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하는 선생들이 점점 많아지고 그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리고 있었다. 부장은 뜻대로 잡히지 않는 사슴을 좇는 사자처럼 마음이 급해졌다. 사슴은 사자의 이빨을 피해 요리조리 방향을 바꾸고, 전력질주를 한 사자 몸속의 뜨거운 피는 전부 머리로 몰렸다. 새끼들과 다른 사자들이 뻔히 보고 있는 앞에서 연약한 사슴을 놓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체면이 말이 아니다. 사자는 온 힘을 다해 마지막 점프를 시도했다.

  <잘못했다는 말 한 마디가 그렇게 어려워요?>

  부장의 목소리가 최고로 커졌다. 교무실이 쩌렁 울렸다. 눈을 돌려 일부러 보지 않아도 교무실의 모든 눈들이 이쪽을 향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니까 그의 목적이 거의 달성된 셈이다. 관중이 많을수록 그의 승리가 맛이 나고 빛이 날 것이므로. 하지만 가까이 서 있는 내 귀엔 큰 고함소리가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들린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 크기와 반대로 빨라지고 있던 심장 고동이 잦아드는 기분이다.

  <보충 교재 원안 말이요, 보충 교재! 오늘부터 이번 달 보충 시작인데 교재도 안 내고 퇴근해버리면 어떡합니까? 연락해도 집에도 없고 휴대폰도 안 받고 말이지.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요?>

  부장은 최선을 다한 점프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과연 사슴의 여린 목은 사자의 강력한 이빨에 찍혀서 숨이 끊어지기만을 기다리게 될 것인가!

 

  ‘아하, 이제야 그림이 그려진다.’

  대충 짐작이 갔다. 내가 속짐작을 하느라 잠시 말대답을 못하고 있는 동안을 부장은 자신의 승리가 굳어지는 시간으로 보았다.

  달아올랐던 그의 얼굴은 근육이 풀어져 부드러워졌고, 여유를 찾은 눈길이 교무실을 한 번 훑었다. 이제 나의 죄송합니다.’ 한 마디면 사건은 끝난다. 부장은 내가 여기서 일단락을 짓고 자신의 권위를 살려준 후, 할 말이 있어도 조용히 다시 와서 해결점을 찾기를 바랄 것이다. 아니 사실은 대부분 그렇게들 하며 살고 있고, 내가 오늘 이 난리를 겪는 건 그 동안 그렇게 살지 않은 데 대한 보복을 당하는 것이다. 그걸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성질이 그리 좋은 편이 못된다. 아니 또 성질대로 일을 끌어가고 있다.

  나는 전열을 재정비해 드디어 부장의 다 된 밥에 재를 뿌리기 시작했다.

  <부장님, 이번 달 보충은 본래 제가 하기로 되어 있었던 게 아닙니다.>

  이제는 죽었겠지, 하고 사슴의 목 깊이 찔러 넣었던 이빨을 빼고 몸을 움켜잡았던 발을 내려놓는 순간, 죽은 줄만 알았던 사슴이 갑자기 일어나 달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부장은 당황했다.

  눈길로는 교무실을 다시 한 번 훑었다.

  이미 한 풀 꺾인, 다시 조금 전의 그 소리를 찾기엔 시간이 좀 걸릴, 제대로 나오지 않는 소리로 말까지 더듬으며 그러나 제법 정상적 어조로 물었다.

  <오규식 선생이 집안 사정이 있어서 못하게 됐다고 이야기 안 했어요?>

  <이야긴 들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부터 보충 시작인데 저는 어제, 그것도 4 시가 넘어서야 전달받았습니다. 물론 교재 얘긴 하지도 않았구요. 교재 원안은 벌써 교무과로 넘어간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원안은 보충 시작하기 사흘 전에는 제출해야 하지 않습니까? 오늘 당장 시작해야 할 수업인데, 그렇게 갑자기 넘기기만 하면 그때부터 모두 제 책임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말을 끝낸 나는 최후의 일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장은 되는 말이든 안 되는 말이든 퍼붓고 볼 것이었다. 그것이 그가 지금까지 해오던 방식이다. 그런데 폭우를 기다리던 내 머리 위로 기다리던 폭우가 쏟아지지 않았다. 웬일인가 싶어 고개를 드는 순간 부장과 눈길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부장은 황급히 눈길을 돌리며 아주 작고 빠른 소리로 말했다.

  <알았으니 그만 가 봐요.>

  이게 무슨 소린가.

  내가 잘못 들었나.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부장을 다시 보았다. 빳빳하게 긴장해 있던 어깨에서 힘이 빠지며 팔이 무겁게 느껴졌다.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닌 모양이다. 부장은 손짓까지 하면서 다시 더 작은 소리로

  <그만 가보라니까요.>

하며 의자에 털썩 앉더니, 앉은 채로 빙그르 의자를 돌려 창 밖 운동장 쪽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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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장은 평소에 하던 대로 오늘도 호출 이유를 금방 밝히지 않는다.

  이 남자는 사람을 불러놓고는 항상 뜸을 들이는 버릇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심리를 파악하고 있다. 상대가 왜 그러십니까.’ 혹은 무슨 일이십니까.’하고 묻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애써 표정을 감춘 약간 치켜든 얼굴과 먼 곳을 바라보며 상대의 눈길을 피한 모습이 그걸 잘 말해주고 있다. 아랫사람이 묻지도 않는데 자기가 먼저 입을 떼어 설명하는 건 뭔가 권위가 서지 않는 방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오늘은 부장의 바람에 부응하고 싶지가 않다. 필요 이상 큰소리로 사람을 불렀던 잔뜩 힘준 목소리에 기분은 이미 상했고, 상한 내 기분은 상대의 기분을 맞춰 줄 상태가 아니었다. 그리고 불렀으면 부른 사람이 먼저 목적을 이야기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화가 나면 윈리원칙을 따지는 법이다. 화난 마음엔 아량이라곤 남아 있지 않았고 바늘 하나 꽂을 대 없이 인색해져 있었다. 

 

  내가 인사만 하고 그냥 서 있자, 부장은 눈동자만 아래로 내려 나의 동태를 힐끗 살폈다.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상대가 가만히 있자, 먼저 말을 할까 어쩔까 고민하고 있는 중이리라.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겠지만 부장은 또 어색한 걸 오래 참아내지 못한다. 그래도 이렇게 뜸을 들이다가 먼저 말을 꺼낸다는 게 심히 내키지 않는지 들릴 듯 말듯한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좀 더 높이 치켜들었다.

  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미 마음을 정한 터라 아무런 동요가 없다 결심하고 나면 결심한 것에 대한 것 외엔 미련을 두지 않는다. 버린 것에 대한 체념이 아주 빠르다그림처럼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서 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림처럼 앉아 있기가 내 취미 생활이다. 난 이런 행동에 너무나 익숙해 있다. 그리고 상대에 대한 사랑이 없으므로 마음이 쓰이지도 않는다. 단지 핵심을 떠난 심리전이 좀 피곤할 뿐이다.

  한없이 그대로 서 있을 것 같은 내 심리를 눈치 챘는지 부장이 드디어 신경질적으로 목의 힘을 풀었다. 그러나 이런 대치 상태가 있고 난 후 보통의 목소리로 말을 시작하면 뭔가 손해를 보는, 권위가 무너진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므로 말이 곱게 나올 리가 없다. , 하고 가래를 밀어 올리는 듯한

  <신선생 말이야.>

로 말문을 열었다. 내겐 그 소리가 마치 전쟁 선포를 하는 신호처럼 들린다.

  <어제는 왜 그냥 집에 갔어요?>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다 짜증이 났다. 항상 이런 식이다.

 무슨 일이, , 어떻게 되어서 불렀노라가 아닌, 핵심을 벗어난 질문부터 한다. 난 무슨 문제인지도 모르는 채, 피의자 심문 당하듯이, 또 문제와 관련이 없을지도 모르는 나의 사생활에 관한 대답부터 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좀 더 간단히 이 상황이 해결되는지 알고는 있다. 다소곳이 고개를 떨구고, 죄 지은 사람처럼 겁먹은 목소리로, 대답 내용엔 상관없이 고분하게만 대꾸하면 된다. 그러면 어떤 일이든, 그게 아무리 큰 실수였다 할지라도 조용하고 쉽게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 싶지가 않다. 나쁜 취향에 맞장구까지 쳐줄 마음은 없다. 나는 예의를 갖춘 어법으로, 하지만 벌이 침을 놓듯 톡 쏘는 어투로 대답한다.

  <퇴근 시간까지 특별한 일이 없었던 걸로 알고 있었는데요.>

  <뭐요?>

  부장의 언성이 갑자기 높아졌다. 선생들이 제법 와있는 교무실에서, 호기롭게 큰 소리로 교사를 부르고, 그렇게 딱딱하게 시작을 했을 때는, 용머리에 어울리는 용꼬리로 마감을 해야 하는데 뭔가 빗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상대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거나 아무소리도 없는 가운데 마무리가 되어야 자신은 비로소 용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특별한 일이고 뭐고 간에 제 할 일은 하고 가야지. 퇴근 시간 됐다고 퇴근만 하면 되는 거예요. ?>

  부장은 특별한할 때 소리가 이상하게 갈라지는 소리가 날 정도로 과장되게 목청을 높였다. 그런데 나는 오늘따라 무슨 일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평소엔 하면 울 밑에 호박 떨어지는 소리하고 곧바로 답이 나올 정도로 그 폼잡음의 이유를 금방 알 수 있었지만 오늘은 전혀 집히는 일이 없다. 모르고 당하는데 더 짜증이 났다. 이성은 흥분하지 말자고 다독이고 있지만 가슴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뒷목이 뻐근해져 왔다.

 날카롭게 튀어나오는 소리를 침과 함께 꿀꺽 삼키며 겨우 가라앉힌다. 간신히 가시를 감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걸 느낀다. 물론 떨림이 상대에게까지 전달되진 않을 것 같다. 그건 뛰고 있는 내 심장만이 감지하는 몹시 억눌린 감정이다

<제가 할 일 버려두고 일부러 퇴근이라도 했다는 말씀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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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동장 가, 나란히 늘어선 차 옆에 주차를 하면서 소형이 문제는 잊어버렸다. 막 차에서 내리는 장미란 선생을 봤기 때문이다. 장선생은 내가 시동을 끄고 가방을 챙겨드는 동안 차창 안을 들여다보며 웃고 서 있었다. 예쁜 미소다. 그녀는 차에서 내리는 나를 훑어보았고 뒤이어 탄성을 질렀다. 토끼 같은 동그란 눈을 크게 뜨면서.

<어머, 선생님 멋지네요.>

<그래요?>

다시 내 기분이 붕 날아오른 건 말할 것도 없다.

<카탈로그에서 금방 뛰어나온 것 같아요.>

<호호, 정말 괜찮아요?>

<괜찮은 정도가 아니에요. 선생님 이미지에도 딱 맞아요. 요즘 옷 입기 참 마땅찮은데, 지금 입기에도 좋고... 이런 거 물어도 되나?>

장선생은 여기까지 말하고 잠깐 뜸을 들이다 묻는다.

<어디서 샀어요?>

<내가 산 게 아니고 친구가 선물한 거예요. 새로 생긴 할인 매장 갔다가 골랐다는데.>

<할인 매장에 이렇게 멋진 옷이? 이런 옷이 왜 거기까지 내려왔을까? 난 할인 매장에선 옷 잘 못 고르겠던데.>

<그러니까 안목이 중요하다는 것 아닙니까? 친구가 한 안목 하거든요.>

<아하, 그 디자이너라는 친구요?>

<, 맞아요.>

<어머, 정말 디자이너라 다른가 봐요. 선생님은 정말 좋겠어요. 저도 좀 소개시켜 주세요.>

<그럴까요?>

거기까지는 정말 좋았다.

하지만 내가 아직 웃음을 얼굴에서 거두지도 못한 채 교무실 문을 여는 순간, 그 날 아침에 내 가슴에 찾아든 뜻밖의 행복은 나를 떠났다.

 

  교무실 안으로 한 발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교무부장이 나를 불렀다.

  부르는 소리에서 나는 이미 느꼈다. 좋은 일이 아니구나.

  목소리에는 뭔가 한 껀수 잡았다는 호기롭고 당당한 기운이 잔뜩 담겨있었다.

  이쯤에서 교부부장의 성향을 좀 설명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남자는, 어떤 일에 문제가 생기면, 그 잘못된 일을 어떻게 바로잡을까, 일의 해결에 목적을 두지 않는다. 아니 문제 해결은 뒷전이다. 해결보다 언제나 앞서는 것은 따로 있다. 누가, 어떻게, 얼마나 잘못했을까, 이 잘못된 일을 자기가 어떤 경로로 발견했는가, 그리고 이 문제로 교무실에서의 자기 위상이 달라질까.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상사에게 어떻게 보여질까, 어떤 생색을 낼까에 더 관심이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내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시며 뺨이 딱딱해지는 게 느껴졌다.

  신단비 화내지 말자.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흥분하지 말자.

  우선 내 자리로 가서 가방부터 놓자.

  숨을 깊이 쉬며 자리로 가 의자를 빼고 가방을 놓았다.

  부장의 시선은 계속 내게 꽂혀있다. 가방을 든 채 잽싸게 자기에게로 달려오지 않는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 못마땅한 마음을 온몸으로 느끼는 몸이 자꾸 굳어지고 있다. 그런 내가 싫었다. 저항심으로 몸이 굳으면 마음은 초라해지고 초라해진 감정은 결국 분노로 변하곤 한다.

 

  가방을 놓고 고개를 들었다.

  부장은 억지 위엄을 띤 얼굴로 선 채로 뒷짐을 지고 나를 보고 있다. 나는 태연한 표정을 지으려 애를 쓰며 그 앞으로 다가간다. 아무런 감정을 싣지 않은 사무적인 표정으로 안녕하십니까.’ 인사를 하고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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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파트 단지 나무들은 변덕스런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젠 누가 보아도 새순의 수준을 넘은 잎들을 달고 있다. 하늘은 맑았고 바람도 일지 않는다. 언제 심술을 부려 흙먼지를 날릴지 모르는 봄이지만 아직은 초점 없는 고양이 눈같이 공기가 맹하니 동요가 없다.

  나는 춤을 추듯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까불까불 가볍게 차 키를 꽂고, 그레이스 켈리같이 우아하게 자동차 문을 열고 사뿐히 올라탔다. 시동 소리도 경쾌했다. 주차장의 차들은 거의 그대로 빼곡히 들어차 있다. 내가 아주 출근이 빠른 편이다.

이 사람들은 다 뭘 해먹고 사는 사람들이기에 이렇게 느긋해?’

콧김을 흥! 뿌리며 액셀을 밟았다.

 

  크고 좋은 차일수록 아침 늦게까지, 또는 오랜 시간동안 주차장을 지킨다. 그리고 작은 차일수록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바쁘게 들락거리고. 풀방구리의 쥐 중 하나인 나는 아직 잠이 덜 깬 조용한 아파트를 빠져나갔다. 가방을 맨 학생들만 종종 눈에 띄는 거리도 아직 한산하기는 마찬가지다.

 

  적당히 허리를 조여 주는 재킷의 착용감을 즐기며, 신호등에 걸릴 때마다 내 모습을 내려다본다. 흐뭇하다.

 그런데 소형은 왜 자꾸 옷을 사줄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왜 나는 옷을 받을 때마다 그렇게 선뜻, 아무 생각 없이, 빌려준 물건 받는 것처럼 부담 없이 좋아만 했을까?

  그러고 보니 정말 이상했다. 내가 왜 그랬지? 돈을 벌어도 내가 더 벌고, 소형은 늘 마이너스 통장 신센데. 옷도 그렇다. 소형은 새 옷이 거의 없다. 유행 지나간 옷은 자기가 손봐서 입고, 웬만해서 새로 사는 법이 없다.

  내가 이렇게 염치없는 사람이었던가. 그렇게 염치가 없었나?

  생각이 빨라진다.

  기억 속의 나는 그렇게 형편없지는 않다고 변명하고 있다.

  소형 외에 다른 사람으로부터 이유 없이 뭘 받은 기억은 없다. 그런데 그 기억은 믿을 만한가? 기억에 없다고 없었던 일인가? 나도 이제 기억력을 맹신하고 있지만은 않는 나이다. 아니, 그렇게 믿을 게 못 된다는 걸 알아가는 나이다.

 

  그렇다면, 성격, 성격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

  급기야 나의 습성을 고찰하기 시작한다.

  어떤 식으로 인생을 살아왔나?

  타인을 대하는 방식은?

  아니 관계를 맺어가는 데 습관이 된 일정한 방식이 있을 테지?

  그렇지!

 드디어 답을 찾는다.

 이유 없이 무얼 받진 않지! 왠지 부채를 짊어진 기분이 드니까. 그랬다면 금방 보답을 해버리는 걸로 짐을 벗어버린다. 그게 내 스타일이다

 

 그런데 소형에겐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무감각했을까. 이유도 없는 선물을 뻔뻔하게 받고도 당연하게 굴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마에서 땀이 났다. 내가 미쳤지, 그 동안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미쳤지, 미쳤지 하는 사이에 차는 벌써 교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학교는 너무 가까워 겨울엔 히터를 켜도 따뜻해지기도 전에 도착을 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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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근을 하려고 행거를 뒤지는데, 도무지 입을 적당한 옷이 없다. 긴 겨울 내내 입었던 어두운 옷은 이제 꼴도 보기 싫은데, 봄옷을 입기에는 아직도 불안하다. 걸어만 놓고 입을 수 있는 날을 기다리다 지칠 때쯤 해서, 이제는? 하고 한두 번 입으면 그걸로 끝인 것이 봄옷의 신세다. 보기에만 아름다웠던 그 옷들은 드디어 때가 왔구나 싶은 순간, 화사함보다는 시원함이 더 보기 좋은 여름이 곧바로 닥치기 때문이다.

 

   출근 시간은 닥쳐오고 마음은 급한데 선뜻 손 가는 옷이 없었다. 초조하게 행거에 걸린 옷들을 하나씩 밀치다가 못 보던 옷을 발견했다.

  ‘이게 웬 옷인가.’

  나는 옷걸이 째로 옷을 빼들고 눈높이까지 쳐들었다. 옷은 내 눈앞에서 흔들리며 기억을 일깨웠다. 아하, 지난주던가, 소형이가 사다 준 옷이었다. 아파트 앞에 새로 생긴 할인 매장에 갔다가 단비 너 입으면 꼭 맞겠더라, 얼마 안 하기에 샀다.’며 주던 바로 그 옷이다. 눈이 빛났다. 새 옷이라면 사온 날 당장 입어야 직성이 풀리는 내가 왜 이 옷을 잊어버리고 있었던가. 나도 늙었나? 그러나 기분은 아직 늙지 않았다. 갑자기 생긴 새 옷에 마음이 들떠 흥분까지 하며 얼른 소매에 팔을 꿰었다.

 

  나머지 한 팔을 꿰는 순간 나는 알았다. 내 몸에 딱 맞춤이라는 걸. 역시! 난 소형의 틀림없는 안목을 칭찬했다. 옷 하나는 기가 차게 뽑는단 말이야, 누가 디자이너 아니랄까봐. 와이셔츠 칼라에 목은 브이 자로 깊게 패이고 허리선이 몸에 맞게 들어간, 단추가 세 개 달린 재킷이었다. 내 몸에서 유일하게 봐줄 만한 가느다란 허리는 멋지게 살리고, 빈약한 가슴은 기가 차게 가려 주었다. 그리고 색상은 비록 검은 색이지만 약간의 반짝이는 광택이 무거움을 덜어주어 밝은 봄날에 입어도 칙칙하다는 느낌이 덜 들 것 같았다. 광택도 어디 싸구려 광택인가? 정말 은은하고 우아한 광택이었다.

 

  나는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그 동안 받쳐 입을 게 마땅치 않아 늘 걸려있기만 했던, 앞뒤로 맞주름이 하나씩 잡혀있는 치마와 또 천생연분이었다. 우아하고 단아해진 내 모습을 거울에 이리저리 비춰보며 나도 모르게 웃음까지 흘렸다. 어울리는 옷 하나에 머리 속에는 야호!’란 소리가 지나가고 행복이란 단어도 둥둥 떠왔다.

 

  소형은 아직 대학교의 강사, 일명 보따리 장사다. 두 학교의 강의를 뛰고 있지만 보수는 고등학교 선생인 나보다 형편없다. 그런데도 황송하게 가끔 훌륭한 안목으로 고른 옷을 너에게 어울릴 것 같아서, 별로 비싼 거 아니니까 그냥 입어.’ 하면서 선사한다. 전생에 옷을 탐내다 맞아죽은 영혼인지 어쩐지 옷에 집착이 많은 나는 그때마다 뛸 듯이 기뻐하며 접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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