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m.youtube.com/watch?v=6Kw1QLal1_M&feature=share

소련 친스탈린주의 군부 쿠데타 실패 후 발트 3국의 레닌 동상이 철거되고, 모스크바에서도 러시아 소비에트 최고회의 의장을 지낸 스베들로프 동상을 끌어내리는 것을 보도한 KBS 뉴스.(우즈베키스탄에 존재하던 마르크스 동상과 레닌 동상도 철거되어 그 자리에는 티무르 동상, 국가의 어머니상이 세워졌다.)

29년 전 소련 해체는 세계적으로 영향이 큰 사건이었다. 한국에서도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하던 NL과 PD 등 많은 스탈린주의자 운동가들이 운동을 그만두게 하고, 일부는 지금의 ‘국민의 힘‘ 등 우파 정당에 가게 할 정도로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동시에 소련 해체를 계기로 그 전에는 ˝미제의 첩자˝로 오해를 받던 트로츠키주의자들 중 소련을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던 ‘국제사회주의자‘가 조직으로서 활동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만약, 소련이 해체되지 않았다면 우즈베키스탄인이지만, 우즈베크어보다 소련 공용어인 러시아어를 잘하던 이슬람 카리모프가 우즈베크어 같은 지역 언어를 억지로 배워서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갖출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카자흐스탄의 초대 대통령을 수십년 간 지내다가 자진사임해서 ˝엘비스(터키의 ‘아타튀르크‘처럼 카자흐어로 ‘국부‘라는 뜻)˝가 된 나자르바예프도 자신의 내각 회의를 러시아어로 주재할 정도로 러시아어에 능숙했는데, 이후에 카자흐 민족주의를 의식해서 모국어인 카자흐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것이 대통령 등 관료의 자질로 넣어서 장기집권을 모색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구잘 같은 배우도 러시아인인지 우즈베키스탄인인지 정체성의 혼란을 느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순수한 러시아인, 즉 슬라브족이 아니라는 점에서 차별을 받았을 수는 있겠지만... 고르바초프도 러시아 연방의 ‘대통령‘으로 출마하려고 자본주의의 상징인 피자헛 광고나 루이비통 광고에 출현하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소련이 해체되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 ˝마르크스주의˝로 알았던 체제가 실제로는 공산당 관료가 소련이란 ˝주식회사˝의 이사회로서 자본주의를 이끌던 자라는 게 명백히 드러날 수 있었다. 특히 옛 공산당원들이 이런저런 정당의 당원으로 활동하거나 자본가가 되어서 여전히 지배계급으로 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소수민족 국가, 특히 스탈린과 히틀러의 밀약으로 강제점령당한 아픔을 겪은 발트 3국도 독립할 수 있었다. 발트 3국이 비록 러시아 혁명으로 독립한 후 독일이나 폴란드 등 제국주의와 반혁명 국가의 지원을 받아서 독립을 유지했기에 현지 공산당원들도 발트3국의 독립(민족자결)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몽골인들이 레닌이 이끌던 소비에트 러시아의 군대의 도움을 받아서 중화민국의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과 군벌, 러시아 백군 잔당을 무찔러서 세운 몽골처럼 소련에 ‘공식 소속‘되지 않고 우호관계를 맺는 국가로 남기를 원했지만(물론 몽골은 사실상 스탈린 집권 이후에는 소련의 위성국이었지만...), 스탈린이 히틀러와의 밀약 이후 발트 3국을 강제 점령하고, 강제적인 ˝국민투표˝로 소련에 편입시켰기 때문에, 발트3국 주민들은 러시아에 대한 원한이 깊었다. 그래서 독립운동도 격렬하게 일어났고, 슬라브지역 3국인 러시아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가 소련을 대체하는 국가로 발의한 ‘독립국가연합‘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물론 발트 3국은 현재 신자유주의의 온상이고, 유럽연합 주요 국가로 노동력이 유출될 정도로, 경제적으로 힘들고,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이 심하기에 ‘헬트 3국‘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만큼 소련과 스탈린이 레닌조차 지지하지 않았을 강제적인 군사공격(게다가 히틀러하고도 손잡고!!!!)으로 점령한 것이기에 러시아에 대한 반감을 느끼는 것은 이해가 된다.

그나마 레닌 동상이 수모를 겪지 않는 나라는 몽골이었다. 몽골에서도 칭기즈칸이란 이름을 모스크바의 한 호텔로 이름을 짓는 것에 대해 항의하는 반소항쟁이 일어나서 많은 소련 지도자 동상들이 철거되었지만, 레닌 동상만은 무사했다고 한다. 이유는 레닌의 할머니가 칼미크인(서몽골에서 러시아 볼가강으로 이주한 몽골계 오이라트 부족의 일원으로 불교를 믿지만, 원래 칭기즈칸 가문이 주도하던 몽골 부족하고는 경쟁관계였다. 칼미크 공화국은 지금도 러시아 연방 공화국 안에 존재하며, ˝티베트 불교˝를 믿는 가장 서쪽 지역이다.)이기 때문에, ˝같은 민족의 피˝를 가진 인물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1991년 소련 해체의 원인과 그 의의를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적으로 분석한 책은 아래와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 지인이 발제하다가 몇가지 오역이 있어서 참고하시라고 공유합니다.

그리고 제 생각은 고한은 왠지 쿨리를 번역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쿨리는 고된 노동하는 중국인 이주노동자를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40쪽 두번째 문단
"자유주의적 질서의 본질인 노동의 소외와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극복한다는 것"
-> "자유주의적 질서의 본질인 노동의 소외와 유적존재로서의 인간의 소외를 극복한다는 것"
- P40

"하인들이나 농업 노동자들 ... 과 달리, 고한 노동자들은"
-> "하인들이나 농업 노동자들 ... 과 달리, 착취공장(sweatshop) 노동자들은"
- P75

마찬가지로 76쪽 위에서 두번째 줄의 "고한 사회주의" 또한 "착취공장 사회주의"로 바꿔야될 것 같은데, 어감 문제 때문에 부득이하게 심신이 고되다는 의미의 "고한"을 쓴 것 같습니다. - P7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3세계의 붉은 별 - 러시아 혁명은 제3세계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비자이 프라샤드 지음, 원영수 옮김 / 두번째테제 / 201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투르케스탄(중국 신장과 러시아령 중앙아시아)

10월 혁명은 확실히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등 도시에서 시작됐다. 그렇지만 1916년 1월 카자흐 스텝 지대와 투르케스탄에서 중앙아시아 민중을 쓸모없는 유럽 전쟁에 징집하려는 차르의 시도에 맞선 소요가 일어났다. 페르가나 계곡과 카자흐와 키르기즈 지억에서 민중은 러시아계 정착민을 공격한 다음 대규모로 중국의 신장으로 도망쳤다. 반군주제 사상에 뿌리를 둔 중국의 비밀결사들이 중앙아시아에 침투해 있었다. 그런 결사 중의 하나가 가로회였는데, 이들은 주오종탕의 후난 군대에게 밀려 신장으로 쫓겨났다. 가로회의 회원 가운데 한 명이 마오쩌둥의 핵심 장군인 주더였다. - P73

주더는 공산당에 가입할 때까지 가로회의 스촨 지부 대장로였다. 가로회와 홍창회는 중앙아시아의 중국 사이에서 이동하면서 차르를 타도해야 한다는 사상을 설파했다. 10월 혁명은 그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 뿐만 아니라 카라콜(Qaraqol: 키르기스스탄 동부에 위치한 도시)에도 기원을 뒀다.
이 지역의 많은 러시아계 정착민들은 주변의 반란에 불안을 느껴 10월 혁명을 타도하려는 백군에 가담했다. 소비에트는 투르케스탄의 상황을 조사할 위원회를 파견했다. 위원회는 옛 차르 관료들을 이 지역에서 제거하고, 러시아계 정착민들의 식민주의적 태도를 제거해야 하며, 중앙아시아인들의 낡은 봉건제적, 가부장제적 태도와 투쟁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투르케스탄과 모스크바 사이의 긴장이 고조됐다.
(중략)
레닌은 지역 공산주의자들이 모스크바의 동지들보다 더 나은 지역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다. - P7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즈베크어 표준 교재 A1 우즈베크어 표준 교재
Mashrabbekova Aziza.이지은 지음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즈베크어 소개

우즈베크어는 투르크어의 일종이다. 투르크어 계통에는 터키어, 아제리어, 투르크멘어, 카자흐어, 키르기스어, 타타르어, 위구르어 등이 있는데, 전 세계 약 1억 5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사용한다. 이 중 우즈베크어와는 위구르어(중국 신장위구르 자치구에 거주하는 위구르인의 모국어)가 가장 비슷하다. 이들 투르크어 계통 언어들은 서로 공통된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문장 구조‘이다. 이들 언어를 소위 "교착어(膠着語)"라고 부르는데, 명사와 동사 원형에 접미사를 붙여 문법적 기능이 표현된다. - P18

우즈베크어 사용 인구는 약 3,300만 명으로 주로 우즈베키스탄에 거주하며, 그 밖에도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아프가니스탄(제3위 공식어)에도 우즈베크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있다. 우즈베크어 어휘에는 아랍어와 페르시아어가 많이 발견되며, 또한 소련의 통치를 받을 당시 러시아어에서 가져온 단어(행정 및 과학 관련 용어)들도 많이 찾을 수 있다. 1991년 독립 이후 우즈베키스탄은 이러한 러시아어 단어들을 우즈베크어로 바꾸는 작업을 정부 차원에서 추진하고 있다. - P19

우즈베크어 표기 변천사

우즈베크어는 20세기에만 여러 차례 표기 문자가 바뀌는 경험을 했다. 1923년까지 우즈베크어는 수 세기 동안 중앙아시아 언어들의 표기 문자였던 아랍어 문자에 수정이 이루어졌다. 이후 1929년 라틴 문자로 대체되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1940년 키릴 문자가 우즈베크어 표기 문자로 채택되었다. 이후 약 50여 년이 지난 후인 1993년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라틴 문자를 우즈베크어 공식 표기 문자로 선언했다.
이 교재에서는 1996년 최종 수정을 거친 새 라틴 문자를 사용하여 우즈베크어를 설명하고 있다. 이미 영어나 그 밖의 라틴 문자를 익힌 이들에게는 우즈베크어를 라틴 문자로 배우는 것이 키릴 문자로 배우는 것보다 쉬울 것이다. 그렇지만 현재도 많은 전문 서적과
- P20

문학작품 및 사전들은 키릴 문자로 출판되기 때문에 고급 수준으로 갈수록 키릴 문자에 익숙해지는 것 역시 우즈베크어를 배우는 데 필요하다.
라틴 문자로 표기된 우즈베크어 문자 순서와 키릴 문자로 표기된 우즈베크어 문자 순서가 서로 다르니 각각 어떤 순서로 구성되어 있는디 확인할 필요가 있다. - P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도와 네루에 대한 내용

1920년 레닌은 동쪽을 바라보며 ‘거기에서 소비에트가 가능하다. 그것은 노동자 소비에트가 아니라, 농민 소비에트 또는 - P65

노력자 소비에트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중략) 소비에트 연방 내의 망명자들이 참여한 인도혁명협회Indian Revolutionary Association는 레닌에게 노트를 보냈다. ‘인도 혁명가들이 모든 피억압 계급과 민족의 해방, 특히 인도의 해방을 위해 소비에트 러시아가 수행한 위대한 투쟁에 대한 깊은 감사와 찬양을 표현한다.‘고 협의는 결의했다. 레닌은 이 결의안에 대한 답변을 썼고, 그것은 5월 10일 방송되었다.

노동자, 농민 공화국이 선포한, 외국, 토착 자본가의 착취로부터 피억압 민족의 자결과 해방 원칙이 자유를 위해 영웅적인 투쟁을 수행하고 있는 진보적 인도인 사이에서 그렇게 열렬한 반응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기쁘다. 노동 민중의 조직과 규율, 그들의 인내와 세계 노동 민중과의 연대는 궁극적으로 승리를 담보한다. 우리는 무슬림과 비무슬림 사이의 긴밀한 동맹을 환영한다. 우리는 이 동맹이 동방의 모든 노력자들에게 확대되기를 진심으로 원한다. 인도, 중국, 조선, 일본, 페르시아, 터키의 노동자와 농민들이 서로 손을 잡고 해방이란 공동의 대의를 향해 함께 행진할 때에야 비로소, 오직 그럴 때에만 착취자에 대한 결정적 승리가 확보될 것이다. 자유 아시아 만세! - P66

인도 국민회의의 지도자인 자와할랄 네루가 소비에트 연방 건국 10주년 행사를 위해 그곳에 도착했다. (중략) 러시아가 네루의 관심을 끈 것은 인도와 소비에트 연방 둘 다 민중의 자유에 장애물인 빈곤과 문맹에 갇힌 농민 국가였기 때문이다. 1927년 네루를 더 놀라게 한 것은 자신이 상상한 것보다 러시아에 빈곤이 더 적었을 뿐 아니라 그 지도부가 노동자, 농민 츨신었다는 사실이었다. 네루가 만났던 미하일 칼리닌Mikhail Kalinin은 농민 가족 출신으로 나중에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원수가 됐다. 정부 수반인 이오시프 스탈린은 구두공과 하녀 가정 출신이다. - P67

네루는 소비에트 러시아가 소비에트연방이 배고픔과 빈곤에 맞서 커다란 성과를 거뒀고, 농민의 권력과 존엄을 증대시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중략) 건국 10년 내에 소비에트 연방은 극단적 후진성에서 경제 사회적으로 안정된 상황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중략) 네루의 관심을 끈 것은 농민에게 훨씬 풍요로운 사회 생활의 모습이었다. - P68

소비에트 연방에서 토착화Korenizatsiya 정책을 추진해 사람들이 러시아어만이 아니라 자기 모국어의 지식과 지혜를 발전시킬 수 있도록 장려했다는 사실도 언급힌 필요가 있다. 그런 진보가 ‘농민 사회‘에서 일어났다. 이에 비해 인도의 문자해독률은 영국에게 식민 지배를 받은 2세기 가까운 기간 동안 12퍼센트에 머물렀다. - P70

젊은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를 포함한 국민회의의 급진파는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들에게 토지소유권을 주고 농민들에게 토지소유권을 주고 농민들이 지대가 아니라 세금을 납부할 것을 주장했다. 네루는 《소비에트 러시아》Soviet Russia(1927)에서 당시를 회고하면서, "비록 간디의 영향 아래 있었지만, 우리는 다른 경로를 추구했고, 우리는 레닌의 모범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썼다. - P4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