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기 전에. 1

이 여행은 아주 단순한 욕망에서 출발했어.

세계 곳곳에서 모아들인 진귀한 그림과 예술품이 엄청나게 전시되어 있는 곳을 보았던 거야. 아니 그런 박물관을 소개하는 걸 보았지. 박물관이 문제가 아니야. 박물관을 품고 있는 도시 자체가 예술품이라나 뭐라나. 하여간 귀가 솔깃했지. 난 미술 전공자도 아니고 많이 보고 많이 경험하자는 주의도 아니야. 차라리 보이는 것에 속지 말라고 떠드는 편이지. 말하자면 많은 경험보다 어떤 느낌에 더 가치를 두는 사람에 속해. 그런데 그 도시를 소개하는 텔레비전 화면에 마음과 눈을 몽땅 빼앗겨버린 거야.

도시의 이름은 쌍뜨뻬쩨르부르그.

정말 들어보기만 했던 이름이야. 교과서에서 보았는지, 어느 책에서 보았는지, 누구한테 들었는지도 모르지. 지명 외엔 알고 있는 게 별로 없다는 뜻이야. 하지만 그 이름을 한두 번 접했던 건 분명 아닐 거야. 이름을 들으면서 도시의 역사를 듣지 못했을 리도 없어. 도시 형성 과정이 그처럼 독특한 경우도 흔치 않고 과정만큼 경관도 특별한데 말이야. 그런 곳을 역사학자들이, 눈과 귀가 앞선 사람들이 그냥 묻어두었을 리가 없잖아. 그런 사람들 덕분에 지구촌 사람들은 앉아서도 지구 곳곳을 모르고 있을 수가 없는 세상이고. 그러니 내 귀와 눈에도 그런 정보가 지나갔음에 틀림없어. 하지만 당시엔 관심을 끌지 못했거나 아님 잊어버린 건지도 모르지. 인연은 사람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야. 사물이나 장소도 인연이 닿아야 만나게 되는 거더라고.

 

제정 러시아 시대 궁전이기도 했던 박물관 이름은 에르미타쥐.

황제가 절대 권력을 가진 시대에 지어진 궁전이라니 얼마나 대단하겠어. 더구나 지금은 천 개나 되는 방에 명화와 미술품이 전시되어 있다는 거야. 루브르 박물관에서도 볼 수 없는 고흐와 고갱의 그림도 많다고 했어. 고흐나 고갱 때문이 아니라 루브르란 이름 때문에 내가 더 혹했는지도 모르겠어. 사람은 전혀 모르는 것이 아닌, 본 적 있고 들은 적 있는 것에 더 호기심을 가지게 돼. 그건 뉴스에 관심이 가는 것과 같은 거야. 새로운 소식. 그건 나에겐 새로운 소식이지만 누군가는 이미 알고 있는 소식이지. 그러니까 전할 수 있었던 거고. 말하자면 누군가 보고 들었다는 전제 아래의 새 소식인 셈이지. 뉴스에 대한 호기심은 아무도 모르는 소식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냥 주변 사람보다 먼저 알고 싶은 욕망일지도 몰라.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사람들은 누군가는 이미 알고 있는, 그렇지만 주변에 널리 퍼져있지 않은 것에 호기심이 더 발동한다는 거지.

사실, 명왕성 천왕성에 가보고 싶은 욕망에 밤잠을 설치는 자가 얼마나 되겠어. 단순한 호기심이야 있을 수 있겠지. 막연하게, , 저 별에도 어떤 생명체가 존재할까, 자연은 어떤 모습일까, 하는 정도로 말이야. 그렇다고 정말 명왕성에 가기 위해 연구하고 탐사 계획을 세울 정도의 호기심은 아니란 거지. 그 곳은 아무도 가 보지 않은 곳이니까. 그러니까 아무런 소식이 없는 곳이지. 아무런 소식이 없으면 호기심도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아. 먼저 본 사람이 없거든. 호기심이란 것도 무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털끝만한 실마리라도 있어야 발동되는 것 같아.

그런 차원에서 내 호기심이 발동했는지도 몰라.

해설자의 설명 속에 루브르란 말이 나왔고 난 다행인지 불행인지 몇 년 전에 루브르 박물관에 갔거든. 하지만 그 유명한 루브르에 대한 이미지는 명성만큼 내 감정에 찬란하게 남아있진 않았지. 한여름의 박물관은 한 마디로 장터였어. 그림이든 자연이든 너무 많은 사람 속에선 제대로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 같다. 인파에 묻힌 그림은 보고 있는 사람들만큼 지쳐보였어. 그림과 마주하고 서로 교감하는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앞으로 다가갈 수도 없는 지경이었지. 특히 모나리자 앞은 유명 가수의 콘서트 장 같았어. 저 멀리 그림이 보이고 내 앞엔 빽빽한 사람의 숲이었지. 그래도 그림을 보겠다고 숲의 끝에 서 있었어. 사람의 물결은 시속 열 발자국 정도로 천천히 움직였지. 파김치가 되어 드디어 그녀의 미소 앞에 섰어. 그냥, 익숙한 여자가 웃고 있더군. 아니 웃고 있다는 생각을 했던 지도 몰라. ‘모나리자의 미소라고 하니까 말이야. 사실은 와글거리는 소리며 사방에서 부딪치고 밀려드는 체온에 모나리자도 미소를 잃은 듯 보였어.

한 시간을 기다려 머문 시간은 10.

그 잠깐의 시간에도 감상은 무리였지.

그래서 아직도 나에게 모나리자의 미소는 일그러져 있어.

 

그런 기억 속의 루브르가 그 날 다시 수면 위로 덩실 떠오르는데,

저 곳에 가야겠다

그렇게 외치고 있는 거야. 내가 말이야.

루브르에도 없는 작품이 많다고 해서, 도시 전체를 제정러시아 시대 황제가 계획적으로 만든 것이니 얼마나 볼만하겠느냐 싶어서, 러시아와 유럽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어서, 핀란드만을 건너면 바로 북유럽도 갈 수 있는 곳이어서.

이런 모든 것들이 날 유혹했을 수도 있어. 하지만 그런 것에 꽂힌 건 아니야. 직접적인 이유는 엉뚱하다고 할 수도 있어. 루브르보다 조용할 것 같아서야. 더 자세히 밝히자면 조용하고 아름다운 미술관에서 천천히 서성이고 싶었어. 저 곳에 가서 매일 에르미타쥐에 가야겠다. 하루에 방 몇 개씩만 보며 즐길 것이다. 그런 시간을 나에게 주자. 그리고 저녁에는 도시를 거닐자. 해도 길다 하니 어스름을 즐기기에는 안성맞춤이겠지. 그런 상상에 황홀해졌지.

그렇게 돈을 들여가서 박물관만 본다고? 나무라는 독자가 있을 지도 모르겠어. 그것도 이해할 수 있어. 아니 당연하게 받아들여. 하나도 이상하지 않아.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게 도리어 이상하지 않겠어. 똑같이 생긴 사람이 하나도 없듯이 똑같은 생각도 없을 테니까 말이야. 난 어디까지나 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거든. 그리고 모든 사람의 생각이 같다면 책이니 글이니 하는 것들이 생겨나지 않았을 지도 몰라. 그런 것들이 왜 필요하며 읽을 이유도 없겠지. 어차피 같은 텐데 말이야. 하지만 다행히도 생각이 다르고 느낌이 달라 이렇게 지구엔 수많은 글들이 탄생하고 읽을거리들이 넘쳐나고 있어. 나무라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책이라는 생각도 들어.

하여튼 이런 이유로 러시아행이 이루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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