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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홍수 - 에릭 드루커의 ㅣ 다른만화 시리즈 4
에릭 드루커 지음, 김한청 옮김 / 다른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아트 슈피겔만, 닐 게이먼, 프랭크 밀러, 조 사코, 닉 혼비 같은 쟁쟁한 이들의 추천사가 아니더라도 에릭 드루커의 작품인 <대홍수> (2010, 에릭 드루커 지음, 다른 펴냄)는 아주 강렬한 작품이다. '태초에 신께서 말씀과 뉴욕을 창조하셨다… 보시니 모든 것이 쓸모없더라'라는 표지의 시니컬한 문구만큼이나 미국의 심장인 뉴욕을 통해 미국의 어두운 면을 낱낱이 드러내보이고 있다. 흑백 대비의 강렬함을 통해서 말이다.
첫번째 이야기인 '집'은 술에 취해 TV를 켠 채 잠들었던 남자가 아침이 되어 깨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모자와 가방을 챙겨서 출근하는 남자는 지하철에서 내려 걸음도 씩씩하게 달려 올라가지만, 공장 문은 '폐쇄' 쪽지가 붙은 채 자물쇠가 굳게 걸려 있다. 삽시간에 고개를 떨군 남자는 술집과 창가와 구걸과 도둑질을 거쳐 집에 돌아오지만, 집 문에도 '폐쇄' 표지가 떡 하니 붙어 있다. 갈 곳이 없어진 그는 또다시 방랑과 매매춘과 절도와 감옥 생활과 방랑을 거치면서 점점 작아져 마침내소멸되고 만다.
두 번째 이야기인 'L'은 지하철 안에서 신비한 세계를 만나게 되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클라이브 바커의 책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에서는 지하철 종점에서 식인을 하는 초자연적인 존재를 만나게 되는데, 에릭 드루커의 'L'은 아프리카 혹은 인디언을 연상케 하는 생명과 화합의 존재들을 등장시킨다. 그러나 그 환상은 사나운 개를 앞세운 경찰이 등장하면서 끝나고, 웅크린 채 맨바닥에서 자고 있는 노숙자를 지나 계단 위로 길게 드리운 남자의 그림자에서 한쪽 팔이 사라져 버린 듯한 허전함이 느껴진다.
마지막 이야기이자 책 제목과 같은 '대홍수'는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 등장해서 현실과 작품의 이야기가 뒤섞인다.
우산 없이 길을 나섰다가 비를 맞게 된 화가는 비를 쫄딱 맞으면서 걷다가 우산 하나를 사서 쓰고 집으로 돌아온다. 고양이 한 마리와 이젤 하나로 꽉 찰 듯한 좁디 좁은 집에는 비가 샌다. 비는 줄기차게 내리고, 집 안에서도 우산을 써야 하는 현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
화가의 그림 안에서는 점점 작아져가는 빙산 위에서 표류하다가 동료들에게 구조된 에스키모 사냥꾼의 이야기 다음으로 현실과 마찬가지로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이야기를 그리는데, 저 멀리 해가 빛나고 있지만 뉴욕을 뒤덮은 것은 무겁디 무거운 비구름뿐. 거센 비바람을 타고 우산째 날아간 그림 속 주인공은 롤러코스터를 타고서 놀이공원 안으로 들어간다. 그 안에는 무기를 들고 행진하는 표정 없는 군인들과, 엉클 샘, 자유의 여신상, 배트맨, 피에로, 닌자 거북이, 뽀빠이 등 미국의 문화를 상징하는 아이콘들이 가장행렬을 하고 있다. 호객꾼을 따라 들어간 마술의 집 안에서는 머리 둘 달린 남자, 칼을 삼키는 여자, 엘리펀트 맨 등 기이한 인물들이 눈을 끄는데, 여러 사람의 각광을 받고 있는 한 근육질 남자에게 새겨진 그림에 주목하게 된다. 미국 연방의 상징인 독수리와 더불어 미국을 '개척'한 사람들이 타고 온 메이플라워호는 인디언과 흑인 노예에 대한 착취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일루미나티를 상징하는 삼각형 눈 아래 약육강식의 표식이 새겨진다. 놀이공원을 떠나는 그의 눈 앞에는 공권력에 대항하는 사람들이 그려지고, 무자비한 탄압 후 비를 부르는 주동자의 손길 아래 뉴욕을 침수시키는 대홍수가 펼쳐진다.
다시 돌아온 현실에서는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대홍수가 벌어져 있고, 살아남은 것은 노아의 방주에 기적적으로 올라탄 화가의 고양이 뿐이다.
만화는 주로 어린이들의 동심의 세계를 대표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다른출판사에서 펴낸 다른만화 시리즈에는 사회 고발적인 내용의 만화들이 연이어 소개되고 있다. 이전에 만난 <바시르와 왈츠를> (2009, 아리 폴먼, 데이비드 폴론스키 지음)에서는 지금껏 익숙했던 이스라엘 관점에서의 이야기가 아니라 대량학살된 팔레스타인인들을 위한 내용이 나왔고, <나는 왜 저항하는가> (2010, 세스 토보크먼 지음)는 '국가에 의한, 국가를 위한, 국가의 정치를 거부하라'는 슬로건 아래 현실과 행동 지침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번 <대홍수>에서는 <나는 왜 저항하는가>처럼 선동적이지는 않지만, 미국의 현실의 어두움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겉으로 드러난 문화와 평화와 민주주의 국가의 형님으로서의 미국이 아니라 알콜과 마약중독자, 노숙자의 나라인 동시에 무소불위의 권력으로서의 미국이 나타난다. 이런 미국에도 노아의 방주가 허락되고, 마침내 무지개가 뜰 것인가.
책 말미에 수록된 시인 앨런 긴스버그의 에릭 드루커 소개와 더불어, 크리스 레이니어의 인터뷰 기사를 읽으면 작품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할 수 있겠다.
묵직하니 마음이 무거워지는 환상과 실제의 세계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