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운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그는 자기 본심을 말하지 못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배워서 그렇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그 정도 자리에 있는 남자는 자신이 뭘 원하는지를 언제나 정확히 알고 만사가 그에 맞춰 돌아가기 때문이다. - P96

어떤 실재를 찍은 사진이 종국에는 그 실재 자체보다 더 흥미로운 건 왜일까? 아직 그 답은 알 수 없었다. - P97

"자유를 향해 가는 길에서 누구는 재물을 얻고 누구는 죽음을 얻지." - P103

아들이 태어날 때마다 엄마 아빠는 사뭇 진지하게 이 아이가 영국의 대학에 입학해 의사나 변호사, 아니면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중요한 인물이 될 거라는 기대를 주고받았다. 아빠가 자기 아들에 대해서, 나는 쏙 빼놓고 같은 부류인 아들들에 대해서만 그런 말을 하는 건 상관없었다. 아빠는 나를 전혀 몰랐으니까. 아빠가 나를 보며 흥미진진하고 승승장구하는 삶을 상상하리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엄마는 날 잘 알았다. 자기 자신을 아는 만큼이나 잘 알았다. 당시 나는 우리가 아주 똑 닮았다고 보았다. 그런 엄마가 아들이 앞으로 해낼 일이 얼마나 자랑스러울지 하는 생각에 빠져 눈에 눈물이 그렁해질 때마다 내 심장에는 칼이 꽂히는 심정이었다. 자신을 똑닮은 자식인 나와 관련해서는, 약간이라도 비슷한 상황을 예상하는 인생의 시나리오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난 속으로 엄마를 ‘여자 유다‘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그때조차 완전한 절연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엄마와의 절연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 P104

머라이어는 내 상황을 완전히 잘못 해석했다. 펼쳐 읽으려면 계속 누르고 있어야 해서 손이 아플 지경인 이 두꺼운 책으로는 내 삶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내 삶은 그보다 더 간단하면서도 동시에 더 복잡했다. 내가 살아온 이십 년 세월 가운데 십 년을 살아온 인생의 반을 난 끝나버린 사랑을 애도하며 살았다. 아마 평생 내가 경험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참사랑을 - P106

하지만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부분들이 변했고, 아직은 나도 잘 알지 못했다. 나 자신을 새로 만들어내고 있다고 보았는데, 과학자보다는 화가의 방식이었다. 정확도와 계산에 의지할 수가 없었다. 믿을 것은 직감뿐이었다. 딱히 마음속으로 계획한 바는 없었지만 그림이 완성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난 사회적 지위도 없고 내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도 없었다. 내겐 기억이 있고, 분노가 있고, 절망이 있었다. - P108

나 혼자만의 지옥에서 말없이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내 감정을 털어놓을 사람도 없었고 내게 찾아든 감정이 있을 법한 감정이라는 것도 몰랐다. 그러다가 어느 날 홀연히 그런 삶에서 벗어났다. 내 과거를 이런 식으로 보게 되었던 것이다. 선이 있다. 그 선은 네 스스로 그릴 수도 있고 누군가 대신 그려줄 수도 있다. 어쨌든 그렇게 생긴 선이 너의 과거다. 지금까지 거쳐온 수많은 네 모습과 지금까지 해왔던 수많은 일들. 더이상은 네가 아닌 네 모습들, 이제는 빠져나온 상황들, 그것이 네 과거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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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빈방이 있다는 건, 누구에게도 딱히 필요하지 않은 그런 방이 있다는 건 얼마나 호사스러운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래야 하는 거 아닐까? 필요한 것보다 많이, 집집마다 딱 필요한 것보다 하나씩은 방이 더 있어야 하는 거 아닐까? - P71

나로서는 가진 게 너무 많아서 일어나는 불행을 바라보면, 재미도 있고 기분전환이 되었다. 가진 게 너무 없어서 벌어지는 일들은 하도 많이 봐서 뻔했으니까. - P71

장소만 바뀌면 내가 가장 경멸하는 것들을 완전히 내 삶에서 쫓아내버릴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내 앞에 펼쳐질 때마다 만사가 어디나 매한가지라는 걸 알게 되었다. 현재가 형체를, 내 과거의 형체를 갖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 P74

"멀리 도망갈 수는 있겠지. 하지만 내가 네 엄마라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는 없어. 내 피가 네 속에 흐르고 있고, 넌 아홉 달 동안 내 뱃속에 있었으니까." 그것이 상상할 수 있는 어떤 쇠창살보다 더 단단한 창살이 달린 감옥에서 죽을 때까지 살라는 선고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 P74

난 루이스와 머라이어의 아파트로 가서 내 방 침대에 앉았다. 여기서 보낸 여름을 떠올려보았다. 겉으로는 달라 보이는 것들 사이에서 동일성을 발견했다. 무척이나 행복한 순간들을 맛보았고 내 미래를 상상해보고픈 갈망이 생겼지만 동시에 환상이 깨지며 대단한 실망감을 맛보기도 했다. 하지만 삶이란 이래야 하지 않을까? 한없이 나를 끌어내리는 위험하기만 한 저류가 아니라 이렇게 기복이 있는 게 맞지 않을까? - P75

태어나 자란 곳이 더는 견딜 수 없는 감옥처럼 느껴져, 익숙한 것들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을 갈망하는 일, 그리고 그것이 안식처가 되어주리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일을 다 이해할 수 있었다. - P77

나는 그녀의 친구들이 아니라 그녀를 만나 그녀의 집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새삼 깨닫곤 했다. 하지만 아무리 아닌 척해도 소용없었다. 난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사는 유형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리 받아도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이었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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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살이와 관련해 내가 지닌 믿음 중 하나는, 아름다움이 여자들에게 대단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믿음이다. 어차피 사라질 것이니까. 아름다움은 사라질 것이고 뭘 어떻게해 본들 되찾을 수는 없을 테니까. - P48

휴가 말했다. "살면서 익숙해진 모든 것에서 멀리 떨어질 수 있다면 그게 가장 행복한 일 아닐까? 나 자신도 내가 누군지 알지 못하고 내가 속했던 그 모든 것들로 과연 돌아가고 싶은 건지도 확실히 알 수 없을 만치 멀리 떠나가는 거지." - P55

머라이어는 사라져가는 것들을 다루는 그림책을 쓰고, 그것을 지키려 애쓰는 단체에 수익금을 기부하겠다고 결심했다. 머라이어와 마찬가지로 그 단체 회원들은 모두 부유했지만, 눈앞에서 진행되는 세상의 피폐화와 자신들의 안락한 삶을 연결시키지 못했다. 나는 그에 관해 한두 마디 말을 해줄 수도 있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해로운 약물을 조금이나마 맛보는 걸 보니 참 근사하다고 말해줄 수도 있었다. - P60

머라이어는 어떤 날엔 아침 일찍부터 늦은 오후까지 밖을 돌아다니며 주변의 다양한 서식지에 있는 생물종을 스케치했다. 그녀를 보면 만물이 멸종 직전이라 당장이라도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머라이어는 내가 아는 가장 상냥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런 관심과 우려가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 상냥함이 안락한 환경에서 살아온 덕분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같은 처지라도 상냥하지도 않고 배려심도 없는 사람들은 쌔고 쌨다. 구하고 싶은 것들을 다 구하고 나면 그녀 자신의 처지는 예전만 못하게 될 거라고 꼬집어 말해줄 수 없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루이스가 매일 주식거래인과 나누는 대화를 잘 따져봐라, 그것이 당신의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져가는 것들과 관계가 있지 않겠냐, 그런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 P60

그들은 장례식을 치르고 토끼를 묻어주었지만, 난 도저히 그 자리에 함께 할 수 없었다. 그 장례식은 엄마와 아빠와 아이들이 꾸리는 삶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허위 - 내가 이제 알아차리기 시작한- 의 또다른 예일 뿐이었다. 예전엔 가족생활의 허위가 오직 나와 우리 가족에게만 존재한다고 보았다. 내가 열어보지 않은 엄마의 편지가 그 사실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 P64

루이스와 머라이어의 아파트에는 창문마다 둥글고 구불구불하게 장식된 철창이 설치되어 있었다. 어쩌다 아이들이 창틀로 올라갔다가 미끄러지더라도 십층에서 아래쪽 보도로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아이들의 생명을 보호하려는 것이니 아주 합당한 일이지만 그래도 난 당혹스러웠다. 부유하고 안락하고 아름답고, 세상이 알아서 최고의 것들을 다 그 앞에 대령하는 이런 지위의 사람들은 안전하지 않나? 손톱이 부러지는 일도 절대 없지 않을까?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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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삶의 목표는 엄마의 편지에 언급된 일들과 가급적 거리를 두는 것이었다. 이 편지가 날아온 곳과 나 사이의 거리를 충분히 벌려놓을 수 있다면, 편지에 적힌 일과 나 사이에 다른 사건들을 많이 집어넣을 수 있다면, 모든 행동과 모든 말과 모든 얼굴에서 수백 년의 세월을 보는 대신 만사를 그냥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 P29

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른다는 찬사가 주변에서 쏟아질 때마다 엄마가 자기만족감에 푹 빠지는 모습에 난 소름이 끼쳤다. 나를 향한 엄마의 사랑이란 오롯이 나를 자신의 분신으로 만들기 위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까닭은 모르겠지만 누군가의 분신이 되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겠다 싶었다. - P33

그녀가 실제 한 말이 ‘아랫것들minions‘이 아니라 ‘수백만millions‘이었을 수도 있다. 농담으로 한 말이 확실했다. 하지만 생선요리를 하는내내 난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랫것들‘ 그것은 나 같은 사람은 떨쳐버리기 힘든 단어였다. - P34

머라이어는 "내게 원주민 피가 흐른다"라고 했고, 장담하건대 그 말은 무엇보다 마치 전리품을 가지고 있다는 선언 같았다. 대체 어떻게 정복자가 동시에 피정복자일 수도 있다는 주장을 할 수가 있지? - P37

아이들을 대할 때는 진지하고 솔직하게, 가능한 한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은 진실 그대로 말해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었다. 동화는 유익하지 않다고 보았고, 긴잠에 빠진 공주가 왕자의 입맞춤으로 깨어나는 식의 것들은 특히 그랬다. 그런 이야기는 아이들이, 모든 여자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세상을 살아갈 때 그릇된 기대를 갖게 만든다고 했다. 동화에 관한 머라이어의 주장이 내겐 늘 신기했다. 내 머릿속에는 세상살이에서 그릇된 기대를 갖게 하는 것들의 긴 목록이 있는데, 동화는 거기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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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라이어는 산들바람에 몸을 숙이는 꽃을 보면 살아 있는 게 기쁘구나.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가 있지? - P19

당시 내 양면성은 극에 달해 있었다. 그러니까 밖으로 보이는 모습과 내면의 모습이 달랐다. 겉모습은 가짜이고 내면이 진짜였다. 그때도 겉으로는 겸손과 고마움을 담아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지만, 속으로는 내 마음에서 그 시를 한 줄 한 줄, 단어 하나하나 남김없이 모두 지워버리겠다고 맹세했다. - P20

그저 한 걸음이었지만 나에게는 나 자신도 인식하지 못했던 어떤 것이 저지당한 느낌이었다. - P20

봄이 시작된다는 그날 세찬 눈보라가 찾아왔고, 그날 하루에만 겨우내 왔던 눈보다 더 많은 눈이 내렸다. 머라이어는 나를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늘 이렇다니까." 그렇게 말했는데 아는 사람에게 막 배신이라도 당한 투였다. 난 웃어주었지만, 사실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날씨가 마음을 바꾸었다고, 날씨가 자기 기대에 어긋났다고 비참한 기분에 빠질 수 있지? 사람이 어떻게 그렇지? - P21

한 곳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남자에게 매맞는 여자아이가 있고, 다른 한 곳에는 눈에 보이는 남자에게 목이 베이는 여자아이가 있구나. 이렇게 넓고 넓은 세상인데 어째서 내 인생에는 선택지가 고작 그 둘뿐이지? - P22

의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으므로 확신을 가져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에게는 늘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니까 일어났으면 하는 일이 일어나니까. 그래서 난 다시 생각했다.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가 있지? - P26

머라이어에게는 좋은 향기가 났다. 좋은 향기, 바로 그거였다. 그리고 난 생각했다. 바로 그게 머라이어의 문제라고. 좋은 향기가 난다는 것. 나로 말하자면 내게서 진한 냄새가 났으면 좋겠고, 그게 불쾌하건 말건 개의치 않는다는 것을 그때 이미 깨달았기 때문이다. - P27

"아줌마는 내가 열아홉이 될 때까지 실제로 보지도 못할 꽃을 노래한 긴 시를 열 살의 나이에 암기해야 했다는 사실을 알기나 해요?" - P28

그녀가 아름다운 꽃을 보는 그곳에서 나는 비통함과 원한만을 본다는 사실은 어떻게 해도 달라질 수 없었다. 우리가 그 장면을 똑같이 보고 함께 눈물을 흘릴 수도 있겠지만, 그 눈물의 맛은 다를 것이었다.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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