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민주의 경제학자들의 오류 분석
1-1. 사회적 분업
상품 경제 기반은 사회적 분업이다. 원자재 산업에서 떨어져 나온 제조업은 특정 제품을 상품으로 생산하고, 다른 모든 산업 부문에서 교환해서 소규모 및 하위 산업으로 세분화된다. 상품 경제 발전은 개별적이고, 독립적이다. 이전에 자연 경제 사회는 가부장적 농민 가족, 원시 촌락 공동체, 봉건 영지 등 다수의 동질적인 경제 단위였으며, 많은 종류의 원자재를 자체적으로 사용하고자 모든 경제 활동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상품 경제가 발전하면서 개별 경제 부문의 수가 증가했고, 동일한 경제 단위의 수도 감소했다. 사회적 노동은 분업으로부터 발전했으며, 자본주의 생산에서는 상품, 사용가치, 교환가치, 화폐로 구체화된다. 또한 소외로부터 사용가치를 생산물로 전환하고, 상품 시장은 사회적인 분업으로 발전한다. 따라서 생산적 노동에서 분업은 개별적인 생산물을 상품의 등가물로 전환시키며, 시장 역할을 하도록 한다. 사회적 분업으로 제조업과 원자재 산업 뿐만 아니라, 제조업과 농업을 분리하는 산업으로 전환하고, 경제 상품을 생산하도록 만든다. 많은 제품 · 제조를 분리해서 더욱 많은 산업 부문을 만들도록 하는 전문화 과정은 농업 지구 · 단지를 형성하고, 자본주의 및 상업적인 농업의 전문화는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세계적인 노동 분업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사회적인 분업은 상품 경제와 자본주의 발전에서 전체 과정의 기초이며, 인위적인 조치에 따른 결과이다. 나로드니키라는 인민주의자들은 모든 상품 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사회적 분업을 인위적이라고 널리 알리면서 발전해갔다. 이반 스테부트, 『농작물 농업의 원리』와 이반 스크보르초프, 『증기 수송이 농업에 미치는 영향』에서는 농업 체계를 작물 재배, 가축 · 사육, 산업 농업이라는 세 가지로 구분했으며, 따라서 주요 생산물은 기술적 가공 과정을 거친 농산물이 된다고 지적했다.
1-2. 산업 인구 형성
상품 경제의 발전은 산업의 일정한 부문에서 농업이 순서대로 분리된 형태이다. 저개발 국가에서는 전적으로 농업에 의존한다. 또한 농산물도 가공하며, 교환과 분업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상품 경제의 발전에 따라 증가하는 인구의 일부는 농업에서 분리된다. 자본주의 생산의 본질은 농업 인구를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인구에 견주어 꾸준하게 감소시키며, 농업 인구를 희생시키면서 산업 인구를 증가하도록 만든다. 자본주의 생산에서는 생산 기관이라는 불변 자본을 증가시키는 노동력으로부터 가변 자본을 희생시키고, 가변 자본은 상대적으로 감소한다. 반면에, 농업 부문에서는 특정한 토지를 착취하면서, 가변 자본이 절대적으로 감소한다. 같은 비율은 새로운 토지가 경작될수록 늘어나지만, 비농업 인구 수는 다시금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상업, 산업에 대한 증가는 농업 인구를 희생시키게 되며,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 매우 명백해진다. 특히 산업 중심지에서는 수적인 발전에 따른 인구 원인으로는 농촌 체계에도 매우 심각한 영향을 끼치며, 자본주의 상업과 농업의 발전을 초래한다. 그러나 인민주의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법칙을 모두 무시했고, 시스몽주의자와 같은 경제적 낭만주의와 동일한 태도를 가졌다. 자본주의 생산에서는 생산수단의 소유자, 노동력의 판매자인 임금 노동자가 있다.
소규모 생산자는 임금 노동자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토지, 작업 도구, 작업장 등을 잃었다는 건, 빈곤해지거나, 파산했다는 전제를 둘 수 있다. 특히 자본 파산은 인구의 구매력을 약화시키고, 자본주의에서 국내 시장을 약화시킨다. 자본주의 생산에서 소규모 생산자가 몰락함에 따라, 국내 시장이 위축된다는 점에서 인민주의자들은 낭만적인 편견에 물들여버렸다. 왜냐하면, 생산자 가운데 한 계급이 생산 수단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건, 필연적으로 생산 수단이 다른 사람 수중으로 넘어가 자본으로 전화된다는 점을 간과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생산 수단의 소유자들은 이전에 생산자가 지불했던 제품을 상품으로 생산해서 국내 시장을 확대해간다. 생산을 확대하고, 새로운 생산 수단의 소유자들은 새로운 도구, 원자재, 운송 수단 등과 소비재에 대한 수요를 제시한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생산자의 안부가 아니라 화폐의 소유에 있다. 자연 경제에서 가부장적이던 농민의 복지 감소는 화폐량의 증가와도 양립한다. 농민이 더욱 파산할수록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만 하며, 생계 수단의 몫은 더욱 커져간다. 농민 토지의 일부를 수탈하고 내쫓아내면서, 식량 수단과 노동력 구매를 위한 가변 자본이라는 물질적 조건, 노동자의 생계 수단 및 노동 재료는 노동력 구매에 사용되는 산업 자본으로 전환되면서, 국내 시장이 창출된다. 따라서 이전의 소규모 생산자들이 몰락하면, 국내 시장이 위축된다는 주장은 추상적이며, 내용적으로도 공허할 뿐이다.
자본주의 생산에서 생산물 가치
1. 불변 자본은 이전에 원자재 및 보조재, 기계 및 생산 도구 등으로 가치를 대체하고, 특정 부분의 완제품으로 재생산된다.
2. 가변 자본은 노동자의 생계를 보장하는 가치로 대체된다.
3. 자본가에게 귀속되는 초과 가치이다.
여기서 불변 자본은 생산으로 들어가고, 가변 자본은 노동 계급의 소비로 들어간다. 그러나 자본가가 초과 가치를 완전하게 구매할 수는 없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은 외국 시장의 획득에서 초과 가치를 실현하고자 한다. 그들은 국내 시장에서는 농민의 몰락과 해외 시장이 없고, 초과 가치를 획득할 수 없기 때문에 위축된다고만 내세운다. 인민주의자들은 모든 생산물 구현 문제를 초과 가치 실현으로 축소시켰고, 불변 자본 구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생산물을 구현하려면 불변 자본이 반드시 투입되어야만 하고, 생산 수단으로 구성된 생산물을 가진 자본의 경우로만 할 수 있다. 불변 자본의 생산물이 소비재인 경우로는 생산에 직접 투입될 수는 없다. 생산 수단과 소비재에서는 사회적 생산 간 교환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인민주의 경제학자들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축적 목적을 소비 문제로만 제시했다. 특히 불가코프, 『자본주의 생산 하의 시장』에서 같은 문제가 있었다. 단지 외국 시장의 생산물 구현 문제만이 아니라, 가치와 물질적 형태에 따라서도 자본주의적 생산물에서는 각 부분에, 시장에서 대체하는 생산물의 다른 부분을 찾아 볼 수 있다. 외국 시장에서 생산물 판매 자체만으로는 판매되는 생산물에 해당하는 등가물을 찾아내고, 처음 부분을 대체할 수 있는 자본주의적 생산물의 다른 부분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국 시장, 외국 무역은 전적으로 버려져야만 하며, 해외 무역에 의존해서 매년 재생산되는 제품 가치를 분석해봤자, 문제의 기여보다는 혼란만 더 커질 뿐이다. 또한 자본주의 모순에서 발생하는 위기 등은 단지 초과가치 문제만이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물의 모든 부분에서도 발생하며, 필연적이다. 따라서 분배가 고르지 못하므로, 가변 자본과 불변 자본, 생산물, 소비재, 생산 수단의 생산물에서도 나타난다. 경제적인 위기가 발생하면 자본주의적 생산이 존재할 수가 없으며, 고립된 생산자들은 해외 시장을 위해서도 생산할 수는 없다.
1-3. 국민 소득
정치경제학에서는 전적으로 잘못된 이론을 기초로 뒀다. 애덤 스미스는 상품 가격을 임금이라는 가변 자본과 초과 가치라는 두 부분으로만 구분했다. 연간 사회적인 총 생산물도 같은 부분으로, 사장 및 지주라는 두 사회층의 수입에서 직접 할당시켰다. 그러나 애덤 스미스는 불변 자본을 생략했다. 곡물 가격에서는 지주의 지대, 생산에 고용된 노동자, 가축의 임금이나, 생계를 지불하며, 농부의 이윤을 지불한다. 생산 과정에서는 농부의 재고와 가축 및 기타 농업 도구의 마모도 보상해야만 했다. 그러나 모든 농업 도구에서는 가격 자체마저 지대, 이윤, 임금으로 이뤄진다. 곡물 가격은 말의 가격과 생계비를 충당하지만, 전체 가격은 지대, 노동, 이윤이라는 동일한 세 부분으로 분해된다. 따라서 농기구를 제작하는 데 사용되는 생산 수단 가격도 포함된다. 이후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생산물 가격에서 자본에 따른 불변 자본을 제외시킨 건, 자본주의 경제에서 축적 개념을, 생산의 확대, 초과 가치에서 자본의 전환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에서도 같은 지적을 한다. 가치 분석에서 가치를 창출하는 추상 노동과 기존의 가치를 유용한 생산물의 형태로 재생산하는 구체적인 유용 노동을 구분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민 소득 문제가 총 사회 자본에 따른 재생산 및 순환 과정에 대한 설명은 필수적이다. 애덤 스미스는 한 국가에서 모든 주민들의 총수입은 주민들의 토지와 노동으로부터 전체 연간 생산물로 포함시켰다. 순수입은 유지 비용을 공제하면 남는다. 고정 자본과 순환 자본들은 자본으로부터 즉각적인 소비를 위해 비축한 재고, 생계, 편의, 오락으로도 쓰인다.
애덤 스미스는 국가 총 생산물에서 자본을 제외하면서, 자본은 임금, 이윤, 지대로부터 순수입으로 분해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사회에서 들어가는 총 수입을 자본에다 포함시키고, 소비재와 분리한 순수입으로 계산했다. 마르크스는 생산물에 자본이 없다면 수입에도 자본은 없다고, 애덤 스미스를 반박했다. 따라서 총 생산물의 가치는 가변 자본, 초과 가치뿐만 아니라, 불변 자본도 들어간다. 애덤 스미스는 고정 자본을 유지하는 데 들어간 모든 비용은 사회에서 순 수입으로 제외했다. 애덤 스미스는 유용 기계, 무역 도구, 수익성을 띠는 건물 등을 지탱하는 자재 및 자재틀을 적절한 형태로 제작하는 데 필요한 노동 생산물의 일부가 될 수는 없고, 노동 가격의 일부로 나타나며, 고용된 일꾼들이 임금의 전체 가치를 소비를 위해 비축한 재고로 바로 넣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다른 노동에서는 가격과 생산물이 모두 재고로 돌아가며, 가격은 일꾼의 가격, 생산물은 다른 사람들의 가격으로 돌아간다. 따라서 순수입에 들어가는 소비재를 생산하는 노동과 유용 기계, 무역 도구, 건물 등으로 개인적인 소비로 사용될 수 없는 품목을 생산하는 노동으로 구분할 수 있다. 따라서 개인적 소비와 생산적 소비라는 두 가지 형태로 된 지출을 구분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바로 잡았다. 그러나 다른 경제학자들은 수입을 혼란스럽게 이해했으며, 리카도, 세이, 밀, 맬서스, 시스몽디, 찰머스, 키르히만 등도 상품에서 전반적인 초과 생산 논쟁을 애덤 스미스의 잘못된 이론으로 고수해버렸고, 불가코프도 잘못된 전제와 문제 자체를 인식했기 때문에 잘못된 공식화로부터 논쟁이 벌어졌고, 투간과 바라노프스키 간 산업 위기 논쟁마저 공허하고, 학문적인 말장난만 반복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총 생산물은 개인 생산물과 같이 불변 자본, 가변 자본, 초과 가치라는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자본주의 생산에서는 두 가지 주요한 부분으로 구분한다. 생산 수단의 생산이라는 생산 품목과 자본으로부터 지출하는 품목 생산의 소비품 생산, 곧 개인적인 소비 품목이라는 생산이다. 불가코프도 같은 방식으로 구분했지만, 개인적인 자본의 생산과 재생산 분석을 완전히 생략했고, 사회·자본에 따른 재생산을 분석했었다. 특히 불가코프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생산물의 자연적인 형태에서도 다른 근거를 도입하고자 했다. 개인 자본의 생산 분석으로 생산물 판매와 노동자들의 소비재, 자본가들의 생산물 구매처에 대해서는 정작 아무런 기여도 못했으며, 심지어 분석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생산에서 개별 가치와 생산 결과에 따른 가치 문제를 부각시켰다. 그렇다면 자본가와 노동자는 소비재를 어디에서 얻으며, 자본가는 생산 수단을 어디에서 얻으며 또한 완제품에 대한 모든 요구를 충족시키거나, 생산을 확대시킬 수 있을까.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가치 부분에서 대체제뿐만이 아니라, 물질 부분에서도 대체제가 있다고 거론한다. 그래서 사회·경제 과정에서도 전적으로 다른 역할을 하는 생산물들을 구분하는 근거이다. 사회적 생산물에서 단순 재생산이란, 이전 규모에 따른 생산 과정이 반복되고, 축적이 부재한다면, Ⅱ부문에서는 개별 자본과 소비재 형태를 띠는 초과 가치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초과 가치 전체로 지불되며, 자본으로부터 전환되지 않는다는 전제를 가진다. Ⅰ부문에서는 생산 수단 형태에 따른 가변 자본과 초과 가치는 생산 수단의 생산에 종사하는 자본가와 노동자로부터 소비재와 교환된다. 반면에, Ⅱ부문에서는 불변 자본이 생산에 다시금 투입되고자, 생산 수단과 교환된다. 그리고 생산 수단에 따른 가변 자본과 초과 가치를 소비재 형태로 띠는 불변 자본과 교환된다. 따라서 자본가는 생산물을 처분하는 방식으로 불변 자본을 획득한다. 단순 재생산에서는 교환되는 부분들도 동일해야 하므로, 생산 수단에 따른 가변 자본과 초과 가치의 합은 불변 자본과도 같다. 반면에, 점진적으로 증가하는 규모 면에서는 축적으로부터 재생산을 가정할 때, 원인이 되는 첫 규모가 후발이 된 둘째 규모보다 더 크다. 왜냐하면, 추가 생산에 따른 초과적인 생산 수단이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변 자본은 각 부분에서 자본가들 간에 다른 생산물과의 교환으로부터, 재료 또는 도구 역할을 담당하며, 직접 생산으로 투입되면서 구체화된다.
축적 부문에서는 자본가들의 초과 가치에 따라 추출되어 초과된 생산 수단으로 나타나며, 소비재로부터 나온 초과 가치 일부가 자본으로 전환된다. 국내 시장에서 자본주의적인 생산이란 소비재보다는 생산 수단으로부터 발달한다. 생산 수단 증가는 소비재 증가를 앞지르면서, II 부문에서는 소비재, 불변 자본은 I 부문에서 생산 수단에 따른 가변 자본 + 초과 가치와 교환된다. 그러나 자본주의적인 생산에 따른 일반 법칙에 따르면, 불변 자본은 가변 자본보다 더 빠르게 발달한다. 소비재에서 불변 자본은 가변 자본과 소비재에 따른 초과 가치보다 더 빠르게 증가하지만, 생산 수단에서 불변 자본은 생산 수단에서 가변 자본 + 초과 가치 증가와 소비재 부문에서 불변 자본 증가를 모두 앞지르며, 매우 빠르게 발달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 국내 시장에 따른 발전이란 개인 소비 발달과는 독립적이며, 주로 생산적 소비로부터 이뤄진다. 여기서 '독립적'이란 말은 생산적 소비와 개인적 소비가 분리됐다는 말이 아니며, 마르크스는 불변 자본들 사이에서 주기적인 순환이 일어난다는 점을 지적했다. 처음 불변 자본은 개인 소비와 무관하며, 불변 자본에 따른 소비 형태는 분명하게 제한되며, 불변 자본 자체가 생산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생산물은 개인 소비에 따른 생산 영역에서 더 많은 자본을 필요로 하면서 생산된다고 지적했다. 불변 자본에서 지출되는 소비는 생산력 발전에서 더 높은 단계이며, 교환 가치로 표현된다. 생산 수단은 대규모 기계 생산을 위한 온갖 부속품으로 구성되어, 자본주의적 생산은 사회적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대규모 생산에 따른 기계 산업을 창출해서 사회적인 부과하고, 특정 부문을 확장시킨다.
경제학자였던, 시니어도 야만인들은 때때로 수입을 소비재로부터 분해될 수 있는 생산물을 얻지 못한다거나, 노동에 따라 지출한 특권 따위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력의 더 많은 부분들을 생산 수단이라는 불변 자본으로 생산에 투입해서 사용된다. 생산 수단은 임금 및 초과 가치에 따른 수익으로 늘 분해될 수는 없으며, 자본으로만 분해된다.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할수록 물신 숭배도 생겨나며, 비축된 생산 수단으로부터 인간의 사회적 관계는 생산물 관계로 제시된다. 왜냐하면, 모든 생산물들은 구매자를 위해 생산되고, 시장에서는 상품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시중에 볼 수 있는 모든 제품이란 바로 상품으로 둔갑된 형태를 지니며, 수입이 생기도록 만든다. 국내 시장에서도 생산 수단 발전은 분명한 '모순'이다. 목적으로부터 생산은, 소비로부터 지불된 형태로 자본주의적인 생산을 더욱 확대시킨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본질은 사회·경제 체제에 따른 모순이며, 구매 및 소비의 확대 없이 생산만 확대시킨 자본주의에 따른 역사적·사회적인 본능과 같은 구조에도 부합된다. 역사적으로는 사회 생산력이 발전하고, 사회적으로는 기술적인 성과에 따라 사람들에게 기여하거나, 활용할 수 있는 기회마저 배제시킨다. 자본주의는 생산 확장에 따른 추진력을 밀어붙이며, 제한된 구매에 따른 모순이 존재한다. 마르크스는『자본』에서도 자본주의 생산에서 상품 구매자로부터 노동자는 시장에 따라 자신의 상품이자 판매자로, 최저 가격으로 유지된다고 지적한다. 구체적인 조건 속에서 많은 생산 부문과 사회적인 구매력에 따른 비례 관계들도 제한되며, 생산력이 더욱 발전할수록, 구매 조건에서 기반한 토대는 더욱 불균등하고, 고르지도 못하다. 생산자들의 수탈과 가난에 기반한 자본 가치 보존과 확장은 단독적인 한계를 보이는 데, 자본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일으킨 생산 방식과 늘 충돌과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생산 방식만으로는 무제한적인 기반을 확장시키고자 하며, 목적 자체인 생산, 사회적인 노동 생산으로부터 무조건적인 발전을 일으킨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인 생산 방식들은 생산에 따른 물질적인 힘을 발전시키며, 세계 시장을 창출하는 역사적인 수단으로부터 역사적인 과제와 사회적인 관계들 사이에서 끊임 없는 충돌과 갈등을 일으킨다는 점을 지적한다. 늘 많은 사람들은 가난으로 인한 제한된 구매력으로부터 외적인 한계를 이루고, 자본주의 생산에 따른 추진력과 개발 면에서 대조적으로 밀려난다. 생산만을 확대하려는 추진력, 제한된 구매 사이에는 모순 이외에 무엇도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자본』에서 초과 가치가 구체화된다는 지적이 아니라, 경제학자들은 종합적인 경제 위기를 단지 과소 소비로만 기인한다고 본다거나, 섣불리 결론 짓고 만다. 그러나 불변 자본들 사이에서도 개인적인 구매는 제한될 수 있다는 점은 마르크스,『자본』에서도 충분히 증명한다. 구매품에 따른 소비재가 국내 시장에서는 미미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모순이라고 섣불리 결론 내린다. 생산의 무한한 확장이라는 추진력과 제한적인 구매력 사이에서 생겨나는 모순은 자본주의에서만 나타나는 유일무이한 모순이 아니다. 특히 자본주의 모순은 역사적인 무의미한 덧 없음과 붕괴로부터, 더 높은 형태로 변형되는 조건과 원인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심각한 모순은 이전 사회·경제 체제에 따라서도 더욱 발전적인 성격을 갖추려고 든다. 여러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을 비롯한 경제적 낭만주의자들은 불가코프, 「산업위기」 , 스크보르초프, 「정치경제학 기초」에서도 축적, 구매 품목에 따른 전반적인 소비재 필수품, 사치품, 화폐 순환, 고정 자본, 마모 등, 자세한 조사를 이뤄냈지만, 이윤과 지대에 대한 잘못된 견해로부터 특히 로드베르투스, 베른슈타인은 무의미한 절충주의와 총 초과 생산물 증가에 따른 부유층 증가와 자본가들로부터 초과 생산물 전체를 소비할 수 있다고만 믿었다. 그리고 투간, 바르노프스키도 노동자의 생활 수준이 충분히 향상될 수 있다고만 해석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자본』에서 생산적 소비와 개인적 소비를 구분하며, 구체적으로 조사해서 분석한다. 그래서 베른슈타인,『사회주의 전제와 사회민주주의 과제, 1899』가 당시에도 부르주아 개량주의로 수정된 기회주의 견해로 불렸던 이유였다.
프루동은 부르주아 경제학자들과 동일한 오류를 저질렀다. 프루동은 초과 가치와 불변 자본이 생겨난 원인을 구체적으로 해명하지를 못했으며, 상품을 화폐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노동자에게만 상품을 판매할 수 있다고 봤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물이 구체화될수록, 원가에서 추가된 이자들로부터 자신의 생산물을 다시 소비할 수는 없다고 지적한다. 포르가드, 로드베르투스도 상품 가격으로부터 임금을 넘은 이윤뿐만 아니라, 불변 자본으로 대체하는 부분을 포함시켰다. 로드베스투스는 지대, 자본, 이윤, 임금을 소득이라고 지적했지만, 정치경제학에서 소득 개념을 명확하게 알지는 못했다. 또한 국민 총 생산물 총 일부는 생산으로부터 소비되거나, 소모된 자본으로부터 대체해서 사용됐고, 다른 일부는 국민 소득으로부터 사회 구성원들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요구했다. 로드베스투스는 애덤 스미스와 동일한 오류를 남겼고, 엥겔스도 지적했지만, 생산물에 따른 임금, 이윤, 지대라는 구분마저 소득 개념에서 기본적인 화폐가 국민 소득인지, 임금에 따른 자본 소득인지에 대한 온갖 추측만 난무했다. 헤르크너, K.H. 라, R. 마이어, A. 바그너와 같은 '고전적인' 경제학자들도, 수익과 소득 개념에서 생산물을 구분했지만, 분배와 소비에 대한 관심으로 치중됐다. 사회 전반적인 자본에 따른 재생산 과정과 사회적 생산물에 따른 많은 구성 요소들을 대체하는 과정을 모르고서는 소비에 대해서도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정치경제학에서 생산이 아니라, 생산에 따른 사회적 관계, 사회적 생산 체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총소득량, 순소득량은 총산출량, 순산출량과도 구분한다. 왜냐하면 총산출량 또는 총생산물은 재생산된 총생산물이기 때문이다. 총소득은 총생산물 가운데 가치 일부와 총생산물 가운데에서 생산으로 투입된 양이며, 앞서 언급한 소비된 불변 자본으로 대체하는 부분에서 차감된 남은 부분이다. 따라서 총소득은 임금(노동소득) + 이윤 + 지대로 계산한다. 반면에, 순소득은 초과 가치, 임금을 차감하고 남는 초과 생산물이며, 자본으로 구체화되어 지주로부터 분배된 초과 가치와 자본에 따라 측정된 초과 생산물이다. 총소득에 따른 국민 소득은 임금, 이윤, 지대가 있으며, 자본주의적인 생산에 따른 이윤과 지대로 분해한 소득만을 순소득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추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참고로 사회적 생산물에 따른 수입은 마르크스,『자본』, 제3권에서도 분명하게 명시한다.
1-4. 자본주의 국가 아래에서 해외 시장
자본주의에서 생산물로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분석의 출발점은 대외 무역이 없다는 전제에서부터 시작한다. 수입과 수출은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을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초과 가치를 해외 시장으로부터 환원시키면서 설명하는데, 주어진 이론으로만 해석하고는 자본주의가 국내 시장을 발전시킨다는 점을 회피한다. 특히 자본주의 국가일수록 해외 시장은 초과 가치나, 사회적 생산물이 아닌, 상품 유통이라는 결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대외 무역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인민주의자들은 초과 가치를 소비할 수 없다고 '진부하게' 생각한다. 해외 시장 문제를 다루려면 외국 무역 발전사, 상품 유통 발전사를 살펴봐야만 한다. 예전에는 사회적 생산에 따른 각 부문 가치와 자연적 형태 간 일치가 돋보여서, 사회 자본에 따른 재생산이 필연적이었지만, 여러 연속적이고, 변동된 평균 크기로만 확립됐다는 특징도 지녔다. 해외 시장을 모색하는 과정에서도 시장 역할은 많은 산업 분야에서 균등하게 발전하지 않으면 서로를 경쟁하고, 앞지르면서 발전하기 때문이다. 인민주의자들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초과 가치를 구현할 수 없다고만 생각했다. 실제로는 많은 산업 발전은 막상 비례하거나, 고르지도 않았다. 자본으로부터 한 산업 분야를 처분하고, 다른 산업 분야로 옮겨갈 때는 산업 분야에서 나오는 경제 위기를 막고자 한다. 따라서 이전 자본주의 생산 법칙에 따른 기술적 토대 위에서 생산을 반복한다. 지주 부역 경제에서도 농민들의 자연 경제, 산업가의 수공업 생산 등과는 반대로 자본주의 생산 법칙에서는 생산 양식의 변화와 생산 규모 면에서 무제한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충분한 기반 및 시설이 있기 때문이다. 이전 생산 양식 아래에서는 경제 단위 성격으로나, 규모 면에서, 큰 변화 없이도 소규모 형태로 지주의 영지, 농촌 마을, 농촌 수공업자, 소규모 산업가 및 수공예인 위주로도 존재했지만, 자본주의적인 기업이 출현하면서부터 마을 공동체, 지역 시장, 국경 단위를 넘나들며 발달하게 됐다. 국가적인 고립은 벌써 무너진지 오래이고, 모든 자본주의 산업에 따른 추세들은 해외 시장을 모색해간다. 자본주의에 따른 '발전적인' 역사적 과업들은 실제로 경제 체계에서도 오래된 고립을 파괴하거나, 세계의 모든 국가와 국경을 경제 전체 단위 하나로 연결해서 묶어버린다. 따라서 해외 시장을 조사한다거나, 분석하고자 한다면 역사적 성격에 따른 각 산업 분야에서 개별적인 발전 과정, 국내 발전 과정, 자본주의 산업으로 전환 과정을 두루 살펴봐야만 한다. 다시 말해, 국내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모든 점들을 잘 살펴봐야만 한다는 말이다.
1-5. 인민주의 경제학자들의 이론적 오류
국내 시장에서 상품 생산과 자본주의 발전 과정은 사회적인 분업을 띤다. 많은 형태로 된 원자재 가공에서도 농업 부문에서는 차례대로 분리되어 독립적인 산업 부문으로부터, 각 산업 부문에 따른 생산물이자 상품은 농산물과도 교환된다. 따라서 농업 자체에서도 상품을 생산하는 산업이 일어난다. 자본주의 경제에 따른 모든 발전하는 상품 경제는 상업 및 비농업 인구로는 농민 인구보다 더 빠르게 증가하며, 더 많은 인구는 농업에서 제조업으로 전환된다. 직접 생산자와 생산 수단을 분리하면서 단순 상품 생산에서 자본주의적인 생산으로 전환시키면서, 국내 시장을 창출하고, 수탈이 이뤄진다. 소규모 생산자에서 벗어난 생산 수단은 소유자 수중의 자본으로 전환되어 생산된 상품을 다시 시중 상품으로 전환한다. 단순 재생산에 따른 생산 수단에서도 구매가 필요하며, 시장에 따른 생산 수단으로부터 생산물은 상품으로 전환된다. 반면에, 소규모 생산자에 따른 생계 수단은 가변 자본에 따른 물질적인 요소로, 고용주 등은 노동자를 고용하고자 금액을 지출하며, 이와 같은 소비재에 따른 국내 시장은 생계 수단을 상품으로 전환시킨다. 자본주의에 따른 생산물로부터 초과 가치가 구체화되는 과정 속에서 사회적 생산물은 개인적 생산물로 전환되는 과정으로, 기존의 가변 자본 + 초과 가치 구분에서 불변 자본 + 가변 자본 + 초과 가치라는 부분으로 분해되며, 사회적 생산물은 생산 수단과 소비재로 구분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에서 생산물은 초과 가치에서가 아니라, 해외 시장에서 구체화된다는 문제로 접근한 방식은 잘못됐다고 충분히 지적했다. 마르크스로부터 구체화된 논의로는 국민 지출 및 소비와 소득 문제를 다뤘고, 국내 시장을 상품 경제로도 다뤘다. 전적으로, 상품 경제 발전에 따라 창출된 사회적 분업이 어느 정도 분화되는지에 따라 발전 수준은 결정되며, 상품 생산에서는 제품으로부터 노동력이 확장되며, 국내 시장을 창출하면서 확장된다. 노동력은 상품으로 전환된 정도에 따라 비례하고, 자본주의는 국가 전체 생산을 포괄하며, 생산 수단을 중심으로 발전한다. 국내 시장에 따라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창출되고, 직접 생산자는 사회적 분업을 심화시키며, 자본가와 노동자로 분리된다. 따라서 자본주의에 따른 국내 시장이 발전도는, 해당 국가에서 자본주의 발전 정도와 같다.
2. 농민층 분리 요인
2-1. 젬스트보 통계 조사 및 분석
2-1-1. 노보로시야, 젬스트보 통계
통계 도표 참조.
V. 포스트니코프는 「남러시아 농민 농업」에서 타우리다 지역, 헤르손 및 예카테리노슬라프 지역 통계를 수집했다. 젬스트보 통계학자들은 타우리다 지역의 농작물 재배 면적에 따라 농민 가구를 분류했다. 농업과 곡물 지배가 조밀하고, 우세한 지역에서 각 집단의 경제 사정을 판단했다. 먼저 농작물 재배 면적 분포가 불균등했다. 전체 가구 2/5 가운데 전체 인구 3/10을 구성하며, 전체 농작물 재배 면적으로는 약 1/8을 소유했다. 전체 가구 수에서 2/5를 차지하는 중농들은 농사 소득으로 평균 지출을 충당했다. 가구의 1/5은 부농들이었고, 경작 면적 절반 이상을 자신들의 수중으로 집중시켰다. 가구 당 작물 면적은 농업의 상업적 성격이 매우 뚜렷했다. 상업적 농업 범위를 계산했을 때, 농장의 총 작물 면적은 식량 면적, 사료 면적, 농장 추가 제공 면적을 분리해서, 생산물이 판매되는 시장 또는 상업 지역 규모에 도달한다. 당시로는 작물 재배 면적에서 11.8% 만이 시장용으로 수확량을 냈었지만, 작물 재배 면적이 꾸준하게 증가하면서부터, 부농은 상업적인 경작에도 종사하며, 연간 574-1500루블에 따른 총 수입을 확보했다. 자본주의 농업 아래에서 부농이 경작한 면적은 가족 노동을 기준으로 삼아도 초과하기 때문에 노동자를 고용해야만 했다. 타우리다 구베르니아, 북부 3개 군에서 부농은 14,000명 이상 농촌 노동자를 고용한다. 반면에, 빈농들은 노동력을 제공하거나, 판매한다. 5-10데시아틴 정도 적은 면적을 가진 집단에서는 토지 경작으로 얻은 소득이 가구 당 현금으로 약 30루블에 불과했다. 따라서 자본주의적인 생산에서 다뤄지는 국내 시장 창출은 상업적이고, 기업적인 농업 생산물인 상품으로 전환되며, 빈농이 판매한 노동력에 따라 상품으로 전환된다. 부농들은 배정지를 잘 제공 받을 수 있음에도, 구매한 토지와 대부분을 자신의 수중으로 쥐고 있었고, 소규모 토지 소유자와 자본주의적인 농부가 됐다. 17-44데시(약 1,700 - 1,600원) 정도된 토지를 임대할 때, 현지 가격으로 약 70-160루블 비용이 든다. 상업적인 거래에 따라 곧 토지는 상품이 된다. 가축과 농기구 부문에서 부농은 빈농이나, 중농보다 훨씬 더 나은 농기구를 갖출 수 있었다. 농민에 대해 사용한 평균 수치마저 허구적이었고, 농민 부르주아지들의 상업적인 경작은 상업적인 가축 사육, 특히 대평야 지역에서 거친 털을 지닌 양의 사육을 수반한다. 총 수확 및 제초 기계(3,061대) 가운데 2,841대인 91.8% 정도, 전체 가구 수 1/5은 부농층에 속한다. 부농들은 평균보다 뛰어난 농장 규모, 풍부한 농기구를 공급받았고, 안정적인 재정 자원 등을 사용했다. 농장 규모가 클수록 농산물 생산 비용은 생산 단위 당으로 감소된다.
농민 집단에서 많은 작물 면적은 고용 노동자, 가축, 농기구 등으로 계산된다. 농장 규모와 농민이 경작하는 면적이 커지면서, 농업에서는 매우 중요한 지출 항목으로 노동력 유지에 대한 지출이 감소하거나, 넓은 면적일수록, 경작 면적율이 비교적 작은 집단 간 지출 작물 간에도 거의 절반 가량으로 떨어진다. 더 큰 생산력을 가질수록 대농장은 안정적이며, 노보로시야 뿐만 아니라, 러시아 중부 지방에서도 해당했다. 작물 재배에서 상품 생산은 깊이 침투해서 관여하게 된다. 농업인들 사이에서 경쟁은 심화되고, 토지 및 경제적 자립에 대한 투쟁도 치열해진다. 따라서 부농들로부터 중농 및 빈농들이 축출된다. 농업 기술 발전에 따라 농업 체계, 밭 경작 체계가 나타나지만, 곡물 재배 및 조방적 경작에서 단순 경작 면적이 확대되며, 단위 경적 면적 당 노동자, 가축 등의 수가 감소하지만, 축산 도륙, 작물 재배 산업에서는 더욱 집약적인 농업 기술을 도입해서, 단위 경작 면적 당 더 많은 노동자들이 작물 뿌리 재배, 가축 확보, 사료용 풀 재배 등을 갖춘다. 부농은 임금 노동을 고용하면서 타우리다 지역 세 군에 대한 자료가 존재한다. 전체 농민, 농장 수에서 노동자를 고용하는 농장 비율을 취할 때 토지 경작으로부터 고용 노동에 의존하는 농민 전체와 비교해보면 미미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100명 중 2-3명, 최대 5명 정도만, 농민 자본주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농장 고용 노동자들의 토지 수로, 농민 농장 총 수와 비교했을 때, 차라리 러시아 산업 부문에서 자본주의를 제거할 수도 있다. 임금 노동자 부문에서 산업에 종사한 가족은 러시아 산업 부문에서 종사하는 전체 가족 수 대비를 퍼센트(%)로 표기했다. 노동자를 고용하는 농장 수를 구하려면, 단순 노동력 판매에 의존하지 않고, 농업에만 의존하는 농장 수와 비교하는 쪽이 더 낫다. 왜냐하면, 러시아에서는 소농 비중이 크게 차지했기 때문이다. 노동자를 고용하는 농장 비율로는 전체 생산량에서도 절반 이상을 차지했으며, 판매용 곡물을 대량 생산하는 부농층에서는 34-36% 정도, 매우 높은 수준으로 나타났다. 경작에서 나타나는 여러 특수성이 아니라, 전체 경작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농노, 정규직, 일용직 고용이 농업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소작농에 따른 경제적인 지위 간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마을 농장 노동자, 외부 활동에 따른 농업에 종사했기 때문이다. 드네프르 군(위예즈드)에서는 소농층이 가구 전체 40%를 차지했고, 경운기 같은 생산 수단을 갖지 않은 기구는 전체 가구 수에서 39%를 차지했다. 농촌 지역에서 무산자들은 노동력 판매 외에도, 할당지를 임대해서 소득을 벌 수밖에는 없었다. 1884-1886년 사이, 타우리다 구베르니아 세 군에서 임대 토지는 전체 농민 경작지에 25%에 달했다. 중산층 지식인들에게 임대된 토지를 제외하고, 1/3은 토지를 임대했고, 농촌 무산자들의 토지는 정작 농민 부르주아 계급들이 임대했다. 대부분 할당 토지들은 러시아 남부 농민들 사이에서도 폭 넓은 투기가 목적이었다. 토지는 약속된 어음 및 구권 관계로부터 대출 담보로 주로 사용됐고, 때로는 더 장기적이었다. 농민 부유층은 상인 자본과 고리대금업자를 대표하는 자본가였다. 따라서 '쿨라크' 같은 고리대금업자는 '진취적인' 농민이 아니었다. 농민 부유층은 상인 자본, 산업 자본에 대한 실마리를 가졌다. 자본의 모습이 이뤄지면서부터 주변 환경과 문화에 따라서도 달라지게 됐다. 가구 당 10-25데소, 평균 16.4데소 정도 소득을 가졌었던 중산층들은 과도기적이고, 191루블 정도 수입을 농업에서 얻었고, 평균 타우리디안 사람들의 200-250루블인 연간 지출보다는 다소 낮았다. 가계 당 평균 3.2마리 정도 가축을 길렀고, 당시로는 4마리 정도는 필요했다. 중산층 농장은 매우 불안정했으며, 멍에 인력을 고용한다거나 투입해서, 토지를 경작했다. 따라서 생산성이 매우 낮았다. 또한 116가구 정도는 쟁기 도구마저 없었고, 고용하는 일보다 노동을 제공하는 일이 더 잦았다. 대부분 지역에서는 배정지에 따른 분배가 매우 균등했지만, 상층에서 하층을 몰아내는 일이 잦았다. 강제 소유 토지에서 자유 토지를 매수하거나, 임대 토지로 넘어가면 토지 집중도는 농민이 사용하던 총 토지 분배가 배정지 분배와 상당하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충산층은 후순위로 밀려났고, 배정지(46%), 사용 토지(41%)로, 부층은 보유 토지를 확대해서, 배정지(28%), 사용 토지(41%), 빈층들은 배정지(25%), 사용 토지(12%)로 경작에서 밀려났다. 소농층에서 할당지 역할은 감소됐다. 토지 임대에서 전체 농경지 면적은 토지 매입 및 임대가 더 우세했다. 토지에 묶인 농민들은 토지 소유권에 따른 세금 부과 등, 자본주의가 농업에 더욱 깊숙하게 침투하면서 파괴됐다. 특히 토지 임대에서 농민층 분열은 두드러졌다. 토지 임대에 의존하는 비율은, 36-68%, 40-70%, 30-66%으로 나타났고, 가구 당 임대 토지는 크기가 작았다. 탐보프 통계에서는, 작은 구역을 소유한 농민은 큰 구역을 소유한 농민보다 더 많은 토지를 임대했다. 그렇다면 평균 수치에 따르면, 토지를 임차한 사람들은 56%로, 토지 부유층에게 집중된 임대 토지 과점 현상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임대 가구 당 평균 임대 토지 면적을 계산하는 터무니 없다. 임차 가구 당도 아니고, 기존 가구 당으로 계산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카리셰프는 「비할당 토지 임대」에서 농민들을 모아 15루블이라는 가격에, 토지 2데시아틴을 받았고, 파산 직전에서는 적정 토지 면적까지 더해서 48데시아틴을 받았으며, 데시아틴 당 3.55루블이라는 비교적 낮은 가격에 토지를 도매로부터 매수했다. 전체 마을 공동체 수치로도, 할당 농민들로 분류해보면, 공동체 자체에 대한 정확한 지적에 대해 언급했다. 임대 토지는 농민 부유층 계급의 수중에서 개인 임대로만 국한됐지만, 마을 공동체에서도 임대가 적용되지 않을 거라 여긴다면 큰 오산이다. 임대 토지도 자본에 따라 분배됐고, 농민 잡단 관계로부터 공동체에 따른 토지 임대를 하는 곳도 늘 일정했다. 카리셰프는 공동체와 개인 간 '임대 갈등'으로 나타냈지만, 오히려 마을 공동체 임대는 노동 원칙, 공동체 구성원 간 균등한 임대 토지에 따른 분배 원칙이 특징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인민주의자들도 이와 같이 주장했고 따라서 오류가 더 많았다. 카리셰프는 젬스트보 통계 조사 결과를 요약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소규모 부유층 농민 집단 수중으로, 임대 토지가 더 집중된다는 젬스트보 통계를 신중하게 다루지도 않았다. 타우리다 지역에서도 농민 공동체로부터 임대하던 국유 토지를 분배했고, 노동 원칙, 균등 분배 원칙에 대한 청사진을 보여줬다. 남부 농민 농업에 따른 젬스트보 통계 자료는 농민의 완전한 분화 요인인, 농민 부유층들이 시골에서 완전한 지배를 장악했다. 마을 공동체에서 기업가 농민들은 늘 최고의 토지를 차지해갔다. 따라서 카리셰프만이 아니라, 포스트니코프의 작업은 중첩적인 성격을 가졌다. 그러한 작업은 도시 지식인들이 농민 공동체를 통합적이고, 동질적인 경향에서만 벗어나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론이 전무했던 저자는 통계를 전혀 처리하거나, 평가하지도 못했고, 그저 조치만으로 통계를 본다거나, 농업, 수공예, 공장 공동체 제한, 명령, 관찰 등만 하면서 계획을 지어냈다. 인민주의자들은 포스트니코프 작업의 첫 긍정적인 점을 대놓고 무시했고, 두 번째 부분에만 집중했다. 정작 포스티니코프는 국내 자본주의 도입을 비난했고, 남부 러시아 농촌 지역에서도 자본주의 관계가 만연했지만, 관계가 널리 퍼쳤다는 자료를 피하기만 했다.
노보로시아 자료에서는 주로 타우리다 지역, 북부 본토 3개 군, 베르됭스크, 멜리토폴, 드네프르, 또는 후자군이다. 포스티니코프는 실제 토지에서 얻을 수 있는 금전적인 수입 규모 간 차이를 해명했다. 동일한 계산에서, 수확량으로 판매되는 곡물 간 가격을 가정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부농이 더 나은 수확량과 곡물을 확보했고, 더 큰 이윤으로 판매했다. 그렇다면 토지를 경작하지 않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상당 규모의 토지를 보유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바로 상인, 산업 시설 소유주 등도 포함됐기 때문이다. 멜리토폴 지역에서 발생한 통계적인 수익률을 확인했을 때, 젬스트보 통계로는 농민 농장 규모가 클수록, 주어진 경작지에서 사용된 도구, 노동자 및 짐끄는 가축 수도 줄어든다. 흑토 지대에서 농부 말 당 경작지가 5-7-8데살이었지만, 3포지 윤작법에 따르면 7-10데살이었다. 국내 지역 인구 일부에서 말 소유 감소는 짐 끄는 가축 수, 경작지 사이에서 일정한 비율로 반복됐다. 따라서 농민 몰락으로부터 농업 발전을 일으켰다. 사회 경제적으로도 자본주의 농업이 발전할 수 있던 까닭이다. 더불어 가금류, 경작지 사이에서 발생하는 일정한 비율의 반복도 농기구를 취득한 지주, 대규모 농작물의 재배자, 농민 부유층들로부터 달성됐다. 영국은 농업 자본주의가 전형적이었다. 농부, 40.8%는 고용 노동력을 전혀 고용하지 않았다. 68.1%는 2명 이하 노동자를 고용했다. 82%는 4명 이하 노동자를 고용했다. 이주, 거주 노동자를 비롯한 농업 무산층 대중들은 일당으로 고용됐다. 이들은 수 많은 마을 은행과 대출저축조합에 의존했다. 번영하는 농민에게는 실질적인 지원을 제공했고, 경제적으로 취약한 농민들은 정작 보증인을 찾을 수도 없었고, 심지어 대출마저 받을 수 없었다.
멜리토폴 지역에서는 집단에 속한 13,789 가구 가운데 4,218 가구만이 자신의 가축으로 땅을 경작했고, 나머지 9,201 가구는 멍에를 졌다. 드네프르 지역에서는 8,234 가구 가운데 4,029가구가 자신들의 가축으로 토지를 경작했고, 3,825가구는 멍에를 졌다. 인민주의자들은 농민층은 분열됐고, 농민 부유층들로부터 농장 협동 원칙들마저 흔들렸다는 점을 은폐해버렸다. 집단 별 토지 사용 수치로는, 할당 토지, 임대 토지, 매입 토지를 합산해서 임대 토지를 계산에서 제외했다. 멜리토폴, 베르됭스크 지방도 비슷했고, 포스트니코프는 부유층들의 상업적인 농업 및 토지 수요를 언급하면서, 불법화가 만연했던 농민 상을 지적했다. 베르너, 「타우리다 지역 편람, 1889」에서는 전체 농민 할당 규모에 따라 분류했고, 1-2명 노동자, 2-3마리 짐수레 가축을 가진 농민 집단을 주로 채택했다. 따라서 집단 범위 안에서 할당 규모가 커질수록, 임대 가구 수도 증가했고, 임대 토지 양은 감소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식은 아무런 증거도 없었다. 같은 수의 가축을 가진 농민만을 고려했으며, 극단적인 집단은 제외됐다. 가축 수가 같다면 경작지 면적도 같았으며, 할당량이 적을수록, 임대 토지 면적도 커졌다. 따라서 문제는 가축, 농기구 등 수가 다른 가구에서는 임대 토지가 어떤 식으로 분배했는지가 관건이었다. 그러나 노보러시아 지역에서는 농업, 농민 분화가 다른 지역보다 더 두드러진다는 점이 단지 특수성 때문은 아니다. 농촌 소부르주아지들은 대부르주아지들에게 늘 위협을 받았고, 농업 분야에서도 자본가들은 노동 생산력을 더욱 늘리고 했다. 18880년대 인구 조사는 주로 과세 목적으로 시행했고, 젬스트보 통계학자들이 통계 자료를 처리하는 방식도 오히려 매우 편향적이고, 잘못 분류했다. 세부 사항들이 있었음에도, 포스트니코프, 「남부 러시아 농민 농업」를 자세히 조사했을 때, 1861년에 들어서야 러시아에서 농노제가 폐지됐고, 농민 공동체에서는 주기적으로 농민들에게 배정지가 재분배됐다.
2-1-2. 사마라, 젬스트보 통계
사마라 지역, 노보우젠스크 지역에서 28,276세대 토지 소유 가구 남녀는 모두 164,146명이다. 이곳에서 농업 생산 집중도는 높았다. 공동 자본가는 전체 가구에서 1/4였고, 10마리 이상 가축을 기르는 가구 수는 농지 면적에서 36.5%를 소유했다. 빈농, 중농을 합한 75.3%라는 수치와 맞먹었다. 그러나 가구 당 15.9개의 농지라는 평균 수치는 거짓이다. 빈층에서는 자영농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개량된 농기계가 빈농에게는 전무했고, 중농은 미미한 숫자만 가졌다. 가축 밀도도 농지 면적 밀도보다 높다. 부농들은 대규모 자본주의적인 농경과 가축 사육을 결합시켰다. 일반 농민들은 토지를 소유한 농노이자 일용직 노동자였고, 주요 생계 수단은 노동력 판매였다. 지주들은 가끔 노동자들을 농장에 묶어둔 채로 임금을 삭감시키고 가축으로 지불하기도 했다. 농민 집단은 농장 규모만이 아니라, 농사 방식도 매우 달랐고, 상층 농민 중 40-60(%), 많은 비율로 여러 개량 농기구를 공급받았다. 상층은 전체 개량 농기구에서 81.9%, 중층은 38.2%를 보유했다. 나머지는 개량 농기구에서17%, 빈층은 37.1%를 보유했다. 따라서 총 5,724개 농기구 가운데 7개 정도였다. 가축을 적게 보유한 농민일수록, 부농보다 전혀 다른 농업 경제 체계로 운영했다. 빈농들은 밀을 파종하고자, 쟁기질도 매일 반복했다. 따라서 부농과 빈농 사이에는 곡물량에 따른 곡물질마저 빈농들이 훨씬 떨어졌고, 부농만 수확량이 더 많았다. 농민 부유층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집단 별 소유 및 사용 토지 수치에 따르면, 76가구 농민은 총 57.128데스의 매수 토지, 304,514데스의 임대 토지를 소유한다. 이 중에서 177,789데스는 5,602가구가 임대한 비할당 토지이다. 다른 마을 공동체에서 임대받은 할당 토지 가운데 47,494데스는 3,129가구를 소유했고, 마을 공동체로부터 임대받은 할당 토지 가운데 79,231데스는 7,092가구가 소유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매수 및 임대 토지가 매우 집중됐다. 총 매수 토지에서 9/10은 부유한 가구 수중이 1.8%였다. 모든 임대 토지 가운데 69.7%는 농민 자본가 수중에서 86.6%가 농민 상위층 수중에 있었다. 할당 토지 임대 및 수치를 비교해도, 토지는 농민 부유층 수중으로 전반적으로 넘어갔다. 토지가 상품으로 전환되면, 토지 도매 구매 가격은 저렴해지며, 임대된 비할당 토지에서 1데시아틴 가격을 결정하면, 하위 집단에서는 상위 집단으로 일정한 수치가 구해진다. 그러나 인민주의자들은 임대 토지 집중도를 무시했고, 특히 카리셰프는 「수확과 곡물 가격에 따른 특정 국민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서 곡물 가격이 하락하면 수확량이 증가하고, 임대료가 상승하면 기업가적인 임차인의 수요가 줄어들고, 소비 경제 대표들은 임대료를 인상한다고 자의적으로 결론지었다. 농민 부유층에서 곡물 가격이 하락해도 임대료를 인상하려 들며, 수확량이 증가하면 가격 하락을 상쇄했다. 농업에서는 기계 사용에 따른 농민 부유층 수중으로 집중됐다. 그러나 카리셰프는 농민 분화 연구가 아니라, 평균 농민으로 산정해서 자의적이고, 부정확한 전제를 제시했다. 부농들은 전체 농업 생산량에서 약 2/3를 차지했고, 주로 곡물 판매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판매용 곡물을 생산하지만, 정작 어려운 형편의 농민들은 추가 곡물을 더욱 구매하거나, 노동력을 판매한다.
인민주의자들의 주장과 국내 시장 형성 과정에 대한 여러 자료를 비교했을 때, 농민들이 번영할수록, 공장도 번창한다는 주장은 부의 사회적 형태에 대한 관심이 전무하다. 여기서 말하는 부란 생산물, 생산 수단, 노동력을 상품으로 전환할 때 창출된다. 인민주의자들은 곡물 판매에서 농민 농부 그 자신이 생산한다는 생각으로, 곡물을 운송하면서 철도 건설에서 농민들을 희생시켜야만 한다고 내세웠다. 자본가들도 공동체 구성원이면서도 농민들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공동 토지 소유권이 지배한 지역에서는 자본주의 원칙에 기반한 농업이 거의 없었고, 이전부터 공동체 유대감은 벌써 무너진지 오래였다.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자본주의 농업이 발전했고, 그들에게 공동체 유대감이란 노동자를 고용한 대규모 작물 재배 농장에 완전히 적응했기 때문이다. 농민 집단 간 관계에서 니콜라예프스키 지역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인구의 13.7%의 부유한 가구에서는 10마리 이상의 가축을 소유했고, 7.4%가 전체 가축의 27.6%와 임대 토지 42.6%를 소유했다. 인구의 19.7%를 차지한 빈곤 가구와 같은 가축이 아예 없거나, 한 마리만 소유한 29%는 가축의 7.2%와 임대 토지 3%만 소유했다. 「사마라 구베르니아 통합 보고서」에서는 농민 처지에 대한 설명이 잘 나타났다. 서부 지역에서는 토지가 부족한 농민들이 이주하거나, 농업 생산 분야에서 토지에 대한 투기꾼들이 등장해서 인구가 증가했다. 그러나 토지 형태가 해마다 복잡해지면서 가치가 상승했고, 토지는 상품화되어 큰 부와 동시에 파멸을 초래했다. 남부 상인과 농민 소유 농자, 일부 경작지에서는 3,000-6,000데시아틴을 경작하기도 드문 일이었다. 일부만 데시아틴에 따른 국유지를 임대했고, 8-10-15,000데시아틴의 토지를 경작했다. 사마라 지역, 농업 무산층 존재와 성장은 비교적 최근이었고, 판매용 곡물 생산 증가, 임대료 상승, 미개척지와 목초지 경작, 산림 개간 등이 있었다. 구베르니아 전체 무토지 가축 수로는 총 21,624 가구였고, 비농업 가구는 토지를 분배 받은 가구를 기준으로 33,772가구였다. 무마 가구와 일마 가구로는 모두 110,60가구였고, 남녀 총 60만 명으로 가구 당 5명과 소수 사람으로 계산됐다. 법적으로는 공유지를 소유하더라도, 무산층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실제로 일용직 노동자, 쟁기질꾼, 양치기, 추수꾼 등 대농장에서 1/2-1 데시아틴 정도를 경작하는 비슷한 노동자들도 있었다. 가족들은 거처로 남아 먹을 걸 마련하고자 할당량을 정했다. 가축을 보유하지도 않거나, 가축 한 마리를 소유한 농민도 무산층에 속했다. 분류표에 따라 포스트니코프도 같은 결론을 내렸고, 농민 최하층에서는 사회·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적도 있었다.「사마라 지역 통계 수익률, 놀보우센스크(1890), 니콜라예프스키(1889)」에서도 비슷한 자료가 있으며,「사마라 지역 종합 수익률」에서는 토지 할당 규모로 불만족스럽게 분류했다. 여기서 농민 대중에게 낡은 농기구를, 개량된 농기구로 교체하려는 운동으로 잘못된 결론을 내렸다. 해당 자료는 젬스트보 보고서에서 총 수치를 가져왔고, 정작 어떻게 농기구를 분배했는지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품 곡물 생산 비용을 낮추고자, 기계를 사용하던 자본주의 농부에 따른 발전은 조사원의 농민 대중 발전으로 잘못 변환되어 표기됐다. 또한 부농이 기계를 구입해서 모든 농민들이 사용하도록 분배했다는 거짓된 논평을 작성했다. 통계학자들은 노동력 판매를 농업 산업이라 불렀고, 정규직 및 일용직 노동자는 「사마라 구베르니아, 종합 수익 목록」, 산업 목록 부분에서 특히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당시에 농업 산업에 종사하던 남성들은 14,063명 가운데 농노 및 일용직 노동자(목동, 쟁기질꾼)이었다. 특히 「노보우젠스크 지역 종합 보고서」표에 따르면 지역 공동체 60%는 토지를 재분할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공동체의 13.8%만 그쳤다.
2-1-3. 사라토브, 젬스트보 통계
흑토 지대 중심이자 기름진 토양을 가진 곳은 사라토브 지역이었다. 카미신 지역에서는 농민들의 가축 보유 현황을 비교적 확실하게 분류했다. 해당 지역은 전체 40,157 가구, 남녀 인구 263,135명이었고, 작물 재배 면적은 435,945 데시아틴이었다. 평균 가구 당 10.8데시아틴 정도였다. 작물 재배 면적은 대작물 재배자 수중으로 집중됐고, 가구 1/5에 불과한 전체 인구에서 1/3인 부농은 전체 작물 재배 면적에서 53.3%로 절반 이상을 보유했고, 농업의 상업적 성격으로는 면적의 크기에 따라 가구 당 평균 27.6데시로 나타났다. 부농은 가구 당 14.6마리 정도 상당 수 가축을 소유했다. 해당 지역 농민의 가축 총 수, 3/5가 농민 부유층 수중으로 집중됐다. 도시 주위로는 최하층인 농촌 무산층은 박살난 수준이었다. 대부분의 인구 1/3을 차지한 가구 절반에도 못 미쳤지만, 전체 농경지에서 1/8에 불과했고, 전체 가축 수로도 훨씬 적은 11.8%를 차지했다. 주로 텃밭 소유 농장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산업 노동자 등이 분포했다. 경작 면적의 집중과 농업에서 상업적 성격이 강화되면서 농업은 자본주의적인 농업으로 전환됐다. 하위층에서 노동력을 판매했고, 상위층에서는 구매했다. P.N. 스크보르초프는 젬스트보 통계에 대해 '산업고용'이라는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했다고 지적했다. 농민들이 할당지 밖에서 종사한 모든 종류의 직업 가운데 산업이라는 범주가 속해졌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두 산업가들이었다. '할당지'에 따라 농민들의 직업과 외부 산업이 무차별적으로 할당됐고, 기존의 전통적이면서도 공식적인 관점들의 잔재로 머물렀다. 농노제에는 시대착오적인 생각도 있었다. 젬스트보 통계에서 나타난 거짓된 평균 농민에 대한 말과 농민들에 대한 차별화를 조장했고, 연구할 수 있는 여지마저 완전하게 배제해버렸다. 따라서 차별화가 잔존됐고, 유지됐다. 외부적인 작업에 의존한 농민들은 많은 곳에서, 특히 카미신 지역에서 '사르핀카' 산업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농민 농업에서 가계부의 수익 처리가 농민 산업이 경제 유형으로 분류되지 않았고, 거론된 산업가들 중에서 고용주와 임금 노동자가 분리되지 않았고, 더군다나 경제 통계마저 불만족스러웠다, 경제적 차등마저 없는 최소한의 경제적 유형이었다. 더욱 자세한 분류로는 임금 노동자를 고용하거나, 고용하지 않는 자영업자, 상인, 매수인, 가게 주인, 장인, 고객 맞춤 담당 산업가 등이었다. 더불어 산업을 노동력 판매로 간주하고자, 농민 산업가들 대부분은 대체로 임금 노동자들이었다. 임금 노동자를 구분할 수 있다면, 상층에서 산업가의 비율도 줄어들 수 있다. 하리조메노프는 임금 노동자와 관련된 자료를 제시했고, 일용직 노동을 위한 단기 고용은 이미 널리 퍼졌다. 또한 농장의 강점과 약점을 판단할 수 있는 특징적인 기준과 잘못된 주장에 따른 성격마저 드러났다. 당시에 서유럽이나, 러시아 현실을 고려해봤을 때, 농촌 부유층에게 일용직 노동자 고용은 매우 전형적인 특징이었다. 임대 토지 부문에서도 농민 부유층들의 수중으로 집중됐다. 사라토프 통계청에서 제시한 통합 표에서는 토지를 임대한 농민 수가 아니라, 임대된 토지 수만 보여줬고, 임대 가구 당이 아닌, 기존 가구 당 임대된 토지 양으로 파악했다. 따라서 부농일수록 토지를 더 많이 임대했고, 할당지도 더 잘 갖췄다. 부유층에서도 대부분의 중농들을 몰아내어, 농촌에서 할당지 역할은 양극단으로 감소했다.
카리셰프도 추가적인 토지 임대를 자세하게 조사했다. 카리셰프는 토지 임대가 임차인 번영에 의존하며, 다른 조건이 동일했을 때, 임대할 수 있는 토지를 둘러싼 경쟁들은 부유층들에게 더 유리하며, 비교적 부유한 가구일수록, 덜 부유한 가구는 뒷전으로 밀어낸다고 지적했다. 또한 임대 토지가 할당 규모에 따라 달라지며, 할당 분류가 부정확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토지 임대는 토지가 제대로 공급되거나, 제공되지 않는 집단에서 더 많이 이용했다. 반대로 토지가 잘 공급되거나, 제공되는 집단에서는 더 많은 토지를 임대하도록 허가했다. 경제적인 힘에 따르면, 부농들에게는 할당 토지가 더 잘 제공됐지만, 임대 토지를 차지할수록, 통계에서도 나타났다. 가계의 번영은 토지 임대에서 결정적이었고, 토지 할당 및 임대 조건 요인들도 변화했으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카리셰프는 산업적인 번영의 영향력을 충분히 조사했지만, 일관된 관점을 고수하지 않았고, 부정확하게 기술했다. 임차인에게도 토지 공급 정도는 토지 임대와 직접적으로 관련됐다. 그러나 카리셰프 조사는 일방적이었고, 부농들이 임대하던 토지 점유하는 방식을 전체적으로 평가하지 못했다. 카리셰프는 비할당 임대 연구에서 임차인 농장을 더 이상 고려하지 않았고, 토지 임대에 대한 젬스트보 통계를 요약하는데 그쳤다. 더군다나 공식적인 연구 방법으로는 토지 임대와 상업적 성격에 따른 번영을 문제로 바라보지도, 해결하지도 못했다. 카미산 지역에서는 동일한 자료를 보유했지만, 토지 임대료에서 절대 수치로만 재현시키고, 한 가구당 평균적인 임대 토지 면적으로 계산했다. 부농들의 수중에서 토지 임대료는 집중됐고, 토지 임대료에 따른 산업적인 특성, 최하층 농민들에 따라 상관된 토지 임대의 성격을 모두 간과했다. 카리셰프는 젬스트보 통계가 인민주의 토지 개념을 반박하면서도, 부농들로부터 빈농들이 추출된다고 지적했지만, 모든 부분에서 제대로 연구하지도 못했으며, 부정확한 설명과 노동 원칙만 반복했다. 농민들 사이에서는 경제적 불화로 나타난 갈등이 있었지만, 인민주의자들에게는 이단일 뿐이었다.
카리셰프는 인민주의자들을 반박했고, 교정했다. N. 카블로코프는 토지 임대의 많은 형태에 대해, '농민은 자신들의 경작으로부터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만큼, 충분한 토지를 가지고 나면 어떠한 토지도 임대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상업 작물 재배에도 종사한 부농들은 토지를 임대하고, 점유하는 과정 속에서 기업가적인 활동은 전무하다고 부인했다. 인민 생산론은 증명되지도 않았지만, 법적으로 규정된 이론일 뿐이며, 특히 흐발른스크 지역에서는 젬스트보 통계표로부터, 가축 수가 동일하다면, 할당량이 적을수록 부족분을 임대로 보충했다. 그렇다면 농민들이 가축 소유에서 동일한 조건 아래 가계에서도 충분한 일꾼들이 있다면, 할당 받는 토지가 적을수록 임대 받는 토지가 더욱 많아진다. 그러나 동일한 가축을 소유한 경우로, 가계가 소유한 토지가 적을수록 더 많은 임대료를 받는다는 건 분명하다. 왜냐하면, 산업적인 번영을 평등하게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충분한 토지를 가진 농민은 토지를 빌리지 않는다는 주장은 증명되지도 않았고, 젬스트보 통계로부터 인용한 수치에 따른 무지를 드러낼 뿐이다. 농민들이 소유한 배정 토지 양을 비교했을 때, 가난한 사람들이 토지를 임대해서 산업적인 번영으로 임대한 토지를 빼앗는 역할이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주로 부농들에게 임대됐다. 카미신 지역에서도 임대 토지 분배는 짐 수레 가축 수에 따른 농민들을 골라내서, 일정한 배정에 따라 배분하고, 일하는 사람 수에 따라서 하위 구분으로 또 분배하기 때문에 농민들이 적은 토지를 가질수록 더 많이 임대시키는 방법이 부농 집단의 소멸로 이어진다는 인민주의자들의 주장은 터무니가 없다.
L. 마레스, 「수확과 곡물가격」에 따르면 가구 당 농민들이 임대받은 토지를 계산했다. 그러나 인민주의자들의 '평균'에 대한 아주 작은 사례일 뿐이었다. 다른 멜리토폴 지역에서도 임대 가구 당 임대 토지 양에 따라 일하는 남성들이 더 이상 없는 가구로는 1.6데시(dess)로, 일하는 남성 한 명이 있던 가구는, 4.4데시, 두 명이 있는 가구는 8.3데시였고, 세 명이 있는 가구는 14데시라고 표기했지만, 정작 대략 1인당 임대 토지 분포도는 동일했다. 마레스는 V. 포스트니코프 저작과 젬스트보 초록에서 경제적인 역량이 다른 가구 집단의 임대 토지에서 실제 분배를 살펴볼 필요가 없다고 소홀하게 생각했다. 남성 노동자가 한 명인 가구 집단에서는 임대 가구 당 임대 토지 평균 수치로부터 4.4데시, 5-10데시를 경작했고, 2-3마리 가축을 기르는 가구 집단에서는 4-50데시 이상의 토지를 경작했고, 4마리 이상 가축을 기르는 가구 집단에서는 38데시를 합산했다. 특히「멜라토폴 지역」, 빈부격차에 따른 소득 산정을 더한 합계를 추가한 항목 수로 나누면, '균등한 분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멜리토폴 지역에서는 전체 가구 21%, 25데시 이상 작물을 재배하는 전체 농민의 29.5%가 부유층 농민들이었고, 토지 할당과 매입 토지를 제공받았으며, 전체 임대 경작지로는 66.3%를 차지했다. 반면에 전체 가구 40%, 10데시 이하 작물을 재배하던 전체 농민의 30.1%였던 빈곤층들은 토지 할당과 매입 토지를 제공받았지만, 전체 임대 경작지에 따른 토지 비율은 5.6%에 그쳤다. 1인 당 균등 분배 기준이었지만 결과가 나타났다. 마레스는 농민 토지 임대에 대한 모든 계산에서 할당 토지를 제공 받는 임대 가구가 주로 열악한 두 집단에 속하며, 임대 인구 가운데 1인당 임대 토지가 균등하다고만 끝맺었고, 토지 임대에서 농민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비교적 좋은 환경을 누리는 집단으로 이동할 수 있다고 섣부르게 판단했다. 그래서 마레스의 주장은 허점과 모순이 상당했다. 마레스는 경제 생활 면에서는 불평등을 다루면서도, 할당 토지가 아닌 가구 분류를 위한 경제 지표 통계만 사용했고, 인민주의자들의 근거 없는 주장을 똑같이 지적하고 말았다.
카미신 지역, 사라토프 현와 다른 지역을 비교했을 때, 농민 집단 간 비율은 대부분 모든 지역에서도 동일했고, 중산층과 부유층이 섞였던 볼스크, 쿠즈네츠크, 발라쇼프, 세르도프스크와 같은 자료도 충분히 분석했다. 부농들이 빈농들을 몰아낸 모습은 도처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특히 카미신 지역에서는 부농들이 다른 지역보다 재산과 수가 더 많았다. 지역에 따른 5개 군 지역에서 가구 비율은 가축 보유량에 따른 가축이 없는 가구는 25.3%, 가축 한 마리의 가구는 25.5%, 가축이 두 마리의 가구는 20%, 가축이 세 마리의 가구는 10.8%, 가축이 네 마리 이상인 가구로는 18.4%였다. 반면에, 카미신 지역에서는 부유층들의 비율이 더 컸고, 중산층과 합쳤을 때도, 가축 2마리 이상 있는 가구는 부농들이 훨씬 더 부유했다. 카미신에서는 토지와 자원이 풍부했기 때문에, 등록된 남성 1인 당 7.1데시를 할당받았고, 지역에 따른 5.3데시와 비교했을 때, 비교적 높은 편이었다. 따라서 농민은 토지가 많을수록 농촌 지역 사회에서도, 농민 부유층 수에 따라 부를 더 많이 가져갈 수 있었다. 따라서 사라토프 주 자료에서 농민 가구 분류를 다룰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는 할당에 따른 분류를 일절 거부하며, 가축과 경작 면적에 따른 경제력 분류만을 사용했다. 젬스트보 통계에서는 이미 할당 분류가 만연했고, 이를 옹호하는 주장들도 많았다. 농업 농민들을 자세하게 연구하려면, 토지 분류가 필수였다. 러시아 생활에서도 근본적인 특징으로는 할당 토지 소유권에서 비자유적인 성격, 법적인 강제력으로부터 평등주의 성격을 띠며, 할당 토지 매매는 극도로 제한되기 때문에, 농업 사회에서 농민 분화는 법적인 제약에서 벗어났다. 농민을 할당 분류로 묶게 되면, 부농과 빈농을 구분하지 못하며, 얻은 평균값은 농촌 사회에서도 존재하는 무산층과 부유층의 차별화를 순전히 모호하게 만들었다.
사라토프 통계학자들은 무의미한 할당 분류를 채택했고, 계산 오류를 범했다. 카미신 지역에서 비배정 농민 범주를 보더라도, 작물 아래 면적을 무시하고는 빈층 범주로 할당시켰다. 작물 아래에서 평균 면적은 가구 당 2.9데시였지만, 평균에 관한 도출로는 대규모 작물 재배자 기준으로 5마리 이상 가축을 기르던 집단에서 가구 당 18데시로, 가구 집단으로는 전체 범주로는 약 1/8을 이뤘지만, 작물 아래 범주 면적에서는 약 절반만을 소유했으며, 가구 당 0.2데시를 가진 가난한 무마 농민과 합쳐졌다. 농장 노동자를 고용하던 가구에서도 범주는 모두 77개였지만, 2.5%였다. 그러나 77개 가운데 60개는 가구 당 경작 면적인 18데시인 최상위 집단에 속했다. 같은 집단에서, 농장 노동자를 고용하던 가구로는 24.5%를 차지했다. 따라서 농민 구분을 더욱 모호하게 만들었고, 재산 없는 농민마저 실제 현실보다 더 좋게 묘사하는 속임수를 썼다. 여기다 부농까지 더하고는 평균값에 그대로 적용시켜 반대로, 부농들은 힘이 약하다고 묘사했다. 대규모 텃밭을 가진 농민 범주를 대다수 부농층뿐만이 아니라, 빈농층까지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할당 분류에서 가축 수, 경작 면적 등에 따른 경제적 힘의 지표로는 텃밭의 규모가 증가하면서 늘 규칙적이라고 주장했지만, 텃밭은 농민층 복지에서도 주요한 요인이었고, 농민들은 대규모 토지 소유주에 따른 지역에서도 늘 농민 부유층들이 대다수였고, 따라서 합산한 통계값과 분포로는 전체 농민층에서도 토지 소유 규모에 따른 평균값이 의도적으로 높아졌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농촌 부유층과 농촌 무산층이 결합해서 계산한 방식으로 합당하다고 추론할 수 있는 근거가 전무하다는 점이다. 특히 농가 통계를 쳬계화할 때는 특정 지역 구획에 따른 분류로만 국한시켜서도 안 된다. 경제 통계는 반드시 농장 규모와 유형을 기준으로 측정하고, 분류해야만 한다. 그리고 유형을 구분하는 지표로 지역적인 조건들과 농업 형태에 따라서 현실적으로 적용해야만 한다. '조' 단위로 곡물 농사를 다룰 때는 작물 재배 면적이나, 가마우지 수에 따라서도 분류를 제한했고, 다른 조건으로는 산업 작물 재배 면적, 농산물에 따른 기술적 가공, 뿌리 작물 재배 또는 가축 사료용 식물 재배, 낙농업, 채소 재배 등을 고려한다. 농업과 산업 활동을 대규모로 결합할 때는 농업의 규모와 유형, 산업의 규모와 유형을 따로 구분해서 결합한다. 농가 소득을 산정하는 방법은 특수한 문제가 아니라, 젬스트보 통계에서도 충분히 다룰 수 있는 본질적인 문제였다. 가계부 보고서의 완성도와 수집 기법도 당시로는 매우 높은 수준에 도달했지만, 막대한 분량의 자료 정보가 불만족스럽게 요약되거나, 손실되고 말았다. 조사자는 단지 젬스트보 통계 자료를 미르 마을 공동체, 볼로스트 행정 구역, 농민 유형, 배정 규모 등을 다루는 평균 수치로만 활용하는 제약이 뒷따랐다. 따라서 농민 통계로부터 측정된 할당 분류에 따른 평균값의 결과가 완전히 거짓이다.
2-1-4. 페름(Perm), 젬스트보 통계
페름 주 크라스노우핌스크 지역에서는 해당 지역 분류로는 농업 규모에 따라 좌우됐다. 크라스노우핌스크 지역, 농업 부문은 총 23,574가구 세대였고, 남녀 인구로는 129,439명이었다. 농경지 면적은 상당히 작았고, 집단 간 비율은 동일했다. 소수 부유한 농민 집단으로부터 소유한 농경지와 가축 집중도는 동일했고, 소유한 토지는 실제 경제적으로 사용된 토지 비율은 지역에서도 동일했다. 부농들은 토지를 공급받았고, 임대 토지를 똑같이 빼앗고는 빈민들에게서 부농 할당지를 임대 형태로 이전시켜, 할당지 역할이 농촌 양극화에 따라 서로 다른 두 가지 방향으로 축소시킨 일도 일어났다. 농민 최상층이 임대 토지를 대부분 소유한 경우로, 인민주의 경제학자들의 토지 임대에 대한 반대 견해와는 다르게 매우 산업적이고, 기업적인 성격을 띠었다. 해당 지역과 관련해서, 사라토프 통계학자들은 일용직 노동자 고용에서 나타난 농장의 강점과 약점이 특징적인 지표가 아니라는 견해를 반박했다. 오히려 농민 부르주아인 부유층들의 특징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형태로부터 형성된 일용직 고용에서 부농들은 가족 내에서도 매우 잘 일했고, 경제력도 상승하면서, 노동자를 고용하는 농민 비율도 증가했다. 따라서 가족 협동이 자본주의적 협동에서도 기반이 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일용직 노동자를 고용한 농장 수로는 계절 노동자를 고용한 농장 수에서 평균 2.5배임을 알 수 있다. 비록 수확을 위한 일용직 노동자 고용일 뿐이며, 통계학자들은 일용직 노동자를 고용하는 농장 총 수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상위 3개 집단 7,679가구 가운데 2,190 가구만 농장 노동자를 고용했지만, 부농이 대다수였던 4,017가구에서는 수확을 위해 일용직 노동자를 고용했다. 일용직 노동자 고용은 페름 지역 내에서만 국한되지는 않았고, 부농 집단에서는 전체 소유주 2-6%, 9%가 농장 노동자를 고용했다. 부유층 농민 가구 대다수는 어떤 형태로든 노동자를 고용했다. 정규직 농장 노동자와 일용직 노동자 집단은 부농이 존재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일용직 노동자를 고용한 농장 수와 정규직 농장 노동자를 고용하는 수의 비율이 하위 농민 집단에서 상위 농민 집단으로 갈수록 줄어들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하위 집단에서 일용직 노동자를 고용하는 농장 수가 정규직 농장 노동자를 고용하는 농장 수보다 몇 배나 더 많았다. 반대로, 상위 집단에서는 정규직 농장 노동자를 고용한 농장 수가 일용직 노동자를 고용하는 농민 수보다 더 많기도 했다. 상위 집단 농민층에서는 노동자를 고용하는 농장, 임금 노동에서 정규직 고용에 기반한 농장이 형성됐다. 임금 노동은 계절에 따라 더욱 균등하게 분배됐고, 더 많은 비용과 번거로운 일로 인해 일용직 노동자 고용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됐다. 부농과 중농이 결합된 엘라부 지역에서는 고용 노동에 대한 수익을 살펴봤다. 빈농과 부농이 사용한 농업 체계와 방법은 근본적으로 매우 달랐다. 왜냐하면, 부농들은 대부분 농민 소유 가축을 손아귀에 쥐었고, 농장 개선 면에서도 노동력을 투자할 기회가 더 많았다. V.V. 보론초프, 「농민 농업에서 발전 추세」에서도 소개됐지만, 당시 러시아에서는 대대적인 농민 개혁 뒤로, 농민들은 가축들이 없는 가구 집단들을 알아서 만들었고, 토양에다 거름을 주는 관행를 도입해서, 당시로는 농민들의 효율을 높였다. 여기서 말했던 발전 추세란 단지 농촌 사회에서 부유층의 발전만을 나타냈을 뿐이었다. 개량된 농기구 분포도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났고, 페름 통계 표에서도 자세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그러나 페름 통계는 농업 부문 전체에서 산정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23,574 가구 가운데 15,076 가구로 해당하는 제 3,4,5 구역에 대해서만 수집됐다는 한계를 보였다. 개량된 농기구로는 풍로기 1,049대, 종자 선별기 225대, 탈곡기는 354대로, 총 1,628대였다. 농민들은 모두 농기구를 사용한다는 바실리 보로초프의 인민주의적인 주장을 잘 보여주는 예시일 뿐이었다.
산업 자료에서 추출한 주요한 산업 유형
1. 농민들의 농촌 부유층으로 상업 및 산업 시설을 소유한 전환
2. 농민들의 농촌 무산층으로 노동력 판매, 농업 산업 분야 진출
또한 정반대되는 산업가 유형들도 따로 추출했다. 농작물 재배 면적에 따른 분포도와 노동자 고용을 보여주는 통계 자료를 비교했을 때, 농민층들의 차별화가 곧 자본주의를 위한 국내 시장을 창출했다. 많은 유형의 직업들에서도 단지 산업이나, 고용이라는 이름만으로 묶고는, 농업과 산업의 결합을 획일적이고, 동일한 본질로 묘사해서 얼마나 자본주의를 배제시키고, 심각하게 왜곡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2-1-5. 오렐(Orel), 젬스트보 통계
옐츠(Yelets), 투르크셰브스크(Trubchevsk) 지역 집단 간에 일반적인 관계는 동일했다. 임대 토지는 부유층 수중으로 집중됐고, 빈농으로부터 토지가 양도되는 등, 고용 노동, 산업, 농업에서도 발전 추세와 관련한 집단 관계도 엇비슷했다. 오렐 지역에서도 농민들은 두 가지 정반대 유형으로 분화됐다. 토지 포기 및 노동력 매각에 따른 농촌 무산층과 토지 매수, 상당한 규모 임대, 할당지 임대, 농업 방법 개선, 정규직 농장 노동자 및 일용직 노동자 고용, 상업 및 산업 기업과 농업의 결합 등에 따른 농촌 부유층으로 분화됐다. 농민들의 농업 규모는 훨씬 작았고, 특히 대규모 작물 지배자가 훨씬 적었다. 군 지역으로 판단했을 때, 농민 분화는 더 미약했다. 농민층 가운데 농촌 무산층으로 전환됐고, 농촌 부유층 집단을 생기도록 한다는 점도 볼 수 있었다. 특히 시골 모습에서 훨씬 두드러졌다. 농업 농민들로 한정된 차별화에 따라, 폭 넓게 가족의 40%가 산업으로 발전했다. 산업가로는 대다수 임금 노동자 외에도, 소수 상인, 매수자, 기업가, 자영주 등이 포함됐다. 농민들의 차별화는 시장과 밀접했지만, 지역 농업 부분에서 조사한 자료는 없었다. 상업적인 시장에서 경작은 판매용 곡물 생산을 위한 경작 면적 확장이 아닌, 대마 생산을 위해 개발됐다. 상업적인 활동들이 매우 많은 작물과 관련해서 많은 집단 사이에서는 농업을 특정할 수 있는 측면이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았다.「트르부체프스크 지역 회보」에 따르면, 금전적인 소득에 따른 대마 재배는 농민 소득에서도 주요한 원천이었고, 마을과 다른 많은 곳에서 농민들은 주로 대마 재배에 주의를 기울였다. 주로 모든 비료는 대마밭에 쓰였다. 대마를 담보로 대출이 이뤄졌고, 부채를 대마로 갚았기 때문이다. 대마밭에 비료를 주고자, 부농들은 빈농들에게 비료를 샀다. 대마밭은 마을 공동체 안팎에서도 임대됐고, 대마 가공은 주요 산업 시설들의 일부로도 채워졌다. 지역 농업에서도 주요한 상업 생산물에 대한 자료를 전혀 제공하지 않는 차별화된 그림은 너무나 분명하고, 또 불완전할 뿐이었다. 특히 트루브쳬프스크 지역에 대한 통계 자료에서는 교회 마을 공동체에 대한 자료가 없었다. 따라서 토지 임대에 대한 공동 자료를 수집해서, 배정된 토지와 배정되지 않은 임대 토지를 합산했다. 배정된 토지 전체를 임대하는 가구 수로부터 대략적으로 제시된 임대된 토지 양으로 결정했다. 얻은 수치로 각 집단에서 사용 중이던 토지 양은 배정된 토지 + 구매된 토지 + 임대된 토지 -임대한 토지를 결정하는 기초였다. 여기서도 부농은 빈농보다 가축 한 마리 당 두 배나 많은 분뇨를 얻는다고 명시했다. 가구 당 7.4마리 가축이 있는 경우로는 가축 당 391푸드였고, 가구 당 2.8마리 가축이 있는 경우로는 가축 당 208푸드였다. 그러나 할당 분류로부터 도출된 결론이었고, 실제로 농민층에 있어 차별화에 대한 깊이를 더욱 모호하게 만들었다. 빈농들은 주로 짚과 분뇨를 연료로 사용하거나, 판매해야만 했다. 오직 농민 부유층만이 가축 한 마리 당 일반적인 분뇨 양인 400푸드를 확보했다. 그리고 V.V. 보론초프는 말 소유 감소에 따른 가축 수, 분뇨 양 사이에서도 일반적인 비율로 충분히 회복시킬 수 있다고만 내세웠다.
2-1-6. 보로네즈(Voronezh), 젬스트보 통계
보로네즈 주는 비교적 매우 완전한 자료와 풍부한 분류를 명시했다. 여러 군에서도 가축, 가족 노동자, 산업 노동자, 농장 노동자에 따른 세부적인 부류도 있었다. 군 단위에 따른 많은 분류가 제시됐지만, 농장 노동자를 제공하는 농장 집단에서는 농산 무산층 전체를 포괄하지 않았다. 일용직 노동자, 미숙련 노동자, 공장 노동자, 건설 노동자, 하인 등 노동력을 제공하는 농장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농장 노동자는 농민들이 제공하는 임금 노동자의 일부일 뿐이었다. 농장 노동자를 고용하는 농장을 포함하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불완전했다. 중립 집단에서는 각 지역에 따른 수만 가지를 묶어내서, 가축을 소유하지 않은 수 천 명의 농민, 가축을 많이 소유한 농민들, 토지를 임대하는 농민, 경작자와 비경작자, 임금 노동자, 소수 고용주 등을 합산해서 계산했다. 전체 중립 집단에서도 일반적인 평균값은 토지 없는 가구 수, 3-4데시를 소유한 가구를 합산해서 얻어냈다. 가구 당 배정지와 구입한 토지 전체 및 25-50데시아틴 이상의 배정지를 소유하거나, 몇 십-백 데시아틴의 토지를 추가로 구매한 가구 수에 따른 가족 당 0.8-2.7마리 가축을 보유한 가구, 12-21마리 가축을 보유한 가구를 합산했다. 그러나 합산된 평균값만으로는 농민들의 차별화 요인을 충분히 설명할 수는 없었고, 농경 규모에 따른 근접한 분류로는 역마차를 채택했다. 관련된 네 가지 보고서에서 젬랸스크, 자돈스크, 니즈네데비츠크, 코로토야크 군이 있었으며, 주로 자돈스크를 채택했다. 다른 군들에 대해서는 매매 토지 및 임대에 대한 별도의 보고서가 아예 없었다. 따로 조사한 자돈스크 지역에서 15,704가구, 남녀 인구는 106,288명, 배정 토지는 135,656데시, 매수 토지는 2,882데시, 임대된 토지는 24,046데시, 임대한 토지는 6.482데시였다. 집단 간 관계로는 시내권, 군 단위, 두 곳에서 비슷하게 나타났으며, 매수 토지와 임대 토지를 집중했다. 토지를 임대한 빈농으로부터 임대 토지를 임대 농민, 부농에게 이전시켰지만, 정작 부농의 중요성은 훨씬 작았고, 소작농 규모 또한 미미했기 때문에, 지역 농민들은 토지를 경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산업가에 속한다는 의문이 생겼났다. 개량된 도구에 따른 반대 유형으로는 노동력 판매, 상업 및 산업 기업들의 분포로부터 검토한 자료와 동일했다.
산업에 종사하던 가구에서 큰 비율로는, 곡물 판매 농장보다도 곡물 구매가 더 우세했으며, 산업에서 얻는 현금 소득은 농업 분야에서 얻을 수 있는 현금 소득보다도 우세했다. 그리고 군 단위의 농업이 아닌 산업으로 간주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 젬랸스크, 자돈스크, 니즈네데비츠크, 코로토야크 군「농민 토지 소유권에 대한 평가 수익」(1899), 해당 보고서에서는 현지 및 자택을 떠나 노동하는 산업가들의 총 22개 거래 목록이 포함됐다. 할당 집단으로 분류했으며, 각 거래에 따른 수입 규모를 파악했다. 농촌 산업에서는 압도적 다수가 고용 노동을 제공했다. 자돈스크 지역에서는 산업가 24,134명 가운데 14,135명은 농장 노동자, 짐꾼, 양치기, 비숙련 노동자였으며, 1,813명은 건설 노동자였고, 298명은 도시, 공장 및 기타 노동자로, 446명은 개인 서비스업에 종사했으며, 301명은 노숙자 및 거지 등이었다. 산업가의 압도적 다수는 농촌 무산층이었고, 토지를 소유한 임금 노동자로는 농촌 및 산업 고용주들에게 노동력을 판매했다. 지역으로는 특정 군 단위에서, 농민 집단 간 비교로 살펴보자면, 거대한 농경지를 가진 토지는 풍부한 대초원 지역이었고, 소규모 농민 농장을 가진 토지가 매우 부족한 지역에서는 차별화된 모습이 전형적으로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농업 조건에 따른 극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농민 상위와 하위 집단 간 비율은 동일했다. 각 지역을 비교했을 때, 어떤 지역에서는 농민들 사이에서 농촌 기업가를 이루거나, 다른 지역에서는 농촌 무산층을 이뤘다. 다른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국내에서 일어난 농민층 차별화 과정을 따라 농촌 무산층은 농촌 기업가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수로 소규모 경작자를 포괄했다. 수적으로 적은 상위 농민 집단에서는 정반대 양상을 보였는데, 구매보다 곡물 판매가 우세했으며, 토지에서는 현금 소득을 얻거나, 높은 비율로는 농민들은 농장 노동자를 고용해서, 개량된 농기구를 소유했고, 상업 및 산업 시설을 소유했다. 농민 부유층은 규모가 작았어도, 전형적인 특징 때문에 자본주의 상업 및 농업이 발전했다. 젬스트보 통계에서 산업이라는 용어는 크게 여섯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었다. 특히 4개 군 총 92,889명의 산업가 가운데 59,277명이 차지한 농업 산업에서 압도적 다수는 임금 노동자였으며, 과일 재배자, 채소 재배자, 양봉가, 마부 등과 같은 농장 소유주, 20,784명을 차지한 장인 및 수공예 분야에서 장인들 가운데 매우 많은 임금 노동자, 건설 노동자 등은 8,000명 이상으로 추산했다. 하인들은 1,737명이었으며, 상인 및 대기업 산업가는 7,104명으로, 특히 산업가 집단에서 구분됐다. 2,881명의 자유업 종사자와 노숙자 및 거지 이외에도 부랑자, 헌병, 매춘부, 경찰관 등 1090명과 도시, 공장 및 기타 노동자 1,106명, 지역 산업가 71,112명, 이주 산업가 21,77명으로 남성 85,255명, 여성 7,634명이었고, 소득 분포도는 전반적으로 매우 많았다. 특히 자돈스크 지역에서는 8,580명 정도로 비숙련 노동자는 234,677루블을 벌었지만, 647명의 상업 및 대기업 산업가는 71,799루블을 벌었다. 그러나 많은 집단들을 단지 산업으로만 묶어버리면, 큰 혼란을 초래하지만, 인민주의자들과, 젬스트보 통계학자들은 거리낌 없이 모두 합산했다.
2-1-7. 니즈니노브고로드, 젬스트보 통계
니즈니노브고로드 지역에서는 3개 지역, 크냐진(Knyaginin), 마카라예브(Makaryev), 바질(Vasil)에 따른 「젬스트보 호별 인구 조사 결과」에서 농민 농장의 할당금 보유 및 자신들의 마을에 거주하는 농민의 보유한 가축 가축에 따라서도 다섯 가지로 나뉘었다. 세 개의 군 단위 지역을 합산하면, 52,260 가구와 남녀 294,798명을 포함해서, 433,593데시 배정지, 51,960데시 매수 토지, 86,007데시 임대 토지라는 모든 종류의 임대지, 배정 및 비배정지, 경작지 및 초원지를 포함해서 19,274데시 임대 토지가 있었다. 부농들은 배정지를 더 잘 갖췄으며, 상층 배정지 비율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보다도 더 컸고, 매입한 토지를 집중시켰고, 전체 9.6%에 해당한 부유한 가구는 매입한 토지 46.2%를 소유했지만, 가구의 2/3인 빈농은 1/4도 소유하지 못했다. 따라서 임대 토지를 집중시켜, 빈농들로부터 임대받은 배정지를 모았다. 농민들은 사용 토지에 따른 실제 토지 분배는 배정지 분배와 매우 달랐다. 가축을 보유하지 못한 농민들은 법으로부터 보장된 배정지보다도 더 적은 토지를 처분해야만 했다. 한-두 마리 가축을 기르던 농민들은 토지 소유량을 10-30%(8.1-9.4데시, 10.5-13.8데시)로 늘렸지만, 부농들은 토지 소유량을 1.5배-2배나 가량 더 늘려갔다. 두 집단에서 토지 규모 분배 차이는 미미했지만, 실제로는 경작 규모 면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농가 시설(Tablishments)
작물이 자란 면적으로 평가해볼 때, 실제로 소유한 토지 양은 훨씬 더 컸고, 할당된 크기도 마찬가지였다. 할당 소유권에 따른 분류는 전적으로 무의미했고, 할당 소유권에 따른 평등은 법적인 허구였다. 농민들 간 농업과 산업 결합은, 부농들이 상업 및 농노를 고용하는 가구들에서 높은 비율로 자본주의 농업을 상업 및 산업 사업과 결합시켰지만, 빈농들은 노동력 판매 및 외부 고용을 미미한 규모로부터 작물 재배와 결합했다. 이들은 토지를 소유한 농장 노동자와 일용직 노동자로 전락했다. 외부 고용 가구 비율로는 비례적으로 감소하지 않는 건, 니즈니고로브 농민들의 고용과 산업이 매우 많았기 때문이다. 농업 노동자, 비숙련 노동자, 건설 및 조선 노동자 등 외에도, 산업가들에는 비교적 많은 수로 수공예인, 산업 작업장 소유주, 상인, 매수인 등도 포함됐다. 따라서 많은 유형을 산업가로만 묶는다면 왜곡은 분명했다. 외부 소득이 있는 가구에 대한 자료에서도 많은 농민 집단의 경작 차이에 대해 니즈니고로드 주에서 토지에 따른 비료를 할당 할 때, 쟁기질 된 토지는 생산된 정도를 결정하는 주요한 조건이다. 평균 호밀 수확량은 사용하는 분뇨량에 따라 비례해서 증가하기 때문에, 전체 배정지 4/4를 기준으로, 100데시 당 300-500 수에 따른 분량의 분뇨를 사용했을 때, 호밀 수확량은 데시 당 47.1메라에 달했으며, 1,500수레 분량 이상이면, 62.7메라에 달했다. 따라서 농업 생산 규모에 따른 두 집단 간 차이로는 작물 재배 면적 차이보다도 훨씬 크게 나타났으며, 니즈니노브고로드 통계학자들은 일반적인 농민 밭에서 생산물을 연구했지만, 정작 빈농들과 부농들의 밭에서 수확된 생산물들은 따로 연구하지 않았다.
2-1-8. 기타, 젬스트보 통계
농민 분화 과정을 연구할 때는,「젬스트보 호별 인구 조사 통계」를 사용했다. 해당 통계는 다소 폭 넓은 지역을 포괄했고, 매우 중요한 분화 지표에 대한 충분하고도 자세한 자료를 제공했으며, 경제적 역량에 따른 농민 집단들을 쉽게 구분하도록 처리했다. 7개 지역 조건에 부합했던 젬스트보 통계 자료들도 참고했다. 완전한 자료를 전달하고자, 비슷한 종류로는「호별 인구 조사」를 기반으로 한 불완전한 통계 자료를 먼저 살펴봤다. 1888년도에는, 노브고로드 지역에서 데미안스크 군에 대한 가축 수에 따른 집단 별 농민 농장에 대한 지표가 있었다. 토지 임대 및 데시아틴 단위로 된 장기 임대 및 리스에 대한 추가적인 자료는 없었지만, 다른 지역과 비교했을 때, 부농과 빈농 사이 관계는 비슷했다. 적어도 가축을 세 마리 이상 기르는 최하위 집단 가구에서 최상위 집단으로 갈수록, 더 많은 가축을 소유한 농장들이 평균 이상의 배정 토지를 소유했음에도, 정작 토지를 매입하고, 임대하는 농장 비율은 날로 증가했다. 세 마리 이상 가축을 소유한 가구로는 전체 가구의 10.7%로, 인구로 따지면 16.1%였고, 모든 배정지로는 18.3%, 매입지로는 43.4%, 임대지로는 26.2%로, 임대지 호밀과 귀리와 같은 재배 면적 단위로 파악했다. 전체 산업용 건물은 29.4%를 소유했지만, 가축이 아예 없거나, 적어도 한 마리의 가축을 소유한 가구로는 전체 인구의 40.1%로, 배정지로는 33.2%, 매입지로는 13.8%, 임대지로는 20.8%로, 산업용 건물로는 28.8%만을 소유했다. 따라서 부농들은 토지를 수집했으며, 상업 및 산업에서 무역을 농업과 결합했지만, 빈농은 정작 토지를 버려 살아남고자 임금 노동자로 전락했다. 산업 종사자 비율은 최하층에서 상층으로 오를수록 감소했다. 무마 농민은 26.6%로, 세 마리 이상 가축을 소유한 농민은 7.8%로 감소했다. 그러나 해당 자료들은 불완전했으며, 농민 분화에 대한 요약본을 제외해야만 했다. 체르니코프 지역에서 코젤레츠 지역에 대한 일부 자료도 생략했다. 왜냐하면, 젬스트보 위원회 체르니고프 통계부,「농지 평가를 위한 자료, 1882」에서 가구 수가 흑토 구역에 있는 지역만으로, 총 8,717가구로만 분류됐다. 반면에 가축 수가 없는, 가구율 36.8%와 인구 28.8%를 이루는 가구는 자신들의 토지와 배정지 21%와 임대 토지 7%를 소유했지만, 8,717가구는 임대한 총 토지가 63%를 차지했다. 반면에, 네 마리 이상 가축을 소유한 가구로는, 14.3%로 전체 인구의 17.3%였고, 자가 및 배정 토지로는 33.4%, 임대 토지로는 32.1%를 소유했으므로, 임대 토지율은 불과 7%였다. 더불어 나머지 한-세 마리 가축을 보유한 가구는 작은 집단으로 세분화되지 않았다.
「이르쿠츠크, 예니세이 지역, 농촌 인구의 토지 이용 및 가정 생활 조사를 위한 자료, 1893」에서는 예니세이 지역, 네 지역에 있는 농민과 정착 농민들에 대한 짐마 가축 수 분류 통계가 있었다. 부유한 시베리아인들과 정착민들의 관계로는 부유한 마을 공동체 구성원과 가축이 한 마리도 없는 구성원들과 동일한 관계를 맺었다. 정착민과 기존의 농민들을 결합해서 기존의 농민들을 노동력 역할을 하도록 제공했기 때문에, 이들도 필수적이었고, 상류층과 하류층의 익숙한 특징을 볼 수 있었다. 가구 가운데 39.4%는 가축이 전혀 없었고, 한-두마리만 있는 하위 집단은 전체 인구에서도 24%를 구성했으며, 전체 경작지로는 6.2%와 전체 가축 수로는 7.1%만을 소유했지만, 다섯 마리 이상을 소유한 가구는 36.4%로, 전체 인구에서도 51.2%를 이뤘으며, 경작지 73%와 전체 가축은 74.5%를 소유했다. 가축이 다섯-열마리 이상이었던 집단에서는 가구 당 15-36마리를 길렀고, 임금 노동에 크게 의존했고, 농장의 30-70%를 고용했다. 가구 당, 아예 없거나, 네 마리 이하를 기르는 하위 3개 집단에서는 노동력을 제공했다. 농장 20-30-59%는 토지 임대 및 장기 임대 및 리스에 대한 자료에서도 부유층 수중으로 임대지가 집중된다는 규칙에서 유일한 예외였으며, 규칙을 증명하는 분류에서도 예외 대상이었다. 핵심은 시베리아에서는 이와 같은 규칙을 만들어내는 조건들이 전무했다는 점이다. 토지를 강제적으로 평등하게 만든 할당지조차 없었으며, 토지에 대해 확립할 수 없는 사유재산마저 없었다. 심지어 부농들은 토지를 구매하거나, 임대하지도 않았으며, 토지를 점유하고만 있었다. 토지 임대 및 장기 임대로는 이웃 간 교환 성격을 띠었고, 집단 통계 자료에서도 일관되지 않았다. 폴타바 지역에서 세 군 단위에 대해서는 경작지 면적 분포를 대략적으로 파악했다. 통계 보고서에 따르면, 데시아틴 경작에 따른 농장 수와 각 구역의 가구 수 단위로 표시된 범위 내에서 평균 경작지 면적을 곱하면, 마을 주민들만 총 76,932가구로 추산하는 통계를 얻을 수 있었다. 362,298데시아틴 경작지를 보유한 가구로는 31,001가구(40.8%)로, 경작지를 전혀 경작하지 않거나, 가구 당 최대 3데시아틴까지 경작했으며, 총 36,040데시아틴(9.9%)가 경작지였다. 19,017(25%)는 가구 당 6데시아틴 이상을 경작했고, 경작지는 209,195데시아틴(57.8%)였다.「폴타바, 콘스탄티노그라드, 호롤 및 피리아틴 지역 경제 통계 수익률」에 따르면 작물 재배 면적 분포는 기본적으로 더 작은 면적을 가졌으며, 타우리다 지역과 비슷했다. 불균형한 분포로 인해 매수 및 임대 토지는 소수의 수중으로 집중됐다. 통계에 따른 가계를 경제적 능력에 따라 분류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완전한 통계 자료마저 없었으며, 콘스탄티노그라드 지역에서는 자료를 제한하거나, 한정해야만 했다. 농촌 사회 계급에서 농업에 관한 장에서는 일반적으로 임대 토지를 세 가지 범주로 나뉘었다.
임차인 당 면적
1). 10데시 이하
2). 10-30데시
3). 30데시 이상
칼루가 지역에서는 8.626가구였으며, 이 지역은 총 농민 가구 수로는 대략 1/20이었다. 곡물 파종에 대한 통계 자료는 매우 단편적이고, 불완전했다. 가구에서 21.6%, 인구로는 30.6%를 차지하는 가구로, 전체 말 보유 수로 보자면, 36.6%로, 경작지로는 45.1%, 총 농업 소득은 43.1%를 소유했다. 해당 수치로는 매매 토지가 부농들에게 집중됐다. 트베리 지역 통계 자료가 풍부했음에도, 호별 인구 조사는 매우 미흡했다. 왜냐하면, 가구를 경제적 능력에 따라 분류하지도 않았고, 비흘라예프는 같은 결함 때문에「트베리 지역 통계 자료, 1897」에서 농민층 간 차별화를 더욱 부정했고, 더 큰 평등을 추진력으로 감지해서는 인민 생산과 자연 경제만 찬미했다. 비흘라예프는 농민 집단에서 정확한 자료를 인용하지 않았고, '계층화'에 따른 매우 위험하고도, 근거 없는 주장만 펼쳤다. 마을 공동체 내에서도 차별화가 진행 중이라는 기초적인 진실마저 명확하게 나타내지 않았고, 그저 계층화에 대해서만 거론하고는 마을 공동체나, 볼로츠(Volots)에 따른 읍 또는 면이라는 소규모 행정 단위로도 분류하는 걸, 터무니 없는 일이라고 내세우기만 했다. 농지 임대와 차용에 따른 현지에 수집된 자료로는 '초보적인' 형태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특수하게 다룰 필요는 없었다. 임대와 차용에서도 고립된 사례도 발생했으며, 우연한 성격은 예니세이 지역 경제 생활에서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예니세이 지역에서는 옛 농민들이 소유한 424,624데시의 경작할 수 있는 연약지 가운데 417,086데시로 수용된 가족 농장 및 사유지가 있었다. 2,686데시 임대지에서는 2,639데시 임대지와 거의 같았고, 정작 총 수용 토지로는 1%도 미치지는 못했다. 그러나 비흘라예프는 트베리 지역 농민에 대한 토지 매수가 지주 규모를 균등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봤다. 증거로는 할당 규모에 따른 마을 공동체 집단에서 살펴봤는데, 소규모 할당 공동체가 토지를 매입한 가구 배율보다 더 높았기 때문이다. 비흘라예프는 소규모 할당 공동체에서 보유한 구성원들이 토지를 구매할 수 있다는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인민주의자들과 같은 결론을 따로 검토할 필요는 없었다. 카리셰프는 「러시아의 재산, 1898」에서, 비흘라예프는 국가 경제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아주 잘 파악했다고만 추켜세웠지만, 너무나 낙관적이고, 평등을 향한 추진력으로 인해, 그러한 주장마저 설득력은 없었고, 내용과 근거마저 없었다. 특히 시베리아에서는 수용된 가족 농장 및 사유지로부터, 주로 부농들이 수용한 토지로부터 토지를 선물로 증여하고, 매각하고, 심지어 가족들에게 상속시키는 등 자기들 마음대로, 거래에 있어서도 자의적으로 사용했다.
2-1-9. 상기된 농민 분리 요인에 대한 젬스트보 통계 요약
농민층 분화에 따른 통계 자료를 비교하거나, 결합하고자 절대적인 수치를 취해서 집단화시켜 집산할 수는 없다. 전체 지역에 따른 완전한 통계 자료와 동일하게 분류하는 방법을 요구한다. 이와 같은 방법은 상위 집단과 하위 집단 간 관계를 토지, 가축, 도구 등 소유물과 관련해서 비교해보거나, 병치할 수 있다는 유리한 이점이 있다. 가구에서 10%는 농경지 30%를 소유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는 관계로는 절대적인 수치에 따른 차이를 없애므로, 모든 지역에서 비슷한 관계를 비교할 수 있게 되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가구 10%도 더 많거나, 적어서도 안 된다. 또한 다른 지역, 지방에서 지역 규모는 동일하지 않다. 따라서 각 지역에 따라 동일한 비율 가구가 포함될 수 있도록, 이와 같은 집단을 구분해야만 한다. 그리고 부농 가구를 위한 가구 20%, 빈농을 위한 가구 50%를 미리 차지하기로 합의했다. 상위 집단에서 가구 20%를 차지하는 집단을 두고, 하위 집단에서는 가구의 50%를 차지하는 집단을 둔다. 예시로는, 5개 집단에 따른 가구 분류로부터 30%, 25%, 20%, 15%, 10%(S=100%)이다. 하위 집단에서는, 첫 집단과 두 번째 조직에서 4/5를 취해서, (30+(25x4)/5=50%)이고, 상위 집단에서는 마지막 집단과 마지막 두 번째 집단에서 2/3을 취해서 (10+(15x2)/3 = 20%)이다. 작물, 동물, 도구 등 면적에 대한 백분율은 다음과 같인 산정해서 결정한다. 가구 당 백분율에 해당하는 작물 면적으로는, 15%, 20%, 20%, 21% 및 24% 순이고, (S=100%), 가구에서 20%인 최상위 집단에서 작물 재배 면적은 (24+(21x2)/3=38%)를 차지하며, 가구에서 50%인 최하위 집단은 작물 재배 면적 (15+(20x4)/5=(31%) 정도를 차지하게 된다. 따라서 농민에 따른 최하위층과 최상위층 간 실제 관계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으며, 수치적인 분할이 요구된다. 이와 같은 방식에 따르면, 4-5-6-7개, 다른 갈래로 분산된 집단을 대신해서, 더욱 명확하게 정의된 지수가 포함된 3개로 된 보다 큰 집단을 구해낼 수 있다. 또한 분포가 많은 지역과 조건 속에서 차별화된 농민들에 대한 자료를 비교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각 집단 간 상호 관계를 판단하고자, 차별화 문제에 대해서는 가구 수, 농민 인구에 따른 남녀 인원, 배정된 토지 면적, 매입 토지, 임대 토지, 집단이 소유하거나, 사용한 총 토지 수(배정지+매입지+임대한 토지-임대된 토지), 작물 재배 면적, 가축 수, 고용 가구 수, 농장 노동자 고용 가구 수, 상업 및 산업 시설 수, 개량 농업 도구 등이며, 여기서 토지 임대 및 고용은 농장 쇠퇴와 몰락을 따라, 농민이 노동자로 전환됨을 말하기 때문에 '부정적'이다. 다른 모든 자료들은 농장 확장과 농민들에게 있어 농촌 기업으로 전환됨을 말한다. 이와 같은 지점에서 농장 집단에 대해서는 지역 전체 배분율로 계산했으며, 상위 집단 가구 가운데 20%는 농작물, 가축 등을 재배하고, 사육하는 면적(%)를 차지하며, 하위 집단 가구 가운데 50%는 농작물, 가축 등을 재배하고, 사육하는 면적(%)를 차지하게 된다. 7개 지역에서 21개 군 자료를 포괄하는 표를 제시하자면, 해당 군에서는 총 558,570개 농가가 있었으며, 남녀 인구로는 3,523,418명이었다.
2-2. 젬스트보 통계 및 군마 인구 조사 결과
농민들의 상·하층은 농촌 부유층과 농촌 무산층으로 관계된다. 이러한 관계에서는 많은 소지역들과 많은 조건을 가진 지역에서도 비슷해진다. 심지어 전체 작물 재배 면적에 따른 해당 농민층에서도 차지하는 비율, 가축 수 등과 같은 수치들조차 비교적 작은 범위 내에서 변동한다는 특징이 있다. 그렇다면 많은 지역에서 농민층 간 관계된 통계를 사용해서, 전반적으로, 당시에 국내 농민층들이 어떻게 나뉘었는지를 얼마나 파악하거나, 또 활용할 수 있을까. 또한 어떤 결과로부터 전체 국내 농민층에서 상층과 하층 구성과 상호 관계를 파악하는가. 당시, 러시아에서는 전국에서 모든 작물 재배 농장을 등록하는 농업 인구 조사를 실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고가 거의 없었다. 농민들이 어떤 경제 집단으로부터 나뉘는지를 파악하는 유일한 자료가 젬스트보 통계와 군마 인구 조사 보고였다. 해당 보고서에서는 농가 내 짐을 나르던 가축 분포도를 볼 수 있었다. 물론 매우 부족한 자료였기에, 대략적인 결론을 도출해야만 했다. 특히 가축을 많이 소유한 농민과 적게 소유한 농민 간 비율은 이미 분석됐고, 많은 지역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블라고베셴스키, 「잼스트보 주택 별 인구 조사 경제 수익, 1893」에 따르면, 젬스트보 인구 조사는 22개 지역에서, 12개 군 단위 지역을 대상으로 삼아, 2,983,733가구 농민과 남녀 인구를 합친 17,996,317명의 인구로 기록했다. 그러나 가계 분포도에 따른 자료만으로는 모든 지역에서도 동일하지는 않았으므로, 3개 지역에서 4개 집단 가구가 아닌, 3개 집단으로 분류된 11개 군을 제외해야만 했다. 따라서 21개 시 지역으로부터, 나머지 112개 군에 대한 인구 1,500만명, 약 250만 가구를 포함한 통합 수치를 얻을 수 있었다. 해당 자료만으로는 유럽 러시아에서 총 농민 가구 수에 따른 1/4보다도 적은 양을 포괄했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 각료 위원회 총리실에서 발행했던,「유럽 러시아 농촌 인구에서 경제적 지위에 대한 종합 통계 자료, 1894」에 따르면, 유럽 러시아에서만 50개 지역에서, 11,223,962가구가 행정 구역에 있었고, 10,589,967가구는 농민 가구였다. 러시아 전체 통계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실시했던「러시아 제국 통계, 1888년 군마 인구 조사, 1891」와「1891년 군마 인구 조사, 1894」가 있었다. 두 보고서에서는 농민 사이에서 가축 분포도 가운데 특히 말에 대한 통계를 보유했다.「러시아 제국 통계, 1888년 군마 인구 조사」에서는 1888년에 수집된 41개 시 지역에서, 당시에 폴란드 왕국이었던, 10개 지역을 합해서 통계 분석을 실시했고,「러시아 제국 통계, 1891년 군마 인구 조사」에서는 유럽 러시아에서 18개 시 지역, 코카서스, 칼미크 대초원, 돈 군사 지역에 대한 통계 분석을 포함했다. 유럽 러시아에서는 49개 지역을 골라내더라도, 돈 지역 통계는 불완전했지만, 1888년, 1891년 통계를 결합했을 때, 마을 공동체에서 농민들이 소유한 가축 총 수에 따른 분포도를 얻을 수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 전역에서 농민들 사이에서 마차를 끄는 말의 분포는 평균 분화 정도에 해당했다.
실제로 분열이 훨씬 심각했다. 전체 가구, 1,020만 가구 가운데 220만 가구에 해당하는 22%는, 1,700만 마리의 가축 가운데에서도 950만 마리, 그러니까 전체 가축 수에서 56.3%를 소유했다. 정작 280만 가구라는 엄청난 규모 면에서는 가축을 소유하고 있지도 않았으며, 290만 가구에서는 전체 가구 수의 17.2%만을 소유했다. 따라서 확립된 집단 간 관계에서도 규칙을 바탕으로 자료를 파악했다. 가구에서 1/5은 전체 가축 가운데에서도 절반을 소유했다면, 전체 농업 농민 생산량으로는 절반 이상이 농촌 부유층들의 수중에 있다고 결론 내릴 수 있었다. 생산 집중도에 따른, 부농들은 매입 토지, 농민들의 임대 토지(할당, 비할당 토지, 모두 포함했을 때), 그리고 지역 마을 공동체에 따른 부농의 형성 과정을 고려해봤을 때도, 대부분을 수중에 쥐고 있었다. 토지 매매에서는 특히 부유한 소수 집단에게는 할당 토지가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하물며 매우 '좋은' 시기임에도, '평균적인' 농민들은 간신히 생계를 유지했지만, 평균보다 상당히 나은 형편에서 부유한 소수 집단은 자영농업으로 모든 지출들을 충당시켰으며, 더군다나 초과분에 따른 '잉여금'을 회득했다. 그리고 상품 생산자가 되어 판매하고자, 농산물 재배에 더욱 종사했다. 더 나아가, 비교적 대규모로 형성된 농작물 농장, 상업 및 산업체 기업들을 결합시켜, 농촌 사회에서도 충분한 부르주아지들로 변모해갔다. 따라서 여기서 산업이란 당시 러시아에서도, 제아무리 진취적인 농민일지라도 '전형적'이었다. 설령 가족 규모가 매우 크거나, 많은 가족 노동자들을 보유했더라도, 당시로는 부농들의 특징이었고, 전체 가구에서 1/5은 인구에 큰 비중을 둘 때도 대략 3/10을 차지했다. 그러므로 부유한 소수는 정규직 농장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를 더 많이 고용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노동자를 고용하는 러시아 농촌 사회에서도 총 수 대비 가운데 상당 수가 부유한 소수들의 농장이기 때문이다. 앞선 분석에서도, 부유한 소수들로 대표되는 인구 비율, 농업 전반에서도 일어나는 총 역축 및 사역 가축 가구 수, 경작 면적에 따라 차지하는 비율을 비교할 때만 결론이 도출됐다. 또한 부유한 소수 집단들은 농업 농민에서 발전 추세로도 꾸준하게 참가해서, 관여하고, 개입했다. 소수 집단들에 따른 나머지 농민 간 관계 면에서도 농업 조건, 제도 체계, 상업적인 농업이라는 형태 차이에 따라서도, 다른 형태와 방식으로도 나타났다. 따라서 농민층 분화 요인에서 주요한 추세는 하나였고, 지역적인 조건에 따라 형태가 또 다르게 변형되거나, 변경됐다. 그러나 무마 농민, 일마 농민의 상태는 정반대였다. 앞서 젬스트보 통계학자들은 계산을 산정했을 때, 농촌 무산층 범주도 포함했다. 따라서 대략적인 계산마저, 농촌 무산층 비율 범주에 속했던 모든 무마 농민, 일마 농민의 최대 전체 가구로 보자면, 약 절반 가량, 3/4을 과장해서 포함했다. 토지 할당으로, 매우 열악한 농민일수록, 농기구, 종자 등 물자가 부족했기 때문에 가끔 자신들의 토지를 임대했다. 농민이 임대하거나, 매입한 토지 가운데 정작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토지는 척박했다. 왜냐하면, 농장에서 생계를 충분히 유지할 수 있을만큼 수확량을 내지도 못했고, 하물며 주요한 생계 수단들이 기껏해야 노동력 판매에 따른 '산업 고용'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토지 할당제로부터 부여 받은, 모든 임금 노동자, 정규직 농장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비숙련 노동자, 건설 노동자 등으로 이뤄졌다.
2-2-1. 1888-1891년, 1896-1900년, 군마 인구 조사 비교
5개 남부 지역(1896)과 나머지 43개 지역(1899-1900)을 결합했을 때, 유럽 러시아에서는 49개 지역에 대한 통계를 얻을 수 있었다. 1888-1891년까지는 49개의 지역에 대한 통계를 인용했다. 그러나 시 지역, 하나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리고 1888-1891년까지 동일한 48개 지역을 얻을 수 있었다. 1888-1891년과, 1896-1900년을 비교했을 때, 농민에 대한 수탈은 심화됐다. 가구 수도 거의 백만 가구나 증가했다. 가축 수는 비록 미미했었지만 감소했다. 가축이 없던 가구 수로는 특히 빠르게 증가하면서, 비율로는 27.3%에서 29.2%로 상승했다. 빈농은 560만 가구에서 660만 가구로 늘어났다. 가구 수 증가는 모두 빈농 수를 늘리는 데 사용됐다. 가축을 많이 소유한 가구 비율은 감소했다. 가축을 많이 소유한 가구는 220만 가구에서 200만 가구로 줄어들었다. 중산층과 부유층 가구에서는 거의 변동이 없었다. 1888-1891년 사이에는 4,465,000가구, 1896-1900년에는 4,508,000가구였다. 따라서 농민 빈곤과 수탈은 심화됐다. 농민 상층과 하층 관계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가구로는 50%를 차지하는 하층 가구에서 20%를 차지하는 상층을 이뤘을 때, 1888-1891년 가구에서 50%를 차지하는 빈곤층은 가축의 13.7%를 소유했다. 가구에서 20%를 차지하는 부유층은 가축의 56.2%를 소유했다. 1896-1900년에는, 가구 50%를 차지하는 빈곤층은 농민 소유 가축에서 13.7%를 소유했지만, 가구에서 20%를 차지하는 부유층은 가구에서 53.2%를 소유했다. 따라서 두 층 간 관계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농민 전체로는 가축 사육이 더욱 어려워졌다. 여러 가축들을 키우는 가구 수와 비율도 모두 감소했다. 유럽 러시아에서는 전반적으로, 소농들이 쇠퇴했다. 러시아에서는 농업에 종사하는 가축 수가 경작 면적에 비하면, 비정상적으로 높았다. 비록 소규모 농민 국가에서는 그렇지 않더라도 말이다. 따라서 가축 수 감소가 어느 정도인지는 농민 부유층 계급 사이에서, 짐승 가축 수와 경작지 면적 사이에서 '정상적인 비율'로, V.V. 보론초프는 '회복'됐다고 진단했다. 비힐라예프,「러시아 농업 현실 묘사」,「농부지(Khozyain)」와 체르넨코프, 『농업 농민 특성화』도 참고해보자. 그들 모두 농민들 사이에서 가축 분포에 대한 수치가 많다는 점에만 매료된 나머지, 경제적 분석을 통계적인 작업으로 바꿔 놨다. 또한 농민 농장 유형에서 일용직 노동자, 중농, 기업가 등을 연구하는 대신에, 산술적 열정만으로, 수치 열만 셀 줄 아는 초보자와 같이 연구했다. 특히 체르넨코프는 오로지 그런 수치 조작 덕분에 차별화에 대해 낡지 않고, 새로운 현상으로 보았으며, 완전한 자본주의적인 현상으로 해석하는 편견이 있다고 반박했다. 체르넨코프는 경제학을 잊었으며, 그저 통계로부터 결론을 도출했고, 가축 수 분포가 단순한 변화만 증명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농민층 분화 요인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토지 임대, 토지 매수, 기계, 외부 고용, 상업 농업의 성장, 임금 노동 등 전체적인 그림도 살펴볼 줄 알아야만 하지만 체르넨코프는 이마저도 낡지 않고 그저 새롭다고만 한다거나, 자본주의적인 현상도 아니라고, 오히려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2-2-2. 농민 예산에 관한 젬스트보 통계
젬랸스크, 자돈스크, 코로토야크, 니즈네데비츠 지역를 대상으로 한 1889년, 보로네시, 「농민 토지 소유권에 대한 평가 수익」에는 「전형적인 농장 구성 및 예산 통계 유형」이 있다. 67개 예산 가운데에서, 14번 코로토야크 지역을 제외하고는 가축 별 6개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
가축 별 집단 유형
a: 무마농
b: 일마농
c: 이마농
d: 삼마농
e: 사마농
f: 오마농 이상
그러나 이와 같은 분류로는 해당 지역 조사로는 적합하지 않다. 상·하층 모두 경제에서 산업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고려했을 때, 예산 통계를 검토하는 호 별 인구 통계 조사와 비교하고, 분류했기 때문이었다. 비교하자면, 농민 집단으로 나눌 수 있었지만, '일반적이고', '전체적인' 평균은 순전히 '허구'였다. 여기서 평균 예산 수치는 늘 평균 이상의 유형 농장을 특징지었다.
평균 예산으로는 최소 한도 내에서 균형 잡힌 농장들만 전제로 삼았다. 이전 농장들은 빈곤층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가금류를 기준으로, 가구 예산 및 기타 통계를 분류하고, 비교해봤을 때, 예산 수치로는 먼저 각 농민 집단에서 평균값을 구해야만 했다. (A) 일반 예산, (B) 작물 재배, (C) 생활 수준으로, 세 가지 항목이었다. 지출과 수입 규모 면에서는 많은 집단에서 예산 규모가 매우 달랐다. 극단적인 집단을 제외하더라도, (E) 예산은 (B)보다 5배가 넘었지만, (E)에서 가족 규모는 (B)보다 3배 미만이었다. 지출 분포도로는 각 집단에 따른 총 지출과 비교한 농장 지출로, 무산층과 지주 모두 있었다. a 집단에서 농장 지출은 14%에 불과했지만, f 집단에서는 61%였다. 농장 지출에서 절대 수치도 마찬가지였다. 지출 면에서 무마 농민뿐만이 아니라, 한 마리 가축을 모는 농민에게도 해당했으며, 한 마리 가축을 모는 농민들은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일반적인' 유형이었으며, 농장 노동자와 일용직 노동자에 더 가까웠다. 식량에 대한 지출 비율 면에서는 a 집단보다 두 배 정도로,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높은 비율로 낮은 생활 수준이 드러났으며, 지주, 노동자 예산을 극명하게 구분했다. 소득 항목에서 지출에 따른 상업 소득은 두 극단 집단인 무마농, 농촌 기업가로 인해 농업 총소득을 초과했다. 최하층 농민 집단에서 개인 산업이란 주로 고용 노동이었으며, 토지 임대 소득은 잡소득에 해당하는 항목이었다. 자영농 집단에서는 토지 임대 소득이 농업 총소득보다 미미한 수준의 사람들을 포함했다. 무마농은 농업 총소득이 당시로는 61.9루블이었으며, 토지 임대 소득은 40루블이었다. 다른 무마농에게도 농업 총소득은 31.9루블이었으며, 토지 임대 소득은 40루블이었다. 토지 임대 소득, 농장 노동 소득은 농민들에게는 개인적인 필요만을 충족시켰다. 농업 총소득에서 농장 운영에 대한 지출을 공제해야만 했다. 추론으로 미뤄볼 때, 무마농에게 농업 순소득은 41.99루블로, 산업 순소득은 59.04루블이었고, 한 마리 가축을 소유한 농민 순소득은 69.37루블, 49.22루블로 나란하게 비교하자면, 생계비 일부를 충당하는 임금으로 줄어든 몫을 가진 농업 노동자 유형들이 있었다. 그러나 농민을 지주 산업과 혼동한다는 건, 과학적인 연구를 무시하는 짓이었다. 시골 반대쪽에서는 자영농, 상업 및 산업 활동을 병행하는 자영농들은 상당한 수입을 올렸고, 수입은 수백 루블에 달했다. 개인 사업이 명확하게 정의되지도 않았으며, 상·하층 간 차이를 은폐했으며, 개인 사업에서 발생하는 소득 규모 자체도 드러났다. 참고로, 보로네시 통계에서는 개인 사업으로 구걸, 농업 노동, 집사, 관리 등이 있었다.
순소득 규모로는 무마농, 일마 농민이 두드러졌으며, 1-2루블에 해당하는 비참한 잔액, 화폐 적자까지 기록했다. 농민들의 자원은 임금 노동자들의 자원과 비슷했다. 이마농은 적어도 몇십 루블에 달하는 순소득과 잔액을 보유했다. 부농들의 순소득은 120-170루블에 달했으며, 당시에 러시아 노동 계급 수준보다도 훨씬 상회했다. 노동자와 고용주를 하나로 통합해서, 평균 예산을 편성한다는 건, 적당한 자립과 순소득만을 보여줄 뿐이다. 수입에서 491로블, 지출 443루블, 잔액 48루블과 (C) 현금 18루블을 포함했을 때, 같은 평균은 완전한 허구였다. 하위층으로는 a, b에서 66개 예산 가운데 30개 예산에 속하는 농민들에게는 극심한 빈곤을 은폐했다. 가구 당 총소득 120-180이라는 적은 루블 수입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기에도 어려워서, 정기적으로 농장 노동, 일용직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따라서 현금 및 현물 수입, 지출들을 정확하게 계산한다면 농민, 시장 간 차별화 관계를 파악하며, 문제되는 현금 수입 지출에서 각 부문 별 예산 가운데 현금 지출이 전체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파악했다. 현금 소득, 지출 비율은 중간 집단에서 지출이 특히 규칙적으로 증가해서, 극단적인 집단으로 볼 수 있었다. 농업에서는 가축을 보유하느냐, 보유하지 않느냐에 따라 뚜렷한 상업적인 성격을 띠어갔다. 두 경우 모두 상품을 판매해서 생활하더라도, 상품은 노동력이고, 다른 경우로는 상품은 판매를 위해 생산된 재화이므로, 상당한 임금 노동과 자본 형태를 취하는 생산물이 사용됐다. 예산 면에서는 농민들의 차별화는 농민들을 농장 노동자로, 소규모 상품 생산자, 소시민들로 전환하면서, 자본주의를 위한 국내 시장을 창출했다. 중요한 추론으로, 모든 농민 집단에서 농업이 매우 폭 넓게 상업화되고, 시장에 의존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소득이나 지출 면에서 현금 부분이 40%미만으로 감소하지는 않았다. 또한 비율 면에서도 높았다. 이렇듯 소작농 총 소득에서 짚이나 겨 등과 같은 가축 유지비도 포함됐다. 중앙 흑토 지대에서 농민들은 화폐 경제가 전반적으로, 산업 지대 외곽 대평원보다 미약하게 발달한 곳조차, 매매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고, 시장에서는 화폐의 힘에 이미 의존했다. 인민주의자들은 자연 경제에 대한 동정만 갖고 있었다. 그러나 현대 사회일수록, 판매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고, 상품 생산에서도 발전을 지연할수록, 생산자 조건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었다. 마르크스는 농민에 대해서도 자본주의 생산 양식으로는 불완전한 발전에서 생겨난 흠점들과 일치했으며, 농민들에게도 자신들의 제품을 상품으로 생산하는 조건 없이, 상인이자, 산업가가 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예산 자료가 세금에서 상품 생산 발전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견해를 반박한다. 지대와 세금은 교환 발전에서 중요했지만, 상품 경제가 확고하게 자리 잡은 세금은 부차적으로 전락했다. 농민들에게는 총 현금 지출, 세금 및 관세 지출을 비교한 비율로는 15.8%에 달했다.
총 현금 지출에서 세금 및 관세 지출 비율
a: 24.8%
b: 21.9%
c: 19.3%
d: 18.8%
e: 15.4%
f: 9%
따라서 세금 지출에서 최대치는 사회 경제로부터 농민들이 불가피하게 부담한 나머지 현금 지출로, 1/3이었다. 그러나 교환 발전에서는 세금 역할을 고려하지도 않았고, 소득 대비로 보자면, 비율이 지나치게 높았다. 개혁 이전 시대에서 농민들에게는 무거운 짐을 지게 했으며, 소농 토지를 소유한 농장 노동자들에게는 총 지출에서 1/7을 차지하는 세금의 존재가 두드러졌다. 더군다나 마을 공동체 내 세금 분배는 불균등했다. 농민들의 형편이 좋을수록, 총 지출에서 세금으로 들어가는 비중이 줄었다. 가축을 보유하고 있지 않는 농민들은 소득에 비례해서, 가축들을 많이 보유한 농민들보다 세 배나 더 많은 세금을 납부했다. 마을 공동체 내 세금 분배에 대해서라면, 토지에서 데시아틴 당 세금, 공과금을 계산했을 때, 균일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불균형한 마을 공동체가 의무적, 봉건적인 성격이 불가피했다. 농민들은 소유 토지에 따라 모든 세금들을 공유했다. 세금 몫, 토지 몫이 결합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농민층 분리는 현대 농촌 사회에서도 양극으로부터 할당지 역할들이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보유한 할당지에 따른 세금 분배는 부농에서 빈농으로 세금 부담을 전가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따라서 마을 공동체 내에서 빈농들에게 더욱 해로운 결과도 생겨났다. 농촌 농업에서 농장은 토지 임대 및 임차, 가구 규모 및 경작 면적, 농장 노동자 고용 등, 각 집단 간 관계로는 예산 자료 및 대량 자료를 검토한 관계에서도 동일했다. 이 뿐만이 아니라, 각 집단에서 경제적인 절대 수치 또한 전체 군 단위 통계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가구에 따라서는 무마농과 일마농은 동일했으며, 예산 통계에서도 충분히 전형적으로 나타났다. 농민 농장에 따른 재산과 농기구에 대한 자료에서도, 많은 집단에서 도구, 가축을 제공받는 정도 차이를 통계표로 나타냈다. 앞서 대량 통계를 기반으로, 여기서 많은 집단들은 재산을 소유한 정도가 완전하게 달랐다. 특히 빈농 가축보다도, 부농 가축이 매우 달랐다. 가축의 1/4가 아니라, 가축의 5/27이었기 때문이다. 가축이 아예 하나도 없거나, 적어도 한 마리만 기르는 농민들의 농장은 비참하고, 또 열악했다. 농민들은 농장에 수백 루블을 쓰면서, 농기구를 개량하고, 노동자를 고용해서, 대규모로 토지를 매수하고, 연간 50,100,200루블의 임대료를 받는 소수 농민들과 묶어낸 방식마저 매우 잘못됐다. 그런데도 가축 하나 없는 농민들은 일용직 노동에서 높은 지출을 차지한다는 말로, 통계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항목에서, 완전하게 다른 두 가지를 하나로 포함했다. 첫째로, 고용주로부터 농기구로 일하는 노동자를 고용해서 농장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를 고용하거나, 둘째로, 자신들의 농기구로부터 고용주 토지를 경작해야만 하는 이웃 농민들을 고용하는 경우였다. 따라서 여기서 고용이란 정반대로, 서로 엄격하게 구분됐다. V. 올로브(V.Orlov), 「구베르니아 시 통계 수익」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농업 소득과 관련해서는 통계가 매우 부족했다. 수확량 문제가 검토되지도 않았고, 각 특정 구역에 따른 농산물 판매 현황, 판매 조건에 대한 통계마저 기입되지 않았다.
상위 집단에서는 농업 현금 소득 비율이 매우 감소했고, 농업에서는 매우 넓은 면적을 경작했다. 따라서 농업은 매우 큰 규모의 자연 경제였다. 농업과 기업가적 성격은 산업 사이에서도 매우 중요한 물음이다. 같은 유형으로, 산업은 많은 가축을 소유한 농민 예산에서도 특히 중요했다. 검토 중인 통계에서는 지역 농민 부유층들에게 전형적으로 농업, 상업 및 산업 기업을 결합하는 경향이 있었다. 같은 유형으로, 농부를 경작자와 비교하는 건, 농업을 자연 경제로만 다루었기 때문에 잘못됐다. 농업에서는 농산물의 기술적인 가공에서 제분, 착유, 감자 전분 제조, 증류 등과 결합되어, 농업에서 발생하는 금전적인 소득은 농업이 아닌 산업 시설 소득으로 귀속됐다. 실제로 농업은 더 이상 자연 경제가 아니라 상업 경제였다. 대량 농산물은 농장 노동자와 산업 기업 및 우편 운송에서 고용된, 가축 생계로부터 현물로 소비된 농장에서도 같았다. 최상위 집단에 속한 같은 유형 농장으로, 코로토야크 지역에서 예산 1위는 가족이 18명이었고, 노동자 4명, 농장 노동자 5명, 가축 20마리였으며, 농업 소득은 1,294루블이었고, 산업 기업 소득은 2,675루블이었다. 자연 경제 농촌에서도 평균을 달성하고자, 무마 농장, 한 마리 가축을 기르는 농장과 결합됐다. 농업 활동 규모, 유형 분류에 따라 산업 활동 규모, 유형 분류를 결합하는 건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농민 생활 수준에서는 현물 식량 지출은 불완전하게 제시됐다. 농산물, 육류에서도, 무마농이나, 한 마리 가축만을 기르는 농민을 합쳤을 때, 나머지와 대조는 옳다는 점이다. 농민 집단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식량이 부족해서, 품질마저 낮았다. 특히 감자 생산에서 그랬다. 한 마리 가축만을 기른 농민 식량은 무마농보다 더 열악했다. 여기서도 평균 문제는 허구였고, 농민 대중들에게 부족한 영향 상태는 부농들의 만족스러운 영양 상태 아래로 가려졌다. 부농들은 빈농들보다 1.5배 더 많은 농산물과 3배나 더 많은 육류를 소비했다. 생산량에 따른 농민 식량 통계도 이를 뒷받침했다. 특히 세 집단으로 뚜렷하게 나타났는데, 최하위 집단, 중간 집단, 최상층 집단이었다. 특히 최상층 집단에서는 최하위 집단보다 식량 품질이 두 배나 더 우수했다. '평균'이란 두 극단 집단을 모두 압도했기 때문이다. 식량에서 현금 지출은 절대적이든, 상대적이든, 두 극단 집단에서 농촌 무산층과 농촌 부유층은 매우 높았다. 농촌 무산층은 중농보다 더 많이 구매했지만, 소비는 적었다. 필수적인 농산물을 구매하더라도, 농산물은 부족했기 때문이다. 농촌 부유층에서 더 많이 소비했기 때문에, 특히 비농산물 소비가 증가해서, 더 많이 구매했다. 두 극단 집단에서는 자본주의 국가일수록, 개인 소비재에 따른 러시아 시장 형성 과정도 알 수 있었다. 나머지 지출 항목에서는 남녀 한 사람 당으로만 계산하는 건 부정확했다. 왜냐하면, 연료비, 조명비, 가정용품 등 비용들을 가족 구성원 수에 따라 비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농민 생활 수준에 따라서도 세 가지 다른 집단은 구분됐다. 모든 개인 소비 지출에서는 현금 부분들이 하위 집단에서 매우 높게 나타났다. a 집단에서는 지출 약 절반이 현금이었다. 상위 집단에서는 현금 지출이 증가하지는 않았으며, 약 1/3에 불과했었다. 그렇다면 양 극단 집단에서는 현금 비율이 증가한다는 점은 어떻게 균형을 이뤘을까. 상위 집단에서는 현금 지출들이 주로 생산적인 소비에 따른 농장 지출로 들어갔지만, 하위 집단에서는 개인 소비로만 나타났다. 따라서 농민들은 농촌 무산층으로 변모할수록, 주로 소비재 시장을 창출했지만, 농촌 부유층으로 변모하면, 주로 생산 수단 시장을 창출했다. 따라서 두 가지 변하는 모습에서도, 모두 자본주의 국가가 국내 시장을 창출하는 과정으로까지 확장된다.
엥겔스는 1891년 기근에 대해서도, 자본주의가 국내 시장을 창출한다고 말했지만, 인민주의자들은 농민 몰락을 단지 자연적인(가부장적인) 경제에 따른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변모가 아니라, 인민 생산에 따른 쇠퇴로만 봤기 때문에, 문제를 제대로 알 수는 없었다. 인민주의자들은 농민층 분화 요인에서도 국내 시장 형성을 매우 간과했다.「국가 수입 증가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나보예 슬라보, 1896」에 따르면, 미국 노동자 소득 표에서 소득이 낮을수록, 식량 지출은 상대적으로 더 컸다. 그러나 인민주의자들은 식량 소비가 감소하면, 다른 생산물 소비에서도 훨씬 더 크게 감소한다고 주장했다. 당시에 러시아에서는 빵과 보드카 소비는 감소했다. 따라서 다른 생산물 소비도 감소했고, 농민 부유층 소비 증가에 따른 대중 소비 감소는 상쇄됐지만, 그러한 주장은 오류를 전제했다. 농민들은 노동자로만 대체되어 노동자와 고용주가 창출되는 과정이지만, 농민들을 노동자로 대체하면서 모든 소비를 개인적 소비로만 축소하거나, 생산적 소비에 따른 생산 수단의 시장 형성을 잊고 만다. 농민층에서 차별화되는 과정은 자연 경제만으로 상품 경제를 대체하는 과정이라는 점 또한 잊었다. 시장이란 소비를 늘려서 창출되는 게 아니라, 현물 소비를 현금으로, 지불 소비로부터 전환할 때만 창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무마 농민들은 중농보다 소비는 적었지만, 개인 소비재를 더 많이 구매해야만 했기 때문에, 더욱 가난해지고, 더 많은 돈을 벌어도 더 많이 지출해야만 했다. 따라서 두 가지 모두 자본주의에서는 필수적이다. 예산 수치 활용 면에서는 농민과 농촌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 면에서 개인 소비 규모를 1인 당이 아닌, 성인 노동자 1인 당으로 계산했을 때, 니즈니 통계청에 근거해서, 도표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농촌 노동자 생활 수준 통계에서 노동 평균 가격을 취했다. 1881-1891년, 10년 사이에 보로네시 시 지역에서 고용된 농장 노동자들의 연간 평균 급여는 57루블이었으며, 유지비를 포함하면 99루블이었고, 유지 비용은 42루블이었다. 농장을 소유한 농장 노동자와 일용직 노동자의 개인 소비 금액은 노동 평균 가격보다도 낮았다. 가족 유지 비용 총액에 따라 4인 가족에서 가축 하나 없는 농부들은 78루블이었고, 적어도 가축 한 마리를 가진 5인 가족 농부들은 98루블에 불과했으며, 농장 노동자들의 유지 비용보다도 더 적었다. 농장 지출, 세금 및 과세를 제외하고, 지역 토지는 세금 액수보다 낮지 않은 가격으로 임대됐다. 토지에 묶인 노동자의 처지는 비교적 자유로운 노동자의 처지보다도 더 나빴다. 농장 노동자들의 현금 지출은 가축 한 마리를 보유한 농민과 무마농들의 개인 소비에 대한 현금 지출보다도 훨씬 높았다. 따라서 사람들을 하나로 토지에 묶는다는 건, 국내 시장 발전을 오히려 저해할 뿐이다. 농장 노동자 소비에서는 젬스트보 통계를 활용했다.「오렐 지역, 1892」통계 보고서에서는 카라체프 지역 자료도 있었다. 당시 해당 자료는 농업 임금 노동에 대한 158건의 자료에 기반했다. 그리고 월 배급량을 1년 배급량으로 환산할 수 있었다. 호밀에 따른 한 가축을 보유한 농민, 무마농들의 생활 수준은 농장 노동자의 생활 수준보다도 높지는 않았으며, 농장 노동자들의 최저 생활 수준이었다.
농민 최하층은 농업에서 이들을 몰아내는 다른 집단과의 관계 면, 가족 부양에 따른 지출액을 차지하는 농업 규모 면, 노동력 판매에 따른 생계 수단 및 생활 수준 면에서, 해당 집단에서 배정지를 소유한 농장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에 속했다. 농민 예산에서 젬스트보 통계에 대한 수확과 곡물 가격 등의 영향력 아래에서, 특히 사브리나,「반품 평가 보고서」는 예산 통계를 처리하고자 검토했다. 사브리나는 마르크스 이론을 사용했다고 말했으나, 정작 적극적으로 왜곡했고, 불변 자본, 가변 자본의 차이점을 고정 자본, 순환 자본의 차이점과 혼동했으며, 보다 선진적인 자본주의 용어와 범주를 농민 농업에서 무의미하고, 무분별하게 남용하고, 적용시켰다. 예산 수치를 처리했을 때 평균 규모를 남용했기 때문에, 모든 평가 보고서가 평균화 농민과 관련됐다. 4개 군 단위에 대해 계산된 토지 소득은 농장 수로도 나뉘었다. 무마농들은 소득이 가구 당 약 60루블, 부농들은 약 700루블이었다. 농장 당 불변 자본 규모에 따라, 전체 재산 가치가 결정됐다. 측정 도구가 평균 가치였고, 상업 및 산업 시설에서 평균 가치가 농장 당 15루블로 결정됐다. 사브리나는 부유한 소수로부터 사유 재산이라는 세부 사항을 무시했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분배된다고 말했으며, 토지 임대에서도 평균 지출로 결정했다. 한 마리 가축만을 소유한 농민들은 60루블이었고, 부농들은 100-200루블이므로, 이를 모두 더해서 단지 농장 수로만 나뉘었다. 심지어 수도, 수리에 대한 평균 지출도 결정했다. 그것이 단지 도구, 가축 보충 및 수리를 말한다면, 수치는 무마농 지출로 보자면, 농장 당 8코페이카였고, 부농들은 75루블이었다. 사르비나는 「오스트로고즈스크 지역 보고서」에서 적용했던 '평균 수요 법칙'을 얻었다. 그러나 틀린 법칙이고, 농민들은 최소 수요를 충족하는 게 아니라, 평균 수준을 충족시킬 따름이었다. 그리고 사브리나는 소농업에서 특수한 발전 유형이라는 결론을 매우 쉽게 도출했다. 농촌 무산층과 농촌 부유층을 균등화하는 이러한 교묘한 장치 속에는 익숙한 분배에 따른 분류가 더욱 강화됐다. 예산 통계를 적용한다면, 농민들을 한 집단으로 결합시켰다. 한 가족 당 15-25데시에 따른 대규모 할당을 받은 범주에 속한 농민들에게는 23.5데시 할당을 임대해서, 1.3데시 작물을 재배했으며, 개인 산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남녀 10명 당 190루블 소득을 확보한 사람들과 코로토야크 지역 예산 10번을 추가로 14.7데시를 임대하고, 23.7데시 작물을 재배하는 농장 노동자를 고용해서, 남녀 10명 당 1,400루블을 확보한 사람들, 자돈스크 지역 예산 2번에 따라, 농장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들의 농장에서 노동자를 고용하는 농민, 농장을 더한 합계를 추가된 항목 수로 나누어서, 특수한 유형으로 개발이 이뤄진다고 말했으며, 그리고 '평균 통계'만이 농민 농업 분야에서도, 규칙적이고, 배타적인 농민들에 대한 차별화를 모든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제거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사르비나는『수확의 영향력』의 기사에 실린 방법을 대대적으로 채택했다. 당시 러시아 농민 전체 예산을 계산하고자 노력을 기울였지만, 똑같이 시험된 평균값을 적용하고 말았다. 국내 경제에서 문학적이고, 미래적인 역사가는 인민주의적인 편견으로 인해 경제 통계에서 기본적인 요구 사항인, 임금 노동자와 고용주 사이에서 엄격하게 구분해야만 하는 요구 사항마저 잊었으며, 그들로 묶은 토지 소유권에 따른 형태와 중개 유형들이 또 얼마나 많았고, 복잡한지에 관계 없이 이뤄져야만 했다.
2-3. 농민층 분리화에 대한 결론
현대 러시아 농민들이 처했던 사회·경제적 상태는 상품 경제에서 주로 나타났다. 중부 농업 지대, 남동부 국경지, 산업 지역에 비하면 낙후됐음에도, 농민들은 시장에 종속됐으며, 개인 소비 농업, 세금 납부도 시장에 의존했다. 농민 농업 및 촌락 공동체 사이에서 존재하는 사회·경제적인 관리 체계는 모든 상품 경제와 모든 자본주의 질서로부터 내재된 모든 모순을 보여준다. 경쟁과 경제적 독립 투쟁, 토지 매매 및 임대 탈취, 소수 생산 집중 및 독점, 다수 무산 계급화, 강제 편입 및 시도, 상인 자본과 농장 노동자 고용으로부터 경제적 소수에 의한 착취 등이다. 농민들 사이에서는 모순적인 형태를 띠지 않는 경제적인 현상이 단 하나도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는 이해 관계부터 투쟁과 대립으로 나타나며, 어떤 이들에게는 유리하거나, 다른 이들에게는 불리한 상태를 뜻한다. 토지 임대, 매수, 정반대 유형으로는 산업이고, 농업에 따른 기술적인 발전 역시 마찬가지다. 비단 러시아 자본주의뿐만이 아니라, 인민주의 이론에서도 중대해진다. 같은 모순들은 공동체 마을로부터 경제 관리 체계가 특수한 인민 생산 등을 구성하는 경제 형태가 아니라, 일반적인 소시민적 형태일 뿐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에도 널리 퍼진 이론임에도, 국내 공동체 농민들은 자본주의 적대자가 아니라, 자본주의로부터 가장 깊은 경제적 토대였기 때문이다. 가장 깊은 토대였기 때문에 인위적인 영향력에서도 벗어나서, 자본주의 발전을 제한하는 제도임에도, 마을 공동체 내에서도 자본주의적인 요소들을 형성한다. 농업 전반에서 과거 전통으로부터, 특히 자연적인(가부장적인) 전통 아래에서 무겁게 짓눌러졌다. 따라서 생산 관계 발전에 따른 모든 사회 관계로부터 변화 등으로 인한 자본주의 변형 효과가 점진적으로 생겨났다. 이러한 농민들 사이에서 모든 경제적 모순을 종합했을 때, 농민들에게 '농민화'라는 용어는 시의적절하다. 낡은 자연적인(가부장적인) 농민들의 완전한 해체, 농민 주민들의 창출을 뜻하기 때문이다. 발뤼예프 위원회 작업에서 바실리코프(Vasilchikov)는 당시 러시아에서 농촌 무산층들이 형성되어 농민 사회층에서도 차별화되고 있었지만, 체계적으로 연구하려는 시도가 전무했고,「젬스트보 호 별 인구 조사」가 제공됐음에도, 적절한 자료들마저 부족했다. 농민 분열을 단지 재산 불평등, 인민주의 전반과 카리셰프의 용어로부터, 단순하게 차별화로 간주하곤 했다. 카리셰프의 임대에 관한 저작 중에는, 「러시아의 재산」에 실린 기사를 참조할 때도, 재산 불평등이 출현하는 전체 과정에서도, 재산 차별화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기존 농민들은 차별화됐을 뿐만이 아니라, 완전하게 해체되어 존재할 수조차 없었으며, 새로운 유형 아래에서 농촌 주민, 상품 경제, 자본주의적인 생산이 지배하는 사회 기반 유형들로 축출됐다. 따라서 농촌 무산층 농업에서 상품 생산자는 엄연한 계급이며, 바로 농업 임금 노동 계급이었다.
농업 자본주의 형성에서 순수한 이론적 분석이 소규모 생산자들로부터 차별화가 이뤄지는 요인임을 지적한다는 건, 교훈적이고, 시사적이다. 마르크스,『자본』Ⅲ권에서도,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인 지대 발생을 염두한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노동 지대'를 언급했다. 직접 생산자는 실제적이고, 법적으로도 자신에게 속한 노동 도구(쟁기, 소 등)를 사용하여, 일주일 가운데 일부 시간 동안만 실제로는 자신들이 소유한 토지를 경작할 수 있었고, 나머지 시간에는 봉건 영주들의 영지로부터 아무런 보상 없이 노동해야만 했다. 다음 형태의 지대에서는 직접 생산자가 자신들이 착취한 토지로부터 전체 생산물을 생산했고, 초과 생산물 전체를 토지 소유자들에게 현물로 제공하는 현물 지대였다. 생산자들은 여기서부터 더욱 '독립적'으로, 자신들의 노동으로부터 필수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생산물의 양 외에도, 특정한 초과분(잉여분)을 획득했다. 이와 같은 형태는 지대에서도 개별적이고, 직접 생산자들로부터 경제적인 지위에서도 더 큰 차이를 초래했다. 적어도, 그러한 차별화가 존재했으며, 직접 생산자들은 경제적 지위에서도 더 큰 차이를 초래한다. 그러한 차별화에 따라 직접적인 생산자들은 차례로, 다른 노동자들을 직접 착취할 수단들을 획득한다. 따라서 자연 경제관이 우세할 때는 종속 농민들의 독립이 처음으로 확대되어, 차별화에 대한 맹아로 나타나게 된다. 여기서 맹아는 현물 지대 형태에서는 단순한 변화를 나타낸 다음 형태 지대로, 화폐 지대에서만 발전한다. 직접 생산자는 토지 소유자에게 생산물이 아닌, 생산물 가격을 제공하게 된다. 같은 유형에 따른 지대 근거로는 동일하며, 직접 생산자는 토지의 전통적인 소유자이면서도, 같은 유형으로는 지대의 해체로, 보다 접근하게 된다. 화폐 지대에서는 상업, 도시 산업, 상품 생산 및 화폐 순환에 따른 발전을 전제로 한다. 종속 농민, 토지 소유자 간 전통적인 일반 법 관계는 순전히 현금 기반 계약으로 변환된다. 관계 면에서도 기존 농민들에 대한 수탈로부터, 농민들은 자신들의 토지와 자유를 매수 당한다. 현물 지대에서 화폐 지대로 전환되면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결과이며, 심지어는 돈을 위해서 고용된 무산 일용직 노동 계급을 형성한다. 새로운 계급의 발생은 산발적이지만, 지대 지불로부터 예속된 부농들 사이에서는 농업 임금 노동자를 자신들의 이익에 맞추어 착취하는 관습으로까지 발전시킨다. 그들은 점차적으로 일정량의 부를 획득하고자 축적하며, 먼 미래에도 자본가로 변모한다. 따라서 토지의 옛 자영업자들은 자본주의적인 소작인들을 위한 유치한 노예 동물원을 만들어내고, 자본주의적인 발전은 시골을 넘어 이와 같은 자본주의적인 생산 발전으로 조건 지어진다.
중농을 희생시켜, 극단층을 발생하도록 만드는 농민 분화에서는 두 가지 새로운 유형으로부터, 농촌 주민들을 찍어낸다. 공통적으로는 경제적 상품화, 화폐적 성격이다. 경제적 상품화에서는 농촌 부르주아지들인 부농들이다. 많은 형태로 상업적인 농업을 수행하는 자영농도 여기에 포함된다. 다음으로는 상업 및 산업 시설에서 실소유주, 상업 기업에 따른 기업 소유주 등이 있다. 상업적인 농업과 산업체 기업 간 결합은 부농들에게만 특수한 농업과 산업 기업(체)의 결합이다. 부농들 사이에서는 자본주의적인 농민층들이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곡물 판매를 위한 농촌 지역에서 토지 임대는 농장에서도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며, 토지 분배보다도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부분 농장 규모로는 가족에서 소용하기 보다도 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농장 노동자 집단, 더 많은 일용직 노동자 집단은 부농 존재에게도 필요 조건이다. 농민들이 순소득으로 얻은 여유 자금들은 농촌 지역에서도 과도하게 개발된 상업적 활동, 고리대금업을 투자하거나, 유리한 조건 아래에서 토지 구매, 농장 개선 등에 투자된 소규모 농업 종사자이다. 수적으로도 농민 부르주아지는 농민들 가운데에서도 소수이며, 총 인구 수에서 약 3/10이며, 가구 수로는 1/5를 넘지 않는다. 비율로는 지역에 따라 상당히 다르다. 그러나 농민 농업 총량, 농민 소유 생산 수단 총량, 농민들이 생산한 총 생산 물량에 따른 차지하는 비중으로 보자면, 농민 부유층은 여전히 우세하며, 현대 농촌에서도 여전히 주인이라는 점이다. 농촌 무산층들은 토지를 소유한 임금 노동 계급들이다. 토지를 전혀 소유하지 않은 빈농을 포함하지만, 국내 농촌 무산층들의 전형적인 대표자는 토지를 소유한 농장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미숙련 노동자, 건설 노동자, 기타 토지 소유 노동자들이다. 한 구획의 토지에서도 보잘것없는 농사를 짓거나, 황폐해진 토지 임대로 입증된 농장과 노동력 판매 없이는 도무지 생존할 수조차 없는 절박한 빈농 산업 상태를 보노라면, 극도로 낮은 생활 수준은 뚜렷해진다. 전체 농가 가운데 절반 이상 인구의 약 4/10은 농촌 무산층이고, 무마 농민, 상당 수는 일마 농민으로 분류한다. 농민층들의 상당 부분은 이미 농촌 무산층에 속한다는 근거는 이미 제시됐다. 자본주의는 자유롭고, 토지가 없는 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고정 관념적인 이해 역시나 자주 포함된다. 주요한 추세로도, 자본주의 농업에서는 매우 느리고, 매우 많은 형태로 농촌 사회에서도 충분히 침투하기 때문이다. 농촌 노동자들에게는 토지 할당이 가끔 농촌 고용주 자신들의 이익에도 부합하기 때문에 토지를 소유한 농촌 노동자들은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국가마다 다른 형태를 띠지만, 특히 영국 별장농은 프랑스, 라인 지방 소작농과 같지도 않으며, 오히려 라인 지방은 독일 프로이센, 크네히트와도 같지 않다. 각각 특정한 농업 체계로부터, 특정한 농업 관계사에 따른 흔적을 지니지만, 경제학자들은 모두 한 유형으로 묶어내어 농업 무산층으로 분류하며, 토지에 대한 권리에서도 법적 근거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여긴다. 소작농에게 토지는 온전한 재산인지, 지주, 기사령 영주로부터 사용이 허가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로는, 대러시아 농민 공동체 구성원으로 소유하는지에 대한 여부가 중요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빈농을 농촌 무산층에 할당하는 건 전혀 새롭지도 않다. 인민주의 경제학자들만이 농민층을 반자본주의적이고, 농민 대중들은 이미 자본주의 생산에서도 일반적인 체계 속에서 농업 및 산업 임금 노동자로 그 위치를 차지한다는 점을 외면할 뿐이다. 러시아 내 마을 공동체와 농민을 유지하는 농업 체계를 그저 칭찬만 한다거나, 자본주의적인 농업 조직을 갖춘 프로이센 '오스트제' 체계와도 비교하기를 긍정했을 뿐이다. 오스트제 지역에서는 농업 인구가 농장 노동자, 일용직 노동층을 살펴볼 수 있다. 오스트제 지역에서도 농민들은 별도로 25-50데시 큰 토지, 3-10데시 토지의 별장 거주자, 토지를 무소유한 농민층으로 나뉜다. S. 코롤렌코도 지적했지만, 별장 거주자는 중부 시 지역에서 러시아 농민과 매우 비슷하다. 일자리를 구하고, 토지를 경작해서, 끊임없이 시간을 나눌 뿐이다. 흥미로운 점은 농장 노동자의 경제적 지위이다. 지주들은 임금 때문에 토지를 할당하는 게 유리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프로이센 오스트제 지역 특징
1. 오스트제 농장 노동자들에게도 소유물은 토지 2데시(lottstelle를 dessiante로 환산했을 때, 1 Lottstelle = 1/3dess이다). 남편은 1년에만 275일을 일하고, 아내는 50일을 일해서, 하루 임금은 25코펙이다.
2. 2와 2/3데스 토지에서 농장 노동자는 가축(말) 한 마리, 소 세 마리, 양 세 마리, 돼지 두 마리를 기른다.
3. 쿠를란트 주 바우스카 지역 6데스 토지의 농장 노동자는 말 한 마리, 소 세마리, 양 세마리, 돼지 여러 마리를 기른다.
일주일에 3일 일해서, 아내는 1년에 35일 일한다.
4. 쿠를란트 주에서는 하센포트 지역 8데스 토지의 농장 노동자들은 무료로 밀가루를 빻으며, 무료 의원 지원과 진료를 받으며, 자녀들은 학교에도 다닌다.
따라서 인민주의자들은 농장 노동자들의 소유지, 농업 규모 면으로는 농민들을 자본주의 생산에 해당하는 유럽 농업 체계와 구분되는 조건들에서 모든 사례를 결합시켰다. 10명의 농장 노동자는 평균 31.5데시 토지를 소유했으며, 노동자 한 명 당 평균값이다. 농장 노동자들은 1년 가운데 적은 기간 동안, 지주를 위해서 농민들은 노동했으며, 남편은 1년의 절반, 아내는 35-50일과 2-3마리의 소나 한 마리의 말을 기르는 농민들도 포함했다. 그렇다면 마을 공동체와 오스트제 농장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오스트제 지방에서는 사물을 고유한 이름으로 부르지만, 러시아에서는 농장 노동자들이 부농과 결합하여, '평균적인' 사람들이 파업을 벌이고, '공동체 정신', '노동 원칙', '인민 생산', '농민과 산업의 결합' 따위의 감상적인 말만 늘어놓는다. 그리고 개혁 이후로는 중농들이 결합됐다. 중농은 상품 생산에서도 매우 드물었다. 중농들은 '독립적인' 농업 노동만으로도 충분히 생계를 유지하며, 매우 좋고, 유리한 시기와 조건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대부분 중농들은 대출에 의존하며, 노동 용역(서비스)으로 상환하고, 부업으로 보조 일자리를 찾지 않고서는 생계를 도저히 유지할 수는 없다. 일자리에서는 노동력 판매 등이 부분적으로 포함된다. 흉년 때마다 중농 대중은 무농층으로 전락하게 된다. 사회적인 관계에 따라서도 중농층은 상위층으로 이동할 수도 있지만, 기껏해야 운 좋은 소수만이 상위층으로 진입하며, 하위층들은 사회 발전에서도 최하위층으로 밀려나게 된다. 농촌 사회에서도 부유층은 농민의 최하층만이 아니라, 중농층까지 밀어낼 수 있으며, 자본주의적인 경제의 특징으로 부상한다. 따라서 중산층은 몰락하고, 극단층은 강화된다. 농민화 과정은 이런 식으로 이뤄진다. 농민 분화는 자본주의를 위한 국내 시장을 창출한다. 하위층은 시장을 형성하면서도, 개인 소비 시장에서 소비재로부터 이뤄진다. 농촌 무산층은 중농에 비해 소비량이 적으며, 품질이 떨어지는 빵 대신 감자를 더 많이 소비하며, 또 구매한다. 농민 부유층의 형성과 발전은 이중적으로 중첩되어 시장을 창출한다. 주로 생산적인 소비 시장에서 생산 수단으로 시장을 창출하며, 부농들은 곤궁한 처지에 있는 지주와 파산 직전 농민들로부터 수집한 생산 수단들을 자본으로부터 전환시키고자 한다. 부농들의 수요 증가로부터 개인 소비에 따른 시장이 형성된다. 그러나 농민들의 분화 진행 여부와 속도를 비교할 수 있는 통계는 부족하다. 농민 분화 통계를 체계적으로 발생하는 형태로 나타내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농촌 지역에서 경제 통계는 분화가 중단 없이 빠르게 증가한다. 농민들은 토지를 매각하고, 임대해서, 가축이 아예 없는 농민 수도 늘어났으며, 농민은 도시로 이주했다. 반면에, 농업에서 발전 추세마저 같은 방향으로만, 농민들은 토지를 매수하거나, 농장을 개량하고, 철제 쟁기를 도입해서, 풀 재배와 낙농업 등을 개발한다. 빈농들도 여기에 참가하게 된다. 더군다나 이주 운동은 특히나 농업 농민 분화에 추진력을 제공한다. 농민 이주는 농업 시 지역에서 이뤄지지만, 공업 시 지역에서 이주는 미미한 수준이며, 노동 용역이 활발하며, 농민 분화를 저해하는 인구 밀도가 높은 중부 시 지역에서 주로 이뤄진다. 이주 지역을 떠나는 중농들과 거주 지역에서 남는 극빈층이 있다. 따라서 이주는 이주 지역에 따른 농민 차별화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차별화된 요소를 새로운 장소로 가져온다. 시베리아 정착민들의 첫 시기에서, 농업 임금 노동에서도, 이주와 농민 차별화 간 연관으로는, I. 호로비치(I. Hourwich), 『시베리아 농업 이주, 1888』에서도 잘 나타난다. 인민주의 출판사에서 끈질기게 은폐하려고 했었던 바로 그 책이다. 농촌 지역에서는 상인 자본, 고리대금업 자본은 큰 역할을 담당한다. 그렇다면 농촌 사회에서 상인 자본, 고리대금업 자본들은 농민층 분화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또한 많은 농민 집단 간 관계와 농민 채권자와 농민 채무자 간 관계 사이에서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또 대부업 및 고리대금업은 계급을 분화시키는 요인이자 원동력인가, 아니면 계급 분화를 지연시키는가.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생산을 분석할 때, 상인 자본과 고리대금업 자본에서 큰 중요성을 부여했다. 마르크스는 상인 자본, 고리대금업 자본, 산업 자본 및 투자 자본과 같은 단일한 경제 현상을 나타내며, 일반적인 공식이 포괄된다. 이익을 내서 판매하고자, 상품을 구매하기 때문이다. 상인 자본과 고리대금업 자본은 역사적으로 언제나 산업 자본 형성 과정에서도, 필요한 전제였다. 그러나 상인 자본, 고리대금업 자본 자체만으로는 자본주의적인 생산 발전에 따른 산업 자본 발상으로는 충분한 전제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언제나 낡은 생산 양식을 해체해서, 자본주의적인 생산 양식으로 대체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인 생산 양식의 형성은 언제나 전적으로, 역사적인 발전 단계에 따른 그 상태에 달렸다. 상인 자본, 고리대금업 자본이 무역 자본, 금융자본으로 옮겨가는 역사적인 과정 속에서도, 어느 정도까지 낡은 생산 양식들을 해체시킬 수 있는지는 견고도와 내부 구조에 따라 달려 있다. 해체되는 과정에서도, 새로운 생산 양식들의 부상은 낡고, 오래된 생산 양식을 대체하는지가 상업적인 성격이 아니라, 오히려 낡은 생산 양식 자체가 가지고 있는 성격에 달려 있다. 따라서 상인 자본에 따른 독자적인 발전도는 자본주의 생산 발전 정도에 따라 반비례한다. 상인 자본과 고리대금업 자본 발전이 클수록, 자본주의적인 생산 발전에 따른 산업 자본의 발전은 작아질 수밖에는 없다.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상인 자본과 대부업 및 고리대금업 자본은 산업 자본과도 연계될 때는 과연 어떤 식일까. 그리고 상업과 대부업 및 고리대금업은 낡은 생산 양식을 붕괴시키면서도, 자본주의 생산 양식이나, 다른 체제로 대체되는가. 국내 국민 경제에서도 답해야만 하는 문제이다. 농민 경작에서는 '쿨라크', '진취적인 농민'이 동일한 경제적 현상으로부터 두 가지 형태가 아니라, 완전히 연결되지도 않았고, 반대되는 유형의 현상일 뿐이라고 내세웠던, 일반적인 인민주의자들의 견해는 전혀 근거가 없다. 아무도 정확한 경제 통계 분석으로부터 증명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계는 그 반대이다. 농민들이 생산 확대를 목적으로 노동자를 고용하든, 토지나 식료품을 거래하든, 대마, 건초, 가축 등을 거래하든, 돈을 거래하든, 오로지 단일한 경제 유형만을 나타낼 뿐이며, 하나의 동일한 경제 관계로 이르게 된다. 더 나아가 마을 공동체에서는 자본 역할들이 예속과 대부 및 고리대금에만 국한되지는 않으며, 자본 생산으로도 투자되며, 부농들은 농장 개량, 토지 매수 및 임대, 개량 도구 취득, 노동자 고용 등에도 돈을 투자하기 때문에 무역소와 사업에만 투자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시골에서는 자본으로부터 예속과 대부 및 고리대금 외에는 무엇도 생산할 수 없다면, 생산 통계만으로는 농민층 분화, 농촌 부유층과 농촌 무산층 형성을 확립할 수 없다.
농민 전체로는 가난에 시달리는 경작자들의 상당히 고른 유형들을 대표하며, 특히 고리대금업자들만 두드러져서, 소유한 화폐 규모에 따라서만 구분될 뿐이며, 농업 생산 규모와 조직에 있어서는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농촌 사회에서는 상인 자본과 대부업 및 고리대금업에 따른 독립적인 발전들이 농업 생산 발전에서도 지연시킨다는 점이 중요하다. 농민층 분화에서도 상업은 더욱 발전하여, 농촌과 도시가 더 가까워지고, 원시적이던 농촌 시장은 사라지며, 마을 상인들의 독점이 약화될수록, 유럽 기준에 부합하는 신용 형태가 더욱 발전하고, 마을 대부업 및 고리대금업들로 대체할수록, 농민층들의 분화도 더욱 심화된다. 소상업과 대부업 및 고리대금업으로부터 쫓겨난 부농 자본은 이미 생산으로 흘러들기 시작한 자본보다도 더욱 풍부하게 생산으로 다시 투입된다. 농촌 경제에서는 농민 분화를 저해하는 또 다른 현상으로는 부역 경제, 노동 용역의 잔존이다. 노동 용역은 현물 노동에 대한 지불에 기반을 두며, 상품 경제에서도 저조한 발전에 기반한다. 노동 용역은 중농을 전제한다. 중농은 그다지 부유하지도 또 무산층도 아니기 때문에 노동 용역을 수행하려면 자신들의 도구가 있어야만 하며, 어느 정도는 '건전한' 농민들이기 때문이다. 농민 부유층은 현대 농촌 사회에서도 주인일 때, 차별화를 저해하는 요인들, 예속 및 속박, 고리대금, 노동 용역 등을 무시한다. 현대 농촌 사회에서 진정한 주인들은 농민 부유층과 그들의 대표자가 아니라, 마을 대부업자 및 고리대금업자, 이웃 지주인 경우가 더 많다. 그러나 무시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농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내부 경제 관계 체계를 연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인민주의자들은 같은 절차를 사용했지만, 도중에 멈추고는 자신들의 추론을 논리적 결론으로 이끌어내지는 않았다. V.V. 보론초프도『자본주의 운명』에서 세금 부담 등을 언급했지만, 마을 공동체에 대해서는 자연스러운 조건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만 언급했다. 그러나 핵심은 농촌 사회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자연적인 조건이란 무엇이고, 마을 공동체 내 경제적 관계 체계를 연구하여, 시골에서 드러난 '자연적인 조건'을 가리는 이전 시대의 잔재를 청산하고, 제거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물론 V.V 보론초프는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마을 관계 체계는 농민의 절대적인 분화로 드러났다. 예속 및 속박, 대부 및 고리대금, 노동 용역 등이 완전하게 없어질수록, 농민층 분화는 더욱 심화된다. 젬스트보 통계에서도 볼 수 있는 분화는 기정사실이며, 농민들은 완전하게 반대 집단으로 분열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