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살이와 관련해 내가 지닌 믿음 중 하나는, 아름다움이 여자들에게 대단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믿음이다. 어차피 사라질 것이니까. 아름다움은 사라질 것이고 뭘 어떻게해 본들 되찾을 수는 없을 테니까. - P48
휴가 말했다. "살면서 익숙해진 모든 것에서 멀리 떨어질 수 있다면 그게 가장 행복한 일 아닐까? 나 자신도 내가 누군지 알지 못하고 내가 속했던 그 모든 것들로 과연 돌아가고 싶은 건지도 확실히 알 수 없을 만치 멀리 떠나가는 거지." - P55
머라이어는 사라져가는 것들을 다루는 그림책을 쓰고, 그것을 지키려 애쓰는 단체에 수익금을 기부하겠다고 결심했다. 머라이어와 마찬가지로 그 단체 회원들은 모두 부유했지만, 눈앞에서 진행되는 세상의 피폐화와 자신들의 안락한 삶을 연결시키지 못했다. 나는 그에 관해 한두 마디 말을 해줄 수도 있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해로운 약물을 조금이나마 맛보는 걸 보니 참 근사하다고 말해줄 수도 있었다. - P60
머라이어는 어떤 날엔 아침 일찍부터 늦은 오후까지 밖을 돌아다니며 주변의 다양한 서식지에 있는 생물종을 스케치했다. 그녀를 보면 만물이 멸종 직전이라 당장이라도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머라이어는 내가 아는 가장 상냥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런 관심과 우려가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 상냥함이 안락한 환경에서 살아온 덕분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같은 처지라도 상냥하지도 않고 배려심도 없는 사람들은 쌔고 쌨다. 구하고 싶은 것들을 다 구하고 나면 그녀 자신의 처지는 예전만 못하게 될 거라고 꼬집어 말해줄 수 없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루이스가 매일 주식거래인과 나누는 대화를 잘 따져봐라, 그것이 당신의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져가는 것들과 관계가 있지 않겠냐, 그런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 P60
그들은 장례식을 치르고 토끼를 묻어주었지만, 난 도저히 그 자리에 함께 할 수 없었다. 그 장례식은 엄마와 아빠와 아이들이 꾸리는 삶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허위 - 내가 이제 알아차리기 시작한- 의 또다른 예일 뿐이었다. 예전엔 가족생활의 허위가 오직 나와 우리 가족에게만 존재한다고 보았다. 내가 열어보지 않은 엄마의 편지가 그 사실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 P64
루이스와 머라이어의 아파트에는 창문마다 둥글고 구불구불하게 장식된 철창이 설치되어 있었다. 어쩌다 아이들이 창틀로 올라갔다가 미끄러지더라도 십층에서 아래쪽 보도로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아이들의 생명을 보호하려는 것이니 아주 합당한 일이지만 그래도 난 당혹스러웠다. 부유하고 안락하고 아름답고, 세상이 알아서 최고의 것들을 다 그 앞에 대령하는 이런 지위의 사람들은 안전하지 않나? 손톱이 부러지는 일도 절대 없지 않을까?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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