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14일
The early 1970s - the very highpoint of radical dissent - also saw the first glimmerings of the postmodern culture which was eventually to take over from it. The halcyon days of cultural theory lasted until about 1980 - several years after the oil crisis which heralded a global recession, the victory of the radical right and the ebbing of revolutionary hopes. Cultural theory was cut loose from its moment of origin, yet tried in its way to keep that moment warm. Like war, it became the continuation of politics by other means. The emancipation which had failed in the streets and factories could be acted out instead in erotic intensities or the floating signifier.(29) Discourse and desire came to stand in for the Godard and Guevara that had failed. At the same time, some of the new ideas were the first straws in the wind of post-political pessimism which was about to blow through the West.(29-30)
- Terry Eagleton, 2003, 『After theory』
급진적 반체제 인사들이 인기를 누리던 1970년대 초는 곧 그 인기를 이어받게 될 포스트모던한 문화가 희미하게나마 처음 빛을 발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문화이론의 태평성세는 1980년경까지, 그러니까 전지구적 경기 침체, 극우파의 득세, 혁명을 향한 꿈의 퇴조 등을 예고했던 석유 파동 이후의 몇 년까지 쭉 이어졌다. 문화이론은 자신이 태어났던 시기와 단절했지만 그 시기를 자기 식대로 계속 간직하려고 애썼다. 마치 전쟁처럼, 문화이론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 되어갔다.(49) 해방[또는 해방을 향한 열정]은 거리와 공장에서 실패했지만, 그 대신에 에로틱한 강렬함이나 부유하는 시니피앙 안에서 재연될 수 있었다.(49-50) 담론과 욕망이 좌절한 고다르와 게바라의 대역이 되어준 것이다. 이와 동시에 몇몇 새로운 사상은 머지않아 서구를 휩쓸게 될 탈정치적 염세주의의 등장을 알려주는 최초의 조짐이 되어갔다.(50)
-테리 이글턴, 『이론 이후』, 2010
급진적 반체제 인사들이 인기를 누리던 1970년대 초는 곧 그 인기를 이어받게 될 포스트모던한 문화가 희미하게나마 처음 빛을 발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문화이론의 태평성세는 1980년경까지, 그러니까 전지구적 경기 침체, 극우파의 득세, 혁명을 향한 꿈의 퇴조 등을 예고했던 석유 파동 이후의 몇 년까지 쭉 이어졌다. 문화이론은 자신이 태어났던 시기와 단절했지만 그 시기를 자기 식대로 계속 간직하려고 애썼다. 마치 전쟁처럼, 문화이론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 되어갔다.(49) -테리 이글턴, 『이론 이후』, 2010 - P49
해방[또는 해방을 향한 열정]은 거리와 공장에서 실패했지만, 그 대신에 에로틱한 강렬함이나 부유하는 시니피앙 안에서 재연될 수 있었다.(49-50) 담론과 욕망이 좌절한 고다르와 게바라의 대역이 되어준 것이다. 이와 동시에 몇몇 새로운 사상은 머지않아 서구를 휩쓸게 될 탈정치적 염세주의의 등장을 알려주는 최초의 조짐이 되어갔다.(50)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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