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청년 샤샤>
샤샤는 몹시 흥분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한다.
흥분한 모습이라고 했지만 그의 진짜 기분 상태는 모른다.
원래 태도가 그렇게 통통 튀는 타입인지. 동양인을 보는 순간 정말 흥분이 된 건지. 아님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긴장을 한 건지. 또는 그 날 기분 좋은 일이 있었던 건지. 그것도 아니면 너무 오래 기다려 반가웠던 건지. 그래서 드디어 임무를 완수했다는 기쁨에 그랬던 건지도.
샤샤는 집주인이 아니다. 집주인 안톤의 친구다. 어떻게 아느냐고? 숙소 계약은 안톤이란 남자와 이메일로 처리했다. 우리가 도착하는 날 안톤은 다른 지역에 있어 그의 친구가 맞이할 거라고 했다. 안톤이 우릴 속일 이유나 의도가 없었다면 샤샤는 안톤의 친구가 분명하다. 그리고 어쩌면 숙소 손님맞이가 처음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긴장하고 흥분했나보다. 아니 뭐, 자주 했을 수도 있지만 성격이 소심해서 그럴 지도 모르지. 아님 우리의 도착이 생각보다 늦어서? 빨리 끝내고 가야 할 일이 기다리고 있어서?
영어를 가장 잘하는 갈마가 선두에서 분투하고 있으니 난 뒷전에서 요런 생각이나 하고 있다. 하지만 직접 물어보지 않는 이상 처음 본 남자의 마음을 알 수는 없다.
하여간 샤샤의 흥분한 듯 발랄한 태도는 긴 하루에 지쳐있던 씨스뜨라의 기분까지 들뜨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나이는 많아야 25살 정도로 보이는 귀엽게 생긴 남자. 마치 발레리노처럼 몸매는 호리호리하고 동작은 춤을 추듯 가벼웠다. 샤샤는 이 방 저 방으로 다니며 집 구조를 보여주고 구비되어 있는 가전제품 사용법을 설명했다. 한 가지를 설명하고 나면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반듯하게 서서 질문이 없느냐고 물었다. 착한 학생이 좋아하는 선생 앞에서 최고의 예의를 갖춘 듯한 모습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상냥하고 친절했다. 밝고 귀여운 청년의 친절. 기분은 쉽게 전염된다. 호객 택시 때문에 조금은 의기소침해져있던 씨스뜨라의 기분을 부정에서 긍정으로 옮겨가는 중요한 역할을 그도 모르는 사이에 하고 있었다. 아니 러시아의 이미지를 바꾸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침내 샤샤가 책임을 완수했나 보다.
설명을 끝낸 그가 현관 문 앞에 섰다.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 채다.
이제 볼일을 끝냈으니 저는 물러납니다. 하는 태도다.
현관 앞에서 그가 다시 같은 질문을 한다. 두 손을 가슴에 모으며 하던 질문이다. 궁금한 것이 있느냐고.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든다. 이렇게 질문을 하라는데 누구도 질문을 하지 않는다. 우린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웃기만 한다. 너도 없냐? 나도 없다. 눈빛으로 그런 대화를 주고받을 뿐이다. 그 눈빛 속엔 누가 제발 질문 좀 하시오. 하는 소망도 숨어 있다. 그렇지만 누구의 입에서도 질문은 나오지 않는다. 말 없는 시간이 흘러간다. 친숙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선 3초만 말이 없어도 시간이 어색해진다.
샤샤도 그랬을지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가 아무리 상냥하고 친절하지만 친숙한 관계는 아니다. 그러니 편할 수는 없다. 일이 끝나면 가야 할 사람. 일이 끝났고 이미 불편이 시작되었고 그가 가는 일만 남았다. 현관에 서 있던 모두가 그렇게 느끼고 있었을지 모른다. 3초 후 샤샤는 작별 인사를 했고 우린 반갑게 인사를 받았으니까.
나가면서 현관문 여닫는 방법을 알려주는 걸 끝으로 샤샤가 떠났다.
무장해제.
샤샤가 나가자마자 씨스뜨라의 직립은 무너진다.
높새와 갈마는 소파를 차지하고 하늬와 난 침대에 퍼진다.
일단 숨 좀 돌리자.
말하지 않아도 그런 뚯이다.
한참 동안 말이 없다.
그래도 어색하진 않다. 조금 전 현관 앞에서완 아주 다르다. 이것이 바로 친숙하다는 증거다.
그새 하늬는 잠이 든다. 깊은 숨소리로 알 수 있다.
잠이 든 건 아니지만 셋은 조용히 누워있다. 하늬의 잠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30분이 지난다. 하늬의 호흡이 달라진다. 곧이어 몸을 뒤척이는 소리. 그걸 신호로 우리도 존재를 알리듯 몸을 움직인다. 7시가 지나고 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 저녁을 먹어야 하고 내일 아침거리를 마련해야 한다. 어둡기 전에 상점에 다녀와야 한다. 샤샤가 말한 대로라면 상점은 5분 거리에 있다.
우리 정말 웃긴다.
그 말을 하며 내가 웃음을 터뜨린다.
분명 저녁 일정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엉뚱하다. 그리고 말대로 정말 웃음이 터진다. 물론 생각의 흐름을 찬찬히 되짚어 가보면 웃음의 이유가 밝혀진다. 그러니 결과는 엉뚱해도 과정은 논리적인 것이다.
어둡기 전에 상점을 다녀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행지에선 어둡기 전에 숙소로 돌아온다는 원칙을 지키는 편이었으니까. 어둠은 위험을 포함하고 있었고, 위험? 이란 생각 뒤에 호객 택시가 떠올랐다. 우리가 구호처럼 위험하니 타지 말자던 호객택시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여행 첫날 바로 실천에 옮겨버렸으니 웃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왜 그래?
하는 표정이지만 모두 웃을 준비가 된 얼굴이다. 웃음은 전염성이 강하니까.
호객 택시 말이야.
더 이상 내가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모두가, 왜 그걸 잊어버렸지? 하며 박장대소한다. 갈마는 웃다가 기침을 하고 따뜻한 물을 마셔야겠다며 일어나 주방으로 간다. 주방으로 갔던 갈마가 곧 다시 돌아온다.
우리가 실수한 게 많네.
또 뭐? 하는 표정으로 모두 갈마를 바라본다.
샤샤가 그렇게 질문할 게 없냐고 했는데도 그 때는 생각도 안 나더니.
맞다. 그 때는 사실 질문할 게 없었던 게 아니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우리에겐 시간이 좀 많이 필요하다. 어느 새 그런 나이가 되어 있었다. 반응 속도가 상당히 느려진 것이다. 우리끼리 있을 땐 잘 느끼지 못하지만 나이대가 다른 사람들 속에선 확연히 표가 난다.
이런 말이 공감이 되지 않는 독자가 있다면 나이대가 다른 것이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나와 다른 신체를 체감한다는 게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해를 하자면 할 수는 있다. 서너 살짜리 아이와 여든이 넘은 노인이 사탕껍질 까는 걸 유심히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보고 있으면 몹시 닯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아직 근육이 덜 발달한 아이와 근육이 퇴화한 노인의 동작은 무척 닮았다. 나이가 든다는 것이 그런 것이다. 그걸 이해할 수 있으면 다른 것도 미루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모든 기능이 퇴화되는 것이니까. 보는 것도, 듣는 것도, 그리고 행동도. 유치원 아이들이나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에게 빠른 말투는 적합하지 않다. 노인에게도 그건 마찬가지다. 물론 아직 그 정도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만 적어도 20년 전과 같지는 않다. 나의 몸이 겪는 일이니 나는 잘 알고 있다.
한꺼번에 많은 일을 동시에 처리할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도 실수 없이. 그러다 동시에 처리는 할 수 있지만 실수가 생기기 시작하고, 천천히 하나씩 하면 실수는 하지 않던 것이, 천천히 해도 실수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급기야 해야 할 일들이 깜박이는 별처럼 보였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보이는 것이다. 우스개로, 무얼 하다가 고개를 돌리지 말라,고 하기도 한다.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하던 일도 잊어버린다는 말이다. 우스개지만 정말 웃을 수 없는 말이 되어버렸다. 물론 천천히 시간을 두고 하면 많은 실수를 줄일 수가 있지만 모든 일을 혼자서 하는 건 아니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다. 특히 직장에서의 일은 보조를 맞추고 시간에 쫓기어 해야 하는 일투성이니까. 그리고 직장을 벗어난 사회도 마냥 느린 속도로 흘러가진 않는다. 오늘처럼 여행 중에도 말이다.
우리 모두는 문제 발견을 제 시간에 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았다.
샤샤를 하룻밤 재울 걸 그랬나?
조카라도 한 명 영입해야겠어.
우리 조카는 쉰이 넘었는데?
농담을 하며 모두 주방으로 간다. 가스불이 켜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돌아가며 점화 스위치를 돌린다. 점화가 되지 않는다. 10분을 술렁거리자 문제가 해결된다.
그렇지! 시간이 좀 걸릴 뿐이라니까!
본래 자동점화가 되지 않고 나오는 가스에 불을 붙여주어야 하는 레인지였다. 갈마가 서랍에서 라이터와 성냥을 발견하면서 알아챘다. 사실 자동점화 되지 않는 가스레인지를 쓰는 나라가 많았다. 여행 중에 종종 겪었던 일이다. 그런데 그것조차 빨리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반응 속도가 빠른 사람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분명 몹시 답답했을 것이다. 하긴 나도 여든이 넘은 어머니의 설거지는 답답하니까. 후후, 그러니 얼마나 다행인가. 닭장 속에는 닭들이. 경로당엔 노인들이. 그리고 이 곳엔? 씨스뜨라만 있으니까.
휴식으로 약간의 힘을 얻은 뒤, 하늬만 남고 장보기에 나섰다. 집을 비우긴 조금 불안하고 그렇다고 짐을 지고 나가긴 싫은 상태. 몽땅 나가려면 그래도 중요한 기본 짐들은 몸에 지니고 나가야한다는 생각은 같았다. 짐 벗은 지 얼마나 지났다고 또 짐을? 적어도 오늘은 더 이상 짐 지지 말자. 말하지 않아도 그랬던 모양이다. 다 나갈 필요는 없겠지. 두 팀으로 나누자. 그럼 당연히 갈마와 내가 당첨. 난 돈을 맡은 총무니 물을 것도 없고 갈마는 나 다음으로 젊다.
갈마와 내가 겉옷을 걸친다. 높새가 일어난다.
적어도 셋은 나가야지. 곧 해가 질 텐데. 8시가 다 되었어. 너희 둘은 러시아에선 어린이 취급 받을 지도 몰라. 그런 키도 키라고.
키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 러시아에서 10년만 자라도 나보다 클 것이다. 물론 갈마보다도.
셋이나 나갔지만 상점을 찾지 못했다.
동네엔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고 곧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샤샤가 말하는 슈퍼마켓이 있어야 할 곳으로 예상되는 곳을 세 번이나 돌고도 찾지 못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러시아에서 슈퍼마켓은 주로 반 지하에 위치해 있었다. 장소를 확실히 모르면 지나가더라도 발견하지 못할 확률이 높았던 것이다.
잘못하다간 길을 잃어버릴지도 모르겠더라고.
그건 숙소에 돌아와서 높새가 했던 말이다. 난 걱정도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길에 대해선 무지하니까. 그리고 인간 네비게이터와 같이 있었으니까. 무지하니까 한없이 평온했다. 그런데 높새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길을 찾아 돌아올 책임의 짐이 그녀의 어깨 위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멋모르는 말을 했고 높새가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난 걱정도 안했는데?
너도 참 어지간하다. 여긴 러시아라고. 그것도 방금 도착한. 더구나 해도 지는데. 밤엔 나도 길 찾기 힘들어.
저녁으로 누룽지를 끓여먹고 긴 하루를 마무리했다.
하늬가 비상용으로 가지고 온 것을 반이나 없앴다.
현미 누룽지를 만드는 공장까지 가서 사온 거라 했다.
빵 먹기 싫은 날의 대체 식품이라고. 가져오기도 좋고. 그냥 먹어도 되고. 끓여서 누룽지죽으로 먹어도 된다고. 햇반을 사오려다 그것보다 간편하고 가벼워서 선택한 거라고. 맞는 말이다. 밥이 주식인 민족에게 누룽지는 무척 편리한 휴대 식품이란 생각이 든다. 다음 여행을 떠날 땐 나도 누룽지 생각을 해볼 것 같다. 아님 누군가에게 요긴한 정보로 제공될지도.
아파트 난방이 너무 잘 되어 있다.
추울까봐 걱정하고 왔으나 더워서 답답할 지경이다.
숙소를 정할 때 고려 항목 1순위는 난방이었다.
우리나라처럼 실내 겨울 난방이 잘되어 있는 나라가 드물다. 겨울에 유럽 여행을 하면 실감할 수 있다. 체질적인 차이도 있겠지만 잠자리가 추우면 정말 힘들다. 러시아는 겨울이 긴 나라이고 혹한에 대한 대비가 잘되어 있을 거라는 예상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4월이나 5월이 여름이면 어떡하나. 그래서 이미 난방을 끊었다면? 뭐 이런 걱정까지 하면서 난방의 유무부터 살폈다. 그랬는데,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안톤의 집은 한여름이다.
덕분에 난 집에 있을 때보다 더 가벼운 차림이다. 그렇다고 더 쾌적하단 뜻은 아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좀 답답하다. 사람에게 딱 알맞은 환경의 조건, 참 까다롭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