-

베르나르 키리니의 [육식 이야기]에선 살짝 보르헤스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로맹 가리의 상상력도 어른거린다. 서문인 ‘고인들의 목록’과 ‘아르헨티나 주교’, ‘지금은 모두 죽어버린 몇 작가에 대하여’나 ‘유럽과 기타 지역의 음악 비평 몇 편’ 같은 데선 친숙한 이름이긴 하지만 가공의 산물인 것들이 어우러져 그로테스크하면서도 발랄한 상상력을 맛보게 한다. 안토니오 가우디나 피에르 굴드가 연이어 등장하고 익숙한 지명을 차용한 대목도 상당 부분 등장하는데 이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글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소재와 글쓰기 방식이라 하겠다. ‘기름 바다’나 ‘살인청부업자의 추억’에서는 삶이나 세상의 허무에 대한 비판적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 로맹 가리의 세계도 겹쳐진다. 로맹 가리의 그것보다는 약간 비관의 색깔은 옅지만 말이다.

키리니의 [육식 이야기]가운데 내게 압권으로 다가온 건 역시 표제작인 ‘육식 이야기’라 하겠다. 그로테스크하면서도 발랄한 상상력, 거기다 허무의 그림자까지 곁들여진 게 이 책의 대표작으로 주저없이 꼽을 만했다.

영국 런던 경찰국 수사관 출신인 해리 그로워가 자신의 삶을 정리해 보고자 회고록을 집필하기 위해 관련 자료를 들춰보다 기묘하고 비극적인 사건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살해당한 식물학자 존 라투렐의 조수였던 오브롱 굴드의 편지와 그에 대한 답신이 오가면서 사건의 전말을 드러내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글이다. 역시 키리니답게 거대 식충식물인 디오나이아 투렐라(라투렐의 파리지옥)가 연구자인 라투렐을 공격하여, 시신이 물어뜯긴 채 온실에서 발견된 사건에 대한 수사 과정을 정밀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유해 식물과 독성 식물이 온갖 증오와 죽음의 악취를 풍기는 음산한 온실을 배경으로 연구자와 그의 조수가 식충식물에 심취되는 과정을 꼼꼼하게 그리고 있는데 조수인 오브롱 굴드는 식물에서 사악함과 비열함을 읽고 있고 라투렐은 파리지옥에 인격까지 부여하며 그를 마치 군주인양, 여주인이나 연인인 것처럼 여겨 사랑에 빠질 정도까지 탐닉하게 되는 모습을 통해 키리니 특유의 기괴하고 도발적인 상상력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결말은 의외의 진범이 밝혀지는 것으로 대반전이 이루어지고 있어 약간 어이없다는 느낌도 들었다.

베르나르 키리니의 [육식 이야기]에는 이렇게 한 편 한 편, 천천히 곱씹어볼만한 이야기들로 빼곡하다. 그리고 분량도 단편보다 더 짧은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호흡을 고르지 않고도 읽어낼 수 있어 더욱 쉽고 즐겁게 다가갈 수 있다. 두고두고 음미해볼만한, 재미있고 발랄한, 그러면서도 나름의 메시지도 담고 있는 이 책은 결코 일회용은 아닐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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