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정신


지금까지 시대정신이라 함은 때때로 헤겔이 언급한 이상적인 '위인'을 말했지만, 이번에는 거꾸로 하나의 주제에 대한 다른 일화 정도를 전하려 한다. 분단 시대가 도래하기 전부터 고려를 패망시키고, 조선은 중앙 집권의 기틀을 일찍 다졌다.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를 침략했을 때 군주제의 유지하에 더 큰 부를 가져다 주겠다는 일본의 영토 밀약에 서명을 한 고종과 순종 부자는 결국 일본의 황태자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한반도의 외부 침략을 지금까지 정당화하는 일부 증거로 남게 되었다. 그로 인해 한국에서도 이러한 군주에 의한 계약 서명이 아직도 유효하다고 믿는 인간들이 존재한다. 그들이 한반도 내 더 큰 식민지적 혼란을 추구하게 만든 원흉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일본 민족에 대한 혐오를 표시해서는 아니다. 다만,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그것에 복무한 이들에게 가장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결국 6.25를 기점으로 분단에 의한 두 국가가 성립되었고, 한 진영은 스탈린의 지도하에, 또 다른 진영은 미군정의 치하하에 분리되는 상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중요한 지점이 있다면 신본 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기존의 토지 일대를 점유하고 있던 봉건 귀족들은 미국과의 원조 끝에 치부를 맞이한 무역 상인들과는 달리 하향된 신분 속에서 갈림길을 맞이하였다. 그들은 기존의 중간 계급보다 못한 상태에서 붓만 다룰 줄 아는 신세로 전락했다. 일부는 양반 세력과 결탁하여 국가 왕조의 부활을 기대하며 대한 제국에 복무했지만, 일부는 결국 농민의 길을 택하였고, 지금까지 '선비'라는 이름을 감추면서 이러한 귀향을 벗삼아 농민들과 함께 지내기로 결심하게 된다. 이 추측이 맞다면 일부는 경주 및 안동 지방에 여러 분포한 성씨 가문들이 대체로 명문 가문들이 많았지만, '패가망신' 당한 채 농촌 지방으로 이주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농민 공동체를 구성하게 되었다는 일부 주장도 타당하게 된다. 


무산 계급 역사의 상실


그러나 왕조 성씨와 일반 성씨가 동일한 성씨라고 하더라도, 계보에 의한 구분이 오히려 일제에 의한 족보가 훼손된 상태에서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오히려 봉건 왕족의 잔재였다고 밝히고 싶다. 중요한 것은 프롤레타리아트 신세로 전락한 이들은 선비나 농민이나 가릴 것 없이 어울려 공동체를 구성했다는 점은, 조선 왕조 사회와는 다른 풍경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한 구성원들은 지금도 일부 남아 독립 운동에 종사하거나, 때때로 국가를 위해 희생을 치르기도 하였지만, 그것을 이 자리에서 논하는 것은 조금 실례가 될 수도 있겠다. 아무튼, 정치적 진영에 의한 민족지들은 북을 선택한 이들조차 비슷한 성씨가 많이 분포했으며 이들 중에서도 일본 제국주의를 선택한 이들에 대한 처벌이 어느 정도 이뤄졌는지는 아직 사실 파악을 못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에 의한 재산의 수탈 과정과도 일치하며, 지금의 '친일파'라고 불리던 재산을 불리는 존재들에 대한 한국의 잔재를 매우 세부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봉건 제도는 이런 식으로 제국주의가 침략을 했을 때의 모순적인 상황을 고스란히 자본주의와 함께 재건하면서 더욱 혼란스러운 수습기를 거치도록 만들게 된다. 그들은 오히려 국가를 옹호하는 논리를 펴거나, 때때로 국가보다 더한 대한 제국을 기리면 기렸지 이러한 혼란을 정체시키도록 만든 측면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장기간의 군부 독재까지 도입한 국가 헌정 사상의 일부를 이루었고, 미군정 치하에서 제작된 헌법의 기틀 아래에서 민주주의가 '합당한' 제도 자체로 정착하고 말았다. 제도는 곧 경제 제도로 설명해야 함에도, 민주주의라는 이념 자체를 제도로 만든 관념적 모순은 이러한 현대 국가적 상황에서도 그대로 잔존한다는 점이다. 이처럼, 그동안 계급적 구분의 부재가 초래한 결과는 오히려 '영친왕'의 사례에서도 보여주듯이, 그들의 후손들이 여전히 잘 생존하여 더 많은 사회적 훼손을 야기한 측면도 배제할 수 없다. 그들은 '자수성가'했다고 말하지만 미군과의 무역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지금의 자본의 기업을 설립하여 부흥하였고, 그것은 여전히 계급적 차별 및 정치적 폭력까지 정당화시키는 존재가 되었다. 그들은 배후의 권력이 되며 곧 부르주아 독재의 일부를 구성하게 되었다. 아무리 친노동자 출신이더라도, 이는 사회적 신분 및 출세가 그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계급적 위치'가 그 자신을 만드는 것이다. 


계급 투쟁


그러면 계급 투쟁은 일단락된 것인가. 그것은 지금까지 부르주아지들의 독단적인 의회 정치가 벌이고 있는 국가 쟁탈전의 그늘하에, '서민을 위한 정책'을 피겠다고 말한 한 '포퓰리스트'의 구도에서 지금의 군부 독재의 장본인을 부정하면서도, 정작 부르주아지의 일부로 견제 및 통합된 사회적 시각은 어떻게 설명되는가. 그것은 오히려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계급적 위치로 설명된다. 그동안 프롤레타리아트는 정녕 누구를 기리며 맞설 도구조차 없이 항복을 선언해야만 했던 것인가 (!) 그것은 일본의 수탈을 지켜보고, 아니, 창씨개명에 겨우 의존해야만 살아남던 지금의 상황과 과연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프롤레타리아트로 전락한 이들의 전 생애는 지금까지 두 국가론에 갇혀 서로와 마주보지도 못하고, 부르주아 견제도 아닌, 평생을 자본의 굴레에 갇혀 살았다고 언제쯤 말하게 될까.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이러한 노고와 활동을 전개한 가난한 출신의 '프롤레타리아트'이야말로 오히려 이 시대정신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인 것이다. 


'작은 이익을 보고 들이친다면, 큰 이익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충무공, 『난중일기』, 갑오년 (1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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