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이전 계급사회가 "비경제적 강제력"에 의존했다고 말했다. 고대 노예제와 중세 봉건제는 둘 다 부자유 노동을 착취하는 데 기초를 뒀다. 노예의 지위는 로마인들이 ‘말하는 도구‘라고 부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일종의 재산이었다. - P52
이런 사회는 위계적으로 조직됐고 사람들이 법률로 불평등하게 - 고대 사회에서는 시민과 노예(사실 시민도 부자와 빈자로 구분됐다), 중세 유럽에서는 신분으로- 구분돼 있었다. 이는 사회에서 일어난 착취의 성격을 반영했다. 눈에 빤히 보이고, 체계적이고, 법률적으로 뒷받침된 불평등이 자본주의 이전 사회의 표준이었다. - P53
노동자와 자본가는 법률적으로 동등한 존재로 노동시장에 마주 선다. 노동자는 자기 노동력을 판매하지 않을 자유도 있다(그러면 굶든지 실업수당을 받든지 해야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노동시장을 가리켜 "그야말로 천부인권의 지상낙원"이고 "자유, 평등, 소유, 벤담의 배타적 영역"이라고 했다. [자본주의에서] 착취는 "생산이라는 비밀 장소"에서만 일어난다. - P55
그러나 역설이 있었다. 자본주의는 자유로운 임금노동을 착취하는 체제인데, 그런 자본주의가 성장의 결정적 국면에서 식민지 노예 사용으로 어마어마한 이득을 봤다는 것이다. 이런 역설은 산업혁명기로 접어들 때까지도 계속됐다. (중략) 바로 이런 맥락에서, 흑인은 인간 이하의 존재고 그러니까 평등한 대우(당시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릴 권리로 인 - P56
식돼 갔다)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사상이 단단히 자리잡기 시작했다. 바버라 필즈는 "인종 이데올로기"가 특히 미국 남부의 "백인 자영농" 사이에서 힘을 얻었다고 주장한다. - P57
노예무역은 물론이고 노예제도 자체를 폐지하라는 압력이 성장하자 에드워드 롱 같은 인종차별 이데올로그들이 나서서 서인도제도의 대농장주를 방어했다. 인종차별 이데올로기는 노예제도가 폐지된 뒤로도 살아남았고, 오히려 19세기에 이론적으로 더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다윈의 자연선택론을 저속하게 해석한 것을 기초로 해서 사이비 과학인 인종생물학이 등장한 것이다. 이 사이비 과학의 탄생은, 처음에 인종차별을 낳은 기이한 예외 사례가 다른 형태로 변모해 계속된 상황, 즉 한 줌 밖에 안 되는 유럽 강대국들(과 유럽화된 미국과 러시아)이 나머지 세계를 지배하게 된 상황을 반영한 일이었다. 아시아인과 아프리카인은 백‘인종‘의 통치를 받기에 적합한 생물학적 형질을 타고났고 백인은 열등한 인종의 이익을 위해 세계를 통치할 의무가 있다는 사상이 그런 사태 전개를 정당화해 줬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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