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의 사전 - 브리태니커와 구글에도 안 나오는 인류 지식의 최신 보고서
카트린 파지크.알렉스 숄츠 지음, 태경섭 옮김 / 살림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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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이 자신의 무지를 '자인'. 혹은 '수긍'한다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무지'를 수치스럽거나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아직도 많은 부분이 미스테리한 부분으로 남아있다. 가령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와 같은 약간은 우스갯소리 같은 이 명제도 보통사람들은 명쾌한 답을 내기기가 힘들다. 그리고 세상에는 이런 '달걀과 닭의 선후문제'처럼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하지만 알고싶어 하고 궁금해하는 문제들은 너무나도 많다.

 

[무지의 사전]은 2005년 [사이언스]지가 발표한 '해명되지 않은 문제들'의 일부와 21세기의 연구를 위한 중요한 문제들이 수록되어있다. 하지만 여기에 수록된 문제들은 '닭과 달걀의 선후문제'와는 달리 꽤나 전문적이고 심오하다. 예컨데 근시와 냄새와 같은 항상 우리가 곁에 접하고 생활하는 그런 문제의 경우에도 우리는 불편함과 같은 감정을 느끼지만 한번도 '왜?'라는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근시는 왜 발생하는지'에 대한 접근은 굉장히 전문적이다. 사실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이야 '근시는 불편하다'는 생각을 하지만 '근시는 왜 생기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지 않은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 이러한 문제들은 '발생 후'에는 불편함을 느끼지만 불편함을 느끼기 전인 '발생 전'에는 전혀 남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무지의 사전]은 꽤나 심오하고 전문적이다. 다시말해 읽기가 수월하고 재미있는 책은 아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의문을 가지기 마련이지만 몰라도 살아가는데에 별 지장이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굳이 읽으라고 권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바로 사람들 스스로가 '무지'에 대해 인정하고 그 '무지'를 알고 깨우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사는데 별 지장은 없는 문제이지만 '무지'는 과학자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정복욕'혹은 '지식욕'에 불을 질렀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많은 사람들의 '무지'는 '깨우침'으로 정복되어가고 있다. 이 세상에서 '돈'보다 '명예'보다 더 가치있고 귀한 것이 바로 '지식'이다. 때문에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지식을 얻기위해 노력한다면 세상을 살아가는데에 있어서 굉장히 값어치있는 것을 얻게되는 것과도 같다. 세상의 누군가는 '무지'를 인정하고 '깨닫'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것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꽤나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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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가미 일족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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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의 영화 그리고.. 5편의 드라마
한 편의 소설이 3편의 영화와 5편의 드라마라는 배다른 형제를 낳았다. 모두들 한 편의 소설이 혹은 만화가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영화나 드라마로 영상화되는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다들 알고 있다. 원작을 가진 영화나 드라마의 경우, 원작의 스토리를 그대로 따라가면 ’원작과 너무 똑같아 재미가 없다’는 소리를 듣기마련이고, 원작과 전혀다른 오리지널 스토리로 극을 꾸려갈 경우 ’원작을 무시했다.’는 소리를 듣기 일쑤이다. 더군다나 그 원작의 인기와 유명세가 높을수록 영화나 드라마에 거는 기대와 반감은 그 인기에 비례해서 커지기 마련이다. 요컨데 인기있는 원작을 영상화하려고 한다는 것은 일종의 ’계륵’과도 같은 것이다. 너무나 좋은 작품이기에 그 작품이 탐이 나기는 하지만 새롭게 영상으로 옮기기에는 원작의 팬들에 대한 기대와 반대가 너무 큰, 그야말로 계륵, 그 신세인 것이다. 하지만 일본 열도에 일약 ’요코미조 세이시 붐’을 일으켰던 [이누가미 일족]은 무려 8번이나 영상으로 옮겨져 독자와 관객, 시청자를 만났다. 과연 그렇게 끊임없이 영화와 드라마의 열렬한 프로포즈를 받았던 [이누가미 일족]은 얼마나 대단한 매력을 가진 작품일지 관심이 가는 것은 당연했다.

 

탐욕과 복수를 부르는 유언장

[이누가미 일족]은 이누가미 가문의 수장이자 대부호인 이누가미 사헤의 죽음과 남겨진 유언장에서 시작된다. 부모도 고향도 그리고 자신의 본명도 모른채 마을로 마을로 흘러들어와 자수성가한 이누가미 사헤는 그야말로 엄청난 유산의 행방을 함구한 채 눈을 감는다. 그리고 남겨진 사헤의 세 딸과 그녀의 아들들, 그리고 천애고아 사헤를 거둬준 노노미야 다이니의 손녀, 다마요를 둘러싼 탐욕으로 뒤덮힌 끔직한 사건들이 시작된다.

 

전쟁으로 떠났다 얼굴에 큰 상처를 입고 돌아온, 그래서 얼굴을 항상 마스크와 복면으로 가린 첫째손자. 이누가미 스키케요.

무슨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없는 의뭉스런 둘째손자. 이누가미 스케타케.

그리고 가볍고 간사스러운 셋째손자. 이누가미 스케토모.

그리고 사헤의 은인에 대한 보은의 의미인지, 자신과는 상관없이 유상의 행방에 키를 쥐게 된 다마요.

 

스키케요의 귀환으로 그동안 비밀에 쌓여있었던 유언장이 공개되고 세간의 관심이 이누가미가로 쏠린다. 과연 다마요는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하지만 유언장 공개전의 불미스런 사건이 이미 예견했던 듯 이누가미가는 유산을 향한 당사자들의 탐욕과 피비릿내로 휩싸이게 된다. 그리고 연이어 일어나는 괴이한 살인사건과 이누가미가의 부를 상징하는 ’요키(도끼), 고토(거문고), 기쿠(국화)’와의 묘한 연관관계, 그리고 난잡한 사헤의 과거가 한데 얽혀 사건은 점점 미궁으로 빠져든다.

과연 살인자는 누구이고, 유산은 누가 상속받을 것인가. 그리고 과연 가면 속의 스키케요는 진짜 스키케요일 것인가.

 

과연 요코미조 세이시의 대표작

일본에 ’요코미조 세이시’ 열풍을 불러왔던 [이누가미 일족]답다는 생각이 든다. 벌써 50년도 전에 쓰여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고루하지 않다. 사람의 일그러진 욕망과 그가 불러온 불운한 사건을 극적인 사건과 잘 어울려 풀어나가고 있으며, 전혀 쌩뚱맞지 않은 결말로 독자의 만족감을 충족시킨다. 50년 전에 쓰여진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지않게 글에서 흡입력이 느껴지며 느슨함이 없이 시종일관 팽팽하게 이야기를 전개해간달까?

책을 읽고난 후, 왜 [이누가미 일족]이 3번이나 영화화 되고 5번이나 드라마로 제작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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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의 동물원 - 꿈을 찾는 이들에게 보내는 희망과 위안의 메세지
박민정 지음 / 해냄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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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진 거의 매해 한 번씩은 서울에 있는 어린이 대공원을 찾았다. 모든학교가 왜 백일장 혹은 사생대회를 의무처럼 어린이대공원에서 여는지는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당시에 동물원은 나의 취향에 맞는 곳은 아니었다. 다양한 종류의 동물들과 그 배설물 특유의 냄새와 고르게 잘 다져진 땅바닥은 찾기 힘들었으며 무엇보다도 동물원은 우리집에서 너무나 멀었다. 아마도 그 나이또래의 여학생들에게 '동물원'이란 그다지 흥미있는 장소는 확실히 아니었다. 그래서 백일장을 가서도 대충 원고지 칸수를 맞춰 끄적거린 후 가방속에 넣어가져 온 만화책을 친구들과 돌려보곤 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만화책>>>>>동물원' 정도일까? 아무튼 유치원때에도 청소년이 되어서도 나는 그다지 동물원이라는 장소에 관심을 가져본 기억이 없다. 

하지만 [화요일의 동물원] 작가는 그다지 재미도 없어보이는 동물원을 4년이나, 그것도 찾는이가 거의 없다시피한 겨울에도 매주 화요일마다 찾아갔다. 과연 작가는 동물원이라는 그 장소에서 지루해보이기 짝이 없어보이는-표정의 변화가 없는 동물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떤 결론을 얻었을까?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언제 한번 동물원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원 그 특유의 쿰쿰한 냄새는 시간이 흘렀다해도 변하지 않았을 것이고, 운이 나쁘면 낙타나 라마가 뱉은 침이 한 두방울쯤 튈수도 있을 것이다. 그보다 덜 운이 나쁘더라도 주변의 아이들의 극성스러운 울음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 나쁜 상황들에도 불구하고 내가 동물원에 가볼까 마음을 먹게 된 것은 작가가 [화요일의 동물원]을 쓰게 만들었을 그 무언가에 대한 관심이며, 무념무상으로 보이는 동물들을 보면서 내머리속도 무념무상으로 비워내보고싶기 때문이다.

[화요일의 동물원]은 이솝우화를 떠올리는 짧막한 길이의 이야기와 그에 어울리는, 그 우화같은 이야기의 모티브가 되었을 한두편의 사진이 짝을 이루어 구성되어있다. 이솝우화는 재미있고 단순하며 읽기에 부담이 없다. 이런 장점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아주 어린시절부터 이솝우화를 읽는다. 하지만 이솝우화안에는 이야기의 단순함 정도와 유치함, 길이의 짧음에 상관없이 확실하고 중요한 주제를 가지고 있으며 읽는 이에게 교훈을 준다. 이솝우화가 도덕이나 윤리 교과서에 에피소드로 등장하는 이유도 바로 이때문이다.

[화요일의 동물원]안의 이야기도 이솝우화와 비슷하다. 동물원안에 옹기종기 모여사는 다양한 동물들이 바로 이야기의 주인공이고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너무나도 단순하면서, 때문에 잊고 지냈던 삶의 지혜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더불어 귀여운 동물들의 다양한 사진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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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못 타는 아이 - 라울 따뷔랭
장 자끄 상뻬 지음, 최영선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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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타 본게 언제 였더라... 싶다. 내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타봤던 자전거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세발 자전거였다.  동그란 바퀴가 셋, 운적석과 보조석이 달린 2인용 자전거. 멀리 밖으로 타고 놀러나간 기억은 없지만 좁은 마당 안에서도 뱅글뱅글 신나게 페달을 밟았던 것같다. 그리고 그 다음은 조그만한 보조바퀴가 달린 두발 자전거. 이 보라색 어린이-청소년용 자전거는 꽤나 오랫동안 우리집 마당 한켠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햇빛은 받아 은빛으로 눈부시게 빛나던 자전거의 몸체게 누렇고 거칠은 녹이 끼고 어느샌가 사라졌다. 그 후로 나는 자저거 타는 방법을 잃어버렸다. 친구들과 함께 찾은 여의도공원에서, 친척들과 함께 간 유원지에서 매번 자전거타기에 도전했지만 매번 그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언제부터 자전거타는 법을 잊어버린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저 막연한 생각에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자전거에 대한 열정과 관심이 식어가던 그 순간부터 자전거 타는 방법도 서서히 잊혀진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나는 '자전거를 못 타는 아이'에서 '자전거를 못 타는 사람'이 되었다.

 

장 자끄 상빼의 [자전거를 못 타는 아이]는 제목처럼 자전거를 타지 못하는 '라울 따뷔랭'이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따뷔랭'은 어린시절부터 겁이 없고 장난기 많기로 유명한 아이였다. 하지만 그가 딱 하나 못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자전거타기! 다른 친구들이 두 손을 놓고 겁없이 자전거를 씽씽 타고 달릴때에도 '따뷔랭'은 그저 부러워하며 자신의 비밀-무려 그 장난기 많고 활발한 '따뷔랭'이 자전거도 못타다니!-을 숨겼다. 자전거 타기는 '따뷔랭'에게 있어 극복할 수 없는 하나의 '비밀'이자 '컴플렉스'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어른이 된 '따뷔랭'의 직업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자전거수리공'이다. 어린시절부터 자신을 번번이 좌절시켰던 자전거에 대해 세심한 관심을 기울였던 '따뷔랭'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따뷔랭'이라고 부를만큼 자전거를 잘 아는 자전거박사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가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는 것은 다른사람들에게 밝히지 못할 비밀이었다. 하지만 어느날 마을에 사진작가 '피구뉴'가 찾아오면서 '따뷔랭'은 자신의 비밀에 관한 답답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한 가지씩 비밀을 안고 살아간다. 그 비밀이 중요한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간에 그 비밀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은 당사자에게 커다랗고 무거운, 때로는 두근거리는 일이다. 어느 누군가에게 있어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는 사실은 별다른 비밀이 아닐 수 있다. 누군가는 "그따위게 뭐 대수라고"할 수도 있다. 하지만 '따뷔랭'에게 있어서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는 것은 그의 거의 평생동안 지켜온 비밀이고, 더군다나 '자전거 박사'가 되어버린 현실에서는 더더구나 남들에게 말로 전하기 창피한 비밀이다. 때문에 '따뷔랭'은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비밀을 가진 사람들이면 누구나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 전전긍긍하듯이, '따뷔랭'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가 자전거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자전거수리에 대해 모르는게 없어진 것도 바로 그런 비밀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결과인 것이다. 때문에 그의 비밀은 점점 더 세상에 밝힐 수 없어진다.

그것은 '피구뉴'또한 마찬가지이다. '따뷔랭'의 마을에서 '피구뉴'는 사진을 잘 찍는 사람으로 소문이나 사람들은 사진을 '피구뉴'라고 부를 정도다. 하지만 그는 번번히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지 못하고 그 사실은 '피구뉴'에게 컴플렉스가 된다. 이렇게 각자의 컴플렉스를 가진 두 사람이 만들어낸 그 순간 - '따뷔랭'이 자전거를 타고 미친듯이 언덕을 내려오는 순간을 '피구뉴'가 멋지게 포착한 순간-은 세상사람들에게 '걸작'이라는 칭송을 받고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자전거를 못 타는 아이]는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짧고 평범한 이야기가 꽤나 많은 것을 독자에게 전해주는 듯 하다. '비밀'이나 '컴플렉스'의 상대성과 무언가를 숨겨야 한다는 상황이 불러오는 답답함, 그리고 숨겨왔던 사실을 용기내어 말했을때 오는 그 속 시원함.

장 자끄 상빼의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있었지만, [자전거를 못 타는 아이]가 내가 읽은 그의 첫 작품이다. 그냥 삽화가 많이 들어간 '그림책'일 것이라 생각하면서 읽기 시작했지만 , 곧 짧고 소소한 이야기를 섬세하고 따뜻하게 풀어나가는 그의 매력에 푸욱~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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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북하우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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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다 지로의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은 너무나도 직설적인 이야기 이다.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이란 명패를 내 건 한 권의 책 안에는 책의 제목만큼이나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7가지의 이야기가 옹기종기 모여 세를 내고있다. 이 7편의 이야기는 너무나 신비롭기 그지없다.

세상과의 모든 연이 끊어져 외롭고 외로운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한 여인의 팔에 묶여있던 붉은 끈, 실패한 가장의 가족에 대한 미안한과 책임감이 만들어낸 도플갱어, 죽은 영혼을 맞이하는 마중불과 한 남자의 과거…….

 7편 모두 슬픔과 공포, 그리고 아련함의 경계가 모호하다. 연인을 먼저 보내야하는 여인의 이야기는 슬프지만 그녀가 죽음을 기다리며 참아야하는 고통은 무섭다. 그리고 전쟁통에 자신이 죽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두고 온 아내를 기다리는 남편의 혼령은 무서우면서도 아련하다.

 죽음과 미스터리함이 뒤섞인 이 이야기들은 무섭지만 끔찍하게 무섭지도 않고, 슬프지만 지독하게 슬프지도 않다. 마치 소금간이 덜 된 국을 맛보는 것처럼 밍밍한 듯 하지만 그렇다고 무미(無味)는 아닌 그런 아련함이 있는 이야기들이다. 이렇게 약간은 무섭고 약간은 슬프면서 또 아련한 이야기들은 아사다지로의 능청스러운 이야기 서술 능력과 만나 좀더 신비로운 색채를 띄게되었다.

 

여름의 무더운 밤, 낮 동안 뜨겁게 달궈졌던 아스팔트가 간간히 부는 밤바람에도 식지 않고 잠은 오지 않는 그런 밤, 그런 밤에는 기분을 시원하게해 줄 이야기가 그리워진다. 물론 머리채를 한껏 흐트러트린 귀신이 나오는 이야기도 좋고 한 맺힌 여인이 원한을 품고 복수를 하는 이야기도 좋다. 그저 읽는 것만으로도 체감온도가 내려갈 그런 이야기가 열대야가 극심한 여름밤에는 그저 그립다. 아사다 지로의 신작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은 그런 날 밤에 읽으면 좋을 소설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기묘한 이야기]라는 일본의 연작드라마가 생각났다.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된 이 드라마는 매회 독특하고 기발한 발상으로 시청자를 즐겁게 해준다. 캔에서 나온 미녀라던가 중세시대 에도에 떨어진 휴대전화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생각해 볼 기회조차 없었던 소재로 한 편의 이야기를 꾸려나간다. 아마도 이 [기묘한 이야기]라는 드라마도 일본의 전통적인 ’기이한 이야기-기담’에서 그 양분을 얻은 것은 아닐까? 아사다 지로의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또한 그러한 일본의 전통의 테두리 안에 조심스레 발을 담그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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