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서랍 - 이정록 산문집
이정록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사실 나는 이정록이라는 시인을 몰랐는데 글샘의 서재에서 이 책의 리뷰를 읽고 뭔가 사람냄새가 나는, 내 정서와 맞는 책일 것 같아서 구입하게 되었다.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 밥상머리에서는 주로 시인의 가족사에 대한 부분이 나온다. 시인의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누나 등 시인의 정신세계와 시에 영향을 미쳤을 가족사가 나온다. 어떤 대목에선 구수하고 어떤 대목에선 뭉클하기도 한 이야기들이었다.

시인의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은 어떤 철학자의 말보다 우리를 사색하게 한다.

 

"인생 농사도 그늘 농사라고 혔지. 아내 그늘, 자식 그늘, 지 가슴속 그늘! 그 그늘을 잘 경작혀야 풍성한 가을이 온다고 말이여."

"그늘이 짙으면, 노을도 되고 단풍도 되는 거여. 사과도 홍시도 다 그늘이 고여서 여무는 거여. 뭣도 모르는 것들이 햇살에 익는다고 허지. "

 

내 눈이 번쩍 뜨인 부분은 3부 <시 줍는 사람>인데 이 글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글이라고 하는 걸 봐서 시문학 공부를 하는 후배들을 위해 쓴 글인데, 작가의 언어 하나하나가 살아 있고 깊이가 있음에 놀랐다. 처음엔 작가가 일상적인 소소한 삶의 단상을 시로 쓰는 소박한 시인일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정말 작가의 시정신의 깊이가 깊고 날카롭다.

작가는 '시인은 설렘과 그늘에 민감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데 나도 그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늘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목탁 속 어둠 같은 것.

뻥뚫린 고목의 내부에 서려 있는 어떤, 없음의 두께

텅 빈 부재의 숨소리.

벌레 먹은 나뭇잎을 막 빠져나온 햇살이 아래 잎에 하염없이 부딪치다가 어쩔 수 없이 나무 밑에 내려놓는 것.

먼 길 달려온 햇살이 자신의 무릎을 접어서 한 그루 나무 앞에서 기도할 때, 그 햇살과 고목이 한꺼번에 뽑아내는 한숨 같은 것.아, 뜬구름 잡고 비를 만드는 이 물컹거리는 언어들에도 그늘은 있죠. 어둠의 골짜기를 따라 내려오면, 세상 모든 그늘은 내 발밑으로 수렴되지요 내 발바닥에서 발산되는 어둔 햇살들.

 

다음과 같은 고백에서 결코 무뎌디지 않으려는 시인의 시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결의를 놓치면 흩어져버리는 게 마음이지요 좋은 게 좋다고 느끼는 순간, 타락의 수챗구멍에 처박히고 말죠. 모나게 살자! 다짐해도 세상에 모서리가 가장 부드러운 곳이라서 금세 어쭈구리가 되지요. 하지만 냉기만으로는 안 되죠. 서리 매운 새벽의 차고 맑은 모래를 감싸는 샘물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솟죠.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어느 나무에 붙은 커다란 흠집인가? 어느 하늘의 샘 줄기에서 떨어져 나온 잔모래인가? 내 시가 내 그림자와 그늘의 테두리 안에서 잔물결로 번져나가길 바라죠.

 

모나게 살자

샘이 솟는 곳

차고 맑은 모래처럼

 

모서리마다

빛나는 작은 칼날

찬물로 세수를 하며

 

서리 매운 새벽

샘이 솟는 곳

차고 맑은 모래처럼

 

      <나에게 쓰는 편지> 전문

 

작가의 글에는 작가의 소망대로  충청도 사투리처럼 '능청과 해학이 의뭉하게 넘실거리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작고 평범한 것들을 '물끄러미' 관조하며 느끼는 따스함과 서늘함의 통찰이 있고, 그 속에서 작은 우주를 발견하는 시인의 날카로움과 동양철학적 깊이가 있다.

<시인의 서랍>엔 무엇이 들어 있나 대강이나마 살펴 보았으니 이젠 같이 산 시집, <정말>과 <의자>도 빨리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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