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쌓인 ‘십자군 전쟁’에 21세기의 부조리를 담아

경향신문 2012. 4. 27

 

한국 대중문화사에서 만화처럼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은 콘텐츠도 없었을 것이다. 수십년 전 만화는 어린이날마다 한데 모여 ‘화형식’을 당하곤 했는데, 최근까지도 학교 폭력을 유발하는 주범으로 몰려 ‘유해매체’ 취급을 받고 있다.

검열관들의 시선으로는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역시 ‘유해’할지도 모르겠다. 1000년 전의 십자군 이야기를 하면서도 미국을 비판하고, 한국의 기득권층을 조롱하고, 종교적 광신을 걱정했다. 그리고 독자들은 이 만화의 ‘유해성’을 기꺼이 즐겼다.

<십자군 이야기> 1권 ‘군중십자군과 은자 피에르’는 2003년, 2권 ‘1차 십자군과 보에몽’은 그로부터 2년 뒤에 나왔다. 1권은 20만부, 2권은 5만부가 팔렸다. 2권 이후 6년의 공백 끝에 3권 ‘예루살렘 왕국과 멜리장드’가 선보였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연재를 마친 4권 ‘무슬림의 역습과 인간 살라딘’ 역시 마무리 작업을 거쳐 조만간 출간될 예정이다. 올해 내로 5권 ‘사자심왕 리처드의 반격’이 나오며, 내년 나올 6권 ‘끝나지 않은 십자군 전쟁’을 마지막으로 <십자군 이야기>는 완간된다.


1권이 나온 때는 미국 부시 정권이 훗날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으로 판명된 대량살상무기를 없애겠다며 이라크를 침공한 직후였다. 1권의 주인공인 은자 피에르는 기독교 성지 예루살렘을 지배하고 있는 무슬림을 무찌르자고 떠들고 다니는 광신도다. 피에르가 타고 다니는 당나귀의 얼굴은 부시에서 따왔다. 당시 서유럽 지배계층의 이해 관계와 민중의 종교적 광신이 맞물려 십자군 원정을 추동하는 과정이 그려진다. 이에 빗대 신의 음성을 듣고 필리핀 정복에 나선 19세기 미국의 매킨리 대통령, 이민족에 대한 근거없는 혐오를 보여주는 나치 독일의 히틀러도 등장한다. 동로마제국의 기득권층은 “나라가 망하는 꼴은 봐도 내가 손해 보는 건 못본다”며 자신들을 비판하는 세력을 ‘좌파’라고 몰아붙여 공격한다. 대중이 ‘십자군 전쟁’에서 기대할 법한 기사들의 무용담, 전투 장면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김태권 작가는 역사책 속에 박제된 채 남아있던 ‘십자군 전쟁’을 현실의 맥락으로 접목시키겠다는 의도를 감추지 않는다.

 

 

 


<십자군 이야기>는 성인 독자층이 읽을 수 있는 이른바 ‘교양만화’ 혹은 ‘지식만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 한국의 만화시장에서는 어린이용 학습만화, 청소년용 장르만화가 주류였다. <맹꽁이서당>(윤승운), <삼국지>(고우영), <먼나라 이웃나라>(이원복), <조선왕조실록>(박시백) 등이 ‘교양만화’의 흐름을 이었으나, 근래에는 작품성과 재미를 고루 갖춘 작품이 드물었다.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는 “‘지식만화’를 그리기 위해선 작가가 지식을 완벽하게 자기화해서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며 “<십자군 이야기>는 인류사의 중요한 변환점인 십자군 전쟁을 작가 개인의 해석으로 전달함으로써 한국 지식만화 시장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고 평했다.

실제 <십자군 이야기>는 십자군의 역사적 맥락과 당대 사람들의 정신 세계, 이와 함께 생각해볼 만한 철학적 주제까지 살펴볼 수 있게 구성됐다. 성인 독자가 꼼꼼히 읽어야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다. 각 권 앞머리에는 로마사, 이슬람사 등을 정리했고, 각 권을 마무리하면서는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플라톤의 <국가>, 프랑스의 이민역사박물관 등을 소개했다.

<십자군 이야기>의 그림체, 칸 구성은 경제적이다. 작가의 화려한 그림 솜씨를 자랑하는 대신, 이야기와 주제를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면서도 바이외 태피스트리, 독일 채식수사본, 이슬람 회화 등 당대 자료를 고증함으로써 독자를 다른 시대, 다른 지역으로 자연스럽게 안내한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추천사에서 “이 책의 또다른 매력을 이루는 것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그림체”라며 “역사만담꾼 김태권은 중세인의 모습을 그들이 그리던 그 방식으로 묘사한다”고 말했다. 박인하 교수는 “독자가 그림을 해석하거나 감정을 읽어내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작가가 전달하는 지식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고 평했다.

이 작품에는 인터넷 하위 문화의 영향을 받은 유머 코드가 간간이 삽입돼 있다. 이는 동시대 독자들이 작품을 읽기 좋게 만드는 한편, 시간의 흐름에 취약성을 드러내는 ‘양날의 칼’ 역할을 한다. 중학교 교사인 이성호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은 “<십자군 이야기>는 역사 속 사실이 현실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수작”이라면서도 “시간이 지나서 다시 읽으면 생뚱맞게 보일 수 있는 유머나 직접적 현실 비판은 작품의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말했다.

 

 

 

[책과 삶]“자료 부족보다 어려웠던 것은 관점의 교정이었다.

 


대입학력고사 세계사 시험에서 십자군에 대한 2점짜리 주관식 문제를 틀리고 결국 재수를 해야했을 때, 김태권 작가(38)는 자신이 십자군 전쟁을 만화로 그리고 명성도 얻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시험 이후로 10년이 흘렀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겨레 일러스트학교를 수료한 그는 신문 연재 소설 삽화를 그리는 만화가 지망생이었다. 때마침 이라크 전쟁이 벌어졌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미군을 ‘십자군’이라 부르자 아랍권에서는 격렬히 반발했고, 교황청에서는 또 한 번의 십자군 전쟁을 우려하는 메시지를 보내는 상황이었다. 김 작가는 1000년 전의 십자군으로 ‘오늘’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옆에서 난리가 나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저 혼자 마음 편하게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그 파도가 나에게까지 올지도 모르고요.”


그러나 정작 십자군에 대한 자료는 많지 않았다.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서유럽의 치부를 드러내는 부분은 찾기 힘들었다. 전쟁의 참가자 수, 기사 이름, 전투가 벌어진 지명 등이 책마다 달랐다. 김 작가는 국내외 서적 60여권을 구해 읽고, 정보를 머릿속으로 조합해 그림을 그렸다.

김 작가는 정작 “자료 부족보다 어려운 것은 관점의 교정이었다”고 말했다. 전쟁 초반부에는 십자군의 일방적인 ‘행패’가 벌어졌기에 선악을 선명하게 가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슬람의 반격이 시작되는 중반부 이후로는 전쟁을 어떤 시각으로 그려야할지 애매해졌다. 게다가 2권과 3권의 사이, 미국에선 부시에서 오바마로 정권이 교체됐다. 김 작가는 “전쟁이 나쁘다는 인식은 어느 정도 공유됐다고 본다. 하지만 타문화, 타민족과 어울려 사는 방법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도 ‘단일민족국가’라는 환상이 깨지고 이주자의 구성비율이 늘어나고 있다.

“(다문화사회에 대한) 준비를 많이 한 프랑스에서도 극우 정당 후보인 르펜의 지지율이 20% 가까이 나왔어요. 준비가 안된 한국사회에서 얼마나 큰 문제가 일어날지 걱정스럽습니다.”

작품 속 십자군 이야기와 현대의 상황은 인위적이라는 느낌이 들 만큼 잘 맞아 떨어진다. 김 작가는 “역사가 똑같이 반복되진 않지만 비슷한 일은 벌어진다”고 말했다. 권력의 속성, 전쟁의 기제 등이 비슷하기에 십자군과 현대의 상황을 일대일로 대응하고픈 유혹을 느낄 때도 있지만, 김 작가는 유혹을 이기려고 애쓴다. 독자의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는 정보가 나온 책을 인용하고 출처를 밝히는 방법을 택했다.

김 작가는 서울대학교대학원 서양고전학 협동과정에서 그리스와 라틴 고전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십자군 이야기>를 위해 라틴어로 된 원문을 찾아보고, 중세 수도원에서 발견된 가사에 현대 음악을 붙인 ‘카르미나 부라나’를 직접 번역해 인용하기도 했다.

그는 내년까지 <십자군 이야기>를 마무리한 뒤, 3권까지 내놓고 중단한 <한나라 이야기>의 나머지 7권 작업에 들어갈 예정이다. 그는 언젠가는 역사물이 아닌 동시대 사람들의 삶을 그려내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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