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레메티예보 공항>

 

 

모스크바다.

모스크바 시간 오후 430.

새벽에 일어나 인천공항행 기차를 탔고, 다시 장장 10시간 가까이 비행기 속에 있었다. 고국은 지금 어둠에 덮여있을 시간. 내가 다리를 쭉 펴고 누워있을 시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직 모스크바엔 밝은 태양이 빛나고 있다.

그렇다고 공항에 내리자마자 고국을 그리워했다는 건 아니다. 당시엔 시간을 계산하고 그럴 여유도 없었다. 아마 짐을 챙기고 입국수속을 하고 참으로 생소한 러시아어 안내 글을 구경하느라 정신없었을 것이다. 이미 달리기는 시작되었으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추억을 되짚어 쓰고 있는 글이니 지금의 감상이 끼어든 것뿐이다. 한적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의 여유가 그 날의 길었던 하루를 계산해주었는지도 모르겠다. 기억이 나진 않지만 언제 숙소에 가서 누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해보았는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건 하루가 30시간이었던 긴 날이었으니까.

 

셰레메티예보 공항 안은 몹시 덥다.

난 초겨울 옷차림이었고 공항 안은 초여름 기온이었다.

‘5월의 모스크바는 우리나라의 4월과 같다. 비가 자주 오고 기온 변화가 심하다. 하루에 사계절을 맛볼 수도 있다. 그러니 사계절 옷을 준비하고 비옷은 필수다. 한 마디로 비가 오고 춥다.’

이것이 모스크바 날씨에 대해 내가 수집한 정보였다. 그래서 난 짐을 줄인답시고 일부러 두꺼운 옷들은 입은 채 출발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와야했기 때문에 그건 아주 현명한 선택인 것처럼 보였다. 새벽엔 제법 쌀쌀하기까지 했으니까. 비행기 안에서도 전혀 선택의 후회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속에 껴입고 온 스웨터가 마냥 포근하기만 했다. 적당한 그 체감이 여행지까지 이어진다는 맹목의 믿음 속에 의심의 그림자는 없었다.

사람은 예측을 기정사실로 믿어버리는 우매한 짓을 종종 저지른다. 그 예측이 한 번이라도 맞아떨어지면 절대적 믿음으로 굳어지는 괴현상도 일어난다. 그래서 예측이 어긋났을 땐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난 것처럼 놀란다. 예측을 사실로 굳혀버린 그 믿음이 더 놀라운 일인데도 말이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이 인생, 이란 말은 글자로만 익혔던 모양이다. 아니, 그런 일을 당할 때만 진리의 말씀으로 떠오르는 모양이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은 사라지지 못하는 지도 모른다. 도무지 학습이 되지 않으니 말이다.

공항으로 들어서는 순간 훅, 하고 끼치는 여름 기운.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오르며 이마에 땀이 배어나온다. 하지만 어떻게 해볼 여유가 없다. 사람들의 바쁜 걸음을 따라 걸음을 옮길 뿐이다. 낯선 동네에 왔으니 눈치껏 행동해야 한다. 그것이 헤매는 걸 방지해 줄 좋은 방법이다. 입고 있는 옷이 점점 무거워진다. 체온을 유지하고도 남는 두께의 옷은 짐처럼 느껴지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다. 상쾌한 온도 조절을 포기하고 부지런히 걷는다. 바쁜 걸음이 끝나는 곳에 사람의 줄이 있다. 입국심사대 앞에는 이미 줄이 길다. 그 중 가장 짧아 보이는 곳에서 걸음을 멈춘다.

줄은 길고 심사는 느리다.

덕분에 여유는 생겼다.

스웨터 위에 걸친 트렌치코트를 벗었다. 스웨터도 벗고 싶었지만 달려있는 짐을 생각하고 참는다. 스웨터 위에는 여행용 크로스백이 목에서 가슴을 가로질러 걸쳐져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도 등에는 백팩이, 한 손에는 바퀴달린 여행 가방이 자리 잡고 있어 손이 모자란다.

그렇게라도 재정비를 하고 나니 몸이 좀 가볍다.

할 일은 없는데 줄은 그대로다.

목을 빼서 심사받는 사람을 바라본다.

한 사람을 심사하는 데 족히 5분은 걸리는 것 같다.

얼마나 까다롭게 보는 걸까.

왜 저렇게 오래 보는 걸까.

, 그래도 입국신고서는 없었지.

러시아는 입국 신고서를 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게 은근히 귀찮은데. 그래서 심사가 까다로운가.

입고 있는 옷이 다시 무거워진다.

불쾌함을 잊으려고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햇살이 비쳐드는 천장 구조물이 보인다. 더울 때는 햇살이 반가울 리가 없다. 분명 아름다운 천장이지만 그곳으로 들이치는 햇살은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다. 온실처럼 더운 이유가 바로 천장의 구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여긴 러시아다. 겨울이 긴 나라. 추위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막느냐가 가장 큰 숙제일 게 틀림없다. 그리고 태양열은 가장 싼 열에너지. 한줄기의 햇빛이라도 소홀히 흘려버릴 수 없을 테지.

그래도 지금은 냉방이 잘 되어있는 인천공항이 그립다.

러시아 공항은 언제부터 냉방을 하는 걸까. 짧은 여름이지만 냉방을 할 텐데. 아직은 때가 아닌 모양이다. 하긴 내가 지금 스웨터만 벗어도 덥지는 않겠다. 분명 한여름의 더위는 아니다. 현지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옷은 대개 가볍다. 그리고 물론 나처럼 더위에 찌든 표정도 아니다.

, 무겁다. 옷도 무겁고 등에 달린 가방도 무겁다. 지친 몸에 무겁지 않은 것이 없다. 더위조차 무겁다. 시원하기만 해도 좀 살 것 같은데 공항의 온도는 갈수록 올라가는 것 같다.

빨리 수속이 끝나서 공항 밖으로 나가고 싶다.

시원한 바람을 쐬고 싶다.

밖은 시원하겠지.

상상의 바람을 그려본다.

상상조차 지쳤는가. 바람의 느낌은커녕 서있다는 감각조차 사라진다. 차라리 감각을 지워버리는 걸 선택한 모양이다. 더위에 지친 시간이 무감각하게 흘러갔다. 아무도 말이 없다. 그들도 나와 같은 고통 속에 있는 게 확실하다. 씨스뜨라의 평균 나이는 60. 그 중 내가 가장 젊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다. 힘을 내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기껏 힘을 내어 한 짓이라곤 어깨를 두어 번 돌려본 것뿐이다. 괜히 땀에 젖은 옷의 불쾌감만 불러왔다. 조금 전의 무감각이 차라리 나았다.

 

인천 공항에서 해물순두부를 먹었던 일이 벌써 까마득하다.

공항행 기차를 타느라 새벽잠을 설쳤지만 덕분에 공항에선 여유가 넘쳤다. 공항 내 식당에서 아침을 천천히 먹고 출국 수속을 마친 시간이 11시였다. 비행기 출발 시간이 두 시간도 넘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탑승구 앞 대기의자에서 느긋하게 앉아 기록도 하고 러시아어 회화 책을 보며 머리에 남지도 않는 회화를 입으로 읽었다. 그러면서 줄곧 의자를 뜨지 않았다. 머물기에 편한 의자와 쾌적한 온도. 그 곳은 이미 나의 여행지였다. 머물러있을 때 무언가를 생산하는 타입인 내가 즐기는 장소이기도 했으니까.

그렇지만 행동 면에서 나와 유형이 많이 다른 씨스뜨라는 어디에 있는가? 물론 자리에 없다. 그들은 내내 어딘가를 어슬렁거린다. 특별한 볼일이 있어서가 아니다. 아니 볼일이 있기도 하겠지만 그들에겐 일을 보러 가는 과정이 더 중요한 목적인 것처럼 보인다. 화장실을 다녀오기도 하고 커피집을 기웃거리기도 하지만 어디든 직선으로 갔다가 직선으로 돌아오진 않는다. 물론 직선으로 갔다 오는 씨스뜨라가 있긴 하지만 그녀도 자리에 앉아 있진 못한다. 대신 분명한 목적을 가진 곳이 여러 곳이라는 게 다르다. 재빨리 갔다 와서 다시 일어나 목적지로 향한다.

길 위에 있는 자들은, 움직일 때 비로소 더듬이가 돌아가는 타입인지도 모르겠다. 유목민의 피가 강하게 흐르는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게 분명하다. 그리고 난 그들의 유전자 덕을 보고 있다. 어차피 낯선 곳에서 길 찾기는 오로지 그들의 몫이니까. 무거운 등짐을 내게 맡겨놓고 홀가분하게 돌아다닐 수 있으니 그들에게도 나 같은 존재는 나쁘지 않다. 여행을 할 때마다 자주 벌어지는 이 같은 상황. 난 익숙한 이 상황에 편하게 젖어있다.

그들은 탑승구 문이 열릴 때가 되어서야 의자로 돌아왔다.

그리곤 백팩을 가볍게 메고 탑승구로 들어갔다.

그 백팩이 그들보다 더 지친 모습으로 등에 달려있다.

짐도 주인의 상태를 따라가는 모양이다.

다행인 것은 그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 아무리 지쳐있어도 그 상태로 멈추어있진 않는다는 것. 물론 시간도.

그리하여,

드디어 입국 심사대 앞에 서게 되었다.

안경을 낀, 금발의 단발머리 러시아 미인이 나를 유심히 쳐다본다.

아무 말도 없이 요모조모 쳐다보고 또 쳐다본다.

얼굴이 참 작기도 하다.

너만 내 얼굴 구경하는 것 아니다? 나도 네 얼굴 구경 한다? 하는 심정으로 그녀의 눈길을 마주한다.

그래도 조금은 긴장된다.

여긴 러시아니까.

학교 다닐 때 반공 교육을 너무 받았나보다.

인고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내 앞에 여권 크기만한 종이쪽지가 올려졌다.

여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무엇인가 빽빽하게 적혀있는 종이를 올려놓고 한 곳을 가리키며 볼펜을 넘겨주었다. 눈치로 알았다. 자필 서명을 하라는 것이었다. 모르는 글자들 속에 내가 아는 유일한 글자가 될 나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그녀는 그 종이를 여권 사이에 끼워 여권을 돌려주었다.

드디어 통과!

유난히 감격적이다. 다른 나라에서 느끼던 것과 또 다르다.

정말, 반공 교육을 너무 받았나보다.

그 종이는 러시아를 떠날 때까지 잘 보관해야 한다. 출국할 때 반드시 있어야 한단다. 그러니까 출입국신고서와 같은 것인 모양이다. 어떻게 보면 서류가 참 간편하다. 여행자가 일일이 작성하지 않아도 되고 그리고 한 장으로 끝! 갑자기 이 나라가 정답게 다가온다. 하지만 알고 있다. 이런 기분 또한 변한다는 것. 변하지 않으면 그게 어디 기분인가. 어떤 사소한 것이 이 기분을 또 정반대의 감정으로 바꿔놓을지 알 수 없다. 그것조차 흘러갈 것이니 너무 멀리 가지 말자.

출입국 심사대의 문을 밀고 나간다.

, 이제부터 자유로이 이 나라를 돌아다녀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것이다.

먼저 수속을 끝낸 자의 여유로운 웃음이 만면한 두 여자가 나를 보고 손짓을 한다.

한 여자는 아직이다. 옆줄로 옮겨간 게 실수다. 말하자면 줄을 잘못 선 것. 짧은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심사관이 더 깐깐한 모양이다. 그녀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둘. 길어야 10분이면 되겠지. 처음 줄을 섰을 때의 긴 줄을 생각한다면 이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 생각이 시간을 달리게 만들었는가. 어느새 그녀가 심사대 문을 열고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 나온다. 앞으로 내가 자주 언급하게 될 바로 그 걸음이다. 목적지가 정해지면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직진하는 빠른 걸음의 소유자. 그녀를 마지막으로 씨스뜨라가 한 자리에 모였다. 오늘 아침과는 완전히 다른 나라 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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