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 정원 9

--번짐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채 번져서

봄 나비 한마리 날아온다

 

 

 

 강 1

   ㅡ흘러감

 

어느 깨달음이 저보다 더 예쁜 자세가 될 것인고

무엇이 저렇듯 오래 젊어서 더더욱 찬란할 것인고

강을 건너는 것이 어디 나뭇잎들이나

새들뿐이던가 봄이나 안개들뿐이던가

저 자세

저ㅡ 밑바닥에서 지금 무엇이 가라앉은 채 또한 강을 건너고 있는지

때로 강의 투명은 그것을 보여주려는 일

이 세상에 나온 가장 오랜 지혜를 보여주려는 일

 

가장 낮은 자가 가장 깊이 삶을 건너는,

가장 가벼운 자가 가장 높이 이승을 건너는,

 

어느 깨달음이 저보다 더 어여쁜 자세가 될 것인고

 

 

 

해남 들에 노을 들어 노을 본다

 

이 세상에 나서 처음으로

해남 들 가운데를 지나다가

들판 끝에 노을이 들어

어찌할 수 없이

서서 노을을 본다

노을 속의 새 본다

새는

내게로 오던 새도 아닌데

내게로 왔고

노을은

나를 떼매러 온 노을도 아닌데

나를 떼매고 그러고도 한참을 더 저문다

우리가 지금 이승을 이승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저 노을 탓이다

이제는 이승을 이승이라고 부르지 말자고

중얼거리며

조금씩 조금씩 저문다

해남 들에 노을이 들어 문득

여러날 몫의 저녁을 한꺼번에 맞는다

모두 모여서 가지런히

잦아드는 저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가슴속까지 잡아당겨보는 일이다

어쩌다가 이곳까지 내밀어진 생의 파란 발목들을

덮어보는 일이다

그렇게 한번 덮어보는 것뿐이다

내게 온 노을도 아닌데

해남 들에 뜬 노을

저 수천만 평의 무게로 내게로 와서

내 뒤의 긴 그림자까지 떼매고

잠긴다

(잠긴다는 것은 자고로 저런 것이다)

잠긴다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에서 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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